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방인들에게 편지를 보냄
행 15:22-35
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23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25-26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27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30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1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33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34 (없음)
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행 15:22-35 / [예루살렘 교회의 편지] 사도와 장로들과 온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그들이 뽑은 대표를 안디옥으로 보내 이 결정된 사항을 알리기로 결의하였다. 그 자리에서 대표로 뽑힌 사람은 신도들 가운데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바사바라고도 불리는 유다와 실라였다. 23) 그들이 가지고 간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계시는 이방인 형제 여러분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과 형제들이 문안을 드립니다. 24) 여기서 간 신도 몇 명이 여러분을 당황하게 만들고 여러분이 구원받는 일에 대해서까지 의문을 가지게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보낸 사람들이 아닙니다. 25) 그래서 우리는 이 기회에 공식적인 대표 두 사람을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만장일치로 결의하였습니다. 26) 대표인 유다와 실라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질문에 대해서 우리가 결정한 바를 이분들이 직접 구두로 전해 드릴 것입니다. 27-29)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던 것을 먹지 말고,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먹지 말고, 또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 이외의 유대인의 율법을 여러분에게 짐 지우는 것은 성령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결정입니다. 이것만 지켜 주신다면 충분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30) [안디옥에 간 대표들] 보냄을 받은 네 사람은 곧 안디옥으로 내려가 총회를 소집하고 편지를 전달하였다. 31) 편지를 읽은 모든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32) ㄱ) 말씀 전하는 은사를 받은 유다와 실라의 설교는 신도들에게 신앙을 더욱 북돋아 주었다. (ㄱ. 혹은 `예언의 은사') 33) 그래서 거기서 얼마 동안 머무른 후에 예루살렘 교회로 보내는 감사의 편지를 가지고 돌아갔다. 34) ㄴ) (없음) (ㄴ. 어떤 사본에는 34절에 `실라는 거기에 남아 있기로 작정하였다'는 말이 들어 있다) 35) 바울과 바나바는 그대로 안디옥에 머물러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설교하였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을 넘어서는 하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한 기초 작업이 끝났습니다. 이제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유대인과 이방인을 연결하는 하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공동체가 결의한 ‘사도와 장로들의 규례’(16:4)가 있을 뿐입니다. 모두를 차별 없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한(one) 복음’이 정리되어 구체적인 실천 지침과 함께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전해집니다. 정리된 복음은 장애물을 넘어 담대하게 선포됩니다.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22-27)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했던 구성원들은 회의 결과를 안디옥 교회에 알리기로 합니다. 그들은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실루아노; 살전 1:1; 행 16:19-29; 17:4, 10, 14; 18:5; 벧전 5:12)를 대표자로 뽑아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에 보내기로 결의합니다. 예루살렘 회의 결과는 편지로만 전달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유다와 실라의 말로도 전달되었습니다. 회의 결과는 같은 권위를 가진 말과 글로써 2번이나 전달되었습니다. 이 같은 회의 내용 전달과정은 회의 참석자들이 얼마나 이 사안을 신중하게 대했고 세심하게 처리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28-29) 회의 결과를 전달하는 주체가 ‘성령과 우리’입니다. 성령님의 뜻을 신중하고 세심하게 살핀 신앙 공동체가 회의 결과를 안디옥 교회에 전달합니다. 회의의 결론은 한 개인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따른 공동체의 만장일치였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먼저 베드로와 야고보의 연설에서 요약된 복음의 원칙, 곧 구원이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데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에 대한 단순한 믿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전합니다(할례의 불필요성). 그리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4가지 지침인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를 먹는 것 금지’를 요구합니다.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30-35) 예루살렘 교회에서 내려온 이들이 성도들을 모아 회의를 열고 편지를 전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서신을 받았고 유다와 실라를 통한 격려와 권면을 기쁘게 받아드렸습니다. 바리새파 출신 기독교인들로부터 시작된 영적인 어둠, 혼란, 다툼, 분쟁, 반목이 기쁨으로 끝났습니다. 교회 분열의 위기는 오히려 이방 선교에 탄력을 주었습니다. 예루살렘 회의 이후 이방 선교의 문은 더욱 크게 열립니다.
적용: 위기는 하나님의 뜻이 내 계획과는 다른 방식으로 펼쳐질 기회입니다. 당신은 위기를 기회로 보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까? 당신은 위기가 왔을 때 믿음으로 반응하고 있습니까?
어떤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양쪽의 의견을 주의 깊게 다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해결책을 찾되 우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나타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주장만 옳다가 아니라, 내 주장도 옳고 상대방의 주장도 옳다는 쪽에서 먼저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특히 예루살렘 교회는 이토록 주의 깊게 서로의 의견을 나누도록 하면서도 사도들의 대표인 베드로와 평신도의 대표인 야고보로 하여금 그 해결을 위한 의견을 나누도록 하였을 뿐 거기에 대해서 옳다 그르다 시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결론에 모두가 흔쾌히 따르는 것을 봅니다.
< 설 교 >
갈등을 넘어
서명성 목사
반상의 질서가 엄격하던 19세기말에 천민은 양반들과 한자리에 앉을 수 없었습니다. 천민 중의 천민으로 불리던 백정의 경우 더욱 심했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어른 대접을 받지 못했고 호적조차 없어 백성대접도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백정들끼리 집단으로 촌을 이루며 살았는데 양반들에게 이런 백정 마을 사람들은 접근해서는 안 될 경계 대상이었습니다. 1895년 무렵, 지금의 관훈동 부근인 관자골에 있던 백정 마을에 박성춘이라는 백정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맸는데 미북장로회 선교사 무어가 그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운영하던 예수교 학당에 다니고 있던 그 아들 봉출이를 통해 사정을 알게 된 무어는 제중원 선교사 에비슨을 데리고 관자골을 찾아가 박성춘을 살려냈습니다. 박성춘은 은혜를 갚는 심정으로 무어 선교사가 사역하던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양반 마을인 곤당골(지금의 소공동)에 있던 양반 교회였습니다. 그런 교회에 백정이 나왔으니 문제가 터질 것은 당연했습니다. 양반 교인들은 박성춘을 다른 교회에 보낼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무어 선교사는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며 그들의 요구를 일축했고 결국 양반 교인들은 홍문수골(지금의 광교 자리)에 따로 교회를 세우고 나갔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목격한 박성춘은 충격도 받았지만 오기도 생겼습니다. 양반들이 떠난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서울 근교 백정 마을을 찾아다니며 전도를 하였습니다. “백정으로 태어나 사람대접도 받지 못하고 살아온 우리를 사람대접 해주는 종교가 왔다.” 박성춘의 메시지는 그와 같은 한을 가지고 살아가던 백정들에게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홍문수골로 나간 양반들은 이런 곤당골 교회를 보고 첩년들과 백정놈들이 다니는 교회라 하여 무시했지만 곤당골교회는 계속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3년 후 교회를 합치자는 홍문수골 교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지금의 인사동인 탑골에 새 예배당을 마련하였으니 지금의 승동교회의 출발입니다. 세습되어 내려오던 노비제의 풍습은 갑오경장을 계기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던 것이 계급의식입니다. 곧 죽어도 나는 양반, 너는 상놈이라는 구분입니다. 양반이라는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 제도에 적응도 느리고 없는 형편에 자존심은 있어 체면을 차리느라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제 막 시작된 교회에 양반과 상놈이 함께 예배를 드릴 때 이를 불편하게 여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혼란과 대립, 진통을 거친 후에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은 선각자들을 통하여 중심으로 신분과 지위를 구분하지 않는 전통이 세워졌습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거리는 한 뼘밖에 되지 않지만 머리의 생각이 가슴에 와 닿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오랜 전통에 사로잡힌 사람이 새로운 사상, 새로운 체험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일 만큼 겸손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교회 안의 갈등도 유대인들이 가진 고정관념이 바뀌지 않아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기도하는 무리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은 그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모이기를 힘썼고 배우기를 힘썼고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필요한 것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놀랍게 변화된 삶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들을 인하여 예루살렘에 믿는 자가 많아졌습니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할례는 믿음의 세례로 대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징표가 할례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은혜에 감사하기보다 할례 자체가 유대인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특권의식을 나타내는 표시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를 믿게 된 상황에서도 할례 = 구원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은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안디옥에 온 유대주의자들은 그런 생각을 가진 그룹을 대변합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교리 상의 문제로 안디옥 교회 안에 갈등이 생기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소집됩니다. 열띤 논쟁도 있었고 자칫하면 엉뚱한 결론이 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간섭하심과 영적인 안목을 가진 리더들의 발언을 통하여 아름다운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갈등을 통해서도 복음의 진보를 이루시는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안디옥 교회의 갈등
바울과 바나바가 일차 선교여행을 다녀온 후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보고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바보 성에서 바예수가 대적하다가 눈이 멀게 된 사건, 비시디아 안디옥이나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쫓겨난 사건,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을 주님의 능력으로 일으킨 사건, 유대인의 선동을 받은 무리들이 던진 돌에 맞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나 계속 복음을 전하게 된 사건 등등 그들의 선교보고를 들으면서 안디옥 교인들은 마음이 뜨거워지고 기쁨이 충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유대주의자 몇 명이 안디옥에 와서 예수님을 믿게 된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교회 전체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바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유대에서 온 사람들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기에 교회가 시끄러웠습니다. 갈등의 상황에서 안디옥 교회는 적당히 타협하거나 대립하면서 분열하지 않고 이 문제를 예루살렘 교회에 의뢰하기로 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교우들 가운데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바울 일행은 예루살렘까지 가면서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 세운 베니게와 사마리아 교회들을 돌보았습니다. 방문하는 교회마다 구브로와 소아시아 지방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나누며 그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예루살렘 공회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 교인들과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바울 일행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행하신 일들을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선교보고를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일부 바리새파 출신 교인들은 이방인 신자들도 자기들과 같이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 민감한 문제를 다루려고 모였습니다. 이 회의를 ‘예루살렘 회의’또는‘예루살렘 공회'라고 부릅니다. 이 회의는 이방인 신자들을 유대인 신자들과 같은 지체로 인정해야 할지 논의하기 위해 소집한 모임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공회의 구성원은 아니었지만 증인 자격으로 참석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의견과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이방인들이라 할지라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의견을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습니다.
1. 베드로의 변론
한참 논쟁을 벌인 후 베드로가 일어나서 발언합니다. 베드로 역시 유대교 안에서 지내왔기에 처음부터 이방인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셨고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말씀을 전할 때 고넬료와 그의 집에 모인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본 환상이 단순히 먹는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계획과 관련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있었다는 사실이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알려지자 이방인들과 함께 있었다고 하여 추궁을 당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며 담대하게 말하자 예루살렘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다고 말했습니다(행 11:17-18). 베드로는 하나님이 자기를 선택하셔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간치 않으시고 성령을 부어주시고 죄 사함의 은혜 주신 것을 언급합니다. 따라서 율법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고, 이방 성도들에게 멍에를 씌우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진리를 선포합니다. 이어서 회중은 하나님께서 바나바와 바울을 통하여 이방인들 가운데서 행하신 여러 가지 기사와 표적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그들의 간증은 베드로의 변론에 더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2. 야고보의 제안
베드로의 변론과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보고를 들으면서 두 의견이 팽팽하던 회의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분위기로 흐릅니다. 이때 야고보가 발언합니다. 그는 요한의 형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하였으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계기로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있게 되었고 마가의 어머니 다락방에서 기도할 때도 함께 있으면서 성령의 부어주심을 경험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야고보가 베드로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자연스럽게 부상하였습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취하시려고 이방 사람들을 처음으로 돌보셨다고 하는 베드로의 발언을 지지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 하며 고통 받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을 돌아보신 것처럼 이제 하나님의 때가 되어 이방인들을 돌보셔서 자기 백성을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백성으로 번역된 'laos'라는 단어는 원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가리키던 단어인데 야고보가 이방인에게 처음으로 사용합니다. 이방인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것을 구약 예언의 성취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모스 9:11-12절을 인용합니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방인의 구원 문제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획 속에 있었고 때가 되니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주께 돌아오는 이방인들에게 율법의 의무를 지워서 괴롭게 하지 말고 단지 몇 가지 즉, 우상에 드려진 제물, 음행, 목매어 죽인 짐승의 고기, 피는 멀리 하도록 권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합니다. 야고보가 제안한 규정들은 이미 유대인들의 삶에서 오랫동안 지켜온 관습이기에 이 최소한의 규정을 이방인 신자들이 지킨다면 유대인 신자들과의 교제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3. 공회의 결의
예루살렘 공회는 야고보의 제안을 따르기로 결의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을 공문으로만 보낼 수도 있었지만 교회가 인정한 사람들을 선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안디옥 교회에 가서 공회의 내용을 설명하도록 배려를 합니다. 그래서 그 모든 내용을 담은 공식 서한과 함께 예루살렘 공회의 의견을 전할 대변자로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를 파송하기로 가결합니다. 공문의 내용으로부터 세 가지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1) 예루살렘 공회는 사도적 권위를 가졌음에도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교회의 연합과 일치 그리고 화평을 이루기 위해 포용과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공문은 “사도와 장로가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 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예루살렘 교회 대표자들이 이방인 신자들을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형제로 여기고 있다는 뜻으로, 모교회로서 권위를 내세우거나 우월감을 품지 않고 그들을 포용합니다. 그리고 이방인 신자들이 피해야 할 것 4가지를 언급할 때도 명령하거나 당위성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요긴한 것들’로 표현하고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라고 말함으로써 자발적인 순종을 권합니다. 이 요구는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교제와 연합 차원에서 제안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의 덕을 세우며 함께 세워져가기 위하여 서로 양보하고 존중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거북하게 여겨질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2)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 가운데 몇몇 사람이 안디옥 교회에 가서, 지도자들이 시키지 않은 여러 말로 안디옥 교인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마음을 어지럽게 한 것을 언급하면서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할례를 주장하던 자들에게 그런 말을 할 권한을 준 일이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할례를 주장하는 것은 교회의 공인된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그릇된 가르침이 침투하여 문제가 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어디서 개인적으로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 목회자와 먼저 상의하지 않고 다른 교인들에게 교재나 설교 tape를 나누어주거나 같이 공부하는 것이 때로 위험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가르침 가운데 이단적인 요소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성령과 우리는” 하면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성령의 인도 아래 결정했음을 분명히 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에 모든 결정이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공회에서 결정된 사항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 참석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회의에서는 안건을 토론한 후에 다수결로 결정하지만 가능하면 기도와 충분한 토의를 거쳐 하나의 결론으로 이끄는 것이 덕스럽습니다.
예루살렘 공회의 의의
한동안 혼란 가운데 있었던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공회가 보낸 편지를 읽고 마음의 부담을 떨쳐 버리고 기쁨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공회의 대변인으로 파송된 유다와 실라도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 큰 유익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믿음 안에서 든든히 서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큰 위기를 극복하고 안정과 기쁨을 되찾은 안디옥 교회는 바울, 바나바와 함께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집중합니다. 교회가 맞닥뜨린 위기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지혜롭게 극복할 때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더욱 집중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공회는 선교현장에서 일어난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소집된 모임이었지만 이 모임이 가지는 역사적인 의미는 매우 큽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고 할례나 모세 율법이 아니라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만이 구원과 교회의 근거라는 것을 확인한 공식적인 회의였습니다. 강한 유대교적 배경에서 출발한 교회였기에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대한 고정 관념을 깨뜨리기가 쉽지 않았고 또한 변화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고 함께 하나님을 섬기면서 할례를 받고 신자가 된 사람들이 편견, 이론, 관습, 그리고 이와 연관된 신앙 감정을 하루아침에 모두 버리고 자신들이 철저히 무시하던 이방인과 태연히 한 자리에 앉아 음식을 나누고 복음을 이야기 하며 신앙의 감정을 나누거나 같은 예배에 참석한다는 것이 실제로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숨 가쁘게 펼쳐지는 과도기에 살면서 한편으로는 옛 상황을 이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구속 상황에 적용하기 위한 과정이 그들에게 필요했습니다.
혼란과 대립, 논쟁은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중심의 안디옥 교회가 하나님 앞에 한 교회로 서는데 필요했던 과정이었습니다. 유대인에서 개종한 신자들과 비유대인으로서 믿음의 길에 들어선 이방인 신자들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고 할례나 모세 율법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이 구원과 교회의 근거라는 것을 확인한 이 회의 이후 사도행전은 더 이상 ‘사도’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는 사도의 직무, 즉 교회의 기초를 놓는 작업이 완수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이제는 모두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한 복음’이 있을 뿐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함께 이방인들도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면 기독교는 그저 유대교의 한 분파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지켜야 하고 절기를 지켜야 했습니다. 논쟁, 대립, 갈등은 있었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의 구원에 관한 일치된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이제 은혜의 복음이 유대교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서 인종과 종족을 초월하는 본격적인 이방 선교가 시작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공회는 회의의 결의 사항이 교회 역사상 최초의 공문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있어 제2차 선교여행을 떠남으로써 복음이 소아시아에서부터 유럽까지 확산되며 선교의 다변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 교회 안의 갈등을 최소화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공동체가 하나 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다보니 견해차로 인하여 갈등이나 논쟁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자기의 주장만 옳다고 고집을 피우거나, 몇 사람의 주장으로 소수의 의견을 묵살하고 그냥 넘어가거나, 혹은 자기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자기주장과 다른 사람들을 은근히 비방하며 험담하는 것은 바른 해결방법이 아닙니다. 갈등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감정대립을 보이거나 상대방을 적대시하여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 이기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타난 갈등과 이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초대교회의 모습은 저희에게 도전이 됩니다. 그들이 보여준 해결방법은 영적이면서도 상식적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당면한 문제를 말씀 안에서 성숙하게 토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교회의 지체들이 함께 기도하며 의견을 나누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해야 합니다. 주목되는 것은 교회 내부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공개적으로 토의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회중의 의견을 하나로 수렴한 점입니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시는 영인지라 하나님의 성령에 인도함을 받는 교회는 다양성 속에서도 하나됨을 추구해야 합니다. 기도가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하고 대화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의 모습을 보이며 다른 형제나 자매들의 유익을 구해야 합니다.
2. 율법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를 처음 믿을 때는 열정적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섬기지만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처음 열정은 식고 형식과 관습과 문자적인 규율에 매여 역동적인 신앙과 삶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한편으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를 부르짖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율법주의 경향이나 그로 말미암아 인정을 받으려는 공로주의에 알게 모르게 젖게 됩니다. 예배 참석하고 헌금을 드리고 봉사하는 것이 자발적인 믿음의 표현이 되어야지 단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열심이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지만 자칫하면 무엇을 했느냐 안했느냐는 외형적인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신앙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바른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자세로 살아가는 헌신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시려는데 때로 우리의 영적 안목이 부족하거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볼 것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거나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분별하는 영적인 민감함, 하나님의 뜻이다 싶으면 담대하게 실천하는 느헤미야와 같은 균형 있는 신앙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사도행전 15장에 나타난 예루살렘 공회의 모습은 우리에게 귀한 도전을 제공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말은,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면서 새로운 차원에서 전적인 헌신을 요구합니다.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아름다운 사귐을 통하여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를 이룰 뿐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뜻을 이루어드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
행 15:22-26 / 양향모 목사
예루살렘 총회를 마치고 총회장격인 야고보가 판결문을 낭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판결문을 편지에 기록하여 이방인의 교회에 보내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 편지를 가지고 갈 사람을 뽑았는데 바사바라고 하는 유다라는 사람과 실라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을 바나바와 바울이 다시 돌아갈 때 함께 보내기로 했습니다.
여러분께서 이미 살펴보신 대로 초대교회 최초의 총회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의 총회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 총회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가? 예수님을 믿어도 할례를 받거나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이런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중요한 회의였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초대교회 총회의 중요한 결정사항이었고 우리가 배운 로마서나 다른 서신서들의 핵심적인 주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후일 종교 개혁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부르짖는 핵심구호였습니다.
이러한 중요한 사항을 전달함에 있어서 누구를 보내는가도 중요하고 어떻게 전달하는가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일을 감당할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을 뽑아서 보냈고 결정사항들을 문서화해서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는 예루살렘 총회에 참석한 사람들과 그들을 대표해서 서신서를 가지고 갈 사람들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를 살펴보면서 그들이 가지고 가는 서신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본문 22-23절에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예루살렘 총회에 참석한 교회의 구성원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구성원은 사도, 장로, 교회, 인도자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제자를 말하고 장로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즉 성도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인도자는 어떤 직분이라기보다는 앞장서서 일하는 지도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 특별하게 살펴볼 것은 이들이 모두가 서로를 형제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디옥에 보내기로 선택한 인도자인 바사바와 실라도 형제 중에 뽑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뽑아서 보내는 사도와 장로들도 형제라고 했고 성도가 된 이방인들도 형제들이라고 했습니다.
형제라는 말은 원래 한 부모님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맺어지는 사이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관계이고 사람들이 갈라놓을 수 없는 사이가 형제지간입니다.
형제간에 서로 사랑하며 도우며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형제간에 잘 해야 한다. 형제간에 서로 사랑해야 한다. 이런 교훈이 별로 없습니다.
잠언에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잠 17:17)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친구는 변함이 없이 서로 사랑해야 하고 형제는 위급할 때 서로 돕기 위해서 있는 사이라는 것입니다. 형제는 변함없이 서로 사랑하는 것에 더해서 위급할 때 자기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고 함께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요즘은 형제지간에 우애 있게 지내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이제는 사촌이 아니라 형제가 논을 사도 배가 아픈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형제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서로 피를 나눈 사이이고 제일 가까운 사이이고 어려울 때 제일 먼저 달려와야 하는 사람입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형제라는 말을 더 넓은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이방인들과 구별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서의 형제지간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민족의식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오늘 본문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형제자매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도가 된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형제자매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도 육신의 형제자매 못지않게 아주 중요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육신의 형제자매보다 더 가까운 형제자매들이 되었습니다. 육신의 형제자매보다 더 사랑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더 힘껏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 교회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육신의 형제자매보다 하나님 안에서 형제자매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5)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호칭을 장로님 집사님 보다 형제자매라는 호칭을 더 잘 쓰는 교회도 있습니다. 어떤 이단성이 있는 교회에서는 아예 목사장로 호칭도 없애고 모두들 형님 동생 오빠로 부른다고 합니다.
물질도 네 것 내 것 없이 서로 통용하고 목사님이 돈 벌어오면 장로님이 쓰고 장로님이 돈 벌어오면 집사님이 쓰고 누가 돈을 벌어 오든지 서로 나누어 쓰면서 산다고 합니다.
우리도 한번 그래볼까요? 어차피 우리가 다 천국에서 같이 살 사이인데 돈 벌어서 같이 쓰면서 살아보면 어떨까요? 그렇게 하면 천국 같은 좋은 세상이 될 것 같은데 문제는 그런 좋은 제도를 만든다고 해도 우리 인간이 타락한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용이 없습니다.
내일부터 그렇게 하자고 약속하면 모든 사람들이 가서 돈 벌어올 생각은 하지 않고 놀고 있다가 남이 벌어 온 돈 쓰려고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 벌어오면 다른 사람이 다 쓸 텐데 고생하면서 일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그래서 교회의 형제들은 그렇게 서로 나누는 형제가 아니라 각기 세상에서 살아가되 신앙적인 문제에 있어서 서로 도와주는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어려움에 처한 형제자매가 있으면 물질적으로도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잘 하도록 도와주는 사이가 교회 안에 있는 형제자매 사이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생김생김도 서로 다르고 학벌의 차이 빈부의 차이도 있고 비교적 착한 사람도 있는가 하면 좀 까칠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고 한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한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신앙이 좀 연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건강상으로 여러 가지 형편에 연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연약한 사람을 우리는 더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연약한 사람들을 더 애처로운 마음으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에도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도 모든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서 오히려 더 연약한 사람을 보호하려고 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본문 24절에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과거에는 짐승처럼 생각했던 이방인들이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형제들이 주안에서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안디옥교회에 가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을 괴롭히고 혼란에 빠지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잘못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서 다시 평안함을 누리며 혼란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편지를 써서 사람들 편에 보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은 거짓 선생들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시키지도 않은 말을 하면서 성도들을 괴롭히고 혼란에 빠뜨립니다.
똑바로 살아야 한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 예수님 믿는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천국만 바라보고 사는 것은 바보다. 세상에서 복도 받고 성공해야 한다. 이렇게 가르치는 거짓선생들이 교회에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성도들이 이런 거짓 선생들의 잘못된 주장에 현혹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런 사이비들에게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 교회의 의무입니다. 이런 혼란에 빠지지 않고 참된 평안을 누리게 하는 것이 형제사랑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의 문제점은 교회가 장사꾼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에게 하기 위해서 목 좋은 곳에 큰 교회당을 짓고 모인 사람들에게 많은 헌금을 하게하고 이익을 남기려고 하는 사업가들처럼 교회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눈에는 교인들이 장사해주는 손님처럼 보일 것입니다. 손님들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서 온갖 거짓선전들을 다하고 온갖 그럴듯한 프로그램을 하면서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그런 장사꾼들의 특징은 장점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나쁜 것 불리한 것은 이야기하지 않고 우선 좋은 것만 이야기해서 사람들을 속입니다. 그런 듣기 좋은 이야기에 속지 않고 진리의 말씀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말씀을 가지고 설교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놓고 그 해석을 자기 유익한대로 하는 사람들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장사꾼보다 더한 사람은 사기꾼입니다. 사기꾼은 거짓말로 시작을 합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처럼 꾸밉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기를 치는 이단들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
본문 25절에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된 것처럼 이방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도 형제로 인정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이 이상한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성경의 진리를 확인하여 편지에 써서 사람들 편에 보낸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을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보낸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무슨 증명서를 가지고 가는 것도 아니고 미리 아는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보냄으로 함께 간 사람들이 거짓선생이 아니고 예루살렘교회에서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서 바나바와 바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이 바나바와 바울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라고 평가했고 그런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전적으로 신임한다고 하면서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진리의 말씀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믿고 따라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복음과 반대되는 이야기들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라고 할지라도 진리를 바르게 구별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마다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하니까 누가 하는 말이 진리인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진리를 구별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그 진리를 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조심을 할 것은 연기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를 전하는 사람이 신실하지 못하면 그 사람이 전하는 복음은 가짜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익이 없다고 해도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자기희생과 헌신이 없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이익을 위해서 거짓 복음을 전하기 쉽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렇게 전해진 것은 이 복음을 위해서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바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애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거짓 복음을 전할 동안 오직 바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헌신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복음을 우리가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순교자의 후손으로 목회를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저도 그런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모든 것을 희생하고 헌신하면서라도 이 복음을 바르게 전하고 싶은 열정이 제 가슴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큰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함께 신앙생활 하는 여러분에게도 주신 큰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생명까지 아끼지 않았던 신앙의 선배들을 뒤따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생명까지 아끼지 않는 멋진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한 형제자매들입니다. 우리 서로가 끝까지 이 믿음을 지키며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힘을 합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거짓선생이나 이단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혼란스러워하지 않고 바른 진리 안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이 전한 이 복음을 우리가 믿고 따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고 사는 신실한 성도님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진리와 그릇
사도행전 15:22-29 / 최응희 목사
처음교회 시대에 안디옥교회는 참 대단한 교회였습니다. 이름없는 교우들에 의해서 교회가 개척되었고, 그 곳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최초로 이방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였습니다. 참 아름다운 이름이 '안디옥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안디옥교회가 또 다시 대단한 일의 시발점이 되고 있습니다. 이방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유대교의 전통을 지켜야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였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이방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인데 여기에 유대로부터 몇 사람들이 와서 율법의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방인이 기독교인이 될 수는 있지만 기독교인이 된 그 이방인은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먹는 것과 금지하는 것에 대한 율법의 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안디옥교회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고 의견이 엇갈리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유대인의 풍습을 따라야 하는 것인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유대인이 되는 것인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유대인들의 풍습과 전통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안디옥교회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사람을 파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 문제를 의논하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할례나 음식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문제는 복음의 핵심과 문화를 구별하는 아주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도 이 문제를 단순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 행동이나 음식이나 옷을 입는 것이나, 생활습관도 유대인과 같아야 된다는 것으로 여기는 아주 보수적인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지, 예수님의 살던 곳의 모습과 생활습관을 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최초의 교회 회의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믿음생활만 잘 하면 되지 무슨 교회조직이며 교단이 필요한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성경만 열심히 믿으면 되지 무슨 신학이 필요하며 해석이 분분한가 라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초대교회도 이런 문제들이 발생할 때, 모여서 의논을 하고 회의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에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보는 각도와 입장에 따라서 다르게 들리기도 하고 해석되기도 하기 때문에 신학적인 훈련도 필요한 것입니다. 이단들 치고 성경을 들이대지 않는 이단이 없습니다. 모두 자신들이 성경을 바로 해석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성경구절을 구구절절히 잘 꿰맞춘다고 진리가 아닙니다. 대체로 이단들이 이런 글자 맞추기는 잘하고, 여기에 많은 순진한 교인들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해석과 바른 신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도 그냥 성경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이단들의 도전과 잘못된 해석들의 암초들을 헤치고 걸러지고 걸러져서 우리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그런 과정 과정들 속에 항상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바른 선택을 하게 하시고, 바른 길을 가게 하시며, 바른 신앙고백을 갖도록 하신 것입니다.
본문도 잘 들여다보면 참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안디옥교회의 질문에 대해서 성령은 베드로와 야고보를 통해서 답변을 주셨습니다(사도행전15:28). 그 결론은 네 가지를 금하고 다른 모든 것들은 자신들의 습관과 풍습을 따라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① 우상의 제물: 당시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들이 시장에서 판매되었습니다. 이것을 먹는 것은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금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바울사도는 이 문제를 양심에 맡기는 것으로 언급하였습니다.(고전8:1-13,10:27, 갈2:11-14)
② 음행: 당시 이방지역에서는 신전에서 우상을 섬기는 축제로서 문란한 음행이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금한 것입니다.
③ 목매어 죽인 것: 이것은 피와 관계된 것으로 고기를 피채 먹는 것을 금한 것입니다.
④ 피: 이방인들은 그들의 축제시 자주 피를 마셨으므로 이를 금하였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피는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율법에 금하고 있는 사항입니다(레3:17, 17:10-14, 신12:16, 23).
이런 결정 그 자체 보다 중요한 것은 이 결정이 복음의 핵심과 문화를 구별했다는 것입니다. 핵심적인 신앙고백과 사는 방법과를 구별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은 두 가지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첫째는 이방 선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복음의 핵심이 분명하여 졌습니다. 유대적이거나, 율법적인 것이 얽매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따라서 외형적인 것, 민족적인 관습의 차이, 사회적 풍습의 차이를 뛰어넘어 복음이 세계로 전파될 기틀이 마련된 것입니다.
둘째는 유대교와 분명한 결별이 되어 핍박이 더욱 거세게 되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율법적인 굴레를 벗지 못한 유대인들이 다수 복음에 참여하였으나 이러한 결정으로 다수의 율법주의적인 유대인들로 하여금 영구적으로 적대적인 위치에 서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민족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다수의 유대인들에 의해 교회가 율법에 위반되는 모임으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더 큰 핍박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이 바로 교회를 세계로 뻗어나가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이 바로 기독교 정신인 것입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으나, 그 진리를 담는 그릇은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정신입니다. 진리와 진리를 담는 그릇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릇이 진리는 아닙니다. 복음에 구원이 있는 것이지 어떤 옷을 입느냐, 어떤 음식을 먹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이유에서 바울사도는 나중에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도 믿음을 따라 자유롭게 선택하라고 고린도교회와 로마교회에 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러한 초대교회의 정신을 이어 받아야 합니다. 성도가 스스로 엄격한 규칙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의 규칙을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적용해서는 안됩니다. 스스로에게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관용적인 사람이 복음적인 사람입니다. 또한 진리의 본질에 있어서는 추호의 양보도 있을 수 없는 굳은 신앙과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 그 방법이나 주변의 것들에 있어서는 언제나 화평의 길을 따르는 것, 자율의 길을 따르는 것이 복음적인 방법입니다. 고백은 보수적으로 하되, 행동은 진보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할 신앙고백이 무엇입니까? 사도신경도 있고, 감리교 교리적 선언도 있습니다만, 아주 핵심적인 것만 요약하면 세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영원한 하나님 나라. 이 세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가지에 있어서는 추호의 양보나 흔들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행동이나 관습이나 방법에 대해서는 언제나 화합, 관용, 개방, 자유함을 이루는 것이 기독교 정신입니다. 이것은 교단적으로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두 영역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삶의 영역과 생활의 영역입니다. 이 두 가지를 혼돈하지 말아야 참 믿음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생활의 영역은 언제나 바뀔 수 있습니다. 무엇을 먹는 것, 무엇을 입는 것, 어디를 가는 것, 어떤 직업을 갖는 것, 이런 것들이 생활의 영역입니다. 직접 우리 생활을 드러내는 눈에 보이는 영역입니다. 그러나 삶의 영역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것, 기뻐하는 것, 감사하는 것, 행복한 것, 등입니다. 생활의 영역은 언제나 변합니다. 발전합니다. 달라집니다. 예전에 했던 생활의 모습을 오늘 그대로 하지 않습니다. 말타고 다니던 길, 이제는 차를 타고 다닙니다. 상투틀고 쪽지던 머리, 이제는 하이칼라하고, 파마합니다. 손으로 하던 빨래, 이제는 기계가 다 합니다. 생활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삶은 바뀌지 않습니다. 말타고 다닐 때에도 사랑은 귀한 것이었듯이 비행기 타고 다니는 지금도 사랑은 최고의 가치입니다. 상투 틀 때도 헌신과 나눔이 귀중한 가치였듯이 지금 하이칼라 시대에도 헌신과 나눔은 더 고귀한 가치입니다. 생활이 바뀌었는데도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삶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생활은 눈에 보이는 것이기에 바뀔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삶의 영역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은 어디에 속한 것일까요? 믿음은 보이지 않는 부분, 삶의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믿음을 눈에 보이는 생활의 영역에다 적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말씀이 모순되는 듯이 보일 때도 있고, 말씀을 잘 적용하지 못하는 때도 생기는 것입니다. 생활의 영역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변하듯이 항상 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하는 생활의 영역에 신앙을 적용하면 신앙자체가 변하는 것이 되어서 모순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신앙은 보이지 않지만 변하지 않는 영역과 함께 가야 합니다. 삶의 영역에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 생활과 삶의 영역을 혼돈하여 그들의 생활을 이방인들의 삶에 강요하였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을 예배, 하나님을 찬양,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이지, 무슨 음식을 먹느냐, 어떤 옷을 입느냐, 어떤 머리를 하느냐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마음의 문제, 영혼의 문제이지, 겉모양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영혼은 엉뚱하면서 겉모양만 그럴 듯 하거나, 형식은 잘 갖추었으나 하나님을 향한 삶이 온전치 못할 때, 주님은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이요, 겉모양만 무성한 나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처음교회 성도들도 이 문제를 가지고 심각하게 고민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바르게 인도하셨습니다. 진리는 분명하게 하되, 그 진리를 담는 그릇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백은 확실하게, 생활에는 관용과 화합을 이루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오늘도 바른 믿음의 생활과 삶을 이루어 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서금석 목사
신앙생활하면서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 석연치 않은 모습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의 분열상입니다. 캐토릭과 개신교의 분열은 물론 개신교안에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파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제가 목사이지만 감리교를 제외하고는 도대체 종파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알지를 못합니다. 제가 다른 교단을 비난할 의도는 추호도 없지만 어떤 교단은 도대체 같은 이름가진 교단이 얼마나 되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같은 교단의 한 교회 안에서도 분열의 아픔이 있는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교회가 하나 더 생긴다고 좋아할 지 모르겠지만 한교회가 두 교회로 나뉘어지는 아픔도 많습니다. 좋은 의미로 분가(分家)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분열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조금만 마음을 열고 보면 극복 못할 것도 없습니다. 모두다 교역자와 성도들이 자기 아집과 이익에만 사로잡힌 탓 아닙니까? 이교단, 저 교단이 믿는 하나님, 이 교회와 갈라져 나간 교회가 믿는 예수님이 각각 다른 분이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이 분열의 모습은 선교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모습은 교회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을 불신자들에게 심어줌으로써 전도에 악영향을 가져오게 됩니다.
"너희끼리 머리 터지게 싸우면서 우리보고 믿으라 하느냐? 싸움구경이나 하라고?"
교회 내의 일치, 교회와 교회와의 일치, 교단간의 일치는 선교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초대교회는 그러한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간에 분열의 위기가 있었지만 슬기롭게 극복하여 '하나의 교회'가 되는 전통을 이미 우리에게 전해 주었지 않습니까?
오늘 성경본문은 사도행전 15장의 제1회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론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은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단지 야고보 사도의 권면대로 29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먹는 것은 조심하도록 당부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23절 "그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에서부터 29절에 하였더라 바로 앞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까지는 야고보가 쓴 편지 내용입니다. 편지를 누구에게 보냈습니까? 23절에 보면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보냈습니다. 누구 편에 이 편지를 보냈습니까? 25-27절을 살펴보면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유다와 실라를 통해 보냈습니다. 콩나물 사러 보내는 사람과 약국에 약 사러 심부름 보내는 사람이 다르지요?중요한 임무일수록 신뢰받는 사람에게 맡기지요.
편지와 사람을 함께 보냈다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편지만 보냈다면 어찌되었을까요? 글로 쓴다는 것은 분명하기는 합니다. 글로 쓰여진 것은 후에 딴소리를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10%, 어떤 사람은 50%밖에 표현할수 없다고 합니다. 만일 편지 없이 사람만 보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말이란 한사람 건널때마다 내용이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사람 일렬로 세워놓고 말 전하기 하면 끝이 많이 달라지지요? 그러므로 편지(글)와 함께 사람을 같이 보낸다는 것은 당시로 서는 가장 완벽한 방법이었습니다.
안디옥에 가서 편지를 전했더니 듣고 기뻐했습니다. 유다와 실라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교회에서 열심히 말씀가르치고 전파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이러한 내용 속에서 몇 가지 문제해결의 원칙을 찾아보면서 교훈과 신앙생활의 방향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1. 일치 가결했습니다.
"25-26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一致)가결(可決)하였노라"
15장 전체를 보면 회의 모습과 내용이 있습니다. 7절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변론도 많았습니다. 베드로의 이야기, 바나바와 바울의 보고도 있었고 야고보의 권면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여기서 다루는 문제는 단순한 ○. × 형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대단한 논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일치가결하였노라"했습니다. 이 회의 오래했을 것입니다. 오래하다 보니까 큰 소리도 있었을 것이고 이런 저런 의견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은 "일치가결하였노라"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일치가결을 위해서는 상반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한 발작씩 물러섰다는 것입니다.
한쪽 주장만 받아들여진다면 반대쪽에서 일치가결해 주겠습니까? 100%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사람이 있다면 일치가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일치가결을 위해서는 한발자국씩 물러서야 합니다. 나라고 가정이고 사회고 하나가 되려면 서로가 양보해야 합니다. 양보하는 사람을 우리는 '모자르다' '바보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의도 사람들이 들어야 합니다.
또 하나 '일치가결하였노라' 이 이야기 뒤에는 회의 결과에 대하여 모두 승복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끝난 결과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반대해서 일이 그리되었다든지 두고 보자든지 말이 많으면 문제입니다. 회의과정에서는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겠지만 결과에는 모두 승복해야 합니다. 우리교회 기획위원회를 제가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점입니다. 회의과정에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을 수 있지만 결정된 다음에는 뒷소리가 없어요. 뒷소리 많으면 잘못된 것, 평균이하의 집단입니다. 교회건축하면서 무리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충분한 회의를 통해 결정되고 결정된 것은 승복하는 자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치가결의 결정'은 단순한 인간생각의 반영이 아니었습니다.
"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성령과 우리는"이란 말씀이 중요합니다. 일치가결한 것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성령과 함께 일치가결했다는 말씀입니다. 동의하고 합의하는데 있어서 열심히 함께 기도했고, 성령께서 함께 하셨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뜻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는 개인의 주장이나 의견이 앞서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중심이 되어야지 목회자나 성도의 뜻을 펴는 곳이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여러분. 우리도 배워야겠지요? 일치가결을 위해서는 양보도 있어야 합니다. 일치가결된 뒤에는 뒷소리도 없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도 일치가결은 성령과 함께 되어져야 합니다. 함께 기도하면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순복시키는 신앙적 결단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내 뜻을 이루기 위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한 곳이 아닙니까? 깊이 유념하시고 그대로 행하시며 사시기 바랍니다.
2.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29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29절 후반절 참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앞서 네 가지 멀리 할 것을 말했습니다. -우상의 제물, 피, 목매어 죽인 것, 음행. 그런데 이 네 가지에 대하여 스스로 삼가하면 잘하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합니다.
1. 자발적으로 잘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명령을/말씀을 지킬 때 - 안지키면 벌 받을까봐 벌벌 떨면서 억지로 지키지 말고 자발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참 잘 지켰습니다. 왜 지켰습니까? 복받으려고 지켰습니다. 지켰다고 자랑했습니다. 못지키는 사람을 비난했습니다. 혹시라도 안식일을 지키지 못한 경우에는 벌 받을까봐 벌벌 떨었습니다. 예수님은 뭐라 하셨습니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느냐? 사람이 안식을 위하여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사람에게 안식일을 주셨을까요? 안식일 지키지 않는 사람을 벌 주시려구요? 아니지요? 안식일에 편히 쉬고, 피곤한 영혼이 소생함을 받고 새로운 용기를 얻어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게 하시려고 사람을 위해, 사람의 행복을 위해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감사함으로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지켜야 합니다. 안지키면 벌 받을까봐 지키고, 주일 지키지 않아서 감기가 걸렸네 하는 식으로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도 하나님이 주신 것 감사해서 기쁨으로 드리는 것이지 '십일조 안하면 사업 망할 것이다- 겁이 나서 드리는 식으로 지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알려진 죤 와나메이커(J.Wanamaker)는 후에 체신부 장관까지 했습니다. 체신부 장관 수락의 조건은 주일에 교회에 가서 주일학교 교사를 할 수 있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주일에 교회에 가서 봉사하는 것이 내 본업이고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일하는 것이 부업이다" 사업시작 60년만에 기념하는 자리에서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성공비결이 무엇입니까?" 와나메이커는 간단히 대답했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바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법을 지키지 않으면 벌 받을까봐 겁나서가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 법도대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2. 다른 각도에서 말하면 율법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때로 주일아침 눈을 뜨면 토요일이 아니라 주일이라서 더 부담스럽게 생각되지는 않습니까? 예배 드리면서 설교시간이 길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주일 예배 빠지면 한 주일의 생활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같아 가슴이 불안하고 답답해 질 때도 있지 않습니까? 주일예배가 한 달에 한번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드십니까? 이런 경우는 다 율법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은혜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이 기다려져요. 설교가 기다려져요. 성전에만 들어서면 마음이 열려요. 무슨 말씀을 들어도 내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으로 들으니 신이 나고 기쁘기만 합니다.
남편이니까 내가 말 듣지 남편만 아니라면 쳐다보기나 하겠느냐고 생각하며 사는 아내는 불행합니다. 사랑하니까 주고 싶고 사랑하니까 위해 주는 것이지 남편이기 때문에 위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백성이 되었으면 은혜로 사셔야 합니다. 율법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사시기 바랍니다. 예배에 참석해도 성경을 읽어도 봉사를 해도, 찬양을 해도, 하나님께 감사해서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해야 -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도 감사해서,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것이 성숙한 것이지 축복받으려는 조건으로 드린다면 축복이야 해주시겠지만 하나님께 흥정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흥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감사의 대상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방인 성도들에게 우상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되 그런데 율법처럼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으로 기뻐함으로 행하면 잘 될 것이라고 평안해 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사시기 바랍니다. 해야 되기 때문에 주일이기 때문에 예배드리고, 장로, 권사, 집사이기 때문에 봉사하고, 하라고 하니까 하는 피곤하고 부담스러운 신앙생활에서 생각해 보니까 하나니 은혜가 너무너무 감사해서 감격 속에 예배드리고 뜨거운 기쁨으로 봉사하고 더 드리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헌금드리고 - 이것이 은혜 속에 사는 모습입니다.
오늘 제3차 건축헌금에 대한 광고가 게재되었습니다. 어쩌면 1,2차 헌금도 완납하지 못한 성도들에게는 또 하나의 부담이 되기도 하겠지만, 요즘 제 마음 속에 목사로서 참 무거운 것이 있는데 바로 건축헌금에 관한 것입니다. 건축하면서 평소에 건축헌금 얘기하지 않아도 성도들이 힘껏 해 주니 저는 감사할 따름이지만 그래도 건축이 마무리되어져 가니까 또 헌금이 필요합니다. 다음 주에 자세한 건축현황에 대한 보고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만 하여간 헌금은 해야 합니다. 그런데 헌금하는 자세도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의무감에서 하는 것입니다. 성전건축하는데 나도 당연히 이만큼의 헌금은 해야 한다. - 이런 마음으로 하는 경우입니다. 안하는 것보다는 귀하지만 자세로서는 좀 모자랍니다. 하나는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성전건축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기쁨입니다. 하나님 축복해 주시면 헌금하겠습니다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 주신 하나님 은혜가 너무 커요. 받은바 은혜가 넘쳐요. 그러니까 바치고 싶어요. 많이 바치고 싶어요. 더 바치고 싶어요 - 이것이 은혜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전건축헌금도 은혜로 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는 넘치는 겁니다. 한 식구 한 구좌하라 그러면 꼭 한 구좌만 합니다. 한 가족이 넷이니까 네 구좌 만 합니다. 이건 율법입니다. 은혜는 넘치는 겁니다.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율적으로 은혜로 살라는 말씀 우리 마음에도 새기십시다.
3. 합력하는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35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머물면서 일했는데 두 가지 우리가 관심을 가져봅니다.
하나는 바울과 바나바에게는 함께 일하는 "다수의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구이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일할 수 있을 정도의 소양이 있고 훈련이 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다양한 일군들이 있습니다. 다양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다양한 재주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세우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진정한 일군입니다. 교회는 목회자가 잘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평신도 사역자들이 반드시 꼭 있게 마련입니다. 목회자가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목회자라서 교회 일하기에 좋은 점도 많지만 그러나 목회자이기에 성도들과 갖는 벽과 거리감도 있습니다. 정말 좋은 교회는, 성숙한 교회는 구경꾼이 있는 교회가 아니라 평신도 모두가 자기 역할을 찾아 스스로 감당하는 교회가 성숙한 교회, 좋은 교회입니다.
특별히 좋은 일군은 합력할 줄 아는 일군입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서는 잘하는데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면 갈등을 일으키거나, 경쟁적으로 다툼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한 몸의 많은 지체'라는 성경말씀을 아시지요? 손, 발, 입, 귀가 서로서로 제구실을 다하고 서로서로 세워주면 되는데 그게 안됩니다. 문제가 많지요. 손, 발, 입, 귀가 따로따로 놀면 넘어집니다. 다칩니다. 장애자가 됩니다. 신앙정도도 다르고, 성품도 다르고, 은사가 다르다 하더라도 함께 일 잘하는 사람이 좋은 일군이 아니겠습니까?
안디옥에는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일하는 '다수의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안디옥 교회는 될 수밖에 없는 교회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함께 일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는 교회여야 합니다. 목회자가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많은 일할 수 있는 성도들에게 할 일을 찾아주어 함께 일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장로님들 - 일대일 양육지도자반을 많이 신청하세요. 장로님으로서 새 신자 신앙생활을 위해 양육하는 것보다 보람있는 일 있겟어요?) 목회자와 협력하여 일하는 일군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권사님 이 일 좀 해 주세요' '장로님 이 일 좀 부탁합니다' '집사님 이 일 합시다'할 때 '예' '아멘'만 있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는 되는 교회요 성장하는 교회입니다. 모르면 부족하면 배워서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요 교회 밖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는 하지만 그러나 체계적인 공부도 꼭 필요합니다. 지금 세례교육에서도 꼭 필요한 것 배웁니다. 일대일 양육, 중보기도 학교, 은사교육, 단기성경공부 등 기회있을 때마다 배워야 합니다.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공부와 훈련이 꼭 필요합니다. 교회성장과 함께 꼭 필요한 것이 교육과 훈련입니다. 군인이 많다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훈련중에 땀 한방울이 전쟁터에서 피한방울과 같다고 말합니다. 훈련해야 승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라 하지 않았습니까? 군사가 훈련받지 않으면 용맹스럽게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적 그리스도와 싸워야 하고 세상유혹과 싸워야 하는데 이기기 위해 훈련받아야 지요. 안디옥 교회는 교육과 훈련에 열심이었습니다.
우리교회의 성도들은 기회있을 때마다 열심히 배우고 훈련받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 부지런하게 불신자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특정기간-총동원전도 주일에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도 믿지 않는 식구들에게, 믿지 않는 친지들에게, 직장동료들에게, 이웃에게도 전해야 합니다. 전도해야 내 신앙도 자라고 교회도 성장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가르치며 전하는 많은 평신도 사역자들이 있었기에 교회도 안정되어 성장할 수가 있었습니다.
춘천중앙교회도 '다수의 다른 사람들'-일군이 많은 교회여야 합니다. 목회자가 여러분에게 찾아가 ' 이 일 좀 해 주시겠습니까?' 할 때 거절하지 마시고 더 적극적으로 말씀드리면 기다리지 마세요. '목사님 일거리 좀 주세요,' 적극적이 되세요. 특별히 다른 교회 다닐 때는 일 잘 하다가 가만히 쉬면서 구경만 하는 성도들, 너무 쉬면 근육 무기력증이 생겨 굳어 버립니다. 일하세요. 전도하세요. 봉사하세요. 양육하세요. 안디옥 교회 이야기가 아니라 춘천중앙교회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정리>
● 초대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에 문제가 생겼을 때 회의를 통해 일치가결했습니다. 양보도 할 줄 알아야지요. 하나가 되는 것 - 양보 없이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인간적인 양보만은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심 속에서 결정되었습니다.
● 신앙생활은 스스로,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예배도, 봉사도, 헌금도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은혜로(아멘) 감사해서(아멘) 기쁨으로 드려야 합니다.
● 교회는 교역자와 함께 가르치고 전하는 다수의 일군이 있어야 합니다. 일군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회있을 때 열심히 훈련받으세요. 쓰임 받는 기쁨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전하세요. 복음을 전하세요. 새 천년 새 성전에서 아름다운 교회 거듭나기 위해 기도하면서 은혜로 가르치고 전하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의 성도가 되기 위해 땀 흘려 최선을 다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평안함을 원하노라
김 조 목사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어 참 평안을 주시려고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한 성도의 심령과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세상 것으로는 느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구원의 기쁨과 주의 평안을 받은 성도들이여! 이제 이 평안을 세상에 전하고 보여주는 자 되어 불안과 불신이 가득 찬 이 땅 위에 참 평안을 이루시기 원하여 “평안함을 원하노라”하신 29절 말씀을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할례와 이방선교 문제로 교회내부에서 큰 다툼과 변론으로 예루살렘교회의 첫 회의가 열려 바울과 바나바의 문제를 해결했고 그 결과를 안디옥교회에 공문으로 보내지며 유다와 실라를 통해 안디옥교회에 편지하였으며 “평안함을 원하노라”하셨으니 어떻게 해야 주 안에서 함께 평안을 누릴 수 있게 했을까 생각하며 몇 가지로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기쁨과 위로의 말을 해야 합니다. (24, 30-32절)
언어는 사상의 표현이라고 하며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7) 영원한 복이냐 저주냐 하는 것이 우리의 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24절에 할례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말한 사람들은 예루살렘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보낸 사람도 아니면서 안디옥 교회를 말로 혼란하게 하였고 성도의 “마음을 혹하게”했다는데 이는 마음에 큰 갈등을 주어 심각하게 신앙을 파괴하고 교회 자체를 붕괴하려 했던 것이나 30-32절에 예루살렘의 공적으로 회의의 결과를 문서화했고 이를 유다와 실라를 보내어 읽고 말해줌으로 그 위로한 말을 기뻐했고 믿음을 견고하게 북돋우어줌으로 말로 평안함을 누리게 했습니다. 성도들이여! 우리도 이렇게 위로와 기쁨을 주는 말을 함으로 평안을 누리게 합시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던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마12:36)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거니와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케 하느니라”(잠15:1) 하셨으니 말 한마디로 싸우게도 하고 평화하게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내 속담에도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말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며 많은 사람에게 평안을 주어야 합니다. 거짓말로 남을 속이고 부정적인 말로 의심하게 하고 혼란과 낙심하게 하고 원망하는 말로 감사를 막아버리고 교만한 말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며 궤사한 말로 사람사이를 이간질하고 포악한 말로 불안하게 하고 패역한 말로 두려움을 주며 허망하고 허탄한 말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지혜로운 자의 말은 양악과 같으니라”(엡4:29)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 새긴 은쟁반에 금사과 같으니라(잠25:11). 똑같은 상황에서도 남을 기분 좋게 하며 용기와 힘을 주며 많은 사람에게 유익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못하겠으면 가만이나 있으면 좋겠는데 말하여 시험에 들게 하고 좌절하게 하고 남을 비방하다가 자기 올무에 빠져 넘어지는 자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실한 말(엡4:25) 덕을 세우는 말(엡4:28) 주 예수 이름으로(골3:17) 지혜로운 말(골4:6) 신중하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같이(벧전4:11)하라고 하셨습니다.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다툼을 일으키고 입으로 매를 자청하느니라(잠14:3,18:6)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고 그 입술에 궤휼을 말하지 말라(벧전3:10)고 했습니다. 성도들이여! 민13:과 14:의 가데스바네아 사건을 기억하고 긍정적인 말로 위로와 기쁨을 주며 평안을 누리게 하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일치 가결로 하나 되게 하여야 합니다. (25,26, 31-32)
할례문제와 이방인 선교문제로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던”(2절)고로 최초의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고 사도와 장로들과 온 성도가 모여 상당한 갈등을 겪었으나 사도들의 말을 듣고 결정하였고 이를 안디옥교회에 전하기 위해 공문과 함께 유다와 실라를 보내기를 일치 가결했으니 결정된 일에 모두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문제도 해결했고 평안함을 주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계층의 사람이 있고 자라온 환경과 삶의 조건이 다 다르기 때문에 의견이 대립될 때도 있으나 공적회의에서 결정된 일에 자신의 모든 것 버리고 그 결정대로 하나 되어야 평안이 있습니다. 물론 다수라 할지라도 비진리라면 따를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일제 시에 신사참배를 총회에서 가결한 부끄러움이 있으니 이를 항거하였던 주기철 목사님이나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총회가 결의해도 진리에 어긋난 문제이기에 투쟁했습니다. 그러나 진리 문제가 아니라면 내가 조금 손해보고 깨닫고 따라갈 때에 모두에게 평안함이 있습니다. 내 생각, 사상, 자신의 유익에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시고 신앙 양심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거슬러지지 아니하도록 기도하며 일치되는 곳에 평안이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간 머물며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 받을 때 산 아래에서는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자”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제사했으니 아론은 백성이 악하였기에 그랬다고 변명합니다(출32:21-22) 다수인 비진리 따라 갈 때는 멸망입니다. 그러나 진리 문제가 아니라면 교회 결정 따라 순종하며 일치될 때에 하나님께 영광이요, 평안할 수 있습니다.
3. 남에게 부담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28,29)
“성령과 요긴한 일”이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이것 외에는 너희에게 짐(부담)을 주지 않기로 했다는 것으로 무엇을 함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은 행위 구원으로 사람으로서는 이루어 낼 수 없는 무거운 짐입니다. 그 무거운 죄, 사망의 짐을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짊어져 주셨기에 우리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참 평안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 큰 사랑과 은혜 입어 무거운 짐 벗은 우리가 어떻게 남에게 짐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남에게 부담도지 아니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다만 20,28절에 네 가지 우상제물과 음행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 먹지 말라는 것을 삼가 지켜라 이것도 강압적 명령이 아니라 권면사항으로 우상제물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 먹지 않은 것이 좋겠다는 것인데 바울 사도는 각자 양심에 맡겼습니다.(고전8:, 갈2:) 먹는 것과 구원은 별개이기에 그러나 이를 금하라는 것은 음식보다 우상 숭배로 신앙이 빗나가지 아니하기 위함이요, 음행은 그리스도인은 절대적으로 안 될 일이요,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은 먹지 말라(창9:4, 레17:14)는 것은 생명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레7:11) 이렇게 그리스도인으로 몇 가지만 지켜도 잘 되리라고 부담을 주지 아니하며 평안 누리게 하였듯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사랑을 전하고 나타냄으로 남에게 짐(부담)되지 말고 평안을 주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불신으로 다툼과 전쟁으로 불안한 이 땅에 참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가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는 참 평안을 심어 줄 수 있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그러기에 언제 우리의 입에서 예수그리스도만 높이는 자로 위로와 기쁨의 말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내가 좀 손해 보는 것 같아도 양보하고 이해하여 일치되어 하나 되게 하며 나 때문에 상처나 짐이 되지 아니하도록 배려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평안함을 누리게 하는 성도되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들어내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