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녘 / 김지하
무엇이 여기서
무너지고 있느냐
무엇이 저렇게 소리치고 있느냐
아름다운 바람의 저 흰 물결은 밀려와
뜨거운 흙을 적시는 한탄리 들녘
무엇이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느냐
참혹한 옛 싸움터의 꿈인 듯
햇살은 부르르 떨리고
하얗게 빛 바랜 돌무더기 위를
이윽고 몇 발의 총소리가 울려간 뒤
바람은 나직이 속살거린다
그것은
늙은 산맥이 찢어지는 소리
그것은 허물어진 옛 성터에
미친 듯이 타오르는 붉은 산딸기와
꽃들의 외침소리
그것은 그리고
시드는 힘과 새로 피어오르는 모든 힘의
기인 싸움을 알리는 쇠나팔소리
내 귓속에서
또 내 가슴속에서 울리는
피 끓는 소리
잔잔하게
저녁물살처럼 잔잔하게
붓꽃이 타오르는 빈 들녘에 서면
무엇인가 자꾸만 무너지는 소리
무엇인가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내리는 소리.
<김지하 시인>
*1941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는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애린』,
『검은 산 하얀 방』, 『이 가문 날의 비구름』,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 『화개』 등이 있고, 『밥』, 『남녘땅 뱃노래』,
『살림』, 『생명』, 『생명과 자치』, 『사상기행』, 『예감에 가득 찬 숲그늘』,
『옛 가야에서 띄우는 겨울편지』,
*대설(大說)『남』, 『김지하 사상전집(전3권)』, 『김지하의 화두』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 로터스 특별상(1975), 국제시인회의 위대한 시인상(1981),
크라이스키 인권상(1981) 등과 이산문학상(1993), 정지용문학상(2002), 만해문학상(2002),
대산문학상(2002)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