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 여호와를 경외하라 (20160124)
본문 : 잠언 9장 10절,11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나 지혜로 말미암아 네 날이 많아질 것이요 네 생명의 해가 네게 더하리라"
오늘도 행복한날 행복한 주일 아침입니다. 오늘도 변합없이 우리를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함께 하나님과 인사를 나누도록 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영광을 받아 주시옵소서. 아멘. 아멘,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아침 온도가 영하18도까지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 추운 날씨에 왜 이곳에 나오셨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떠한 설교를 들으러 오셨습니까? 아니 조금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은 어떠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그런데 오늘 아침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여러분들에게 힘을 드리기 보다는, 자신을 분명히 알게 하십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시듯이, 이것이 여러분들이 힘들어하고, 여려분들이 위로를 받고 싶고, 여러분들이 힘을 얻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 설교를 보시는 여러분들은, 제대로 여러분들의 갈증이 풀어지는 복된 시간이 되어질줄 믿습니다. 그건, 설교자가 하는 말씀도 아니고, 우리의 생각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이 말씀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는지를 알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이부분 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계십니까? 그럼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잠언08장 13절을 통해 "여호와를 경외하는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경외란 히브리어 "야레"라는 동사로 하나님의 권위와 거룩하심에 대한 공경과 두려움을 나타내는 데 쓰는 용어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한다는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거룩하심에 대한 공경과 두려움을 나타내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가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떨게하시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을까요? 아닙니다. 두려움을 나타내는 행위는 죄 있는자들의 행동일뿐, 우리 믿는 사람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권위와 거룩하심에 대한 공경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은, 신앙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입니다. 자기 죄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세상 어느 누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 두려워 하지 않을 인생이 있을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십니까? 저 입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명하는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할 것과 함께 말씀하고 있습니다(신 6:4-). 그건 시내 산에서 율법이 주어질때, 하나님은 영광과 광채 가운데 친히 나타나, 이 경외심을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속에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신 4:10).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경외할수 있는것은, 어느 정도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이 경외심(감)을 경험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어리석은 사람(시 14:1, 53:1 잠 1:7)에게는 경외심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경외함의 결과이고(고후 7:1),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 없이, 구원은 완성될 수가 없습니다(빌 2:12).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사랑의 가르치심(교의)은, 사람들을 저 공포의 노예된 상태에서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아들된 신분을 준다는 사실입니다(요 15:15, 롬 8:15, 갈 4:5-8).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요 4:18). 이렇게 하여 인간은 심판의 두려움이나, 하나님이 단지 엄격한 주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두려움에서 구원되어지는 것입니다(마 25:24, 눅 19:22).
물론 그렇다고 해서, 창조주에 대하여 피조자가 응당 가져야 할 경외심으로서의 두려움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두려움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는, 그 사랑에 매혹되어,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화해해야 할 것을 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지는 것이라는것입니다(고후 3:12-). 너무 장황하게 말씀을 드린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 하나님을 경외함이며, 우리가 피해갈수가 없는 말씀이기에, 조금은 어려울수도 있지만, 이것이 복음이기에 있는 그대로를 말씀드렸습니다.
옛날 어느 시골 교회 교인들이 기도하기를 '하나님 우리 목사님을 축복해 주십시오. 우리 목사님으로 하여금 십자가 뒤에 숨을 수 있도록 도와 주셔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 외에, 아무 것도 보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떠십니까? 이 기도야말로 참으로 선한 기도이며, 모든 설교자와 모든 크리스천 일꾼들이 마땅히 드려야 할 기도요,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도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행동은 없는 수많은 성도들, 하나님을 너무나도 잘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목회자들, 예수님만이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공경과 두려움이 없는 교회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있습니까?
세계 미인 대회 심사 규정에 의하면 지성미에 50점, 육체미에 50점을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눈에 해당되는 점수가 10점이나 됩니다. 이것은 눈이 우리의 신체 중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차지하고 있는지를 말해 주는 것인데. 사실 눈으로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정해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물이 펄펄 끓는 주전자에서 '와트'는 증기의 힘을 보았고, 번개에서 '프랭클린'은 전기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의 궁전 옥상에서 밧세바를 봄으로써, 그 인생의 비극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볼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할수 있지만, 세상을 바라볼때 우리는 세상을 경외할수 밖에 없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한 자를 아는것이 명철이니라" 라고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로소 안심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로소 안식할수 있고 안주할수 있는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할수 없음을 아시기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연약함을 온전함으로 반전시켜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함께 기도드리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