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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3 : 13. 요단강에서 3 : 14. 요한의 질문 3 : 15. 승낙
2. 세례를 받으시다 ( 3 : 13 – 17. 막 1: 9 - 11. 눅 3 : 21 - 22 )
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3 : 13. 요단강에서 -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이 합당치 않으나, 예수께서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세례를 받으셨다.
1] 이 때에(*, 토테)
세례 요한의 등장(1절)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현재 접속사를 사용하여 전절과 직접 연결된다.
즉 세례 요한의 사역이 절정에 달해 있을 바로 그때에 예수께서 오셨다는 의미이다.
2]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이 장면의 평행 구절인 막 1: 9에서는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2: 23의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라는 말과 연결시켜 볼 때 예수께서 애굽에서 귀국하신 이래 계속해서 나사렛 동네에 거주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요단 강이라는 말 앞에 정관사 '톤'(*)이 제시된 것은 그 당시 세례 요한의 세례 사역지로 잘 알려진 요단강의 바로 그 지점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3]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행위에 대해서 많은 오해가 있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메시아적 소명을 인식하고 있었다.
* 눅 2: 49 -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요한이 메시야를 위한 자신의 선구자적 소명을 자각하고 있듯이(11절) 예수께서도 세례 요한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죄에 대해서 무관하신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 하시는가? 이다. 이는 예수께서 개인적인 죄의식을 느끼셨기 때문이(Bauer, Strauss) 아니고, 요한의 세례를 보증하기 위한 것도(Kuinoel, Kern) 아니다.
그가 율법에 복종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Hoffmann, Krabbe, Osiander)도 아니다. 예수의 수세(受洗)의 참 뜻은 말씀에 표현한 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다.
* 마 3: 15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 신 6: 25 -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그가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죄를 담당하시기 위함이다.
* 사 53: 4-6 -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마 3 : 14. 요한의 질문 -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
모든 의를 이룬다는 말은 그가 세례 제도에 순종하심과 모든 택함 받은 자들의 모든 죄를 담당한 자로서 죄사함의 세례를 받으심과, 또 그럼으로써 삼위 하나님의 증거를 받으심을 의미하였다고 본다.
1] 요한이 말려(*, 디에코뤼엔)
미완료 과거형으로 그저 한번 '말려보는'(*, 코뤼오) 정도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집요하게 만류했음을 암시한다.
요한은 예수의 종교적, 윤리적인 우월성과 순결한 자태에 강렬한 인상을 받고 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지극히 비천함을 느꼈다.
세례 요한은 30년 전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던 일(눅 1: 39-45) 그리고 예수가 자기의 출생 사건보다 더 놀라운 출생 사건을 통해 태어났으며, 어린아이로서는 경이로운 성경 지식을 가졌었다는 사실(눅 2: 41-52)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 눅 2: 41-52 - 열두 살 시절의 예수 –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그러나 자신 앞에 서신 예수를 직접 대면하고 나서 그의 탁월한 성결성과 영적 심화력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요한은 성령의 하강(descent)하시는 신적 표적이 있기 전까지는 아직 예수의 메시아 성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요 1: 31-32의 평행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 요 1: 31-32 –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2]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세례 받는 것을 만류한 이유를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 요한은 예수가 메시아이신 것을 알아보고 그에게서 성령과 불로 세례 받기를 원하였다.
이 견해는 마태복음의 주제가 성령이 아니고 의(義)란 점에서 동감하기 어렵다.
예수의 답변을 보더라도(15절) '의'가 강조되고 있다. 더욱이 마태는 예수가 누구에게나 성령과 불의 세례를 주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을 맞춰 기록하고 있다.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한 것이 오순절 성령 강림(행 2장) 이후였기 때문에 마태는 성령의 세례가 주어진 것은 그가 기록하려는 시대보다 뒤의 일이라고 믿었다.
또한 11: 2-12(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시다. 눅 7: 18-35)에서는 세례 준 후에도 요한이 예수를 완전히 '알지' 못하였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2) 요한의 세례는 종말론적 의미만 가진 것이 아니라, 죄의 고백과 회개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요한은 겸손한 인물로서 예수가 자기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는 알고 있었으나 예수에게는 회개해야 할 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오히려 예수가 자기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실로 마태는 요한이 언제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깨달았는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마태는 예수의 무죄함과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지 세례 요한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요한이 흠(欠)이 있는 자신으로서는 순결 무흠한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 수 없었다.
3] 예수의 겸손과 세례 요한의 사양 ( 마 3: 13-14 )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회개의 메시지를 외치며 세례를 베풀어 메시야의 심판을 열심히 예고하고 있을 때 그곳에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그곳에 조용히 나타나신 예수께서는 인간의 세례를 받으실 하등의 이유도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받기를 자청하셨다.
그러나 세례를 베풀기를 청하는 예수를 바라본 순간 첫눈에 세례 요한은 그가 메시야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오히려 자기에게 주어진 막중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예수께 먼저 죄 사함의 세례와 성령세례를 받아야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예수의 요청을 사양했다.
이제 이러한 겸손과 사양의 아름다운 장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1) 예수께서는 때를 맞추셨다.
① 세례 요한의 사명이 끝나는 때였다.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가진 자로 예수보다 약 6개월 앞서 태어났으며, 광야에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한 것도 에수께서 나타나시기 6개월 전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최선을 다하여 그의 사명에 진력했으며, 예수께서 그에게 나오셨을 때에는 이미 그에 대한 유대 사회의 관심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다. 바로 그때 그는 자기에게 향했던 유대의 관심을 예수에게로 향하게 했으며, 자신은 역사의 무대 밖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예수가 흥하기 위하여 스스로 쇠하여진 진정한 겸손의 사람이었다.
② 예수께서는 이때를 위해서 준비하시며 기다리셨다.
세례 요한과 조화되는 이때를 위하여 예수께서는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사생활에 충실하면서도 기다리셨다. 우리는 흔히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일을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종종 일을 망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서두르거나 조급해서는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일은 시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여기에는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예수께서는 그 귀한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해 30년이란 긴 세월을 기다리셨다.
(2) 예수께서 찾아오셨다.
①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내가 메시야로서 만왕의 왕이며 구세주이니 만민들은 내게로 오라고 앉아서 기다리시지 않았다. 세례 요한에게도 내게 와서 불세례를 받으라거나 물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친히 찾아오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참모습이다. 죄인들, 병자들, 억눌린 자들을 찾아오시는 모습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을 가지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 은혜에 감사하며 감격하는 것이다.
②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다.
물은 언제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러므로 생명의 물이신 그분께서 찾아가신 곳 역시 가장 낮은 지대였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낮고 천한 곳에서 태어나셨을 뿐만 아니라 공생애 사역에 있어서도 가장 낮은 곳으로 찾아가셨다. 낮은 곳을 찾아가는 것, 이것은 예수의 겸손을 실천하는 것이며 예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다.
(3) 세례 요한의 사양
① 그는 세례를 자청하는 예수님을 말렸다.
그는 순간적인 자기 과시욕에 사로잡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얄팍한 신앙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는 매우 순간적으로 예수님의 요청을 들었지만 그것에 단순히 반응하여 즉석에서 당당히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지 않고 예수님을 말렸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보다 세례 요한이 평소에 메시야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자기의 위치에 대해 확고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자기가 비록 메시야의 선구자였지만 메시야는 자기의 주인이시며, 자기는 그의 신들메를 감당하기조차 어려운 종이란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
② 그는 자기가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함을 알았다.
세례 요한은 자기가 베푸는 세례가 죄 씻음을 표로 주는 것이었지만 원천적으로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라고 반문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는 참된 선지자요, 메시야의 참된 선구자였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된 일군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세례 요한처럼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처한 위치가 어디이고 자신이 때를 알아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겸손히 그만을 증거해야 한다.
마 3 : 15. 승낙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려는 주님의 마음은 모든 성도가 본받아야 할 일이다.
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대 이제 허락하라.
본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최초의 말씀이다.
여기서 '이제'(*, 알티)라는 말은 특별한 시점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는 요한의 반대(14절)가 원칙적으로 옳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제'(지금), 즉 구속사 중에서 지금 이 시점에서는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예수가 종의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 보여야 했고, 그분이 스스로 백성들과 같이 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셔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수세(受洗) 전부터 자신의 메시야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메시야이신 주님만이 이러한 명령을 세례 요한에게 할 수 있었다. 요한은 예수에게 세례를 베풂으로 그리스도의 영적 아버지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에 자신을 복종시킨 자가 된 것이다.
2]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예수께서 '나'라는 1인칭 단수 명사를 쓰지 않고 '우리'라는 복수 형태를 취하신 것은 예수와 요한, 곧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모든 의를 이루어야'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뒤이어지는 '이와 같이 하여'란 말은 단순히 세례와 같은 어떤 절차를 강조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한 순종의 자세, 또는 순종의 마음을 강조한 말이다.
3]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여기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1) 예수의 세례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의'를 성취하는 것이다(O. Cullmann).
이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에도 나타나듯이 예수가 당할 죽음의 세례를 예시한 것이다.
* 사 52: 13 – 53: 12 - 고난 받는 종 : 13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14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15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그러나 '의'를 예수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이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2) 예수는 하나님의 명령('모든 의')을 모두 순종('이루다')해야 했으며 세례도 그 명령 중 하나이다.
이 견해는 세례가 '의'가 아니라 '회개와 죄의 고백'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명령으로는 부적당하다.
(3)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뜻('모든 의')이며, 예수께서 요한과 함께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그의 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사적 생애를 마감하고 메시야 직무를 수행하는 공생애로 들어가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Bruce, Erdman).
더욱이 예수의 수세의 주제는 모든 죄인을 대신한 고난이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적 메시지에 따르면 예수는 고난받는 종(사 42: 1-9. 49: 1-6. 50: 4-9. 52:13-53:12)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요한은 세례를 베푼 후 즉시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요 1: 29)이라 불렀고, 예수 자신도 자신의 대속적 고난을 세례로 표현했다.
* 눅 12: 50 -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4]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요한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는 예수의 설명을 듣고 난 후 무흠한 신성(神性)의 소유자이시지만, 그분 곧 메시야에게 합당한 세례를 베푼다.
이로써 예수와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동역자의 선상에 서게 된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데는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시기 위해서였다.
즉 공생애에 앞서 예수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직의 자격과 능력이 구비되었으나 인간적 면에서 인간들의 이해를 위해서도 교회의 선한 전승(inheritance)에 순종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이런 예수의 자세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16절의 성령 강림과 17절의 천성(天聲)을 통해 예수가 모든 의를 갖추신 자임을 공표(公表)하셨다.
(2) 이를 통해 세례 요한은 메시야가 도래했음과 메시야의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공적으로 선언했다.
* 요 1: 31-34 –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3) 회개나 세례가 필요 없었던 예수는 수세를 통해 죄로 타락된 인간과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켰고 우리를 대신하는 일을 시작하셨다.
* 고후 5: 21 -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4)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를 믿는 자에게 보이신 수세의 모범이었다.
5] 이제 허락하라.
예수의 언행은 언제나 진리대로 행하는 순수하고 온전한 것이었다. 본문의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에게 죄 사함의 증표인 세례를 받으려 하셨고, 세례 요한이 도저히 그럴 수 없다고 사양하자 세례 요한의 겸양을 일축하고 세례를 베풀 것을 명령하신 장면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주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세례 요한의 믿음이나 겸손을 시험하시려 하거나 당신의 겸손을 만인 앞에 드러내고 싶어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요청했던 것이 아니었다. 단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 했던 것은 예수의 사역 과정에서 그것이 자신의 사역을 온전하게 하는 중요한 한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면서 세례 요한의 겸양을 물리치고 친히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1) 세례 요한의 사양을 일축하셨다.
① 인간적인 생각에 대해 예수께서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셨다.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일개 인간으로서 창조주이시며 구속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히 세례를 베풀수 없다고 사양하는 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허락하라'는 한 마디로 그의 겸양을 일축하셨다.
이는 곧 예수께서 아무리 우리가 예수를 위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결단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는 그 좋은 예를 가이사랴 빌립보의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 마 16: 21-23 –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사역을 감당할 때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일에 대한 생각보다 인간적인 생각이 앞서서는 안 된다.
② 쓸데없는 변론을 싫어하셨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신앙을 한마디로 일축하시고 나서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라는 말씀으로 쓸데없는 변론을 피하셨다.
우리는 때로 쓸모없는 일에 필요 없는 시간과 정력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익보다는 해가 되며 화합보다는 다툼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2)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함을 역설하셨다.
① 의를 이루어 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마땅하니라'.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의를 이루기 위해서 오셨다. 그리고 그 의를 인간에게 전가시키기 위해 예수께서는 인간의 육체를 입기도 하셨고, 33년을 세상에서 살기도 하셨으며 십자가에 고난도 당하셨다.
따라서 그 모든 일 중 본문의 세례 받는 일은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게 보이는 이 일을 하시면서 이처럼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예수께서는 전체를 위해서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을 얼마나 중히 여기셨는가를 알 수 있다.
기독교는 지극히 작은 일,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중히 여기는 종교다.
② 의를 이루는 데 있어서 연합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의를 전가시키기 위해서 오셨고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이 땅에 왔을지라도, 그리고 서로의 임무에 충실한다 할지라도 서로 조화가 되지 않는다면 거기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즉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려 하시고 세례 요한은 메시야로서 예수를 지명해 줄 뿐 그에게는 도저히 세례를 베풀 수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만 세례를 베풀겠다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오늘날 다른 사람들과 연합하려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혼자만 잘하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아무 의미없는 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3) 요한은 세례를 베풀었다.
요한은 겸양의 미덕을 중요시 여겼을 뿐 아니라 주께 복종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우리가 아는 세례 요한은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사명의 한계를 알아서 일할 때 열심히 일하고 사라져야 할 때 조용히 사라져 갔다. 본문을 살펴보면 그는 겸손할 뿐만 아니라 주의 명령에 즉시 복종하는 믿음도 가진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믿음의 자세다.
우리는 겸손이 지나쳐 함께 일하는 사람을 짜증나게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진정한 겸손은 적당할 때에 복종을 동반해야 한다.
흔히 기회주의자들은 어려운 일이나 자기에게 손해 나는 일을 맡길 것 같으면 겸손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사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기의 위대함을 과시할 기회에는 겸손함을 보여주었고, 감당키 어려운 일을 맡길 땐 불평 한마디 없이 즉석에서 복종하는 말씀을 지녔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복종과 겸손이 우리의 신앙 미덕이 되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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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설교 감사합니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