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학창시절이라면 누구나 한번 씩 불러봤을 만한 단소이고 구하기도 쉬워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가벼워 보이기만 하는 것이 단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말이지 그 청명한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격분한 황소마냥 온 사방을 헤집고 다니더라도 온몸에 힘을 놓은 채 편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단소이지만 단소가 우리나라에 어떻게 전해졌거나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 그 누구도 자세히 알고 있지 못해서 안타깝기도 합니다.
우선 단소는 향피리나 현재의 아쟁과 같이 향악 연주에 알맞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양금과 함께 이조 말에 속하는 악기이며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즉, 4000년 전 황제 헌원 때 기백의 창작으로, 조선조 순조 때 청에서 들어왔다고 주장한 이도 있고, 또는 한대 단소요가의 단소 명칭이 우리나라와 같으므로, 마치 한가지인 것처럼 설명된 일도 종종 있으나, 이조 순조 때 청에서 들어왔다는 기록이나, 단소요가가 곧 단소라는 기록도 아직 발견되지 않아서, 이 모두는 다만 추측에 불과한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단소요가에 대하여 수서 음악지에는「 한명제때 4품의 음악 중 그 넷째를 일컬었으며, 군중에서 쓰던 음악」이라 하였고, 후한서 예의지 주 에도 「단소요가는 군악이다」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는 군악으로 판명되고 있습니다.
또한 원래 소(簫)라는 악기는 세로로 잡고 부는 종적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가로 로 잡고 부는 횡적을 가리키는 적(笛)과 비교되어 쓰이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세로로 잡고 부는 관악기로는 퉁소가 있는데 단소는 이보다 작은 것 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이지만 언제부터 단소가 우리 음악에 쓰이기 시작했는지는 전혀 알려진 바 없으며 성종 때의 '악학궤범'이나 영조 때의 '증보문헌비고'에도 언급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조선 후기부터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고 합니다.
2. 청성곡을 듣고
손발이 모두 얼어버릴 듯한 어느 겨울밤에 그 누구도 알아주지는 않지만 자신의 길을 외로이 가는 냇가에 흐르는 물에 달빛이 비춰 그가 가는 길을 외롭지 않게 한다. 지저귀는 한 마리 짝 잃은 외로운 새 또한 그를 반겨준다. 이것은 눈을 감고 청성곡을 듣고 있을 때 내가 느끼는 이미지다.
청성곡을 듣고 있노라면 그 구슬픈 가락에 마음이 숙연해지는 느낌이다. 아랫입술에 힘을 주고 복식호흡을 하며 가늘게 김을 불어넣어 줄때 나오는 그 단소 특유의 맑으면서도 영롱한 소리는 뭔가 이루 말할 수 없는 특유의 설렘까지 건내 준다.
청성곡은 본디 대금 정악 독주곡의 백미라 불리며 여러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곡이다. ‘청성자진한잎’ 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지니고 있는 청성곡은 가곡 이수대엽을 변조한 '태평가'를 2도 높인 다음, 다시 옥타브를 올려서 시김새를 첨가하고, 또 특정음을 길게 늘여서 만든 곡이라고 한다. 특히 특정음을 길게 늘인 청성곡을 특징을 공부하고 나서 끊고 이음을 확실하게 분간하는 서양음악을 듣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기도 했다.
대금으로 독주하는 청성곡은 대금특유의 음색으로 단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대금은 굵직한 대나무를 잘라 만든 악기이다. 모든 것을 달관하고 세속과 떨어진 보다 더 넓은 곳에서 자리 잡고 사는 대나무로 만든 악기라서 그런지 대금 특유의 부드럽고 유안한 음색은 매우 훈훈하고 비단 옷감처럼 부드럽기까지 하였다. 역시 대금 정악 독주곡의 백미라는 이름이 아깝지가 않은 듯 했다.
그러나 나는 큰 흐름보다는 그보다 작고 소박한 기류를 좋아한다. 큰 힘과 굵은 선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듯이 부드럽게 뛰어노는 대금의 음색보다는 소박하지만 그 특유의 영롱함으로 한사람 한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단소의 음색이 더 마음에 들어하는 것은 그 때문인 듯 하다. 슬픔을 겪는 것은 싫지만 그 슬픔을 표현해내는 매개체를 앞에 둘 때 마다 느끼는 기쁨은 단소로 연주되는 청성곡을 들을 때 극대화가 되는 것 같다.
가냘픈 듯 첫 음을 잡아가면서 청송곡은 시작된다. 그 특유의 영롱한 단소소리는 곧 끊어질듯 가냘프지만 곧 힘을 내어 힘있게 뻗어 나가는데 뒤이어 이어지는 흔들며 떨어지는 음은 마치 떨어지면서도 그 미와 지조를 지키려는 한 잎의 단풍잎과 같다. 내가 신비롭다는 생각을 그칠 줄 모르게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우리나라 특유의 음악성이 아닌가 싶다. 서양의 음악처럼 악보에 나와 있는 그대로를 연주자 자신의 혼을 거부하는 악보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다. 청성곡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음악은 연주자 자신이 내고 있는 음 자체야 어느 정도 형태가 갖춰져 있지만 그것은 단지 넓게 흩뿌려져 있는 물과 같다. 그 물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특색이 묻어나 있는 그릇에 옮겨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자신이 연주할 음악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이다. 악보에 적힌 그대로를 예전 그것을 작곡하거나 연주했던 이들과 똑같이 연주해야 하는 서양음악과 자신만의 색채로 음을 채색해가며 연주해가는 우리나라 음악의 차이를 뻔히 보이는 스토리의 드라마를 보는 것과 반전의 반전을 거듭해가며 앞을 예측할 수 있는 그것의 차이는 한번정도 느껴본 이들이라면 저절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비록 서양음악의 하나인 혼성합창을 하고 있지만 문득 느끼는 어떤 옥죄는 듯한 답답함은 어찌할 수가 없다. 사분 쉼표가 그려진 마디에 음표하나 없이 그야말로 깨끗한 상태이지만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채워지지 않는 그릇에 무언가 잔, 이물질이 남아 텁텁하고 답답한 느낌을 받는다. 그에 반해 그야말로 여백의 미를 절실히 드러내주고 있는 청성곡은 그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잊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그 눈물 흘리는 듯한 음을 연주한 뒤에 찾아오는 잠시 동안의 ‘쉼’. 그 잠시 동안의 시간동안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한다. 아니 나는 그 많은 생각으로 인해 오히려 멍한 채 귀만 열고 있는 바보 같은 행동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그 생각 중 하나로 뒤이어 나오게 될 음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 하나만으로 청성곡을 듣기에는 충분하다.
오늘은 새벽부터 이어진 빗소리에 내 마음이 매우 축축해진 느낌이다. 밤이면 날 반기던 서울의 달도 오늘만큼은 좀체 내 곁으로 오지 않아 더욱 외롭기만 하다. 이런 날에 나를 반겨줄만한 친구로 한줄기 흐느끼는 소리를 내는 단소의 청성곡을 듣고 있으니 새삼 기쁘지 아니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