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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8. 묵상글 (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 무엇 앞에 그리고 누구 앞에 있을 것인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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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8.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28 06:19
- 무엇 앞에 그리고 누구 앞에 있을 것인가?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제 미사 강론 중에 종말이 닥치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여쭈었을 때
한 분이 당신은 생명의 시작으로 받아들인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분이 그렇게 답하면 지극히 교리적인 답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제가 아는 그분은 실제로 그렇게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죽음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기 전의 그분은 얼굴이 어둡고,
고통과 죽음 앞에 있었으며 두려움도 있었지만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기 전에는
하느님 앞에도 있다가 고통과 죽음 앞에 있다가 했는데
신앙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온전히 하느님 앞에 있고 생명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징벌의 날에 관해 얘기합니다.
그리고 속량의 날에 관해서도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징벌의 날에 징벌을 받지만
어떤 사람은 징벌의 날에 속량을 받습니다.
징벌 앞에 있는 사람은 징벌을 받지만
회개하여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람은 속량을 받습니다.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친” 자는 징벌을 받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도 하느님 안에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든” 자는 속량을 받습니다.
무엇 앞에 있을 것인가?
누구 앞에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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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8.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많은 사람이 메밀을 좋아합니다. 메밀에는 다양한 영양소와 생리활성 물질이 들어 있어 건강에 이로운 음식이라고 하지요. 고혈압 예방, 성인병 예방, 혈관 건강, 혈당 조절, 변비 해소, 이뇨작용 등 장점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래서 메밀국수, 막국수, 메밀묵, 메밀전병, 메밀전 등의 음식이 유명합니다. 또 예쁜 메밀꽃도 좋아합니다.
구전에 따르면 메밀은 고려 말 중국 원나라의 지배를 받을 때, 제주도에 들어왔습니다. 당시만 해도 메밀은 소화도 안 되고 독성이 있는 작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실제로 살리실아민이라는 독성 물질이 있습니다. 원나라는 제주도 남자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제주 전역에 메밀을 심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선조의 지혜는 이를 오히려 약으로 바꾸었습니다. 무와 함께 먹으면 간단히 중화된다는 것을 알고, 무를 메밀밭 옆에 심었고 또 메밀을 무와 함께 먹었습니다. 독을 이 나라에 뿌렸지만, 반대로 고마운 약이 된 것입니다.
원나라의 지배를 받고 또 독성이 있는 메밀이 산천에 심었을 때, 가장 안 좋은 상황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이때 만약에 그냥 좌절해서 포기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이겨내려는 마음에서 최악의 상황을 최선의 상황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삶 안에서도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라면서 그냥 절망하면서 포기해야 할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이 또 다른 기회라고 여기면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고통과 시련이 오히려 기쁨과 행복의 순간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 마지막 때를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될 때라고 하시면서 이때가 바로 징벌의 날이라고 하시지요.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가고, 짓밟힐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순간 예수님 말씀처럼 ‘불행하여라’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절망의 순간만을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언제나 오늘이 마지막인 날인 것처럼 주님께서 오심을 꾸준한 기도 그리고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으로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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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새로운 시간 속에서 새로운 마음을 담아야 한다(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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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8.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지금 <전례시기>의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마지막 날’에 벌어질 무시무시한 표징들을 듣습니다. 곧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고’와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 대한 표징들입니다. 이는 ‘종말’, 곧 ‘구원’은 올 것이라는 사실과 하느님께서 그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그때에 그 어떤 시련을 당하더라도 절망하지 말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이는 ‘종말’ 그날이 우주의 파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이 새롭게 창조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곧 그날의 대재앙은 단순히 미래를 앗아가는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를 “속량”하신다는 것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그래서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의 종말은 집단적 죽음이나 멸망, 결별이 아니라, 하나의 변형이 될 것입니다. 곧 인간의 종말은 분열과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탄생이 될 것입니다. 곧 대재앙이 아니라, 정신적 역전이 될 것입니다. 정신은 역전하고 다른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며, 세계는 순간적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서의 희열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말론적인 표현들을 미래의 세상 종말에 대한 지식을 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종말론적인 표징들은 우주론적인 표현이라기보다 신학적인 표현으로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그분은 먼 미래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고, 세상은 이미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성의 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그분을 맞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헨리 나웬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삶 안에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곧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질 때, 그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때”에 결정적으로는 드러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주님!
새롭게 하소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게 하소서.
변형되게 하소서. 당신의 속량을 입게 하소서.
제 삶이 역전되고 당신 승리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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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8.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첫눈치곤 많이 내렸습니다. 겨울은 겨울입니다. 건강 관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녹음을 즐기고 가을에 풍성함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유난히 더웠던 여름이었고 가을인가 싶었는데 겨울입니다. 추위를 견디며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는 계절입니다.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때가 되면 지나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온 사람과 세상에 매여 산 사람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재앙이 닥칠 때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에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루카21,21).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도시는 화려함과 편리함 속에 누릴 수 있는 온갖 것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사람의 욕심과 계획이 지배하는 곳이요, 그것에 맛 들이면 빠져 나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결국은 도시는 하느님의 다스림 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그곳으로부터 빠져나가라고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발을 빼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요? 내일 망할 것을 알면서도 예나 지금이나 온갖 죄악이 거기서 사람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산과 시골은 순수함과 깨끗함이 거기에 있습니다. 오염 되지 않은 맑고 소박한 정겨움이 있습니다.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와 법칙이 살아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에 목을 적시고 발을 담글 수 있어 좋고, 메뚜기가 뛰어놀고 다람쥐가 활개를 치며, 까치밥을 남겨 놓은 감나무가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빙판길에 모래를 뿌리시는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러니 그곳을 두고 성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순리가 살아있는 곳에 생명도 있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치면 결국은 죽고 맙니다.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죽게 만듭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가 아파합니다.
예수님께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8).하시니 이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화려하고 편리한 인간적인 생각에 머물러 재앙을 자초하거나 세상 것, 이상하고 신비한 일에 현혹되지 말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지혜,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머리를 들어야 합니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임을 잊지 말고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가톨릭 성가 445번 ‘예수님 따르기로’함께 부르겠습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내 결코 뒤를 바람 봄 그분만을 따릅니다. 이 땅 위에서 산다하여도 이 띵 위에서 산다하여도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그분만을 따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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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8.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정태현 신부님의 ‘성서 입문’을 읽고 있습니다. 주제는 ‘성서의 형성 과정과 각 권의 개요’입니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를 알려주듯이, 성서 입문을 통해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미술도 시대에 따른 흐름이 있고, 음악도 시대에 따른 흐름이 있듯이, 성서의 형성에도 시대에 따른 흐름이 있습니다. 오늘은 예언문학, 지혜문학, 묵시문학이 전하고자 하는 사상과 교훈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언문학의 핵심 메시지는 한마디로 하느님의 뜻을 대변하고, 경고와 위로를 통해 신앙 공동체를 회복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예언문학은 하느님의 정의, 자비, 공의가 이 세상에서 실현되기를 바라며, 특히 불의와 억압에 반대합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부조리를 지적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공의를 외칩니다. 예언자들은 종종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고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예언문학에서 반복되는 주제는 회개와 회복이며, 백성들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삶을 변화시키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정의롭게 심판하실 것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심판을 경고하면서도, 심판의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교정과 회복임을 강조합니다. 장차 올 구원자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약속합니다. 이러한 메시아적 기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궁극적인 희망을 제공하고, 나아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중요한 메시지로 작용합니다. 예언문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백성들이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신앙을 지키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것을 촉구합니다.
지혜문학의 핵심 메시지는 인생과 신앙, 도덕적 가치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으며, 인간이 지혜를 통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가르칩니다. 지혜문학의 시작과 중심은 하느님을 경외함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하느님을 인식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올바르고 정직한 삶, 즉 의롭고 도덕적인 삶을 강조합니다. 지혜는 올바른 선택을 하고 다른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겸손히 하느님 앞에 서야 함을 가르칩니다. 인간은 모든 걸 이해할 수 없고, 하느님의 계획은 때로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물질적 성공과 쾌락의 무상함을 강조하고, 진정한 행복과 의미를 추구하도록 이끕니다. 인생에서 겪는 고난을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며, 이를 극복하는 지혜로서 인내와 신뢰를 가르칩니다. 고난 속에서 믿음을 유지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의 한 부분임을 강조합니다. 삶의 작은 부분들 속에서도 지혜를 실천할 것을 가르칩니다. 이는 가정과 사회생활, 인간관계 속에서 도덕적이고 올바른 태도를 보이는 것을 포함합니다. 지혜문학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경외하고, 정직과 의로움으로 삶을 살아가며, 삶의 일시적 본질을 깨닫고 진정한 의미를 찾는 것을 통해 충만한 인생을 누리도록 이끕니다.
묵시문학의 핵심 메시지는 시련 속에서 희망을 전하고, 최후의 승리와 하느님의 정의로운 통치에 대한 약속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전합니다. 박해와 고난 속에서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위해 쓰였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일시적이며, 끝까지 인내하면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구원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합니다. 역사의 모든 흐름이 하느님의 섭리 속에 있으며, 모든 사건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진행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하느님이 모든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현재 상황이 불확실하거나 고통스러워도 궁극적인 목적이 있음을 신뢰하도록 돕습니다. 종말에 하느님께서 완전한 새 창조를 이루실 것이라는 약속을 전합니다. 이는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창조를 의미하며, 신앙인들에게 영원한 희망과 소망을 줍니다. 강력한 상징과 비유를 통해 독자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도록 촉구합니다. 비유적인 언어와 환상은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주며,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신앙을 경계할 필요성을 일깨웁니다. 세상의 악과 싸우는 영적 전투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신앙인들이 이 싸움에서 영적 무장을 통해 승리하라고 요구합니다. 믿음을 지키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이 있어도 하느님이 함께하시며 그분의 계획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면 도움이 될 겁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거룩함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종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희망입니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 그리고 희망의 탑을 쌓으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가 청빈과 정결 그리고 순명의 삶을 산다면 이곳이 하느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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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8.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라고 말입니다. ‘속량’이라는 단어의 뜻을 아시나요? 그 뜻은 이렇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노비에게 대가를 받고 그들의 신분을 풀어주어 양인(良人)이 되게 하던 제도.’(네이버 사전)
다시 말하면 ‘속량’은 노비에게 자유를 주는 제도였으며 더 이상 상하 구조의 신분이 아닌 평등의 신분이 될 수 있는 제도였던 것입니다. 이런 ‘속량’이 우리에게 가까이 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탄을 맞이하기 전에 대림이라는 기다림과 설렘의 시작을 지냅니다. 우리가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유는 우리의 속량 재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속량 제물이 되시고 그러므로써 우리는 죄와 어둠의 종살이에서 풀려나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그 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속량 될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늘나라에 맞는 빛의 옷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몰아내고 사랑과 자비로 우리 내면을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속량 되어 그리스도와 한 형제, 자매가 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빛의 갑옷을 입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빛이 우리의 어둠을 몰아내고 우리 안에서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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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신발
인도의 성자 간디가 군중과 함께 기차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차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간디가 기차를 타려다가 신발 한쪽이 벗겨졌는데, 주워 들 틈도 없이 기차가 출발했습니다.
그러자 간디는 재빨리 나머지 한쪽을 벗어 던졌습니다.
누가 줍든 신발은 두 쪽이 있어야 쓸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까닭 중- (박흥렬)
그대는 위와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까요? 간디의 자비로움을 익히고 싶은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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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8.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희망의 순례 여정
“희망의 빛, 희망의 힘, 희망의 훈련”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여라.“(묵시19,9ㄴ)
그대로 어린양의 미사잔치에 초대받은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같습니다. 이런저런 유익한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지난 10월4일 제가 주례한 혼인미사후 신부의 어머니가 했다는, 그의 남편이 전해준 고백글을 잊지 못합니다. 나이 40을 훌쩍 넘어 늦게 결혼한 외동딸입니다.
-결혼식을 마치자, 아내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사위가 ‘장모님’하고 부를 때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마음 졸이고 살았는지 몰라.”-
끝까지 희망을 내려놓지 않고 하느님의 때를 기다린 신자 부부입니다. 결혼은 서로를 구원할뿐 아니라 부모들까지 구원함을 봅니다.
어제 일간지에서 읽은 주목할 기사도 소개합니다. “검찰권의 정치 무기화, ‘바나나 공화국 전락한다”제하의 내용이었고 공감했습니다. 바나나 공화국은 ’부패한 권력자가 지배하는 불안정한 후진국’이라 하는데 결코 이런 일이 있어선 안되겠습니다.
또 하나는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을 앞둔 미국과 중국에 관한 기사내용이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문화전통에서 나오는 중국 정치지도자들의 깊은 지혜와 전략, 희망에 공감했습니다.
“이 불확실성이 중국을 불안하게 하지만, 트럼프의 거칠고 혼란스러운 정책이 미국의 분열과 쇠퇴를 더욱 가속화할 것이라는 중국의 기대도 높다. 트럼프가 중국에 단기적으로 나쁘지만, 장기적으로는 좋다는 판단을 많은 중국전문가들이 내놓고 있다. 지금 중국은 미국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은 내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외적의 침입보다 가장 무서운 적은 내적 분열의 내란이요, 사람이든 나라든 아무리 작아도 내적으로 일관성이 있고 견고한 일치를 이루면 안전할 것입니다. 개인이든 나라든 “희망찬 미래”가 내외적 일치를 보장함을 깨닫습니다. 옛 어른이 지혜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바탕에 무엇을 쌓는지에 따라 사람의 격이 결정된다. 이러한 바탕과 단계를 아울러 성품이라고 한다.”<다산>
“군자는 위로 통달하고 소인은 아래로 통달한다.”<논어>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의 사람들은 부정적 비관적 성품에 아래로 통달한 소인이될 가능성이 다분하나, 반면 감사, 감동, 감탄의 삼감에 희망의 사람들은 긍정적 낙관적 성품에 위로 통달한 군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희망이 답입니다. 이제 곧 희망과 기쁨의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진선미(眞善美)의 성품 형성에 가톨릭의 전례영성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12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기도지향도 ‘희망의 순례자들’로 오늘 강론 제목과 일치합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희망의 순례자들입니다.
“다가올 이번 희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일상의 삶 안에서 알아볼 수 있도록 도와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하며, 우리를 희망의 순례자인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켜주도록 기도합시다.”
희망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호는 <희망의 원리>라는 책에서 넷을 말합니다.
1.인간은 빵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희망을 먹고 산다.
2.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은 이미 삶자체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3.희망이 힘이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삶을 쉽게 포기하지만 희망이 있는 사람은 최악의 상태에서도 버텨 이겨낸다.
4.희망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5.희망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행복을 약속한다.
베네딕도 규칙서 <4장 착한 일의 도구들에 대하여> 중 두 대목이 생생합니다.
1.자신의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성규4,41)
2.그리고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절대로 실망하지 마라.
희망은 힘이자 빛입니다. 희망을 잃어 실망하거나 절망하거나 원망하기 시작할 때 마음도 정신도 영혼도 병들기 마련입니다. 정신건강, 마음건강, 영혼건강에 희망보다 더 좋은 명약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희망을 둠이 최고의 처방입니다.
피정지도시 참 많이 다룬 주제가 “희망의 여정”이고, 아침 산책때 마다 부르는 “바다”라는 동요를 부르곤 합니다. 얼마전 피정 자매들 거의 못 부르기에 알아보니 40-50대 자매들이었습니다. 60대후반이후는 대부분 열창합니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성서가 말하는 궁극의 결론도 희망입니다. 예언자들은 물론이요 종말을 이야기하는 묵시록도 하느님의 궁극의 승리를, 구원을,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두렵고 불안하게 하는 종말 이야기들이 아니라,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구원의 희망을 북돋아 주기 위한 종말 이야기들입니다.
역시 값싼 희망은, 값싼 영적승리는 없습니다. 희망과 영적승리만 아니라 모든 더목이 즉 믿음이, 사랑이, 평화가 그러합니다. 하느님을 감동 시킬수 있는 부단한 수행의 노력과 훈련이 절대적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진인사대천명,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한다.” 말마디들에서 한결같이 강조되는 바 노력입니다. 천재들 역시 잘 들여다보면 노력하는 천재들입니다. 천재에다 끊임없이 노력을 더해가니 당해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을 보십시오. 하느님의 궁극의 승리를 목격한 자들은, 구원의 희망의 실현을 목격한 자들은 온갖 시련과 박해를 견뎌 통과해온 주님의 전사, 희망의 전사, 승리의 전사들인 신자들입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권능은 우리 하느님의 것,
과연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
바로 오늘 묵시록 19장 승리의 찬가를 우리 가톨릭 교회는 매주일 제2저녁기도때 노래합니다. 바로 공동전례를 통해 끊임없이 승리의 찬가, 희망의 찬가를 노래하는 영적훈련이 승리의 믿음과 희망을 날로 강화해줌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종말 풍경은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밤이 깊으면 새벽도 동터오눈 법입니다. 끝까지 버텨낸 이들이 동터오는 구원의 새벽을 맞이합니다. 복음의 마지막 장면이 하느님의 궁극의 승리와 더불어 실현되는 구원의 희망을 보여줍니다.
“그때에 사람이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런 하느님 승리의 영광을, 희망의 실현을 앞당겨 맛보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마다 한결같이 희망찬 삶을,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루카21,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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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8.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이 사람에게 기쁨이요
사람이 사람에게 슬픔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믿음이요
사람이 사람에게 반역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희망이요
사람이 사람에게 절망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사랑이요
사람이 사람에게 증오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축복이요
사람이 사람에게 저주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해방이요
사람이 사람에게 억압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살림이요
사람이 사람에게 죽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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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8.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루카 21,25-26)
많은 사람이 신앙에서 멀어질 때, 불신의 구름이 밝은 신앙을 가릴 것입니다. 제 경우에는 제 믿음에 따라 거룩한 태양(말라 3,20 참조)이 밝아지기도 하고 흐려지기도 하니까요. 사람들이 하늘의 해를 바리볼 때도, 보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흐리게 보는 사람과 밝게 보는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빛도 믿는 이의 경건 함에 따라서 달라지지요. 지구와 달리 달은 주기에 따라서 해의 방위에 들어가면 이지러집니다. 육체의 악덕이 거룩한 빛을 가로막으면 거룩한 교회 또한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거룩한 빛의 밝음을 빌려 쓸 수 없습니다. 박해 때는 이 세상 삶에 대한 애착이 하느님의 빛을 차단히는 경우가 무척 많습니다.
-암브로시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3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6).
윗자리에 올라앉는 것과 높임을 받는 것은 하느님 안으로 더 깊이 들어 가는 것을 의미하기에, 엑카르트는 하느님의 내적 본심이 무엇과 같은지를 더 깊이 분석하려고 한다. 바로 여기서 그는 둘째 성서 말씀, 곧 에페소서 본문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에페소서의 본문은 아래와 같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에페 4,1-6)(286)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녀의 왼쪽 폐에는 이미 고름뭉치가 생겼다. 의사는 화농성 늑막염이라고 진단했다.
마침 이즈음(1919년 봄) 신심 깊은 대중은 성모님의 바람에 대한 사제들의 태도가 너무도 성의 없게 생각되어 참다 못해 마지막 발현시의 소망을 채워 드리고자 고바 다 이리아에 보잘것없는 작은 성당을 지었다.
그것은 겨우 사방이 몇 미터밖에 안 되는 엉성한 건물이었고 더구나 길 가까이에 세워졌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이정표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허술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발현 장소는 정확한 표적으로 잘 지켜졌다.
애석하게도 성모님의 귀여운 친구 중 루치아 혼자만이 여기에 가서 기도를 드릴 수 있을 뿐이었다.
유행성 질환은 루치아네 집에도 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퍼져 나가 아버지는 그 해 여름(1919년 7월 31일)에 사망했다.
어머니 마리아 로사도 위독한 지경에 이르러 생사를 헤매었다. 급기야 병자 성사도 받고 아이들 각각에게 유언을 남기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종의 괴로운 숨결 속에서 어머니는 루치아에게 속삭였다.
“네가 말하는 것이 정말이라면 고바 다 이리아에 가서 기도드려 봐라.”
루치아는 집을 나왔다. 길을 가면서 소녀는 로사리오를 드렸다. 마침내 소성당까지 와서 기도를 바치고 만일 어머니의 병이 나으면 무릎으로 고바까지 가서 다시 조배드리고 9일 동안 아침밥을 걸언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아주 좋아져 계셨고 사흘 후에 다 나았습니다. 기적이었어요 ...... 그러나 어머니는 아직도 나를 믿어 주지 않으셨죠. 아 ! 어머니의 불신을 본다는 것이 내게 그 얼마나 큰 괴로움이었는지 모릅니다.” 하고 루치아는 가슴속에 품었던 생각을 이야기했다.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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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8.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역사의 반복처럼, 매년 연중행사처럼 분쟁 그리고 천재지변, 기상이변과 각종 질병은 끊이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어쩌면 이런 인재人災와 천재지변이나 기상이변 등은 이젠 지구라는 행성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에게 일상화되어 버린 듯 무감각하기도 합니다. ‘금년도 예외 없이!’ 예수님 시대 이후 세상은 세기말世紀末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일상은 종교적인 맥락에서 보면 종말終末을 앞둔 시간을 살아간다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니라고 봅니다. 더욱 교회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침 시기와 또한 새로운 시작,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를 앞둔 지금은 공교롭게도 계속해서 비슷한 복음의 메시지를 듣다 보면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워집니다. 하지만 이 시기만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 때까지 우리네 삶도, 역사의 시간은 바로 ‘어제는 금요일, 그러나 부활 주일이 오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 두 날을 온전히 살았던 사도들은 결코 예수님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아니 계신 것처럼(=不在) 보일 때가 예수님이 가장 강하게 現存하신 때이며, 예수님이 죽은 것처럼 보일 때가 다시 살아 돌아오실 때라는 것을 철저하게 배웠고 체험했었습니다.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실제로 영적으로 전례력에서 별로 의미 없는 날, 바로 토요일을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 역사는 어떤 면에서 약속과 성취 사이의 시간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구는 현재 토요일인데 과연 부활 주일, 곧 재림은 올 것인가? 영성적 의미에서 우리는 성금요일과 부활 주일 사이에 살고 있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재림은 오리라는 기다림으로 살아야 하는 우주적 시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당신께서 몇 번이나 예루살렘을 모으려고 하였으나 마다하였다.”(루13,34)하고 한탄하시면서도, 품으려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을 향한 애틋한 심정으로 눈물을(19,41) 흘리시면서까지 회개하도록 촉구하셨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은 역사적으로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통하여 예루살렘은 자신의 속량(=구원)을 스스로 잃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그 결과로 닥친 환난을 피하기 위해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성경에서 산은 하느님이 계신 곳이며, 하느님께 피신하라는 의미)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악의 구렁에서 나오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죄악의 구렁으로 들어가지 마라.)”(21,21)고 권고합니다. 이런 권고는 마치 6. 25전쟁을 겪으신 분들은 이런 어려운 상황을 온몸으로 겪으셨기에 실감하셨으리라 보며, 그러니 전쟁 중에 누가 그 전쟁의 중심 지역으로 들어갈 것이며, 빠져나와 피난을 떠나다 보면 거동이 불편한 임산부나 젖먹이가 딸린 여성들이(21,23)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야 의심할 수 없이 자명한 일이라고 봅니다. 이런 전쟁이 이 땅에 다시 일어나서는 아니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미에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말씀, 곧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구원)이 가까웠기 때문이다.”(21,28)라는 말씀을 통해서 종말의 시간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그 시간은 속량(=구원)과 심판의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종말의 시간을 앞두고 우리는 역사와 신앙의 교훈을 통해 누구 앞에 어떻게 서 있을 것인지 지금부터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불안과 걱정으로 허리를 굽히지 말고, 머리를 들어 세상의 표징을 읽고 주님의 말씀과 뜻을 되새기면서 힘차고 충실하게, 밝고 아름답게 살아간다면 마지막 그 날, 그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날이며 시간이 되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존재”(묵18,9)의 행복을 만끽하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예수님께 귀의하여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빛의 편에 선다면 그날은, 그 시간은 결코 두렵고 무서운 심판의 날과 시간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일 매 순간이, 그날과 그 시간이 계속될 뿐 내일은 없습니다. 내일이 있으려니 지금 주어진 시간을 헛된 것에 탕진하고 소진하고 산다면 이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며, 그 사람에게는 바로 그 마지막 시간이 곧 심판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내일이면 이미 늦습니다. ‘때는 늦으리라!’ 그러기에 오늘 바로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 (21,28)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마지막 날은 고통과 절망으로 끝나는 날이 아닌 기쁨과 희망으로 벅찬 새로운 날이 되리라 믿습니다. 속량의 날이 가까웠으니 주님의 은총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합시다. “주님,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위기의 시간에 두려워하지 않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 살아가도록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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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8.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오늘 이 기쁨이 종말의 그날로 이어짐을 /
박윤식 [big-llight]241127. 18:40 ㅣNo.177979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되면 산으로 가, 그곳을 달아나라. 이 백성에게 징벌의 날로 재난과 진노가 닥치면서, 칼날에 쓰러지고 다른 민족에게 끌려간다. 해와 달, 별에는 표징이 일고 파도 소리에 민족이 공포에 휩싸인다. 모두가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치리라.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면서,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어느 지혜로운 스승이 자신의 사랑하던 두 제자를 하산시키면서, ‘세상의 모든 게 빛난다.’라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그들 인생은 참으로 복될 것이라고 다짐을 단단히 주었다. 산에서 내려가 서로 다른 길을 가던 두 제자가 많은 세월이 흐른 뒤 만났다. 한 제자는 동료에게 세상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다 겪으며 결국은 모든 것이 빛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나.
이에 반해 다른 한 제자는 행복한 모습으로 이에 응답했단다. “글쎄, 모든 것이 다 하나같이 빛나는 것만은 아니라네. 다만 빛나는 모든 것이 존재할 뿐이지.” 어쩌면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며, 그러한 존재들로 둘러싸인 곳에서 산다. 그러나 모든 것을 사랑으로 완성하실 주님 섭리대로 살기에, 각자가 빛나는 순간을 갖고 있는 작은 조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연중 마지막 주간인 싸늘한 이 늦가을 밤, 죽음과 종말에 대해 묵상해본다. ‘세상 마지막 날을 어떻게 맞이할까?’가 우리에게는 늘 커다란 두려움이다. 그날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하느님 나라를 세우시는 날이다. 그날은 구원과 해방의 날, 영광의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날 게다. 그래서 그날 주님 얼굴을 맞대 뵙는다. 예수님께서 당신 재림에 관해 언급하시면서,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라고 직접 이르셨다.
이는 역설적으로,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는 일상에서 생생하고 빛나는 순간들을 만나는 정녕 ‘가슴 벅찬 때’가 되리라. 누군가가 세상이 전쟁, 전염병, 자연재해 등을 늘 겪지만, 절망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란다. 이것은 세상의 역사는 멸망의 역사가 아닌 구원의 역사이며, 그 중심에 예수님께서 계시기에. 그러기에 겁먹지 말자. 잘못을 깨우쳐 회개하자. 종말은 주님 자비를 믿는 이에게는 파멸의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희망과 구원이다. 종말의 징조는 언제나 현실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여러 사례로 종말을 구체화 시키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종말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마는 그러한 심판의 날만이 결코 아니다. 그날은 하느님을 멀리하는 이들에게는 심판과 파멸의 날이지만, 주님을 믿고 그분께 의지하는 이들에게는 속량과 구원의 날이 될 것이기에. 사실 전쟁을 일으킨 이들, 그로 상처 입은 이들도 모두 다 죽었다. 개인의 죽음이 일차적 종말이다. 그렇지만 진짜 종말의 준비는 바로 그날에 예수님을 다시 뵙는 거다. 우리가 평소 그분을 마치 친구처럼 찾았다면, 우리는 기쁨과 신뢰 속에서 만날 게다.
그러나 반대로 모른 체했다면, 마지막 날 그분과의 만남이 두려움과 고통 속에 이루어지리라. 그날이 우리에게 구원이냐 단죄냐의 이 선택은, 바로 오늘 이 시각 우리 삶으로 이루어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현실의 삶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늘 다시 시작하란다. 우리는 언젠가 죽어 하느님께 돌아간다. 미리 겁먹고 그날을 두려움으로 생각한다면, 어찌 복음 믿는다 하랴? 오히려 그날을 기억하며, 현실의 삶에 충실히 살아가자. 종말은 결국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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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8.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묵시 문학은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해도 바꿀 수 없으며 어떻게 벗어날 도리가 없는 억압의 굴레와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개입하신다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거슬렀던 이들에게 이 상황은 두려움이며, 하느님 말씀을 충실히 따랐던 이들에게는 위로와 희망입니다.
믿음 안에서 마지막 날을 잘 준비한 이들은 이 마지막 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희망하며 기다립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날을 전혀 다른 두 가지 말로 표현하십니다.
‘징벌의 날’과 ‘속량의 날’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이들은 심판과 벌을 받을 것이고, 주님을 믿고 회개한 이들은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의 요한 묵시록도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다다랐을 때, 악을 상징하는 바빌론은 파괴될 것이고, 하늘에 있는 무리들은 승리에 기뻐하며 하느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 마지막 날은 주님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삶의 완성과 구원의 날, 그러지 않았던 이들에게는 파괴와 징벌의 날이 됩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본다면, 개인 역사의 끝은 죽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존재입니다.
죽음이 누구에게는 조금 이르게 올 수도, 누구에게는 조금 늦게 올 수도 있지만, 모든 이가 받아들여야 할 순간입니다.
죽음으로 맞는 마지막 날이 나에게 두려움이 아닌 희망이 되도록 잘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며 산다면 그날은 기쁨과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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