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의 눈물
몽골 고비사막에 대한 다큐를 보았는데,
낙타가 새끼를 낳고 있었다.
바람 부는 잿빛 사막의 모래 위에서
어미는 처절한 사투를 벌이며 새끼를 낳고 있었다.
막 땅에 떨어진 새끼는 꿈틀거리다가
비척비척 일어서더니 가까스로 걷게 되자
바로 어미의 젖부터 찾았다.
그런데 어미는 새끼가 젖을 물려고 하자
한사코 새끼를 떠밀며 젖을 주지 않았다.
낙타 주인이 보다 못해 억지로
어미를 붙들고 새끼에게 젖을 물리려 하자
어미는 어린 갓 태어난 새끼를
발로 툭 차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3일 동안 새끼는 어미로부터
거부당하고 젖을 먹을 수 없자
주인은 인근의 샤먼을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새끼에게 젖을 물릴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한다.
늙은 샤먼은 자신의 젊은 아들에게
마두금을 연주하게 하고
자신은 어미 낙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한참 정성을 들이니
얼마 후 놀랄만한 일이 일어났다.
어미 낙타가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새끼에게 젖을 내주는 것이었다.
잃었던 모성애를 되찾은 것이다.
물론 모든 낙타가 그러는 것은 아니며
이런 경우는 가끔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 샤먼은 말한다.
“어미 낙타가 새끼를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미움 때문이었다고.
출산을 통해 어미가 겪은 엄청난 고통과
죽음과도 같은 두려움 때문에 생긴
새끼에 대한 미움 때문이었다고.”
나는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모성의 본능조차
잊을 정도로 자식이 미웠을까.
그럴 수도 있을까.
한참을 생각하며
내 안의 미움을 들여다보는 동안
나는 그 의문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었다.
내 안에는 너무 많은 미움들이 있었다.
이웃들에 대한 미움,
직장 상사에 대한 미움,
자신에 대한 미움,
생활 속의 시시콜콜한 미움과
세상에 대한 막연한 미움까지
내 안에는 오래된 미움들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동안 나는 그 미움들을
정면으로 거부할 용기도,
스스로에 대한 솔직함도 없었기에
그 미움에 대해 반응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생각을 하니
낙타가 제 새끼를 거부한 것은
솔직한 자기감정의 표현이요,
스스로의 삶을 있는 그대로 살아낸
어쩌면 진솔한 삶의 모습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 <낙타의 눈물>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스스로의 미움을 스스로 거둘 수 있는
솔직하고 순수한 감정, 그리고 그 용기 있는
삶의 태도는 내게 주는 각성이었다.
진정한 사랑의 마음은
이렇게 대상에 대한 미움의 감정을
깨끗이 지우고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일 것이다.
나는 미움의 감정을 말끔하게 지우지 못하고
사회적인 체면 때문에, 어설픈 인간관계 때문에
입으로만 용서하고 사랑한다며 살지는 않을까.
위선적인 사랑에 스스로 도취되어
진정한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