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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길리성
조선의 음악기관 장악원
조선 시대 음악의 중심 기관, 장악원
조선 시대 왕실의 행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장악원의 음악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각종 의례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왕실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각종 명목의 잔치를 벌일 때, 심지어 왕이 활쏘기를 할 때도 장악원 음악인들이 동원되었다. 조선의 악(樂)은 예(禮)와 함께 의례의 핵심이었고, 그만큼 조선의 국가 음악기관이었던 장악원의 역할은 매우 컸다. 종묘와 사직을 비롯한 제사의례, 정월 초하루와 동짓날에 행하는 의례, 노인을 위한 양로연, 왕실의 각종 경사, 외국의 사신을 위한 연향 등이 열릴 때 국가 음악기관인 장악원은 그 용도에 맞는 각종 음악을 담당하였다.
경현당석연도. 1719년 숙종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여 기로신들에게 내린 연회를 그린 그림. 화면 아래에 장악원의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이 보이고 화면 중앙에는 소년 무용수인 무동(舞童) 두 명이 춤을 추고 있다.
성종 대에 편찬된 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장악원에 소속된 음악인의 수는 천여 명에 달하였다. 장악원의 이러한 규모는 예악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던 조선 궁중음악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조선 시대에 예와 악은 서로 독립되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예가 ‘질서’를 위한 것이라면 악은 ‘조화’를 위한 것이므로 의례를 행할 때 음악이 수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때의 음악은 ‘음악을 위한 음악’이 아닌, ‘의례의 일부로서의 음악’이었다.
이처럼 장악원은 조선 시대의 예악 정치를 구현하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한 음악기관이었다. 장악원의 음악인들은 수많은 의례에 쓰이는 음악을 소화하기 위해 평소에도 끊임없는 연습을 해야 했다. 왕실의 연중행사를 보면 음악인의 연주 횟수, 연습 일정이 치밀하게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장악원에서 연마해야 할 연습 일정을 법전(法典)에 규정해놓기까지 했는데, 이는 꾸준한 연습을 통해 완성도 높은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조선 시대 국가 전례의 수준을 높이는 일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악공과 악생
조선 왕실의 행사에서 음악을 연주한 전문 음악인은 악공(樂工)과 악생(樂生)이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이 전공으로 하는 악기와 더불어 몇 개의 악기를 더 연주했는데, 이 외에도 부전공으로 노래나 춤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들은 음악을 담당한 사람들이었지만 ‘음악인’이라는 직업은 매우 힘든 것으로 인식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흩어졌던 악공과 악생들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궁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던 것을 보면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전쟁 후 악공과 악생의 수가 모자라 충원하는 데 힘이 들었으며 정원을 채우지 못할 때도 있었다. 이는 조선 시대에 악공과 악생이라는 직업이 인기가 없었음을 알려준다.
매우 열악한 처우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음악 열정은 강했다. 장악원에서 정기적으로 치르는 실기 시험을 잘 보기 위해 피땀 흘려가며 실력을 쌓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첫 번째 달인 음력 1, 4, 7, 10월이면 정기적인 시험을 보았는데, 《경국대전》에는 상세한 시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또한 각각의 전공과 부전공에 해당하는 악기로 궁중음악을 연주하거나 춤을 추는 시험을 치렀다. 시험 방식은 오늘날 음악대학의 경우와 비슷하다. 장악원에서 연주하는 곡은 그 수도 많고 길이가 긴 것이 대부분이어서 한 사람이 모든 음악에 대해 시험을 치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따라서 시험 대상 곡들을 모두 익히도록 한 후 그 중에서 몇 곡을 제비뽑기로 선정해서 시험을 치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제도이기 때문에 시험 준비를 위해서는 수많은 곡들을 모두 익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 최근 3개월 내의 근무 일수가 모자란 사람이나 각종 의례에 2회 이상 무단 결석한 사람은 시험을 볼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요즘 대학에서 출석 일수가 3분의 1이 되지 않으면 학점을 주지 않는 것과 유사하다. 또 시험 성적이 좋으면 품계를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들은 성실한 출근과 실력 향상을 위한 장치로 작용하였다. 그 밖에 연말이 되면 특별 시험을 보아 실력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이는 징계를 받았다. 음악감독의 역할을 맡은 전악(典樂)은 실력이 모자라는 사람을 특별히 모아 놓고 보충수업을 시켜 부족한 실력을 채우도록 했다. 때로는 시험 결과가 우수한 사람에게 상금을 주어 격려하기도 했으며,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기도 했다. 음악인들의 연주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소년 무용수, 무동
장악원 소속 음악인들 가운데에는 나이 어린 소년들도 있었다. 주로 8세에서 15세 사이의 남자 아이로서 왕실의 각종 의례에서 춤추는 역할을 담당한 ‘무동’(舞童)이 그들이다. 이들은 노래를 주로 담당했던 아이들인 가동(歌童)과 함께 남악(男樂)이라는 범주로 구분되어 여성 예술인인 여악(女樂)과 함께 조선 왕실의 의례를 수행할 때 일정한 몫을 담당하였다.
조선의 궁중에서 나이 어린 무동이 필요했던 것은 왕실의 주요 의례 시 필요한 음악과 춤을 연행하는 관행과 관련되어 있다. 의례를 위한 악무의 연행에서 기악 연주는 남성 음악인들인 악공과 악생, 혹은 맹인 음악가인 관현맹인(管絃盲人) 등이 담당했지만 노래와 춤은 주로 여성 예술인들의 몫으로 주어졌던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조선의 지식인 가운데에는 남성들이 주축이 되는 왕실의 의례에서 여성 예술인들이 춤을 추는 행위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는 춤이 의례의 일부라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춤추는 여성 예술인들을 ‘의례 수행의 담당자’가 아닌 ‘풍기문란의 폐단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로 파악하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결국 궁중에서 활동하는 여악의 ‘폐지론’을 제기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고, 여악을 대신하여 춤과 노래를 담당할 수 있는 대상의 물색으로 이어졌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가장 적합한 것이 어린 남자 아이들이었다. 이들은 여성이 할 수 있는 고운 동작이 가능했고, 또한 여성의 고운 목소리를 낼 수 있었으므로 일정 기간의 훈련을 거쳐 외국 사신을 위한 연향 등 궁중의 각종 행사에서 여악을 대신하여 춤과 노래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한창 성장이 이루어지는 나이에 무동으로 선발되었기 때문에 재주를 모두 익혀 기예가 능숙해질 즈음이면 이내 ‘아이’가 아닌 ‘성인’으로 자라 버렸다. 어른이 되기 전의 한정된 기간에만 활용이 가능하다는 무동 집단의 특수성은 무동 제도 유지의 어려움으로 작용하였다. 늘 부족한 인원을 지속적으로 충당해야 하는 구조적 문제는 무동 제도 자체에 이미 내재되어 있었다. 또한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무동’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이들의 숙련된 능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도 여전히 과제로 남았다. 수년에 걸쳐 기예를 연마한 이들을 궁중의 여러 행사에서 활용하는 방안은 이들을 무동으로 탄생시키기 위해 강행하는 훈련 못지않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인해 조선 시대의 무동은 ‘간헐적’으로 유지되었고, 무동 개인의 ‘무동’이라는 신분 유지는 일시적이었다. 무동이 의례 현장에서 활용될 수 있는 시한은 한 개인의 일생을 놓고 볼 때 극히 짧았다. 또 이들이 비록 나이가 어린 ‘아이’이긴 하지만 ‘남자’라는 성적 정체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대용’으로 활용된다는 제도적 특수성으로 인한 문제점은 조선 지식인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으로 떠오르곤 하였다. 이처럼 조선 시대의 무동은 그 존재양상이나 활용 면에서 여러 문제를 지니고 있었지만 조선 말기까지 장악원 소속의 음악인 신분으로서 왕실 의례에서 일정 부분을 담당하였다.
궁중 음악감독, 전악
장악원의 음악인들을 이끄는 전문 음악인은 전악(典樂)이라 불렸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음악감독’에 해당한다. 이들은 각종 제사 음악과 연향 음악을 잘 연주할 수 있도록 악공과 악생의 연주 실력을 향상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실제 의례가 시작되면 각 절차에 따라 빈틈없이 음악이 연주되도록 이끌어야 했다. 이들은 때론 노래와 무용을 지도하기도 했다. 음악이 연주되는 무대 배치도 이들의 몫이어서 의례를 위한 음악의 전체 구도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전악은 악대가 실제 음악을 연주할 때는 박(拍)을 쳐서 음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집박악사(執拍樂師) 역할도 담당하였다. 국상(國喪)이 있을 때에는 악기 소리를 밖으로 내면 안 되었기 때문에 연주는 하지 않지만 악대를 벌여 놓고 그 자리를 지켜야 했다. 일식(日蝕)이 있을 때면 그것을 구제하는 의례에서 청색, 적색, 백색의 북을 각 방위에 놓고 특정 순서에 따라 북을 울리기도 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업무가 이들에게 주어졌다. 이처럼 다양한 능력을 요하는 전악은 최고의 실력을 갖춘 음악인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따라서 이들은 전악을 지내고 은퇴하더라도 그 실력을 묵히지 않았다. 음악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민간의 여러 행사에서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조정에서 이들을 다시 선발하여 궁중의 여러 행사에 투입하기도 했다. 평생 장악원에서 기예를 익혀 뛰어난 실력을 소유한 인재들을 그대로 묵히지 않고 활용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런가 하면 은퇴 후 조용한 곳에 은거하면서 자신이 연주했던 음악을 악보로 만들거나 제자를 가르치는 사람도 있었다.
‘기사사연도’ 부분. 장악원 소속 연주자의 반주에 맞추어 처용무를 추고 있는 악인들 모습. 장악원의 음악인들은 왕실의 행사에서 예와 함께 어우러지는 음악을 연행하기 위해 실력을 연마하였다.
이처럼 장악원 전악은 어려서부터 음악을 시작하여 은퇴 이후까지도 재능을 묵히지 않고 궁중의 여러 행사에 투입되어 조선의 음악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음악인을 교육하는 업무였다. 장악원의 최전방에서 음악인들의 수준을 한 단계 위로 끌어올리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들이 바로 장악원 전악이었다.
장악원의 책임자, 장악원 제조
장악원의 업무를 총괄하는 사람은 장악원 제조였다. 제조는 등급이 높은 문신(文臣)이 겸직했는데, 겸직임에도 불구하고 그 업무는 과중한 편이었다. 수없이 많은 궁중 행사에서 연행되는 음악을 총체적으로 책임져야 했다. 행여나 연주가 잘못되면 장악원 제조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그가 맡은 업무는 방대해서, 다양한 국가 행사에 쓰이는 악무(樂舞)와 관련된 일, 예컨대 의례에서 노래하는 악장(樂章)의 내용이 그 의미에 걸맞은지, 음률이 제대로 되었는지, 각종 음악인들이 연주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등을 모두 점검해야 했다. 또 악기 제작을 감독하고, 음악 관련 제도가 잘 운영되고 있는지 검토한 후 수정하는 일도 이들의 업무였다. 이 밖에도 조선의 악학(樂學) 부흥을 위한 노력도 장악원 제조에게 부여된 임무였다.
장악원의 최고 책임자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제조는 전문 음악인이 아니라 행정관리였다. 따라서 이들의 음악 실력에는 개인차가 있었다. 음악을 잘 알고 악기 연주도 뛰어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이도 있었다. 조정에서는 가능한 한 음악에 조예가 있는 인물을 장악원 제조로 임명하려 했지만, 늘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 장악원이 예악(禮樂)에 관한 일을 담당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덕을 갖춘 인물을 물색하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그 한 예로 성종 대에 장악원 제조로 일하던 유자광은 덕망이 없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는 건의가 제기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음악인들의 연주 실력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 장악원 제조의 음악 실력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성종은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이 장악원에서 일하도록 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음악이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능력을 타고나야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음악을 관장하는 관리 또한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조선 성종 대의 장악원 제조로 일했던 성현(成俔, 1439~1504)은 조선의 악서(樂書) 《악학궤범》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음악 실력이 뛰어나 장악원 제조로 추천된 인물이다. 성현은 장악원 제조로 일하면서 음악을 많이 들었다. 손님을 위한 연향에서, 사신을 위한 잔치에서, 음악인들의 시험 과정에서 늘 음악을 듣고 가까이 했으며, 실력 좋은 음악인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듣는 것을 매우 즐거워했다. 이웃에서 밤늦게까지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오면, 누워서 그 음악을 듣는 것이 즐거움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성현은 그러한 즐거움에 대해, “부지런히 공부해도 명성을 얻지 못하고 죽는 가난한 선비가 많은데, 나는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육조판서에 이르고, 또 밤낮으로 노래를 듣고 부르니, 어찌 홀로 태평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이와 같은가?”라고 평소에 이야기했다. 가난한 선비들에게는 자신이 누리는 복이 미안했던 것이다. 예와 악에 밝고 음악을 좋아하던 성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성현은 《악학궤범》의 서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좋은 음악도 귀를 스쳐 지나가면 곧 없어지고, 없어지면 흔적이 없는 것이 마치 그림자가 형체가 있으면 모이고 형체가 없어지면 흩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악보가 있으면 음의 느리고 빠른 것을 알 수 있고, 그림이 있으면 악기의 형상을 분변할 수 있으며, 책이 있으면 시행하는 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악학궤범》을 편찬한 이유이다.”
아무리 좋은 음악이라 하더라도 귀를 스쳐 지나가면 사라진다. 성현은 한 나라의 주요 의례에서 쓰이는 음악을 기록으로 남겨 두어야 하는 이유를 이처럼 명확하게 설명하였다. 조선 시대 국가 음악기관인 장악원에서 연주했던 음악은 성현에 의해 [악학궤범]에 낱낱이 기록되었다.
글송지원 | 서울대학교 연구원조선시대 국가 전례와 음악사상사, 음악문화사, 음악사회사 분야의 연구를 통해 예와 악, 인간과 문화, 사회의 관점에서 역사를 읽어내고 있다. 음악 행위의 주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역사 속에서 음악인들의 삶의 궤적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 중이다. [한국 음악의 거장들], [정조의 음악정책] 등의 저서와 [담헌 홍대용 연구],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조선 전문가의 일생] 등의 공저, [다산의 경학세계], [역주 시경강의](전 5권, 공역) 등의 번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