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 이광수(1892~1950) 선생은 58년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 시인‧소설가‧수필가‧문학평론가‧번역가‧
기자‧언론가‧독립운동가 등으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큰 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왜군을 찬양하
는 글을 쓰고 징용을 권고하는 등 친일활동을 한 행적으로 인해 좌파들로부터 오로지 민족 반역자로
매도되고 있다. 친일활동과 함께 빼어난 업적도 있는 그대로 평가되어야 한다. 춘원이 남긴 「유정」
등 30여 편의 장편소설, 「이순신」 등 4권의 전기, 「춘원시가집」, 「금강산遊記」, 「돌베개」 등
다수의 수필집, <신생활론> 등 수십 편의 논문, 다수의 번역서 등은 다른 사람이 감히 추종할 수 없
는 위대한 업적이다.
춘원은 평안도 정주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친척 집을 전전하며 자랐다. 어릴 때 상경한
춘원은 야학을 거쳐 왜국에서 5년제 중학교를 나왔다. 귀국한 춘원은 어릴 때 부모가 정혼해둔 까막
눈 백혜순과 혼인했다. 오산학교에 교사로 채용되었지만 학생들에게 강제로 기독교 신앙을 주입시키
라는 재단의 요구를 거부하고 사표를 냈다. 춘원은 22세 때인 1914년 2월 러시아의 바이칼호 인근에
머물면서 자주 바이칼호를 탐방하는 등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편소설 「유정」의 줄거리가 될
체험을 쌓았다. 「유정」의 줄거리는 2018년 9월 우리 카페에 올린 글 <춘원 이광수와 바이칼호>에
서 간략하게 소개한 바 있다.
「유정」이 안타까운 사랑 얘기라면, 앞서 발표한 장편소설 「무정」은 부유한 김 장로의 딸과 기생
이 되어 나타난 왕년의 은인 박 진사의 딸 사이에서 고뇌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까막눈
이 아내와 이혼하려 했던 춘원 자신의 내면을 그린 작품이다. 춘원은 결국 자신의 아들까지 낳아준
조강지처를 버리고 산부인과 의사인 신여성 허영숙과 재혼했다. 춘원은 왜국 동경에서 「무정」을
쓰고 있던 중에도 신여성 나혜석과 허영숙 사이에 양다리를 걸친 적이 있었는데, 허영숙과 재혼한 뒤
에도 젊은 시인 모윤숙이 접근하자 거침없이 사랑을 불태우다가 허영숙에게 걸려 혼찌검이 났다. 춘
원은 이 밖에도 수많은 여인과 염문을 뿌린 희대의 바람둥이였다.
러시아에서 중국을 거쳐 귀국한 춘원은 인촌 김성수의 도움으로 두 번째 왜국 유학을 떠나 와세다대
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이때 <매일신보>에 「무정」을 연재하기 시작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19
19년 동경의 조선 유학생들이 독립운동을 일으키려 하자 춘원은 2‧8 유학생선언을 써주고 중국 상해
로 망명했다. 거기서 도산 안창호를 만나 흥사단에 입단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귀국한 춘
원은 총독부에 귀순증을 제출한 뒤 노골적으로 왜놈들에게 아첨하는 논문 <민족 개조론>을 발표하
면서 스스로 민족반역자가 되었다.
<동아일보>에 적을 두고 여러 장편소설을 연재하던 춘원은 1933년 느닷없이 경쟁지인 <조선일보>
로 자리를 옮겨 다시 한 번 배신자라는 욕을 버지기로 얻어먹었다. 1934년 그의 외아들이 17세의 꽃
다운 나이에 패혈증으로 돌연사하여 고통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18세 연하의 모윤숙이 따뜻
하게 위로를 해주었다. 춘원은 <조선일보>에 사표를 던지고 중이 되겠다며 금강산으로 떠났는데, 이
는 모윤숙과 즐기기 위한 환락여행이었다. 춘원의 후처 허영숙은 금강산까지 쫓아가 춘원을 설득하
여 함께 귀경했다. 춘원은 세검정 홍지동에 산장을 짓고 살기 시작했는데, 이때도 모윤숙이 수시로
찾아와 밤새 즐기고 갔다. 모윤숙은 허영숙의 눈에 띄어 욕을 먹기도 했지만 쉬 물러서지 않았다. 허
영숙은 모윤숙을 민족사학자 안호상과 혼인시켜주었지만 두 사람은 오래지 않아 이혼했다. 모윤숙이
춘원과 관계를 지속했기 때문이었다. 그 몹쓸 놈의 속궁합이란!
바로 이때 수양동우회 사건이 터졌다. 총독부는 수양동우회를 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창시자인 도
산 안창호를 중국에서 체포하여 국내로 압송해왔으며, 이때 춘원을 비롯한 수십 명의 관련 인사들도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춘원은 열악한 감옥생활로 인해 폐병이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병보석으로 풀
려난 춘원은 입원생활을 하면서 장편소설 「사랑」을 썼다. 혹독한 감옥살이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
을까? 춘원은 각중에 반일로 돌아서서 「사랑」에서 왜국의 대동아전쟁을 신랄하게 반대하는 논조
를 펼쳤다. 그러나 사회적 명성에 목이 마른 춘원은 다시 친일사상이 담긴 글을 쓰면서 갈팡질팡하는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을 보였다.
왜국의 패망이 다가오자 춘원은 현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단종비 정순왕후의 사릉 인근에 은거하
기 시작했다. 해방과 함께 민족반역자로 몰리게 되자 광릉으로 거처를 옮겼다. 광릉은 해방 전에 썼
던 장편소설 「단종애사」 및 「세조대왕」과 관련이 있는 곳으로, 춘원은 먼 왕족이었다. 이때 춘원
의 은거를 도와준 사람이 팔촌동생인 중 운허였는데, 운허는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큰 인물이었다.
운허는 춘원이 불경을 번역하겠다고 하자 완강하게 반대했다. 아무리 문학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 팔
촌형이지만 민족반역자에게 그런 신성한 일을 맡길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춘원은 헛된 꿈을 접
고 홍지동 산장으로 돌아왔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사흘 전인 1950년 6월 22일, 춘원은 고혈압과 폐렴으로 쓰러져 자택에 드러누웠
다. 인민군은 7월 5일 춘원의 효자동 집을 압류하고 그를 내무서로 연행했다. 7월 12일 춘원은 김규
식‧안재홍‧정인보‧방응모 등과 함께 북으로 끌려갔다. 평양에서 강계로 이송되던 춘원은 홍명희의 눈
에 띄어 김일성의 허락을 받고 강계의 큰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1948년에 월북하여 훗날 내각 부
수상까지 지낸 홍명희는 대하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이광수‧최남선과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로
꼽힌 인물이었다. 그러나 병이 너무 깊어 춘원은 결국 1950년 10월 25일, 향년 58세로 눈을 감았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북한이 연이은 미사일 발사로 긴장을 고조 시키는 기류 인데 식량지원은 그대로 이행 하겠다는 대외적 포석이 영 걸맞지 않습니다. 이는 표출 없이 지원이 되었으면 하는게 정도 인것 같습니다. 한반도 의 평화, 국민 모두의 염원 입니다. 날씨 좋은 주말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