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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물따라 스크랩 [중국] 4대 불교명산(佛敎名山) 구화산(九華山/九华山:Jiuhua Shan:지오화샨)
이종일 추천 0 조회 78 10.07.16 20: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중국] 4대 불교명산(佛敎名山) 구화산(九華山/九华山:Jiuhua Shan:지오화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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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화산(九華山/九华山:Jiuhua Shan:지오화샨)은 안휘성(安徽省:Anhui) 지주시(池州市:Chizhou Shi) 청양현(靑陽縣/青阳县:Qingyang Xian)에 위치하며, 100㎢의 지역을 덮고 있다. 십왕봉(十王峯:Shiwang)이 주봉으로, 해발 1,342m이다.  화산은 폭포, 온천, 이국적인 바위들, 고대 동굴, 고송(노송) 그리고 무성한 대나무가 가득한 곳이다.

 

 

구화산의 아름다움은 머리털이 쭈뼛해지는 것부터 고즈넉한 영역까지 아주 다양하다. 민원죽해(閔園竹海/闵園:Minyuan)는 1000 에이커를 덮고, 바람이 불 땐, 대나무 잎들이 귀를 즐겁게 하는 운율처럼 쉬쉬 소리를 내고 한편 뒤쪽에선 시냇물이 콸콸 흐르고 샘들이 펑펑 솟아 오른다. 

 

 

대나무 숲을 통과해서 산길에 서면 “천하제일송(天下第一松)”으로 유명한 봉황송(鳳凰松/凤凰松)이다. 봉황송은 약 1,400년 이전의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심어졌다. 비늘모양의 한 쌍의 늘어진 줄기와 곧추선 다른 줄기와 푸른 솔잎들은 하늘을 향해 날아 오를 것 같은 봉황을 닮았다. 하지만 지금은 안전시설로 나무아래가 너저분해져서 본래 나무의 기품은 반감된다.

 

 

구화산은 원래 구자산(九子山:Nine son Peak)이라 하였다. 허나, 당대(唐代:Tang)의 시선(詩仙) 이백(李白:Li Bai)이 산을 유람한 후 노래하길 “일전에 구강(九江)을 따라 내려갈 때, 멀리 구화봉을 보았다. 하늘에 하늘의 강이 걸린 것 같고, 녹수에 수놓은 꽃 같다” (한문의 원시는 “妙有分二氣(),靈()山開()九华” – 묘한 기운이 두 곳으로 나뉘어 기상하며, 신령한 산에 아홉 개의 꽃을 피웠다 정도로 해석되는 데 위 영문 설명은 잘못된 듯~) 어쨌든 이백의 영향으로 구화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구화산의 아홉 봉우리 중 가장 멋진 곳은 천대(天臺/天台:Tiantai), 연화(蓮花/莲花:Lianhua), 천주(天柱:Tianzhu), 십왕(十王:Shiwang)봉이다. 구화산 주변 지역은 내, 작은 폭포, 울퉁불퉁한 바위들, 동굴, 소나무, 그리고 대나무들이 어우러진 조용하고 외진 곳이다.

 

구화산구십경(九華山旧十景)은: 오천(五川)에서의 구화산 경관, 도암폭포(桃岩瀑布:Taoyan) 서담인월(舒潭印月), 동암연좌(東岩宴坐/岩宴坐), 평강적설(平崗/平岗积雪), 화성만종(化成晩鐘/化成晩钟:Huacheng), 연봉운해(蓮峰雲海/莲峰云海), 구자천성(九子泉聲/九子泉声:Jiuzi), 천주선종(天柱仙踪), 천대효일(天臺曉日/天台晓日)이다.

 

 

구화산 기슭은 거대한 들판이 펼쳐진다. 오래된 사이프러스(측백나무과의 교목)가 다양한 모양의 봉우리들과 폭포들 그리고 샘들로 이루어진 산과 능선들을 덮고 있다. 5세기 초에 불교가 이곳에 소개되었다. 동진(東晉) 륭안(隆安:Longan) 5년 (서기 401년)에 천축의 승려 회도(懷渡)가 이곳에 사원을 짓고 전도를 시작했다(唐) 현종(玄宗: 695-762) 개원(開元)의 통치기간에 김교각(金喬覺: Jin Qiaojue)이 신라에서 건너와 70년 동안 머물다가 794년 입적하였다. 지장보살(地藏菩薩)의 탄생일 매년 음력 7월 30일에 성대한 종교축제가 열리고 며칠 동안 계속된다.

 

 

이곳의 사찰들은 당조(唐朝:Tang) 이후 건축되기 시작했고 명조(明朝:Ming)와 청조(淸朝:Qing) 때 가장 번성했다. 수백 개가 넘는 사찰과 사원들이 향 연기에 둘러 쌓여서 “불향(佛香)의 땅”이라 하기도 했다. 현재는 화성사(化成寺: Huachengsi:화창스), 육신보전(肉身寶殿/肉身宝殿:Roushenbaodian), 지원사(祗園寺/祗园寺:Qiyuansi), 백세궁(百歲宮/百岁宮:Baisuigong) 등의 78개의 사찰이 남아 있고 이곳엔 수천 개의 조각상과 불교경전 그리고 옥도장 같은 유물이 있다.

 

 

지장보살(地藏菩薩: ksitigarbha Bodhisattva /Dizang Pusa)

 

일본에선 지장(地蔵:Jizo), 중국에선 지장(地藏:Dizang)으로 알려진 크시티가르브하(Ksitigarbha)는 대중적 대승불교보살로 통상 동양의 부처승으로 묘사된다. Jizo나 Dizang은 “땅의 보물”, “땅의 축적”, “땅의 모체” 또는 “땅의 자궁”의 번역으로 보인다. 산스크리트 단어의 ksiti(earth: 大地)와 garbha(womb, matrix: 藏)로 읽혀지는 것을 중국식으로 뜻을 번역한 것이다.

 

모든 지옥이 빌 때까지 열반에 이르지 않겠다는 그의 맹세로 인해” 지장은 종종 지옥에 존재하는 보살(菩薩/菩萨)로 나타난다. 그의 유명한 맹세는 많은 불교도들에게 “지옥이 빌 때까지 열반하지 않는 것은; 모든 존재하는 것이 구원 받을 때까지 깨달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는 것으로 암송된다.

 

통상 삭발한 머리 주위로 후광을 한 승려로 묘사되는 그는 지옥 문을 열수 있는 지팡이를 들고 어둠을 밝혀 소원성취를 할 수 있는 보석을 휴대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보현(普賢/遍吉菩萨:편길보살 /: Samantabhadra), 문수사리(文殊師利 /曼殊室利:만수실리:Manjusri), 관세음(觀世音:Avalokitesvara)과 함께 동양대승불교의 4대 보제살타(菩提薩埵: bodhisattva)의 한 명이다.

 

당대(唐代:Tang)대 이전의 돈황(敦煌:Dunhuang)과 용문(龍門:Longmen) 석굴(石窟/石窟)에서 그는 전통적인 보제살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당대 이후 묵주와 지팡이를 들고 있는 승려로 묘사하는 것이 늘어났다.

 

그의 전체이름의 중국식 표현은 대원지장보살(大願地藏菩薩/大願地藏菩:Dayuan Dizang Pusa), 또는 위대한 맹세의 보제살타 왕 지장(Dizang)로, 일본에선 Daigan Zizo Bosatu로 알려져 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Gautama)가 열반하고 미륵보살(彌勒菩薩: Maitreya)가 임할 때까지의 기간에 존재하는 모든 여섯 세계를 구제할 책임을 받은 경전의 기록에도 그의 맹세가 나타나 있다. 이러한 중요한 역할로 인해서, 지장을 모신 사찰은 종종 동양대승불교사찰의 중심역할을 수행한다.

 

지장보살에 대한 이야기는 대승불교경전의 가장 대중적 경전의 하나인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Dizang P'usa Benyuan Jing)에 나타난다. 이 경전은 석가모니가 도리천(忉利天/三十三天: Trayastrimsa)에 이르러 생의 마감을 앞두고 사랑하는 어머니(마야부인:摩耶夫人:Mayadevi)에 대한 감사와 회고의 표현과 같은 말들이 실려 있다. 이것은 지장보살이 도덕적인 효를 실행하며, 모든 지각 있는 존재를 구원하기 위한 위대한 맹세를 실질적으로 이끌어내게 된다.

 

 

성녀로서의 지장보살

 

지장경(地藏經:Ksitigarbha Sutra)에서, 석가모니는 지장보살이 먼 과거의 영겁엔 성녀(Sacred Girl)로 지명된 브라만 소녀였다고 말했다. 그녀는 삼보(:Triple Gem)를 종종 비방하곤 하였기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을 때 깊은 근심에 쌓였다. 지옥(나락가: 那落迦: Naraka)의 엄청난 고통에서 그녀의 어머니를 구원하기 위해서, 어린 소녀는 머리카락까지 팔아가면서 “명상과 깨달음의 꽃 부처”로 알려진 당시 부처님을 위해 매일 기도하면서 제물을 바쳤다. 그녀는 어머니가 지옥의 고통에서 구원 받을 수 있도록 부처님이 도와달라고 열심히 기도했다.

 

 

사원에서 어느 날, 자비를 간청하고 있을 때, 그녀는 어머니가 어디 계신지 알고 싶으면 즉시 집으로 돌아가서 좌정하여 어머니의 이름을 암송하라는 부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들은 대로 집으로 돌아가서 암송을 시작하였다. 암송의 계속하는 중에 그녀의 의식이 지옥의 땅으로 이동한다. 지옥의 관리자를 만나서 알게 된 사실은, 그녀의 간절한 기도와 충실한 헌금을 통해 그녀의 어머니가 많은 공덕을 쌓게 되어, 이미 지옥을 떠나 천국으로 올랐다는 것이다. 그녀는 안도하면서 크게 기뻐하였으나, 지옥에서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앞으로 영겁(永劫:kalpas)의 세월 동안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맹세하게 된다.

 

 

승려로서의 지장보살

중국에서 지장보살이 구체화된 된 전설은 중국 4대 불교명산의 하나인 구화산을 금강좌(金剛座/菩提道場:Bodhimanda – 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 밑의 자리)로 선택하였다는 것이다. 동한(東漢:25-220)의 명제(明帝:28-75) 통치기 동안에 불교가 전래되어, 당대(唐代:618-907)에 가장 번성하였고, 한국과 일본에 전래되었다. 당시, 이들 국가의 승려와 학자들은 가르침(:Dharma)을 찾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이들 중엔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로 나뉘어져 있던 한국의 왕자도 있었다. 그가 바로 과거 신라의 왕자에서 지장(地藏:Earth Store/Dizang)으로 칭하게 된 김교각(金喬覺:Kim Kiaokak/Jin Qiaojue)이다. 그는 안휘성(安徽省:Anhui)의 구화산(九華山:Jiuhua)에 도착한 이후, 깊은 산속에 오두막을 짓고 수행을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김교각은 독사에 물리는 한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여인이 우연이 동굴 옆을 지나다 이를 발견하고 독을 치료할 수 있는 약과 물을 주었다고 한다. 몇 년 동안, 김교각은 그의 오두막에서 수행을 계속했다. 어느날 Chu-Ke라는 선비가 친구들과 가족들을 이끌고 산을 찾았다. 그들은 식기에 음식도 담겨 있지 않고, 머리는 장발인

채로 수행하고 있는 김교각을 발견했다.

 

 

동정심을 느끼며, Chu-Ke는 김교각을 위해 사찰을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산을 내려간 후 즉시 사찰 건축계획을 토론했다. 구화산은 Wen-Ke라는 부자 노인의 소유였는데, 그는 사찰 건축을 허락했다. Wen-Ke와 선비들은 다시 산에 올라 김교각에게 필요한 땅이 얼마냐고 물었다. 그는 가사(袈裟:kasaya)로 덮을 수 있는 정도의 땅이면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사원을 짓기에 한 평은 충분하지 않아 사람들이 당황해 하자, 그는 그의 가사를 던졌다, 법복은 자꾸 커져서 산 전체를 덮었다. Wen-Ke 노인은 김교각을 위해 산 전체를 포기하고 후원자가 되었다. 얼마 후, Wen-Ke의 아들도 승려로서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 출가했다.

 

김교각은 99세로 입적하기 까지 75년을 구화산에 머물렀다. 열반(涅槃:nirvana)에든지 3년 후 항아리를 열었으나 부패하지 않은 것으로 들어났다. 많은 어려움에도 중생을 구제했던 그였기에,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그가 지장보살(Ksitigarbha)의 현신이라고 믿었다. 잘 보존돼, 수분이 없어진 그의 몸은 오늘날에도 구화산의 그가 세운 절에서도 볼 수 있다.

 

많은 불확실한 불교, 도교, 그리고 중국의 전통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지장보살을 Yama(지옥을 지배하는 자-인도신화)와 동일하게 본다. 또한 많은 불교에서 당대(唐代) 불교경전을 찾아 서역으로 위험한 여행을 하고 중국소설 서유기(西遊記)의 기초가 된 삼장법사(三藏法師:Tripitaka Master) 현장(玄奘)을 지장보살로 오해 하기도 한다. 이는 주로 법복과 5부처(Five Buddha) 왕관을 동시에 착용하기 때문이다.

 

 

백세궁(百歲宮/百岁宮:Baisuigong)

 

지원사(祗园寺:Qiyuansi)의 위쪽 봉우리에 있는 사찰이 백세궁(百歲宮:Baisuigong)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산등성이를 따라 180m 정도 걸으면 된다. 백세궁은 동봉(東峰:Dongfeng)정상에 있는 도교사원이다. 원래 적성암(摘星庵:Zhai Xing An-Star Picking) - 원문은Zai인데 오류인 듯 – 으로 불리었으나, 16세기에 유명한 무하(無瑕/无瑕:Wu Xia)가 입적하기 위해서 구화산으로 온 후 백세궁이라 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무하화상(無瑕和尙)은 오대산(Wutai)과 아미산(Emei)의 사찰들을 순례한 후 이곳에서 금분과 피로 쓴 화엄경(華嚴經:Huayan)을 완성하고, 126세에 입적하였다.

당시 그 사원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무하화상이 죽은 후 3년이 지나서야 발견되었는데, 외관상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매우 놀라며, 그를 기리며 사원을 개칭하였다. 명대(明代:1368-1644)의 숭정제(崇禎帝:Chongchen: 1628-1644)가 무하화상의 몸에 금을 입히고 사찰을 정비했다. 황실에선 구화산의 4번째 큰 사찰로 확장하는 것을 승인했다. 지금도 기도하며 앉아 있는 그를 볼 수 있다.

 

 

지원사(祗園寺/祗园寺:Qiyuansi)

 

궁전식사찰(殿式寺刹:Tending Garden Monastery)인 지원사는 구화산의 사찰 중 가장 크다. 원래 명대(明代:1368-1644)의 가정제(嘉靖帝:1521-1567) 통치기인 16세기 중반에 지어졌으나, 현재의 건물들은 청대(淸代:1644-1912) 나타난 개혁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지완사에는 당대 황실의 주문으로 인쇄한 불경들이 남아 있다. 사찰에 들어서서 처음 보게 되는 것이 영궁전(靈宮殿/灵宮殿:Linggong Dian – Bier Palace Hall)인데, 두 명의 수호무사가 부처상의 옆에 있다. 다음으로 부처상이 있는 천왕전(天王殿:Tianwang Dian)인데 사방(四方)을 호위하는 4개의 상이 있다. 더 앞으로 가면 대웅보전(大雄寶殿:Daxiong Baodian)인데 연꽃 위에 세 부처상이 있다. 다른 전각엔 수많은 아라한과 부처상들이 있다. 음력 9월 30일에는 지장본원의 창시자 김교각을 위한 축제가 열린다. (위에는 7월 30일이라던데?)

  

 

 

육신보전(肉身寶殿/肉身宝殿:Roushenbaodian)

AD794년 김교각(金喬覺/金乔觉)이 원적(圓寂:열반)하였다, 관례에 따라 육신은 항아리에 보관되었다. 3년 후, 승려들은 항아리주변으로 탑을 쌓고, 탑의 주변엔 전각을 지었다. 그래서 육신보전이라 한다. 천 년의 세월만큼 육신보전도 흥폐(興廢)를 보였으나, 고대건축의 백미로 남아 있다. 정문엔 동남제일산(東南第一山)의 편액이 걸리어 있다. 전 중앙에 칠층목각의 “지장탑(地藏塔)”이 있고, 탑 내에는 일백의 지장상이 있다. 

 

 

화성사(化成寺: Huachengsi:화창스)

화성사는 구화산가(九華山街)의 중심의 화성언덕에 위치하는 중국의 주요사찰이다. 주변이 언덕으로 둘러 쌓여 있어서 성벽 같다. 401년 인도 승려 회도(懷渡:Huaidu)가 이곳에 수도원을 지었다. 당대(唐代)의 배관정?(Fei Guanqing)이라 승려가 그의 일기에 화성사를 기록했다. 756년에 조각계?(Zhu Gejie)가 사찰 건축을 위해 기부하면서, 김교각(金喬覺:Jin Qiaojue:진초주)이 거처해 줄 것을 요청했다. 794년 99세로 김교각이 입멸(入滅)하고 난 후 지장보살의 현신으로 생각되자 그를 위한 의례를 개최하는 장소가 되었다. 지금은 역사박물관이 되어서, 여러 경서들과 황실의 칙령 그리고 다른 역사기록들을 보관하고 있다. 화성사는 안휘(安徽)의 전통형식으로 지어진 4개의 전각이 있다. 사찰 앞은 넓은 광장으로 축제 때 사용된다. 광장과 사찰 사이에 방생연못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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