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의 마지막 노래를 들어라
학전이 문을 닫는다는 訃告… 남은 공연이 모두 매진됐다
얼마나 귀하고 드문 것인지 배웅 행렬을 보며 생각한다
박돈규 기자
부고(訃告)를 받았다. 죽은 것은 사람이 아니라 장소였다. 33년 동안 대학로를 지킨 학전이 폐관한다는 소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으로 73만 관객을 실어나른 소극장, 가수 김광석이 라이브 콘서트를 1000회 연 곳, 아동극 ‘고추장 떡볶이’ ‘우리는 친구다’ 등 수작을 낳은 공간이 사라지는 것이다. 싱어송라이터이자 연출가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김민기(73)는 대중에게 ‘아침이슬’ ‘상록수’로 기억된다. 1970년대 앨범이 압수되고 노래도 금지되자 봉제 공장을 거쳐 그는 농촌으로 갔다. 머슴살이를 하며 농사일을 배웠고 민통선 안에서 소작농으로 5000평 쌀농사를 지었다. 노래를 잊으려 세상을 등진 때였다. 기타를 치던 손끝의 감각도 무뎌졌다. 역사의 변곡점마다 ‘아침이슬’ ‘상록수’가 울려 퍼졌지만 그는 조용히 땅을 일궜다.
김민기가 1991년 만든 학전(學田)은 ‘배움의 밭’이라는 뜻이다. “조그만 곳이라 논바닥 농사는 아니고 못자리 농사다. 애들을 촘촘하게 키우지만 추수는 큰 바닥에서 거두게 될 것”이라는 바람은 적중했다. 배우 김윤석·설경구·황정민·이정은· 조승우, 가수 김광석·나윤선·윤도현.... 모두 학전에서 뿌리를 잡고 큰 무대로 나가 성공했다. ‘지하철 1호선’이 길러낸 배우만 200여 명에 이른다.
댄스 음악에 밀려 설 자리를 잃은 통기타 가수들은 학전에서 콘서트를 올렸다. 김광석은 1980년대 중반 “가수를 하고 싶다”며 김민기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노래를 들어보니 너무 못해서 “너 가수 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학전에 빚이 늘어날 때 연 김광석 콘서트는 복도 문짝까지 떼어 관객을 받을 만큼 흥행했다. 김광석은 대학로의 스타로 떠올랐고 김민기도 운영난을 덜었으니 서로를 구원한 셈이다.
그런데 일찍이 2011년에 김민기는 “이젠 희망이 없다”고 했다. 어린이 공연들은 작품당 4000만~5000만원씩 적자가 났고 ‘지하철 1호선’으로 모아둔 게 바닥났다며 한숨을 지었다. 학전 20주년 소감을 묻자 “지겹죠 뭐”라며 쓸쓸히 웃었다. “우리 아이들이 너무 바빠요. ‘교육 횡포’로 학원 가느라 극장에 올 수가 없어요. 그래도 아동·청소년의 현실을 담은 공연은 필요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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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는 “미련하지만 이게 학전이 문 닫을 때까지 내가 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아침이슬’과 ‘상록수’에 대해 “사람들이 각자의 마음으로 간절하게 불렀기 때문에 더 이상 내 노래가 아니다”라고 했던 그에게, 어린이 공연은 묵묵히 씨를 뿌리고 김을 매야 하는 농사였다. 돈이 된다면 남의 것마저 자기 것이라 우기는 시대 아닌가. 김민기의 철학과 뚝심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 학전이 끝내 폐관한다. 살던 집이 담보로 잡힐 정도로 만성적인 재정난, 코로나 이후 관객 급감, 김민기의 암 투병이 겹치면서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조승우는 “학전은 내 모든 것을 만들어준 장소”라고 했다. “연습할 때 가끔 웃으시며 ‘미친놈’ 내지 ‘또라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제자에게 하는 가장 큰 칭찬이라는 것을 알아요. 그 말을 들을 때 기분이 좋았습니다. 권위적인 것을 혐오하셔서 늘 친구처럼 남아 계십니다.”
폐관일로 잡은 3월 15일은 학전 개관일. 생일이 곧 기일이다. 병들어 죽었다고 해서 장례식에 가보니 맙소사, 이건 축제다. 예정된 공연은 모두 매진됐다. 학전과 김민기에게 문화적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배웅 행렬이 이어진다. 우리가 잃은 것이 얼마나 귀하고 드문 것인지 생각한다. 상업 논리만으로는 긴 맥락에서 문화가 살아남을 수 없다. 김민기가 부르는 마지막 노래를 들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