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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청아하고 고운 목소리로 남산초등학교 2학년 때 KBS 어린이 성우로 활동했다.
4학년 때는 서울시립합창단 창단멤버와 메트로폴리탄 합창 단원으로 활약했다.
서울시 육상대회에 출전해 3위에 올라 운동에도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이화여중에 입학해서는 음악콩쿠르에 나가 3위에 입상하면서 성악가의 꿈을 키웠다.
명문 이화여고에 진학해 높은 경쟁을 뚫고 교내 방송의 아나운서가 됐다.
합창단의 지휘자로 활동했고, 배구시합 때는 선수로 뛰기도 했다. 공부부터 노래, 운동까지 만능이었다.
대중음악에 관심을 가진 것은 둘째 오빠의 영향이 컸다.
어느 날 오빠가 기타 치는 것을 보고는 그 모습에 흠뻑 반하고 만다.
이때부터 열심히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고, 곧 오빠를 능가하는 기타 연주 솜씨를 보이게 됐다.
교내에서 7번의 개인리사이틀을 열었을 정도니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수험준비에 여념이 없던 1972년 9월 어느 날, 교문 앞에 누군가 서성이고 있었다.
김인순이 나타나니까 재빨리 달려왔다.
당시 젊은이들의 인기 라디오 프로였던 CBS <세븐틴>의 김아무개 PD였다.
그는 김인순에게 다짜고짜 자신의 프로에 출연해줄 것을 요청했다.
김인순은 잠시 망설였으나 그의 간청에 그만 고개를 끄덕인다.
김인순은 처음으로 방송에 나가 노래를 불렀는데, 애청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몰고 왔다.
이때부터 시험 준비 보다는 노래에 푹 빠져들었다.
그해 대학입시에서 연세대 신방과를 지원했던 김인순은 보기 좋게 낙방했다.
그녀는 절망하지 않고 대학 대신 다른 길을 모색한다.
이번에는 성우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방송국에 갔다가 유명 포크 가수인 이장희를 만나게 된다.
김인순의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던 이장희는 그녀의 끼와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본다.
“너, 내 방송에 한 번 나올래”
이렇게 이장희는 자신이 진행을 맡고 있던 DBS(동아방송) <0시의 다이얼> 김인순을 게스트로 초대한다.
흔쾌히 받아들여 출연하게 된 그녀는 포크 싱어로 소개받고는 재치있는 말솜씨와 함께 기타를 치며 팝송을 불렀다.
청취자들에게 ‘김.인.순’이라는 이름을 알리게 된 좋은 기회였다.
1974년 5월, 김인순은 데뷔앨범을 발표하며 대중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유니버셜레코드를 통해 발매된 <비오는 날에는/외로운 소녀>란 독집 앨범이다.
이중 <그리운 너>, <외로운 소녀> 등 몇 곡의 가사는 그녀가 직접 썼다.
아쉽게도 데뷔 앨범은 크게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가능성은 보여주는 데 만족해야만 했다.
두 달 후 드디어 김인순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다.
그해 6월 KBS 라디오 <젊은이의 광장> DJ로 전격 발탁된다.
이때부터 날개를 달았다.
4개월 후에는 양희은의 뒤를 이어 TBS(동양라디오) <팝송 다이얼>의 진행을 맡으면서 자신만의 이미지를 굳혀 나간다.
그리고 1975년 김인순은 대박을 터트린다.
같은해 8월에 개봉한 김응천 감독의 하이틴 영화 <여고 졸업반>(장제훈 작사·정민섭 작곡)이 4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흥행에 대성공을 거둔다.
이 영화는 구혜영의 장편소설 <불타는 신록>을 영화하한 작품이다.
여자 주인공이었던 신인 배우 임예진은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청소년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김인순이 부른 주제가 <여고 졸업반>도 최고의 히트를 기록했다.
각 방송의 가요순위에서 처음으로 1위를 차지하며 단숨에 톱 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이 여세를 몰아 1976년 MBC 10대 가수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20대 초반의 싱그러운 이미지로 어필한 김인순은 이후에도 하이틴 영화 주제가를 계속 부르게 되면서 하이틴 영화 전문가수로 이미지가 굳어진다.
1976년 영화 <소녀의 기도>, <청춘을 이야기 합시다>, <학창시절>, <청색지대>, <푸른 교실>, <친구 사이>, <선생님 안녕히> 등의 주제곡을 불렀다. 일부 영화에서는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이때 김인순의 인기는 최고 절정에 달했다.
1978년 9월, 김인순은 MBC 아나운서와 결혼하며 가정을 이뤘다.
1979년 5월에는 <긴 밤에> <용서하는 마음> 등 사랑을 주제로 한 신곡을 내며 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늘 여고생 같은 ‘소녀가수 이미지’에 매료돼 있던 팬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낙심한 김인순은 가수활동을 접고 한동안 평범한 주부로 가정생활에 전념했다.
하지만 가수로서의 열망을 식히지는 못했다. 2년 만인 1981년, <언덕에 앉아>라는 타이틀곡을 내세워 신곡 앨범을 발표했다.
의욕적으로 활동은 재개했지만 예전 같은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그렇게 김인순은 팬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그녀는 밤무대 출연으로 가수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다 1988년 5월18일 그녀의 비보가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이날 인천의 한 업소에 출연했던 김인순은 이날 오후 11시40분쯤 로얄샬롱 승용차를 타고 귀가하고 있었다.
인천 서구 가좌동 사거리를 지나던 중 과속으로 달리던 덤프트럭(7.5톤)이 갑자기 나타나 그녀가 탄 승용차 운전석을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김인순과 운전기사가 그 자리에서 숨졌다.
늘 여고생 같았던 하이틴 가수 김인순은 이렇게 허망하게 팬들의 곁을 떠났다.
그녀의 나이 3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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