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시대 행복의 조건은 평등
우리는 언제까지 경제성장을 위해 달려가야 하는가? 경제성장이 더 나은 삶의 질을 보장해주는가?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 교수는 이 같은 의문을 던지고 있다. 특히 최근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져들면서 이런 의문이 더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우리는 대체로 1인당 소득이 높아지면 사람들의 만족도가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연구결과에 의하면 아주 기본적인 요구들이 해결되는 수준을 넘어서면 소득과 사람들의 행복은 연관성이 없다고 한다. 또한 사람들의 행복은 소득의 절대값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의 상대적 크기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스키델스키 교수는 이러한 연구결과를 설명하면서 성장이 행복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은 아니며, 지금과 같은 양극화의 상황에서는 평등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평등은 사회안전망과 건강 수준이 높아지는 것이기도 하고, 더 많은 여가를 즐기고, 더 많은 시간을 가족이나 친구들과 보내고, 동료 간에 더 많은 존경을 받으며, 더 다양한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덧붙인다.
그래, 이제 좀 다르게 살아야 한다. 국민총소득이 아니라 국민총행복지수가 중요한 시대가 되어야 한다. 국민들이 보편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요구하는데에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다. 2012년 대선에서 대한민국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논의하고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수연 연구원 / 새사연(새로운사회를 여는 연구원)
행복은 평등이다
(Happiness Is Equality)
2012년 10월 19일
프로젝트 신디케이트(Project Syndicate)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
부탄의 국왕은 우리 모두가 더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그는 정부는 국민들의 국민총소득(GNP)이 아니라 국민총행복지수(GNH, Gross National Happiness)를 최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행복을 강조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은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일까? 아니면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유행인걸가?
왜 정부가 경제성장을 덜 강조해야 하는지는 경제성장이 어려울수록 잘 알 수 있다. 올해 유로존은 전혀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영국 경제는 긴축 상태에 들어갔으며, 그리스 경제는 몇년 동안 위축되어 있다. 심지어 중국도 침체에 들어설 전망이다. 성장을 포기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하면서 살면 안되는 걸까?
경제성장이 회복된다면 이런 분위기는 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강조하는 태도에 대한 진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특히 선진국에서 성장은 덜 중요한 미래 가치가 되고 있다.
성장을 강조하던 태도가 변하게 된 첫번째 요인은 지속가능성에 관한 관심이다. 과연 우리의 미래를 위협하지 않으면서 이전과 같은 속도로 계속 성장할 수 있을까? 1970년대 사람들은 성장을 계속 하기에는 자연의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식량의 고갈이나 재생불가능한 천연 자원이 걱정거리였다. 최근에는 탄소 배출이 주요 문제로 떠올랐다. 2006년 스턴보고서(Stern Review)가 강조했듯이 미래에 뜨거워진 지구에서 튀겨지지 않으려면 우리 모두는 오늘날의 성장을 어느 정도 희생해야만 한다.
신기하게도 이 토론에서 한가지 금기시되는 내용은 인구에 관한 것이다. 인구수가 적을수록 뜨거워지는 지구 위에서 우리가 직면하게 될 위험은 줄어든다. 하지만 선진국 정부는 자연스러운 인구의 감소를 받아들이지 않고, 임금을 낮게 유지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흡수하고 있다. 그래서 선진국은 더 빨리 성장한다.
최근 들어 성장이 가져오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반드시 더 많은 성장이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계속 성장해야 하는가?
이 질문의 시작은 몇십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974년 경제학자 로버트 이스터린(Robert Easterlin)은 "경제 성장은 인간의 삶을 개선시키는가? 몇가지 실증 증거들" 이라는 유명한 논문을 발표한다. 많은 국가에서 1인당 소득과 스스로 느끼는 행복의 정도가 관련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던 상황에서 그는 놀라운 결론을 이끌어낸다.
기본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정도의 최소 소득이 충족된 상황이라면, 행복과 1인당 GNP는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GNP는 삶의 만족도를 측정하기에 매우 부족한 지표라는 뜻이다.이후 대체 지표를 고안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1972년 두 명의 경제학자 윌리암 노드하우스(William Nordhaus)와 제임스 토빈(James Tobin)이 순경제적후생(Net Economic Welfare)이라는 지표를 도입한다. GNP에서 환경오염과 같이 나쁜 생산물을 제외시키고, 여가와 같이 시장 밖에서 일어나는 활동을 추가한 것이다. 더 많은 여가를 즐기고 더 적은 노동을 하는 사회가 더 많이 일하고 따라서 GNP도 높지만 여가를 덜 즐기는 나라만큼 후생이 높다는 것을 보였다.
최근 들어서는 삶의 질을 측정하는 지수의 범위가 더 넓어지고 있다. 문제는 삶의 양은 측정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삶의 질을 측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양과 질을 어떻게 종합하여 삶의 만족도를 측정하는 지표를 만들어낼 것인가의 문제는 경제학보다는 윤리학의 문제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양을 측정하는 후생 지표에 매달리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또 다른 발견이 있다. 한 국가 안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덜 행복하다는 것이다. 즉,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이 확보된 경우 사람들의 행복 수준은 그들의 절대 소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집단과 비교한 상대적 소득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다른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우월하다고 느끼기도 하고 열등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결국 후생은 성장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분배되는가에 달려 있다.
삶의 만족도는 평균 소득의 성장이 아니라 중위 소득의 증가, 다시말해 일반인들의 소득이 늘어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10명의 사람이 있는데 이 중 1명은 관리자로 1년에 15만 달러를 번다. 다른 9명은 노동자로 1년에 1만 달러를 번다. 이들의 평균 소득은 2만 5천 달러이다. 하지만 90%는 1만 달러를 벌 뿐이다. 이런 식의 소득 배분에서는 성장이 되어도 일반인의 후생이 높아질 리가 없다.
특수한 사례를 든 것이 아니다. 지난 30년간 이어진 부자들의 사회에서 평균 소득은 꾸준히 늘어났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소득은 정체되거나 심지어 하락했다. 즉, 미국이나 영국에 거주하는 매우 소수의 사람들이 성장의 과실을 대부분 가져갔다. 이런 경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장이 아니라 평등이다.
더 많은 평등은 사회안전망과 건강 수준이 높아지는 것이기도 하고, 더 많은 여가를 즐기고, 더 많은 시간을 가족이나 친구들과 보내고, 동료 간에 더 많은 존경을 받으며, 더 다양한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 불평등이 심해질수록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고 끊임없이 자극당하면서 더 많은 상품을 구매하도록 강요당할 것이다. 우리는 터보엔진을 단 아빠와 호랑이 같은 엄마가 아이들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라고 끊임없이 외치는 빡빡한 사회에 살고 있다.
오히려 19세기에 살았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더 훌륭한 시민의 소양을 보여준다.
"나는 다른 이를 짓밟고 밀어제끼며, 다른 이와 충돌하고 싸우는 방식을 통해 유지되는 삶을 바라지 않는다. 사회적 삶으로서 가장 바람직한 인간...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좋은 상태는 아무도 가난하지 않고 아무도 더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앞으로 나가기를 강요당하며 뒤처질까봐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상태이다."
부탄의 왕을 비롯하여 수량화할 수 있는 부의 한계를 깨달은 많은 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새겨들어야 할 교훈이다.
<원문 보러가기> : http://www.project-syndicate.org/commentary/economic-equality-and-life-satisfaction-by-robert-skidelsky
첫댓글 평등 이야기가 나와서 덧붙여 보면,
"분배의 공평", "기회균등",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용자와 노동자/ 생산자와 소비자 등 "경제 주체들 사이의 세력 균형"도 평등을 향한 노력들이라는 것.
우리나라 헌법상에서 그러한 경제적평등의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는 경제민주화도 전혀 어색한 용어가 아니라는 것.
참 노파심에서 그러는데 평등에 관한 글을 보고 레드컴플렉스를 가지시지는 않으시겠죠??
감사합니다. 잘 보고 느끼고 갑니다.
좋은 글입니다. 경제학자들이 이런 부분을 조금 폭넓게 받아들여 지속적으로 고민을 해 주었으면 좋겠네요.
그렇지요. 많은 국민들이 이러한 생각을 하고 정치인을 잘 선택해 주는 것이 첫걸음 이라 생각됩니다.
이제 파이를 키우는 데에만 열중하지 말고 나누는 법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야죠.
재벌입에만 파이가 다 들어가 버리면 나머지 국민들은 행복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