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1839-1906)
세잔은 남부 프랑스의 액상 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방도시의 은행가였고, 어머니와 두 누이가 있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중학교에 다닐 때는 에밀 졸라와 동급생이었다. 병약하고, 난시인 졸라가 급우에게 시달리자 앞 장 서서 막아주었다. 졸라는 고마움의 표시로 사과 한 광주리를 선물했다. 이 사과가 ‘세잔느의 사과’로 불릴 만큼 유명하다. 졸라와는 1886년까지 친밀한 우정 관계를 유지했다.
세잔은 화가가 되고 싶었으나 아버지는 법대를 나와서 가업을 이어받기를 원했다. 졸라가 적극 권유하여 파리로 미술 공부를 하러 갔다. 파리에 온 세잔에게 마네와 꾸르베를 소개해 주었다.
파리 생활은 실망스러웠다. 에콜 드 보자르의 입학 시험에는 계속하여 낙방했고, 살롱전에서도 낙선을 거듭했다. 아버지가 돈을 보내주었지만 세잔은 아버지에 의존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고 있었다.
1861면에는 파리의 아카데미 쉬스에 들어가서 피사로, 기요맹을 만났고, 이듬해에 모네, 바자유, 시슬레, 르노아르를 사귀었다. 이 시기의 세잔의 작품은 폭력과 관능주의를 주제로 선정했다. 이런 주제는 낭만주의적 기법의 표현이었다.
1872년에 피사로를 다시 만나므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인상파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살롱전의 낙선자 전시회인 앙데팡당 전에 모네, 피사로, 마네 등과 함께 참여했다. 세잔은 인상파 화가와 함께 하였으나 자신을 인상파 화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인상파 기법으로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순간의 인상과 빛의 일시적 효과보다는 자연의 구조적 분석에 몰두함으로 신인상주의를 예고했다. 사과 정물화를 그릴 때 인상주의 화가들은 사과에서 나오는 빛의 순간적인 변화를 그리기 위해서 급급했지만 세;잔은 언제, 어디서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과의 고유 형태를 그리는데 집중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특정한 소재, 곧 그의 부인 오르탕스 초상, 정물, 그리고 액상 프로방스의 경치를 그리는데 집중했다. 그는 대상의 기본적인 구조에 관심이 있었지 계절이나 배경, 시간 등에는 관심이 적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거리는 회화적 균형을 위해서 외관의 형태를 미묘하게 기울어지게 하거나, 늘려서 왜곡시켰다. ‘목욕하는 사람들’에서는 누드의 여인들을 그리고 있는데 회화적 구조를 위해서 해부학적 정확성을 포기했고, 단순화된 인물의 형태는 멀리 뻗은 나무줄기의 영역을 반향하고 있다.(나무줄기와 조화를 맞추고 있다.) 또한 입체감의 표현은 원근법과 단축법에 의하지 않고 매우 특이하고 미묘한 색조의 변화로 나타냈다.
1869년에 19세의 모델 오르탕스 파케를 만난 세잔은 집에 알리지도 않고 동거를 했다. 17년이나 동거하고 아들까지 낳았지만 너무 엄격했던 아버지에게 알릴 수가 없었다. 세잔의 아버지는 임종 직전에서야 손자의 존재를 알고 손을 잡아 주었다고 한다. 오르탕스도 세잔의 부인이 되었지만 그의 인생에 별로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세잔은 그에게 한 푼의 유산도 남기지 않았고, 임종 때도 나타나지 않았다. 세잔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고독한 인생을 살았다.
세잔은 스쳐지나가는 사람과 팔만 닿아도 버럭 화를 냈다. 늘 혼자 있었다. 같은 인상파 화가인 모네가 악수를 청하자 일주일 동안 손을 씻지 않아서 악수를 할 수 없다고 말한 일화도 남아 있다.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세잔은 파리의 기성화단과 평론가에 대한 적개심을 가졌고, 그들과 불화했다. 그렇지만 소년 시절부터 함께 했고, 세잔을 화가의 길로 이끈 졸라와의 우정은 유명하다. 정신적인 스승인 피사로가 화가로 이끈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1886년에 졸라가 쓴 소설 ‘작품’의 주인공이 실패한 예술가였는데, 세잔은 자신을 모델로 쓴 소설이라면서 절교를 선언한다.
세잔은 부인과 아들을 파리에 남겨 둔 체 고향인 액상 프로방스에 내려와서 살았다. 고향의 민둥산인 생 빅투와르 산을 그리고 또 그렸다. 그는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으나 여행도 하지 않고 고향의 작은 집에 틀어박혀서 그림만 그렸다. 그는 그림을 시간을 두고 매우 공을 들여서 건축물을 구축하듯이 천천히 그렸다
세잔은 1895년에 화상 볼라르가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어주기 전까지는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 전시회는 젊은 세대의 화가들에게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나타난 일이 거의 없었으므로 신비의 인물로 더욱 인기를 높였다. 19세기 말의 아방가르드 화가들은 그를 현인의 경지까지 끌어 올렸다.
1904년에 파리에서 특별전이 열렸고, 그가 죽은 후인 1907년에 열린 추모전은 입체주의 미술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견인 역할을 했다. 후대의 화가로서 세잔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이다. 그래서 그를 ‘현대 회화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피카소에게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고, 마티스에게는 회화의 신이었다. 클레는 세잔을 그의 가장 뛰어난 스승이라고 했다. 그와는 미술적 성향이 같지 않은 칸딘스키도 세잔을 추상회화의 토대를 쌓은 화가라고 했다.
1906년 10월 15일에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던 그는 폭풍우 속에 쓰러져서 10얼 22일에 페렴으로 사망했다.
화가 모리스 드니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상 유명한 사과는 셋이 있다. 뉴톤의 사과이고, 이브의 사과이고, 세잔의 사과이다.’ 세잔은 말했다. ‘나는 모든 자연에서 원통, 구, 원추로 봅니다.’ 이 말은 회화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