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나도 <플라멩코 추는 남자>를 만나보았으면.....
주인공 허남현은 굴착기 기사다.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현재 두 번째 아내와 살고 있다.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딸을 두었고, 지금의 아내와의 사이에서도 딸을 두었다. 67세 노년이 나이에 접어둔 남현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았났을 때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로 기록한 <청년일지> 노트를 서재에서 찾아낸다. 거기에는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것들도 기록해 두었다. 그 중에 하나가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보연이를 찾는 일이고 보연이에게 아빠 노릇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일이었다. 남현은 수소문 끝에 보연이를 찾는다. 그리고 보연이와 함께 스페인 여행을 떠난다. 스페인 광장에서 플라멩코를 춘다. 수 많은 관광객들이 지켜 보고 있지만 남현이에게는 딸 보연이가 지켜 보고 있다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보연이는 잃은 아빠를 늦게나마 찾게 되고 서로가 용서를 하게 된다.
학교에 근무하다보면 한부모 가정이 제법 많이 늘어나고 있다. 여러가지 사정이 있어서그렇겠지만 안쓰럽게 느껴진다. 아이의 잘못이 아니었는데 고스란히 상실의 아픔을 평생 간직하고 살아가야 할 아이의 미래가 그려지기 때문에 마음이 쓰인다. 사춘기에 접어들면 부모의 도움이 더욱 필요한 때가 있을텐데 어떻게 하나 생각이 든다. 행여나 상처가 곪아 터져 삐뚤어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된다. 아빠와 엄마가 있는 가정에서도 여러가지 힘든 일이 많은데 한 부모 그늘아래에서 무거운 짐을 홀로 짊어지고 가야 할 아이의 장래가 눈에 밟히기도 한다. 내가 그런 삶이 살았기에 피부로 더 와 닿나보다. 아버지 없이 자랐기에 그 설움을 잘 안다. 아버지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른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와 나, 단 둘이서 살았다.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금기어였다. 나 스스로도 아버지가 누군지 간절하게 물어보지 않는 것도 있겠지만 어머니의 과거를 다시 끄집어 내는 것 같아 깨끗이 잊어버리며 살고 있다. 그러다가 <플라멩코 추는 남자>를 읽으며 잊었던 아버지의 존재가 다시 생각난다. 왜 아버지는 나를 찾지 않았을까? 지금도 살아계실까? 만약 플라멩코 추는 남자, 허남현처럼 지금이라도 내 앞에 나타난다면 어떨까?
나도 제법 나이가 들었다. 이제 곧 있으면 50이니 말이다. 혈기 왕성할 때야 우리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의 존재가 불편하고 원망가득하겠지만 반백 인생을 맞이하는 지금에서야 만약 나타난다면 보연이처럼 처음에는 당황스럽겠지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지 않을까 싶다. 새로운 가정을 꾸려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자녀들도 장성하여 손주까지 보고 노년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수 있겠다. 허남현의 두 번째 가정의 가족들은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 남편에게 전 처 소생의 딸이 있다는 사실도 이해해 준다. 허남현의 또 다른 딸 선아도 다른 엄마의 딸, 언니가 있다는 것에 적지 않게 당황하지만 아빠를 용서하고 넉넉히 이해한다. 나 또한 그렇지 않을까. 이왕 이렇게 살아왔는데 왜 우리 가족을 버렸냐고, 나를 찾지 않았냐고 따질 수 있겠는가. 그저 생명을 준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인식하고 늦게나마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을 따름이다. 젊었을 때는 이 모든 가정사가 숨기고 싶은 비밀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니 이것 또한 내 삶의 일부분이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오히려 이런 가정사가 있었기에 가정의 소중함을 절실히 바라고 지켜내려고 하지 않았나 싶다.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말못할 아픔과 상처가 있지 않을까? 다만 밖으로 꺼내 놓을 수 없기에 지금도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고 있을 뿐. 나를 이해해 주고 용서해 주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면 지금이라도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을 사람이 수두둑 할 것 같다. COVID-19를 신호탄으로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각퍅해 지고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감염될 줄 모르기에 만남을 꺼려하고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더더욱 대화할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은 자멸의 위기에 처해 있고 국가에서 지원해 주는 지원금으로는 회생 불가능할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주변의 이웃들의 아픔을 서로 공감해 주지 못하는 것이 더욱 안타까운 현실이다. <플라멩코 추는 남자>는 굴착기를 사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인간미가 묻어 있는 늙다리 청년에게 마음을 준다. 약삭빠른 젊은이보다 무디지만 진솔한 청년에게 자신의 굴착기를 넘기려 한다. 공감해 주는 사람, 용서해 주는 사람이 필요한 시기다. 설령 사회적 지탄을 받을 짓을 한 사람이라도 왜 그런 짓을 했는지 한 번 쯤은 진지하게 이해하려는 과정이 필요한 시기다. 누가 플라멩코를 추는 남자, 허남현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