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경복궁 지킴이(3기) 고니시다카코 선생님 이야기가 보도됩니다.
궁궐지킴이 활동가로서는 최초의 외국인이자, 400여년 前 임진왜란시 참전했던 倭將 고니시유키나카(小西行長)의 후손으로 알려진 고니시다카코 선생님.
현재 한국인 남편과 사이에서 1남1녀를 두고 경기도 성남시에서 살고계신데요. 경복궁 지킴이 설명을 하실 때에도 한국어와 일본어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특이한 것은 "한국의 경복궁은...." 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경복궁은....", 또는 "한국사람들은..."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나라사람들은...."이라고 이야기 한답니다. 벌써 한국사람이 다된것 같군요. ㅎㅎ
요즘 토요일 경복궁을 찾는 일본인 관광가이드들이 고니시 선생의 '감시(?)와 잔소리'에 벌써 여럿 당했다(?)는 군요.
이제는 궁궐사랑에도 국경이 없는 것 같습니다. ㅎㅎ
추신 : 현재 고니시선생께서 일본어 안내를 위한 궁궐지킴이 <일본어 연구반>에 참여하시기로 했습니다. 일본어 연구반에 함께 하실 지킴이들께서는 사무실로 연락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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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3.26/경향신문/김희연]
400년만의 참회
- 조상은 '가해자', 후손은 '수호자' -
경기 성남에서 11년째 살고 있는 일본여성 고니시 다카코(小西貴子·38). 1남1녀의 자녀와 휴대폰 판매영업을 하는 남편 신길순씨(39)를 알뜰살뜰 뒷바라지하는 평범한 주부이다. 1989년 강원도 횡성에서 ‘일본 며느리’를 구경하러 몰려온 시댁 친지들을 모시고 혼례를 올린 후 다카코는 한·일 축구전을 보며 한국팀 응원에 열을 올리는 ‘한국 아줌마’가 됐다.
한국인 남편은 일본에서 이웃에 살던 지금의 시고모가 다리를 놓았다. 친정 아버지는 맏딸이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을 크게 반대했지만 결국 ‘수완 좋은’ 시고모의 조카 자랑에 넘어갔다. 다카코는 한국말을 전혀 몰랐고 남편 역시 일본어를 할 줄 몰랐다. 하지만 인연이었는지 88년 서울올림픽 때 처음 만난 후 이듬해에 3남5녀 집안의 막내며느리가 됐다.
맏이 준호(12)가 태어날 때까지 일본에서 살았다. 갓난아이를 안고 한국에 아주 살러 오면서 착잡한 마음도 있었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일본인이라는 것 때문에 크게 마음 고생한 기억도 없다. 하지만 준호가 초등학교 3학년때 있었던 일은 아직도 생생하다.
어느날 어린 아들이 학교에 가다 말고 울면서 돌아온 것이다. 까닭을 알아보니 등교길에서 만난 반 친구들이 “너희 엄마, 나쁜 일본사람이지” 하면서 놀려댔던 것이다. 하지만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 희수(7)에게는 그런 일이 없을 것 같다. 이젠 ‘나도, 한국 아줌마야!’라는 자신감이 붙었기 때문이다.
이 ‘한국 아줌마’의 1주일은 무척 바쁘다. 매주 월·수요일은 지역 동사무소에서 열리는 일본어 강좌에서 주부·직장인 8명을 가르치고 화·목요일은 청소년 수련원에서 10여명의 중·고등학생에게 일본어 공부를 시킨다. 자원봉사로 일본어 강의를 시작한 지 5년째다.
두 자녀의 엄마와 아내, 지역주민들의 일본어 선생님 역할로 바쁜 그는 24일부터 새로운 봉사활동 한가지를 더 시작한다. 바로 우리 궁궐을 찾는 이들에게 궁궐에 대한 이해를 돕고 안내하는 ‘우리 궁궐 지킴이’ 일이다. 평소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던 그는 한국역사에 대해 좀더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마침 지난해 말 다카코의 제자격인 주부·직장인 5명이 좋은 프로그램이 있다며 함께 공부하자고 제안해 왔다.
겨레문화답사연합에서 운영하는 ‘우리 궁궐 지킴이’ 시민활동이었다. 생생한 역사의 현장인 궁궐에 대한 이해야말로 진정한 역사공부라고 생각하고 신청서를 냈다. 그런데 함께 공부하자던 제자들은 까다로운 교육과정을 마친 후 6개월간 궁궐 지킴이 자원봉사를 해야 한다는 규정에 겁을 먹고 그만 모두 포기해버렸다. 결국 혼자 접수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궁궐 지킴이 되기는 쉽지 않았다. 99년 ‘우리 궁궐 지킴이’가 활동을 시작한 후 첫 외국인 지원자라는 점 말고도 그가 다름아닌 우리 궁궐의 역사에 가장 참담한 수난을 가져다준 일본인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다카코는 자신이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을 침략할 당시 1만8천여명의 왜군을 이끌고 맨먼저 조선땅을 침략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후손이라고 밝힌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히데요시가 죽은 후 후계자 결정을 둘러싼 내란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반대편에 섰다가 패해 결국 처형당하고 말았다. 학계에서는 그의 후손이 절손된 것으로 보고 있다.
“직계는 아니지만 고니시 유키나가의 후손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대로 무사의 집안이었고 가보로 내려오는 무사의 칼도 있어요. 또 멸문지화를 피해 살았던 곳으로 유명한 ‘도쿠시마’라는 지방에서 저의 조상들이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겨레문화답사연합’은 다카코의 신청을 두고 ‘과연 일본인이 일본에 의해 황폐화된 우리 궁궐의 역사를 방문객들에게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 등등 많은 고심을 했다. 다카코의 조상을 안 한 관계자는 “재수없다”는 극단적인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열정이 남다름을 알게 된 주최측은 일단 교육신청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50시간의 고된 교육을 끝까지 마치리란 보장도 없었기 때문이다. 교육기간 중 지각이나 결석을 세차례 하면 ‘우리 궁궐 지킴이’ 자격에서 자동 탈락된다.
그러나 매주 한번씩 저녁 6시30분에 시작해 9시가 넘어야 끝나는 강의에 그는 제일 먼저 자리를 잡고 강의를 기다렸다. 언제나 앞에서 세번째 줄에 앉았다. 슬라이드 자료수업이 많았기 때문에 가장 잘 보이는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런데 한번은 수업중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 벌어졌다. 일제에 의한 궁궐 소실을 설명하던 한 강사가 흥분한 나머지 “일본놈, 일본놈들!” 하며 격분한 것이다.
지난 2개월간 ‘가시방석’에 앉아 조선 궁궐사를 비롯해 궁궐 건축의 이해, 서울의 궁궐, 궁궐의 상징물 등을 빈틈없이 배웠다. 노트 필기도 제일 열심히 했다. 단 한번의 지각도 없이 무사히 과정을 마치고 드디어 지난 3일 수료식도 마쳤다. 10일에는 경복궁에 나가 궁궐 지킴이 선배들에게서 현장교육을 받았다. 매주 교육일이면 밤 11시나 돼서야 집에 돌아오는 아내에게 별말이 없던 남편도 과정을 마쳤다는 얘기에 “그렇게 열심히 할 줄 몰랐다”면서 반가워했다.
다카코는 현장교육을 마친 후 혼자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아 경복궁 복원모형을 찬찬히 보았다. 현재 남아있는 궁궐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규모와 그 궁궐에서 숨쉬었을 역사 속의 인물들이 느껴져 가슴 한구석이 찡해졌다. 복원이 한창 진행중인 경복궁을 바라보며 ‘내 마음의 궁궐’을 가슴에 그려 넣었다.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궁궐을 찾는 모든 이들이 궁궐의 제 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껍데기만 남은 ‘죽어있는 궁궐’만 휘휘 볼 것이 아니라 수백년을 뛰어넘어 숨쉬는 역사의 현장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요”
고니시 다카코는 자신이 그 일을 제대로 해낼지 걱정이다. 그러나 우리 궁궐을 소중히 여기는 진실만은 통하리라 믿는다. 6월에는 성남시에서 개최하는 ‘디자인박람회’에서 통역봉사자로 활동할 계획이다. 이 ‘한국 아줌마’는 사람끼리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며 마음을 나누는 것 만큼 보람된 것이 어디 있겠느냐며 살며시 웃었다.
☞[취재수첩]입구에선‘오뎅’팔고 소림사같은 박물관…
다카코는 평소 우리 궁궐을 보며 의문을 가졌던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제일 놀랐던 것은 바로 경복궁 입구에서 팔고 있는 일본음식 우동과 오뎅. “1992년에 처음 경복궁을 찾았는데 ‘우동과 오뎅이 조선 궁궐에서 가장 맛있게 먹던 음식이었나’ 하고 혼자 갸우뚱했어요”. 그는 궁궐의 고풍스러움과 어울리는 국내 전통차나 대표적인 궁궐음식을 파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경복궁을 돌아보며 눈에 거슬렸던 건물도 있다. 가장 높게 올라서 있는 국립현대민속박물관이다. 불국사, 법주사, 금산사 등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설명을 후에 들었지만 중국영화에 등장하는 소림사쯤으로 보였던 것이다. 오히려 근정전을 압도하는 듯 우뚝 솟아오른 모습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궁궐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경건한 마음은 고사하고 제멋대로 식·음료를 즐기고 담배를 피우고 애완동물을 데리고 거니는 모습에 처음에는 ‘이런 나라가 있나’ 당황스럽기까지 했단다. 문화가 달라서인지 궁궐에서 결혼사진을 찍는 것도 이상스러웠다. 일제에 의해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격하된 수난의 역사가 떠올라 죄스럽기도 하지만 이젠 궁궐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는 궁궐 지킴이로 활동하는 동안 유서깊은 사적지를 도시공원마냥 여기는 방문객들에게 아줌마 특유의 ‘잔소리’ 실력을 발휘해볼 각오다. 얼마 전에는 인사동 한복집을 찾아 생활한복도 한벌 마련했다. 마침 고운 살구색이 왕비가 살던 교태전 후원의 빛깔들과 잘 어울려 설레기만 하다.
☞ 위 기사내용은 [경향신문] '메거진X란'에 3월 26일(월) 게재된 내용입니다.
고니시다카꼬 선생님은 겨레문화답사연합이 주최한 제3기 궁궐지킴이 '기본교육'을 마치시고 현재 경복궁 2반에 소속되어 궁궐지킴이 활동의 첫 걸음을 떼었습니다. 성격은 매우 쾌활하시고, 매사에 열성이시며, 궁궐지킴이 활동에 대한 각오도 다부지답니다.
물론 고니시 선생님 이외에도 172명의 궁궐지킴이 자원활동가들이 경복궁, 창경궁, 덕수궁, 종묘에서 매주 토요일 활발한 자원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토요일 궁궐에 오시면 회원 여러분께서도 이들 지킴이 활동가분들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애정, 아낌없는 후원을 바랍니다.
☞ 기사내용중 임진왜란시 조선을 처들어온 고니시유키나가의 후손이라서 "재수없다"고 한 한 관계자는 기사내용과 다름을 정정합니다. 이 내용은 기자에게도 확인한 내용으로써 착오에 의해 잘못 기술된 내용임을 일러둡니다. (*선생님이란 호칭은 나이와 상관없이 지킴이 상호간의 호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