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 링거 (Dead Ringer)
1964년 미국영화
감독 : 폴 헨라이드
음악 : 앙드레 프레빈
출연 : 베티 데이비스, 칼 말덴, 피터 로포드
필립 캐리, 진 헤이건, 조지 맥크리디
에스텔 윈우드, 조지 챈들러, 시릴 딜레반티
모니카 헨라이드
베티 데이비스, 정말 전설적 배우입니다. 그녀가 왕성하게 횔동하며 전성기를 누린 시기가 1930년대 부터 40년대 중반 정도까지 입니다. 영화로 본다면 '인간의 굴레(34)' 부터 '라인강의 감시(43)' 까지라고 봐야 할까요? 물론 그 이후에도 계속 영화에 출연했고 그 영화들의 평점도 높은 편이지만, 아무래도 덜 알려진 작품들이고 첫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게 '인간의 굴레'였고 1939년 출연한 '제저벨' 부터 5년 연속 아카데미상 후보에도 올랐으니 그 때가 최고의 전성기였지요. 1950년 '이브의 모든 것'이나 1952년 '스타' 같은 영화를 통해서 꾸준히 괜찮은 작품을 터뜨리곤 했습니다. 50년대 들어와서는 확실히 주춤했고, TV 시리즈에 얼굴을 자주 내미는 등 전성기 지난 배우들이 하는 길을 똑같이 걸었죠.
그런 베티 데이비스에게 60년대 다시 대전환의 기회가 오며 제 2의 도약기를 맞게 됩니다. 1961년 '포켓에 가득찬 행복'같은 따뜻한 영화가 등장한 건 서막일 뿐이고, 62년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의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라는 영화에서 괴이한 역할을 연기하여 엄청 호평을 받았습니다. 중년 여인 호러로 손꼽히는 작품이 되었죠. 이 캐릭터 때문인지 60년대 베티 데이비스는 4편의 영화에서 섬뜩한 '호러 아줌마'를 연기합니다. '데드 링거(64)' '허쉬 허쉬 스위트 샬롯(64)' 그리고 '유모(65)' 입니다. 이렇게 4편은 모두 흑백영화였고, 괴이한 내용입니다. 물론 베티 데이비스가 모두 주도하는 작품이고요. 흑백이라서 범죄 혹은 호러물 다운 분위기가 더 살았고, 나이가 많이 든 베티 데이비스는 칼라보다 흑백이 더 나았죠. 4편 모두 상당한 오락적 재미가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작품은 '데드 링거' 입니다. 포스터는 아주 섬뜩한데 의외로 나머지 3편에 비해서 덜 괴이한 영화입니다. 호러물이라기 보다는 범죄영화지요. 베티 데이비스의 모습도 다른 세 편처럼 괴이하고 섬뜩한 분위기가 아니라 아름다운 중년 귀부인 역할이지요. 그래서 연기는 좋지만 사실 좀 덜 어울립니다. 40대 초반 정도 여배우가 캐스팅 되어야 더 어울렸고, 베티 데이비스는 동안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 있지요. 당시로서는 에바 가드너가 더 어울렸들 듯 합니다.
베티 데이비스는 쌍둥이 자매 역할로 1인 2역이지요. 제목 'Dead Ringer' 는 똑같이 닮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가끔 '죽음의 반지'라는 오역을 하는 분들이 있지만요. 이 제목은 1988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작품이 더 유명하지요. 거기서도 제레미 아이언스가 1인 2역이었죠. 우리나라 제목은 '데드 링거' 라고 보통 표기하는데 Ringer 는 미국식 발음으로는 '링어' 이고 영국식으로는 '링거' 입니다. 보편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링거'라고 표기하지요.
장례식으로 시작하는 영화입니다. 굉장한 갑부의 장례식이에요. 그는 젊은 장교일 때 이디스(베티 데이비스)라는 여인을 만났는데 쌍동이 동생(언니일수도 있죠. 영어는 sister 라고 하니 언니인지 동생인지 구분이 안가지만 편의상 동생이라고 하겠습니다.) 마가렛이 가로챕니다. 이디스는 마가렛이 그의 아기를 임신해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한 줄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18년 동안 두 쌍둥이 자매는 의절하다시피 연락도 안하고 살았습니다. 마가렛이 부자 남편 덕에 호화로운 귀부인으로 대저택에서 살아가는 동안 이디스는 고생을 하면서 겨우 작은 바 하나 차려서 운영하고 있었고, 짐 홉슨(칼 말덴) 이라는 형사와 소박한 사랑을 하고 있었죠.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운전기사에게 마가렛이 애초에 아기 출산 자체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디스는 배신감에 분노하죠. 그녀는 마가렛을 바 건물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불러 권총으로 살해하고 이디스가 자살한 것으로 위장하고 자기가 마가렛의 옷을 입고 그녀 행세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하루아침에 이디스는 마가렛의 신분으로 살게 되고, 홉슨 형사는 어이없게도 애인을 잃은 남자가 되어 버리지요.
사실 많이 비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누군가로 위장해서 가짜 인생을 살아가려면 그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의 특징이나 인간관계 등을 면밀히 파악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여기서는 무려 18년이나 떨어져 지냈던 사람의 행세를 하는 것이거든요. 물론 쌍둥이라서 얼굴은 똑같이 생겼고, 친 자매이니 20년 이상 같이 살았던 적은 있지요. 그래도 부자집 귀부인이라면 여러 사교 관계 속의 인간관계나 하인, 하녀, 저택의 특징 등 익혀야 할 것이 상당히 많지요. 특히 시댁 쪽 사람들은 거의 모를텐데. 즉 이 영화에서 이디스가 저지르는 범죄는 현실적으로 굉장히 무모합니다.
영화에서도 그런 문제를 많이 다루고 있긴 합니다. 하녀가 보석을 넣기 위해서 금고를 열어 달라고 하자 번호를 몰라서 당황하기도 하고, 집사가 손님이 어느 방에서 기다린다고 하자 그 방 위치를 몰라서 당황하기도 하죠. 물론 위태위태 하기만 기지를 발휘해서 잘 넘깁니다. 집에서 키우는 큰 개가 원 주인보다 이디스를 더 잘 따른다는 설정은 조금 아이러니해요. 개를 싫어하는 주인 마님이 갑자기 개와 가까이 지내는 걸 주변 사람들이 오히려 의아해 하죠.
아무튼 별 탈 없이 위기를 넘기고 그 막대한 재산을 차지하며 잘 지낼 것 같은 이디스에게 두 방해자 역할을 하는 남자가 얼쩡거리지요. 한 명은 이디스의 애인이었던 홉슨 형사, 또 한 명은 마가렛이 남편 몰래 밀회를 즐겼던 토니(피터 로포드) 라는 건달입니다. 둘다 이디스를 마가렛으로 알고 있는데 홉슨 형사는 자꾸 귀찾게 찾아오지만 뭐 마가렛과 특별한 관계는 아니니 사실 큰 문제는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토니는 마가렛의 정부였으니 골치 아픈 존재지요. 같이 몸을 섞고 뒹군 사이의 남자에게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긴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토니는 아주 교활한 악당이지요.
결국 이디스와 홉슨형사, 토니 등과 관련되어 이야기가 더 긴박하게 흘러갑니다. 그러면서 마가렛과 토니의 어떤 비밀도 새롭게 드러나고, 당연히 가짜 마가렛인 이디스는 궁지에 몰리게 되고요. 과연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갈지 보는 내내 정말 흥미진진 합니다. 베티 데이비스가 조금만 젊었으면 금상첨화 였을거에요. 피터 로포드와 끈적한 장면을 연기하는 게 영 부자연스럽거든요. 심지어 칼 말덴의 상대로도 나이가 너무 들어 보입니다.
베티 데이비스의 기괴한 캐릭터 4편의 특징은 앞의 2편, 즉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와 '데드 링거'는 그녀가 저지른 범행을 다 보여주고 이끌어가는 작품이고, '허쉬 허쉬 스위트 샬롯'과 '유모'는 그녀가 과연 괴이한 마녀인지 아니면 피해자인지 애매하게 끌고 가면서 거의 끝날 때에나 그 여부가 드러납니다. 4편 4색이라고 할만큼 네 편 모두 상당한 재미가 있고, 베티 데이비스가 어떤 일을 저질러도 놀라울 게 없을 정도로 독특하게 괴이한 캐릭터를 연기하지요. 60년대 이렇게 기괴한 캐릭터를 연기한 4편으로 그녀는 나름 독자적인 60년대의 영화이력을 완성시킵니다. 심지어 '유모'는 영국 해머 영화사 작품입니다.
칼 말덴은 악역이 더 어울려 보이는 배우인데 이 작품에서는 비교적 순정적인 민완 형사역으로 선역입니다. 베티 데이비스가 연기한 1인 2역에서 이디스는 선량한 역이고 마가렛은 사악한 역할이지만 이게 영화가 진행되면서 애매모호해지죠. 영화의 내용은 이디스가 저지른 범죄의 삶이 과연 어떻게 들통날지, 어떻게 감추어질지가 관건이니까요. 피터 로포드는 딱 봐도 느끼하고 사악해 보이는 건달로 잘 어울립니다. 그 외에도 충직한 집사나 마른 하녀 등 각각의 캐릭터들이 나름 자기 자리에서 역할들을 잘 하시죠. 심지어 큰 개까지.
죄짓고 부자로 사느니 떳떳하게 가난하게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입니다. 바를 운영하면서 어려움을 겪지만 성실한 경찰이 자신을 사랑해 주고 극빈한 삶도 아닌데 이디스의 행동이 좀 안스럽지요. 물론 사랑했던 남자를 거짓으로 속여서 앗아간 자매에 대한 복수심은 이해가 가지만. 여주인공이 범죄를 저질렀지만 많이 안스러운 영화지요.
아무튼 믿고 보는 베티 데이비스의 60년대 기괴한 아줌마 시절의 4편 중 한 편입니다. 확실히 연기와 발성이 좋은 배우라는 게 느껴집니다. 영화도 꽤 재미있고. 대가는 나이 먹어도 여전히 대가라는 걸 느끼게 해준 작품입니다. 감독은 '카사블랑카'나 '뮌헨행 야간열차' 등에서 배우로 더 낯익은 폴 헨라이드 입니다. 극장용 영화는 많이 연출하지 않았지만 무난히 잘 연출했습니다. 설정상의 비현실적인 몇 부분은 어쩔 수 없었지만요.
ps1 : 머리에 총을 쏘면 피가 튀어서 옷이 더렵혀질 텐데 그런 것에 대한 애매한 설정이 좀 아쉬웠습니다. 그 외에도 설정상 문제들이 좀 있지만 그런 것 무시하고 봐야 재미난 영화입니다.
ps2 : 60년대 영화 치고는 1인 2역이 깔끔하게 처리되었습니다. 물론 둘이 가까이 있는 모습이 많이 보이진 않았지만.
[출처] 데드 링거 (Dead Ringer, 64년) 베티 데이비스의 1인 2역 범죄물|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