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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묵상글 (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 가까이 있는데도 멀리 보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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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29 04:15
- 가까이 있는데도 멀리 보는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당신 말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을 때
저는 저의 어머니가 사라질지라도 당신 말씀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말씀으로
바꿔 듣는 것이 제게는 더 실감이 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것은 강 건너의 불이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것은 강 이쪽의 불이기 때문이겠지요.
오늘 주님께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런 일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씀하시듯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가
그제 아름다운 성전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는
주님 예언대로 신음하고 실제로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것을 보는데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거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하시는데
강 건너 불 보듯 멀리 보기에 지난여름 온 지구가 그렇게 펄펄 끓었는데도
지구 종말의 때가 가까이 온 줄도 모르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도 모릅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겁니까?
온수자청와(溫水煮靑蛙)라는 말이 있고,
Boiling flog라는 말이 있는데 끓는 물 속의 개구리라는 뜻입니다.
뜨거운 냄비라면 개구리가 즉시 냄비 밖으로 탈출할 텐데
물이 서서히 끓는 냄비 속에 있다가 서서히 죽어간다는 비유지요.
지금 우리가 꼭 이런 개구리 같습니다.
위기를 멀리 느끼고 그래서 실감 나지 않습니다.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더 큰 위기인데
종말이 오는데도 종말이 오는 줄 모르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모르는 우리는
가까이 왔는데도 멀리 보는 개구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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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누구나 삶 안에서 최악의 기분을 느꼈던 적이 한두 번은 있었을 것입니다. 저에게 잊지 못할 일을 하나 꼽으라면, 서울 신학교에 다녔을 때 학생회장이 되어 사람들 앞에 섰을 때였습니다. 당시 세 개의 학교가 통합되었습니다. 제가 다니고 있었던 서울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 신학대, 부천에 있는 성심여대, 그리고 강남에 있는 가톨릭 의대가 ‘가톨릭대학교’라는 이름으로 합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통합되었던 해에 세 교정이 함께 축제를 했습니다.
이 축제에서 신학대학 학생회장이라는 이유로 무대에 서서 축제 축하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난생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떨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하는 말에는 떨림이 그대로 묻어 나왔고, 너무 긴장해서 열심히 준비한 원고가 전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 앞에서 횡설수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축제를 마치고, 도망치듯 학교를 빠져나왔습니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제 방에 들어가 혼자 펑펑 울었습니다. ‘오늘의 일이 꿈이라면’이라는 생각과 함께 앞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만날까 싶었습니다. 이때 저의 선택지는 다음의 두 가지였습니다.
1번, 계속한다. 2번, 그만둔다.
두 번째를 선택하면 사제의 길을 포기하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첫 번째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를 가지고 밤새워 고민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 고민이었습니다. 지금 잘살고 있고, 당시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저를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 오직 한 사람만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로 ‘나’만 제대로 기억할 뿐입니다.
그때를 떠올리면,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도 1번인 ‘계속한다’를 선택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만두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포기, 좌절, 절망은 어쩌면 악마의 소리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날을 미리 알려 주는 표징들을 제대로 봐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가 잎이 돋자마자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단순히 잎이 돋았다고, 이제 끝이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 열매를 맺기 위해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 교회 역사 안에서 끊임없는 박해와 순교가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 말씀을 따르면서 우리는 분명 영원한 생명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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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훌륭한 부모의 슬하에 있으면 사랑이 넘치는 체험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먼 훗날 노년이 되더라도 없어지지 않는다(루트비히 판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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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세상의 종말과 하느님께서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곧 무화과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알 수 있듯이(루카 21,30), 세상의 사건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아야”(루카 21,31) 한다고 깨우쳐 주십니다.
시대의 징표를 깨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비가 올지 혹은 안 올지, 추울지 혹은 더울지를 감지해내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징표를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시대의 징표를 진정 깨닫는다면, 세상을 달리 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마음’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모든 사건을 바라보고, 모든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를 펼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먼 미래에나 혹은 이 세상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언젠가 먼 미래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고, ‘지금 여기’에 와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미’ 오신 주님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아니한 까닭일 것입니다. 우리가 완고한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을 이미 받았음을 보는 것이야말로 정말 위대한 발견이 될 것입니다.
사실, 그 발견은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그것이 우리를 발견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베풀어진 하느님의 선물”이 먼저 우리를 발견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한다는 것은 그것을 주시도록 하느님을 설득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주신 그분의 선물을 알아차리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맛보기 시작한 그 무엇을 청할 수 있을 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당신의 사랑이 먼저 우리에게 베풀어졌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오늘,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으로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33)
주님!
제 영혼이 당신의 자리이오니, 말씀을 이루소서.
당신께 승복하게 하시고, 말씀으로 활기차게 하소서.
저에게 뿌리신 말씀이 자라나 열매를 맺게 하시고
당신의 말씀이 저에게서 사라지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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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일을 볼 수 있는 눈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새로운 싹이 트면 계절의 변화를 느끼듯 세상의 여러 혼돈과 징표를 보면 그것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나의 혼돈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데 꼭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하나의 풍파가 몰아치면 그것을 계기로 새로운 틀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혼돈과 어둠 속에서 움터 오르는 새 하늘, 새 땅의 창조와 광명을 내다보는 눈”(이현주목사), 혜안, 영적인 눈을 가진 이는 행복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혼돈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나라가 우뚝 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또한,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마음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마음 한구석엔 두려움이 있습니다.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 ‘각자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성직자를 떠받쳐 위하고 거룩하게 보지만 그 속을 알면 누구보다도 부끄러움이 많고 자비를 간구해야 할 사람입니다. 맑고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로 부끄러움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들은 언제나 살아있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는 영적인 삶과 육적인 삶의 대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영원히 변치 않을 말씀을 들었으면 그에 걸맞은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가슴에 남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 것은 사라지지만 주님의 말씀을 차지한 사람은 영원합니다. 나자렛 예수는 사라질지라도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나 자신의 한계 속에 내 옆에 계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가를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영원한 것을 붙드는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겨냅시다”(프란치스코 교황).
우리가 일상 안에서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뻔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서도 걸려 넘어지고 나서야 후회하고 새로운 다짐과 시작을 합니다. 마지막 날이 언제 올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명한 것은 “그날이 오고 있다.” 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날이, 오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때에 주님을 떳떳이 만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종말의 정확한 날짜를 감춘 것은 공포를 갖게끔 하기 위한 것이아니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사랑의 결실을 맺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말씀 안에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청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내 마음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저의 길에 빛”(시편 119,105)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주님의 주권과 통치가 받아들여지고 있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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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뜻밖에 등장하면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거기에서 왜 나와?’ 사제들의 모임에 스님이 있으면 그럴 수 있습니다. 이슬람 사원에 교회의 목사님이 있으면 그럴 수 있습니다. 지난번 미국 대선이 있었고,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승리 연설에 뜻밖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를 호명하면서 이번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일등 공신’이라고 추켜세웠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트럼프 대통령 후보에게 2,000억 원 이상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트럼프의 공약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매주 복권을 추첨해서 100만 불을 주었다고 합니다. 언론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2,000억 원을 투자했지만, 2조 원 이상의 이익을 얻었다.” 저는 예전에 일론 머스크의 강연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화성에 인류가 이주해서 살 수 있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구는 소행성과 충돌할 수 있고, 지구 자체의 원인으로 큰 재앙이 닥칠 수 있습니다. 지구는 여섯 번의 멸종을 이미 겪었습니다. 화성에 인류가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면 언젠가 다가올 재앙을 피할 수 있습니다.” 화성으로 가는 방법을 찾으면서 인류의 과학 기술은 더 발전할 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오늘은 일론 머스크의 꿈이 인류에게 준 긍정적인 요소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일론 머스크의 꿈은 여러 방면에서 인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비전은 단순히 기술 발전을 넘어서, 인류의 미래와 지속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 답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이어졌습니다. 테슬라를 통해 머스크는 전기차와 재생 가능 에너지 사용을 대중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화석 연료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이바지를 했습니다. 머스크의 비전은 단순히 수익을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지속 가능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기술의 상용화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스페이스X를 통해 우주 탐사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미래의 화성 이주 가능성을 높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우주여행을 넘어서, 인류의 생존 가능성을 지구 밖으로 확장하려는 장기적 목표로 인류의 존재와 미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습니다.
머스크가 추진하는 다양한 혁신 기술들은 단순히 미래를 꿈꾸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이퍼루프와 같은 교통 혁신, 인공지능 연구, 뉴럴링크와 같은 신경 과학 기술 등은 인간의 삶을 더욱더 효율적이고 편리하게 만들려는 노력입니다. 테슬라 특허 공개와 같이, 머스크는 기술을 독점하기보다는 인류 전체의 발전을 위해 공유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이는 개인적 성취보다 공동체의 발전을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실천한 사례로, 기술과 지식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머스크의 도전적인 꿈과 비전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특히 청년층에게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실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성공 사례는 개인의 꿈이 사회와 세계에 어떤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열망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의 꿈은 단순한 기술 개발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2000년 전에 묵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었습니다. 그것은 우주선을 만들어서 새로운 별을 찾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죽어서 가는 나라를 말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꿈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도 우주선을 타고 새로운 별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참된 자유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생명은 죽음이 있기에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거부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는, 주어진 삶에 충실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찾아야 합니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지라도,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며, 그것은 죽음을 넘어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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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다시 여름이 가고 가을과 겨울이 이어지면 우리는 일 년이라는 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그 시간 속에 바쁘게 살 때는 알아차리기 쉽지 않겠지만 문득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알게 됩니다. 전례력으로 일 년의 막바지에 우리는 와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기억하고 집중해야 하는 곳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말씀은 방대합니다. 사실 말씀뿐만 아니라 주님의 여러 활동과 성경 속 주변 사람들의 증언도 우리는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성경 말씀은 지금도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주님께 첫째가는 계명을 물었던 그 장면 말입니다. 그 물음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는 계명은 주 하느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며, 둘째가는 계명은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부분이요.
특히 주님 시대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우리에게 이어져 오는 말씀은 바로 ‘사랑’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사명인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하느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합니다. 이웃보다 자기 욕망을 더 사랑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변화무쌍한 우리들 마음 때문에 변하지 않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이 아닐까요?
변하지 않는 기둥 같은 주님 말씀이 늘 우리 마음을 잡아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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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2
-행복은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가진 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이다.-
갑자기 세잎클로버의 꽃말, ‘행복’이 떠오릅니다.
세잎클로버(행복)가 지천으로 깔려있는데 그 안에서 네잎클로버(행운)를 찾는 우리 모습.
행복은 지금 그대 옆에 있습니다.
행복은 지금 그대 손에 있습니다.
행복은 지금 그대 공간 안에 있습니다.
무엇을 가졌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대가 가진 것에 기뻐하고 감사할 때
그대가 바라는 행복은 그대 가슴에 꽃을 피우고 향기를 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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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나라의 꿈
“살아 있는 자들만 꿈꾼다!”
“보라,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묵시21,3ㄴ)
2012년 수도원 설립 25주년을 맞이하여 수도공동체의 역사를 회고하며 쓴 글의 주요 내용 넷이 지금도 선명히 떠오릅니다.
1.모든 것은 때가 있다.
2.모든 것은 필요했다.
3.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결론하여,
4.지금을 살아라(carpe diem)
이런 깨달음을 사는 이들이 진정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들입니다. 이런 이들은 과거를 인정하고 긍정하나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를 삽니다. “만약?”이란 질문은 부질없는 공허한 질문입니다. 하느님은 나름대로 최선, 최상의 길로 인도해주셨을 믿고 하루하루 선물로 주어지는 오늘, 여기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입니다. 참으로 꿈꾸는 사람이 삽니다. 부단히 현실화되는 꿈입니다. 성서의 사람들, 한결같이 꿈꾸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꿈중의 꿈이 하느님 나라의 꿈입니다. 정말 사람은 꿈이, 비전이, 희망이 있어야 삽니다. 오래전 두 시가 생각납니다.
“창문밖 가난한 언덕
보랏빛 은은했던 제비꽃 그 자리에
샛노한 민들레꽃 감동의 그 자리에
하얀 눈 덮여 있다
흰 눈 덮인 하얀 땅
보랏빛
샛노란 빛
봄꿈을 꾸고 있겠지”<1998.1.22.>
그해 겨울은 이 ‘봄꿈’이란 시로 마음 따뜻한 겨울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엊그제 뜻밖에 내린 많은 눈으로 온누리가 눈부신 눈꽃들로 가득합니다. 흰눈을 볼 때마다 요셉수도원을 각별히 사랑했던, 지금은 작고한 테제 마르코 수사의 “화이트 사일런스(white silence)” 하얀 침묵이란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저절로 하얀침묵에 젖게 하는 흰눈이요, 여기서 피어난 “봄꿈”이란 시입니다. 초봄의 부활시기에 쓴 또 하나의 “살아 있는 것들만 꿈꾼다" 란 시도 생각납니다.
“살아 있는 것들만 꿈꾼다
죽어 있는 것들은 꿈꾸지 않는다
연초록 새싹으로
화사한 꽃들로 피어나는
봄꿈의 나무들!
살아 있는 것들만 꿈꾼다”<2009.4. >
살아 있다 하나 꿈꾸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죽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살아 있는 자들은 꿈꾸는 자들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시간, 하느님을, 하느님의 나라를 꿈꾸는 시간이요 파견되면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나라 꿈을 실현하며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묵시록의 주인공 요한 사도야 말로 꿈꾸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고 모든 것은 다 지난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오늘 묵시록입니다. 마침내 이런저런 과정을 통과한후 요한의 꿈이 꽃처럼 활짝 피어났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집니다.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짜 하느님 나라의 꿈입니다. 눈만 열리면 오늘 지금 여기가 새 하늘과 새 땅이요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인 새 예루살렘입니다. 이런 하느님 나라의 꿈을 앞당겨 살게 하는 이 고마운 미사은총입니다. 과거가 현재를 만들기도 하지만 미래의 하느님 나라의 꿈이, 비전이, 희망이 현재를 만듭니다. 부단히 하느님 나라의 꿈을 현실화하면서 주님을 닮아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야하는 우리들입니다.
타고난 것들이 모두라면 절망이겠습니다만, 하느님께 희망을 둔 우리에게 날마다 새롭게 선택할 것은 무궁무진합니다. 무엇보다 하느님 나라의 꿈을, 희망을, 기쁨을, 평화를, 감사를, 행복을 선택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두 말씀이 우리에게 무한한 격려가 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님과 함께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의 평생 꿈이 하느님 나라 꿈이요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오늘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한 가르침이 참 고맙습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인 이런 일들입니다.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하느님의 나라는, 주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합니다. 지금 연중 마지막 34주간은 성서주간입니다. 주제 성구 “지혜의 시작은 가르침을 받으려는 진실한 소망이다.”(지혜6,17)라는 말씀처럼 주님의 말씀을 갈망하고 배울 때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새삼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하는 일이 하느님 나라의 꿈과 실현에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오늘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영원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당신 집에 사는 우리들!
우리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행복하여라, 당신께 힘을 얻은 우리들!
우리들은 더욱더 힘차게 나아가리이다.”(시편84;6,8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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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스미도록 가까이>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 21,31)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가까이 오듯이
하느님의 나라에
우리가
가까이 갑니다
깊어가는
믿음으로
피어나는
희망으로
타오르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스미듯이
하느님의 나라에
우리가
스미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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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 21,29-31)
사람의 아들을 맞을 준비를 하며 깨어 있어라
그대의 삶을 깨어서 지켜보십시오. 그대의 등불을 꺼뜨리지 말고 그대의 허리띠를 풀어 놓지 마십시오.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니"(마태 24,42; 루카 12,35) 준비하고 계십시오. 그대들 영혼에 좋은 것을 찾는 모임을 자주 가지십시오. 생의 종말에 기가서 완전함을 입증하지 못하면, “한평생 믿은 것이 헛일이 될 것”(바르나바의 편지 4,9 9) 이기 때문입니다.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디다케)-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3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6).
이 본문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올 한데 묶는 하나 됨과 하느님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현대의 한 주석학자는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 됨이야말로 교회와 모든 피조물의 인증서다."1 하나 됨은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이다. 엑카르트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피조물과 하나가 되는 것을 가리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내밀한 하느님 경험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 됨의 의미를 분석하기 시작한다. 그는 부정적으로 시작한다. 왜냐하면 만유내재신론이 사물의 존재 방식이라고 해도, 또한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해도, 우리는 하느님이 ‘만물 위에 있고, 만물을 꿰뚫어 있고, 만물 안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느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하느님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이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287)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성체성사에 대하여(강론 272)
이것이 왜 빵의 상징 안에서 이루어지겠습니까?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기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직접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전례를 수행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렷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1코린 10,17).
이 말씀을 이해하고 기뻐하시오. 이 말씀 안에 일치, 진리, 깊은 신심, 사랑이 있고 “하나인 빵”이 있습니다. 이 하나인 빵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렷이지만 한 몸입니다.” 빵 하나가 단 한 개의 밀알로 만들어지는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밀알로 만들어지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세례를 받는 중에 구마 의식이 거행되는 동안 여러분은 밀가루로 빻아졌습니다.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베푸는 동안 여러분은 동시에 그 물로 목을 축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령의 불을 받았을 때 그 불에 의해 여러분은 빵으로 구워졌습니다. 여러분야 지금 보고 있는 것대로 되십시오. 그리고 바로 여러분 자신인 그리스도의 몸을 받으십시오. 바오로 사도께서 빵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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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33)
오늘은 ‘오광수’의 「내일을 예약합니다.」라는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내일을 예약합니다. 저기 저 하늘과 같이 눈부시게 파란 내일을 예약합니다. 내일은 생각이 젊어져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정열이 살아나고 내일은 가슴이 건강해져서 진리를 위해 양심의 고동을 울릴 수 있고 내일은 마음을 활짝 열어 미움이 사라지고 더불어 사는 날이길, 내일을 예약합니다. 저기 저 아침 해같이 타오르는 붉은 내일을 예약합니다. 내일은 생각이 요동쳐서 좌절했던 자리에서 도전하는 자리로 바뀌고 내일은 가슴이 뜨거워져서 사랑을 위해 진실의 고백을 나눌 수 있고 내일은 마음이 손을 잡고 시기와 질투가 없는 정스러운 날이길, 내일을 예약합니다. 남은 건 어제의 실패와 어려움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흘린 진실한 땀과 소중한 노력으로 내일을 예약합니다. 』
매일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와 같이 거의 비슷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내일이 전혀 다른 하루가 되리라는 희망에서 내일을 예약하는 사람은 분명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제와 다른 내일이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깨어 살려는 사람은 분명 내일을 희망하면서 일상의 반복된 리듬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철저히 계획하고 준비한다고 해서, 내일 모든 일이 다 성공하지는 않고 더러 실패를 맛보게 될지라도 말입니다. 때론 삶에는 본인 스스로가 계획한 적이 없는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짐으로써 오늘과 전혀 다른 내일을 맞이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처럼 세상의 종말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올 것이며, 그날은 분명 예상하지 않을 때 올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내일을 예약하면서 언제 올지 모를 내일을 오늘부터 계획하고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비록 남은 건 어제의 실패와 어려움밖에 없을지 몰라도, 오늘 흘린 진실한 땀과 소중한 노력으로 내일을 예약해야 합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21,33) 모든 것이 다 변하고 사라질지라도 하느님의 말씀만은, 하느님만은 영원하실 것임을 우리는 신앙으로 믿고 받아들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시다.”(1베1,24)라고 증언합니다. 풀꽃과 같이 우리네 인생도, 세상의 모든 것도 덧없이 사라져 버리겠지만,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난”(1베1,23) 존재답게 하느님의 말씀에 귀의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의탁하여 새롭게 거듭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등불이며 빛이고(시119,105), 이 말씀을 보고 맛보고 체험할 때,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고 자연의 리듬 곧 “무화과나무와 다른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21,29~30)되며,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깨달을 수가 있을 겁니다. 외부 환경을 바꿔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가 영원히 썩지 않을 생명의 말씀으로 먼저 변화되고 변모될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으로 마음이 가난해지고, 하느님의 의로움을 살기 위해 박해를 받을 때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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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하느님 나라 지름길은 오직 기도뿐 /
박윤식 [big-llight] 241128. 19:35 ㅣNo.178007
닭싸움을 즐기는 상인이 있었단다. 그는 거금을 투자해 싸움닭 기르는 이에게 자신의 닭을 부탁했다나. 열흘 후 그가 물었다. “닭이 싸울 만한지요?” “아직은 아닙니다. 자기 힘을 너무 믿습니다.” 다시 열흘 뒤에 상인이 묻자, 조련사의 답이다. “아직도 아닙니다. 닭만 보면 싸우려 덤빕니다.” 또 열흘 뒤의 답이다. “아직도 안 됩니다. 지금도 상대를 보며 힘만을 과시합니다.”
다시 열흘이 지나자, 조련사가 말한다. “거의 됐습니다. 이젠 교만하지 않고, 함부로 싸우려 덤비지 않고, 마치 나무로 깎아 놓은 듯합니다.” 이 닭이 싸움판에 ‘꼿꼿이’ 서기만 해도, 다른 닭들은 감히 덤비지 못하고 슬슬 뒤로 물러났다. 한낱 미물인 닭도 준비하고 훈련하면, 이렇게 강자로 바뀐다. 우리도 살아남기 위해서 종말을 얼마만큼 준비하며 살고 있는지. 우리 인생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훈련되면서 성장되고 완성되리라. 따라서 주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겠다.
이러하니 슬프다고 슬픔에, 기쁘다고 기쁨에 메이지 말아야 할 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인생이 덧없다고 말해서도 안 되리라. 슬픔의 순간, 기쁨의 순간에도 우리 삶의 한 중심을 관통하는 영원한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말씀이다. 모든 게 다 지나가고 사라져도, 이 말씀과 함께 우리는 영원을 살게 될 테니. 세상의 그 숱한 만남, 계절의 변화도 말씀으로 창조되었기에.
말씀 안에서 이 모든 것은 하느님 나라와 연결되리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단다. 주변에는 읽을 수 있는 시대의 징표가 너무나도 많이 깔려 있는데, 이를 바로보고 해석할 줄 아는 눈은 모두에게 주어진 것 같지 않다. 사실 예루살렘 멸망은 마치 세상의 종말과 같았다. 우리는 이를 새로운 하느님 나라가 건설될 결정적인 계기로 봐야 한다.
“무화과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돋은 잎을 보고 여름이 온 줄을 알게다.” 나무는 계절이 바뀌는 것을 알려주니 늘 새롭다. 우리 삶에서 하느님께서 일으키시는 변화들에 민감해야 한다. 유다인들은 무화과나무에 여린 잎이 돋는 것을 보면서, 열매가 무르익을 여름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챘으리라.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잎사귀로 당신 나라의 때가 찼다는 것을 깨우치신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이르시는 거다.
실제로 이는 하느님 나라를 고대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각성시키고 유다인 선민사상을 탈출하게 만든다. 그래서 교회가 모든 민족에게 개방되었고 새로운 형태의 하느님 나라가 시작될 게다. 말씀은 살아 있으며 삶의 구심점이다. 신앙인은 자신의 삶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며, 하느님 발자취를 발견하는 이들이다. 다시 출발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종말을 준비하는 첫걸음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다가올 하느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할 나라라고 믿는다. 이렇게 예수님에게 모든 왕권이 주어졌으며, 그분 나라는 세상 종말에 다시 완성될 터이니까.
사실 그 때와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지만, 그분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신단다. 이는 예수님께서 직접 약속하셨다. 따라서 하느님 뜻을 헤아리는 게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본분이다. 이를 아는데 필요한 것은 기도이리라. 기도는 하느님 능력이 바로 우리 힘이 되게 하기에. 누가 뭐래도 꾸준한 기도만이 하느님 나라로 바로 들어갈 그 지름길이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이르셨다. 이처럼 하늘과 땅이 사라질지라도, 당신 약속의 이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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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과거의 선택과 행동이 지금 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과거의 좋았거나 나빴던 경험들은 나에게 긍정적 또는 부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이 과거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과거만이 나를 결정짓지는 않습니다.
지향하는 이상과 가치, 곧 미래에 대한 전망도 지금의 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미 지나가 버렸고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발목이 잡혀서 나를 바꿀 수 없다고 단념하고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기보다는, 이상을 지향하고 추구하면서 나를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진다면 과거는 다르게 다가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저 깊은 곳에서 나를 괴롭히고 있는 부끄러운 과오, 상처, 실패들도 나아가야 할 이상을 향한 밑거름이 됩니다.
과거에 버림받았던 경험이 불신과 폐쇄적인 성격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미래의 전망 안에서, 그 아픈 체험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해 줄 수 있는 따뜻함을 이끌어 낼 수도 있습니다.
연중 시기의 막바지에 우리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장차 다가올 종말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종말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종말에 대한 미래의 전망이 지금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의 선택과 행동이 지금의 내 삶을 이루고, 지금 우리는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과거만이 현재를 만든다면, 우리는 미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섭리에 대한 믿음, 미래 종말에 주실 위로와 희망, 미래에 감당해야 할 심판 등 미래에 대한 전망이 나의 과거를 다시 볼 수 있게 하고, 지금의 나와, 나의 삶을 바꿀 수 있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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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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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프란치스코 가족 모든 성인 축일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계명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것을 지키면
오래 살고, 재산과 많은 후손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었던 이 사람은
당연히 그 계명을 잘 지켜 왔습니다.
그러한 그가 여전히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여쭈어본다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확실히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즉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 부족한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여기에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
가진 것을 다른 이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즉 가난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방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부족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려는 마음,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마음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 부족한 이유는
계명을 통해 하느님을 따르려는 마음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는 마음이
그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계명은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음을 뜻합니다.
그 하느님은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당신과 관계 맺는 사람에게
당신께서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십니다.
즉 계명을 지키면서 얻는 장수, 재산 그리고 후손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따라오는 이차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과 관계가 맺어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 이어지는 부분에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저희는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의 말에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따르려는 하느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좋으신 분이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누구는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누구는 가진 것을 내어주는 것으로
그분을 따르고
그분과 관계를 맺습니다.
그 방식은 사람마다 각자 다를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분을 찾는 마음,
그분과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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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희망과 설렘으로 가득 찬 기쁨의 날, 종말!
사흘 내내 강풍을 동반한 비와 진눈깨비가 계속 내렸습니다.
늘 잔잔하던 바다도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표지판이 넘어지고, 그간 용케 버티고 있던 단풍들도 모두 떨어져 내렸습니다.
순식간에 가을에서 한겨울로 넘어온 느낌입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이 세상 것 무엇 하나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물건들도, 죽고 못 살던 인연들도, 목숨처럼 중요시 여겼던 일도, 직책도, 사랑도, 젊음도 다 사라져간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끝도 없이 순환을 거듭하는 자연, 부침을 거듭하는 인간사야말로 인생의 참된 깨우침을 주는 큰 스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진리를 명확히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변화무쌍한 이 세상 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에 더 큰 가치와 우위성을 두고 살아갈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33)
은혜롭게도 하느님은 변화무쌍한 우리 인간과 달리 언제나 한결 같고 든든하십니다.
영원불멸하십니다.
언제나 그곳에 서 계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어떻습니까?
세월의 흐름 앞에 별 도리가 없습니다.
서서히 무너져 내립니다. 천천히 사라져갑니다.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고 태초의 상태, 무(無)로 돌아가고 맙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사랑도 가고, 꽃다운 청춘도 다 지나갑니다.
세상도 지나가고 하늘을 찌를 것 같던 권세도 잠시입니다.
모든 것이 떠나가고 인간 세상과 인류 역사의 끝에 오직 한 분만 남을 것인데, 그분은 바로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그분의 말씀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끝, 종말에는 모든 것이 다 사라지겠지만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실 사랑은 끝까지 남아있을 것이라는 말씀,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세상의 끝, 재림의 시기에 하느님을 거슬러 살아온 사람들, 하느님을 거부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공포의 때가 확실하다.
그러나 반대로 하느님 말씀 안에 살아온 사람, 하느님만 신뢰하며 그분만 붙들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해방의 날이자 구원의 날, 기쁨과 환희의 날이 분명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종말이 공포심에 부들부들 떠는 날이겠지만, 하느님 말씀 안에 산 우리들,
그분 말씀을 열심히 실천하며 살아온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또 다른 시작, 희망과 설렘으로 가득 찬 기쁨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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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다가온 것을 알듯이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29-31절) 하시고 예루살렘의 파멸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를 미리 알아서 대비하라 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가 많이 들어온 말씀으로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 모르니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씀이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말씀을 들은 그 세대가 가기 전, 70년에 파괴되었지만, 예수님의 재림, 세상의 종말은 아직 오지 않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시기의 징표는 알 수 있으나 그날은 하늘의 천사들도, 사람의 아들도 모르고 하늘에 계신 성부만이 아신다고 하였다. 이 세상 종말이라고 하는 것은 마태 25에서 말씀하시듯이 당신이 구원하신 온 세상을 성부께 바치는 날이며, 당신을 따른 모든 이들과 함께 새로운 축복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구원의 완성이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 개인의 죽음, 나 자신의 심판과 종말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어떻게 종말에 대비하여야 할 것인가를 더 걱정하고 염려해야 한다. 그날이 언제 오더라도 그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는 지금의 이 순간을 하느님의 자녀로서 충실히 살아야 한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삶이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항상 깨어있는 삶이다. 그날은 공포와 기쁨, 영광 등 세상에 함께 있던 것을 분명하게 둘로 가르시는 때이다. 그것은 그때만의 일이 아니라, 지금의 삶의 태도와 계속 연결된 결과라는 것을 암시한다. 흥청대며 허송세월한다든지, 지금의 행동이 초래할 불행을 면하기 위해서는 그때가 언제인지는 분명히 모르고, 번갯불처럼 닥쳐올 것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33절). 그 말씀이 이제 우리의 삶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말씀을 삶으로써 우리의 삶을 언제나 종말론적인 삶으로 이어가도록 항상 깨어있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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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람은 왜 결단력을 잃고 우유부단해지는가?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덴마크 왕자 햄릿은 사고에 대한 집착과 성찰이 만성적인 우유부단과 결국 비극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인물입니다. 햄릿의 삼촌 클라우디우스에 의해 자신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복수를 요구하는 아버지의 유령을 만난 후, 생각이 많아집니다. 그의 철학적 성격은 삶과 죽음, 정의의 본질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모든 상황을 과도하게 분석합니다.
햄릿은 신속히 행동하기는커녕 유령의 진위 여부와 복수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에 시달려 지체합니다. 그는 클라우디우스가 기도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를 죽이는 것을 자제하고 그러한 행위가 클라우디우스를 저주보다는 천국으로 보낼 수 있다고 자기 우유부단함을 합리화합니다. 햄릿의 끊임없는 망설임으로 인해 클라우디우스는 의심을 하고 햄릿에 대한 음모를 꾸미게 만듭니다. 그의 지나친 생각은 폴로니우스를 충동적으로 살해하고 그를 클라우디우스로 착각하는 등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며, 이는 폴로니우스의 딸 오필리아와 궁극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련의 사건을 촉발합니다. 그의 지나친 사색은 그를 고립시키고,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며, 결국 덴마크 궁정이 붕괴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햄릿과 같이 고민만 하다가 결국 인생을 우유부단하게 망치고 만 사례는 많습니다. 우유부단함은 생각을 많이 한 결과이고 이는 겸손과 신중함 때문이기보다는 자기 생각을 믿는 교만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 대표적이고 역사적인 인물이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입니다. 그는 자신을 철학자라 여겼습니다. 그리고 우물쭈물하다가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암살에 참여하게 되고, 우물쭈물 하다가 안토니우스가 성장할 기회를 주어 결국 자살에 이릅니다.
지나친 생각은 오류를 낫습니다. 어떤 실험에서 사람들에게 돈을 거저 주고 그것 중 일부를 기부하고 싶은 사람은 기부하라고 했습니다. 바로 기부한 사람의 기부 양이 많을까요, 아니면 오래 생각한 사람들이 기부를 많이 했을까요?
연구자들은 직관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개인이 더 관대하고 더 많은 금액을 기부하거나 공동 기금에 더 많이 기부하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대조적으로, 숙고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진 참가자들은 일반적으로 덜 이바지했습니다.
생각은 자아와의 대화입니다. 뱀과 대화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증가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만 증가합니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하고 싶거든 생각을 최대한 멈추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예수님은 무언가 결정할 때 ‘자연’을 보라고 합니다. 자연의 무엇을 보라는 말씀일까요? ‘법칙’입니다. 자연엔 법칙이 있습니다. 내가 결정하려는 것이 자연의 법칙과 일치하는가를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햄릿형과 반대되는 형이 돈키호테형입니다. 돈키호테는 자신에게서 해답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는 책을 읽고 해답을 찾았고 바로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실제적인 유형의 사람이 14세기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브루스 덤펌린입니다.
이야기에 따르면, 스코틀랜드를 영국의 통치로부터 해방하려는 노력에서 여러 번의 패배를 겪은 후 로버트 브루스(Robert the Bruce)는 낙담하여 숨어 지내게 되었습니다. 동굴에서 피난처를 찾으면서 그는 삶을 포기할 생각을 했습니다. 동굴에 있는 동안 그는 거미줄을 돌리려고 하는 거미를 관찰했습니다. 거미는 거미줄이 계속 부러지고 떨어지면서 반복적인 실패에 직면했습니다. 거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거미줄을 완성하는 데 성공할 때까지 계속해서 시도했습니다. 거미의 결단력과 인내에 영감을 받은 로버트 브루스(Robert the Bruce)는 그의 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새로운 동기에 용기를 얻은 그는 군대를 모아 결국 영국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며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확보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할 때 가장 영향을 준 책이 ‘꽃들에게 희망을’이였습니다. 애벌레는 나비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고치를 만드는 모험을 하지 않으면 나비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도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자연이 알려주는 것입니다. 자연의 법칙에서 배우고 결정한 삶을 저는 후회해본 적이 없습니다.
결국 자신을 믿는 이들은 우유부단해지고 하느님의 뜻을 외부에서 찾는 이들은 결단력 있는 존재가 됨을 알았습니다. 자연과 책, 그리스도의 모범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틀리지 않습니다. 진리가 어렵다고 하지만, 실상 진리는 나뭇가지에도 있습니다. 항상 해답을 자연과 성경, 교회와 모든 법의 원천인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오류에서 자유롭고, 결단력 있게 행동하여 우물쭈물하다 멸망하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해답을 찾는 일은 자기를 믿지 않는 겸손의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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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에 대한 집착과 욕심만 버려도...>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29-33)”
1) 당시에 그 지역에서는 여름이 추수철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추수는 심판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종말과 최후의 심판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종말이
시작되었고,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 날’이 되면
종말이 완성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까이 오다.’는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 초기에 나자렛에 가셔서 희년을 선포하시는 장면을 보면,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메시아 시대가, 또는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수확 때가 온다.’ 하고 말하지 않느냐?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이미 수확하는 이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씨 뿌리는 이도 수확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요한 4,34-36).”
이미 추수가 시작되어서 진행 중이라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지금’이라는 시간은, 최후의 심판이 이미 시작되어서 진행 중인 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또 우리가 그것을 실감하기도 어렵고, 의식하기도 어렵지만, 또 너무 느리게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떻든 종말과 최후의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 중이고, 곧 완성될 때가 올 것입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7,29-31).”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1요한 2,15-18ㄱ).”
사도들의 말은, 지금 당장 인생을 정리하라는 뜻은 아니고,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에 대한 집착이나 미련을 버리고 영원한 것만 추구하라는 권고입니다.
4) 만일에 ‘종말’과 ‘심판’이라는 것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우리 앞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허무’만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내세도 안 믿고, 종말도 안 믿고, 최후의 심판도 안 믿는 사람들의 인생은 그렇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의 인생은 ‘허무’만 남게 됩니다.
사는 동안에는 허무하다는 말만 반복하면서 살다가, 죽을 때에는 허망하게 사라집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임종을 앞두고 하느님을 찾기도 하고, 다행히 세례를 받거나 대세를 받는 경우도 있긴 한데, 그것을 바라면서도 그 기회를 놓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임종을 앞둔 사람의 표정에서, 저쪽 세상을 미리 보고 하느님을 안 믿었던 것을 후회하고, 그래서 그 세상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때가 많습니다.
당사자는 자신의 후회와 두려움을, 또는 마지막 희망 같은 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데, 이미 몸이 굳어져서 뭔가를 표현하는 것이 안 되는 경우에,
그럴 때에 몹시 안타까워하는 모습도 자주 봅니다.>
5)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이 세대’는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바로 ‘나’, 또는 ‘우리’입니다.
<인간적인 심정으로는 당장 종말이 올 것 같지도 않고, 어쩌면 앞으로도 한참 동안 안 올 것 같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런데도 또 마음 한편에서는
‘혹시 오늘 밤? 아니면 내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것이 종말과 최후의 심판을 대하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어떻든 방심하면 안 되고, 자만해도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종말과 재림과 최후의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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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21,29-33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간 내내 종말에 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 말씀들에 담긴 공통적 메시지는 죽음이 나라는 존재 자체의 끝이 아니듯, 종말이 곧 파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 그리고 종말 이후에 하느님과 더 깊은 일치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종말에 관한 담화를 마무리하시면서, 종말의 순간 일어나게 될 각종 천재지변과 재난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벌 주시거나 멸망시키시려고 일으키시는 ‘재앙’이 아니라 당신 나라가 즉 구원이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왔다는 ‘표징’이며, 그것을 구원의 표징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주님께 대한 믿음, 특히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하신 구원의 ‘약속’이, 사랑과 자비의 ‘복음’이 세상의 멸망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언제까지나 남아 반드시 이루어질 거라는 굳건한 믿음을 지녀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그런 점을 설명하시기 위해 드시는 것이 ‘여름에 무성해지는 나뭇잎의 비유’입니다. 무화과나무를 비롯해 모든 나무들은 여름이 되면 그 생명력과 성장이 정점에 이르러 가지를 크게 뻗고 잎이 무성해지지요. 그러니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나무가지에 무성하게 달린 잎을 보는 것만으로 여름이 왔음을 알 수 있는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종말의 순간이 되면 그 수명을 다한 이 세상에 각종 재해와 재난이 일어나며 무너져 내리게 되는데,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에 재해와 재난이 일어나는 것만으로 하느님께서 당신 뜻을 충실하게 따른 이들을 부활시키시어 참된 행복의 나라로 데려가시는 종말과 구원이 곧 이루어질 것을 알게 될테니,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하라는 겁니다. 나무에 매달린 번데기 고치를 보고 애벌레의 죽음을 슬퍼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나비라는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그런 점을 머리로 어떻게든 이해해본다고 해도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여름이 되면 나무에 잎사귀가 무성하게 달리는 것이나, 애벌레가 번데기를 거쳐 나비가 되는 건 수없이 반복된 일상의 경험들을 통해 자연스레 체득된 것들이고, 종말의 순간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가 살면서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무에 잎이 달리거나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는 것은 나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특히 고통과 시련 같이 나를 힘들고 괴롭게 만드는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 ‘남의 일’이지만, 내가 세상에 일어나는 재해와 재난에 휩쓸려 상처 입거나 생명을 잃는 건 나라는 존재 자체와 깊이 연관된 일이기에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넘기기가 어려운 겁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라도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더더욱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종말을 일으키시는 것은 우리를 겁주거나 파멸시키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구원하시기 위함임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하느님 사랑과 권능에 대한 믿음으로 기꺼이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신 것처럼 말이지요. 고통이 고통 자체로 끝난다면 허무한 재앙이지만, 참된 영광과 기쁨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면 내 삶에 의미가 되듯이, 종말의 순간 일어나는 재해와 재난이 그저 멸망으로 끝난다면 깊은 절망이지만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참된 행복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된다면 내 믿음에 의미와 희망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주님 말씀을 마음에 담고 행동으로 실천하여 내 삶 속에서 완성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종말을 멸망이 아닌 구원으로 바꾸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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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하시면서 무화과 나무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 21,29-31)
주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의 중심은 ‘하느님 나라 (바실레이아 투 테우 Βασιλεία του Θεου)’
입니다.
그런데 이미 세례자 요한에 의해서 선포되고 예수님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며 교회 안에서
그 의미가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오시는 그 때에 결정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용어는 ‘나라’라는 뜻보다는 ‘왕국’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것은 왕이 다스리는 영역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왕은 어느 한정된 영토를 자신의 왕국으로 삼고 통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식으로는 하느님 나라를 어느 한 영역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이해하려는 데에
어려움을 갖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일상적인 우리의 인식으로는 다 이해되기가 어려운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연현상의 비유로라도, 오늘 무화과 나무와 또 다른 모든 나무의
자연현상을 들어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미래에 오실 하느님 나라를 현재의 나를 중심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러한 일들이 ‘이 세대가 지나기 전기 전’에 일어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더불어 ‘언제 그 나라가 도래할 것인가?’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대가 지나기 전’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여기의 ‘이 세대’가 구체적으로
어떤 시간으로 이해하려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자연현상을 통해서 그 나라의 도래를 알기 쉽게
설명하시는 것이지요.
무화과 나무 잎이 돋아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도 분명히 다가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가르치시는 그 시간부터 이미 그 나라는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따르는 사람들은 무화과 나무의 변화처럼 세상은 모르지만
이미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의와 차별이 있는 현실과는 다르게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
사랑과 진리가 넘치는 것입니다. 현실은 고통과 슬픔의 사슬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곳에는 평화와 기쁨이 또한 넘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에 요한 묵시록에서는
‘십사만 사천 명’(묵시 7,4; 14,1)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 숫자의 의미는 한정된 숫자가 아니라 시련과 고통을 이겨낸 사람들,
다시 말해서 ‘완전’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불완전하고 갈팡질팡의 삶을 살고 있기에 ‘완전’이라는 말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완전할 수가 있어서 ‘십사만 사천’이라는 뜻에 연결될 수 있을까요?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킨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완전한 사람’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주님께서 약속하신 ‘부활의 영광’으로는 가능한 것이지요.
‘이 세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아직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는 아니지만 이미 시작한 주님의 정의와 사랑이
함께 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무화나무 비유의 교훈을 새기며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기쁨, 평화를 내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소중한 하루가 되시기를 또한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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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을 품은 씨앗
고요한 침묵이 가슴 빈자리에 찾아들면 저 깊은 내면의 작은 바람과 느낌의 발자국이 생생하게 일어선다. 하느님을 품은 침묵은 동료 인간과 피조물, 자연과 세상을 향한 애정 어린 갈망과 선한 지향의 마음자리를 보도록 살며시 문을 열어준다. 침묵을 호흡하는 나는 하느님을 품은 씨앗이다. 한 해의 끝자락은 소란스러운 만남보다는 잠시라도 멈추어 자신과 대화해보도록 초대하는 듯하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21,29-31) 팔레스티나에는 봄과 가을이 없다. 이런 기후 때문에 나무에 잎이 돋우면 여름이 이미 다가온 것을 알게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전파괴와 같은 큰 재난이 나타나면 하느님 나라가 다가올 줄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다가올 세상 종말은 세상을 파멸하기 위한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 생명과 사랑의 질서를 세워 새롭게 창조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의 개입’이다.
나는 종말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느님은 파멸하시고 벌하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마치도 무화과나무가 소리 없이 자라나 우리에게 풍요로운 생명과 그늘과 열매를 선사하듯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잔잔한 손길로 우리를 키우시고 돌보신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다. 따라서 우리의 영성생활도 심판과 처벌이 아닌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바로 이 근본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우리의 그분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분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알아차리고(1요한 4,19 참조) 또 얼마나 깊이 느끼고 받아들이며 사는가 하는 것은 바로 영성생활의 방향과 질을 가늠하게 해주는 핵심이다. 세상 종말이야 언제든 닥칠 것이고, 우리도 알 수 없는 때에 생의 마지막을 맞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아차리고 그분의 개입을 사랑의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의 발걸음, 나의 생각, 나의 눈길은 사랑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사랑으로 품고 견디고 받아들인다면 바로 그 순간은 영원의 시간이 되리라! 고통과 시련과 슬픔이 다가올 때야말로 하느님 나라에 더욱 가까이 서 있음을 믿자. 말없이, 사치스럽거나 과장하지 말고 내 안에 사랑을 키우고, 드러내지 않고 좋은 일을 하자. 마음 상하는 말에도 대꾸하지 말고, 꾸지람을 듣더라도 변명하지 말고, 따돌림 당하고 오해받을 때라도 ‘말없이’ 사랑하자. 무슨 일이든 다른 이의 어떤 말이나 행동이라도 좋게 바라보고 적어도 왜 그랬을지 사랑으로 헤아려보도록 하자. 외롭고 슬플 때, 무시당할 때라도 잔잔한 사랑으로 견디며 받아들이도록 하자. 마음 깊은 곳의 괴로움과 불안, 미움의 마음 또한 조용히 침묵하며 하느님께 봉헌하자. 하느님 앞에 불쌍하고 비참한 ‘나’임을 ‘우리’임을 생각하면서 언제나 형제를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도록 하자. 아무런 함성도 겉꾸밈도 없는 침묵 가운데 커가는 무화과나무처럼 ‘생명을 싹틔우는’ 하느님의 부드러움과 순리를 배우도록 하자.
2010년 경남 함안에서는 700년 전의 연씨를 발아시켜 연꽃을 피우는데 성공하여 화제가 되었다. 이 연꽃을 ‘아라 홍련’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그 아름다운 연꽃을 말없이 품고 씨앗 채 기다려온 세월은 창조와 생명을 품은 신비임이 분명하다. 우리도 이제는 말없이 사랑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내 안에 하늘을 품는 씨앗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명을 품고 자신의 미래를 철저히 외부 환경에 내맡긴 채 시간을 뛰어넘어 기다려온 아라 홍련 씨앗처럼 우리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그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속 깊은 기다림과 헤아림’을 담은 하느님의 씨앗이 되어보면 어떨까! 이것이 종말을 준비하는 아름다운 삶의 자세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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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연중 제34주간 미사의 독서들을 통해 점진적으로 펼쳐진 종말의 모습에 행복한 반전을 선사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 21,31)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이지요. 이미 시작되어 완성을 향해 가는 하느님 나라는, 육안으로 선명히 드러나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마지막 때에 벌어질 천재지변이나 전쟁, 박해와 죽음은 두렵기 짝이 없지만,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정이라면 견딜 가치가 충분히 있지요.
새벽 빛이 떠오르기 전이 가장 어둡고, 정상에 오르기 직전이 가장 숨가쁜 것처럼 하느님 나라도 이젠 꼼짝없이 죽는구나 싶은 한계를 인내와 희생으로 넘어설 때 맞이하게 될 축복입니다. 그 희열과 행복이 우리를 견디게 하고 살게 하지요.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묵시 21,1)
묵시록 저자는 세상을 헤집고 오염시킨 온갖 악의 실체들이 주님의 힘으로 하나둘 무너지고 스러지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눈 앞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새로움은 적당히 고치고 덧붙인 변형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과 추측의 가능태를 뛰어넘는 완전한 새로움입니다.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묵시 21,2)
적들에게 포위되어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예루살렘의 치욕과 수치가 주님의 신부 자리를 되찾아 아름답게 변모됩니다. 이제 새 예루살렘은 다른 우상이나 재물, 권력이 아니라 오직 신랑이신 주님만을 위해 단장하게 될 것입니다. 본래의 모습대로 정결한 주님의 신부로 거듭나 거룩하게 빛날 것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화답송)
새 예루살렘이 하느님에게서 내려와 사람들 사이에 자리잡습니다. 신랑은 신부인 새 예루살렘을 따라 이 지상에 거처하시지요. 하느님의 나라는 그분께서 현존하시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분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아직 미완이지만 이미 우리 가운데 현존하고 있는 신비입니다.
종말은 우리 모두가 맞이하게 될 공평한 미래입니다. 그 전에 우리는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묵시 20,12.13) 사랑의 심판을 받게 되겠지요. 우리 마음이 자연의 소소한 변화에도 놀라고 들뜨듯이, 두려움을 치우고 설렘과 기쁨으로 하느님 나라를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죽음 뒤에 이어질 부활, 새 생명의 축복을 고대하며 우리 영혼이 아름답고 성숙하게 영글어 가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한해가 저물어갑니다. 전례력으로 새해가 열리기 전, 마지막 시기를 보내면서, 지난 한 해 동안 각자의 삶 안에 알알이 들어와 박힌 고통과 슬픔의 보석들을 가만히 어루만지며 새 희망을 꿈꾸어 보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렇게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 가는 중이니, 실망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기쁨의 채비를 차리며 주님의 날을 기다립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바로 저 너머에서 손짓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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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2024.11.29> 아침을 여는 묵상 (호 10장 1~15절)
❝오직 하나님만 찾고, 신뢰하는 삶❞
❚ 하나님만을 유일신으로 믿고, 인생의 방향을 그분께로 돌이켜 영적 풍요를 누려야 합니다.
✔ 하나님만 찾고, 신뢰하는 것은 어떤 삶입니까?
➲ 우상을 버리고 믿음을 지키는 삶입니다(1~3절).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수록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기보다는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는 제단을 더 많이 세웁니다. 그들의 땅이 번영할수록 그 땅을 우상의 주상들을 세우고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1절).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풍요로움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에 사용을 하고 말았습니다. ‘...두 마음을 품었으니...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2~3절).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왕으로 인정하지도 않고 자신들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답게 살지 않고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상을 섬기고 이방을 의지했기 때문에 그들은 징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풍요로움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 얻은 것임을 확신합니다. 이 영광을 오직 주님께만 그리고 풍요로움을 허락하신 하나님만을 위해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인간적으로 믿는 구석이 있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나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심각한 자기 착각입니다. 그렇게 해서 많은 것을 쌓아 올렸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파괴하고, 부수어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간섭 밖에 있으면 자유로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만이 나의 진정한 길이시오, 진리가 되십니다. 주님의 간섭함이 나에게는 말할 수 없는 큰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인생의 유일한 주인으로 삼지 않으면 다양한 문제 앞에서 다른 것들을 의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 찾고, 신뢰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참된 주인으로 인정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탐욕을 버리고 진실로 섬기는 삶입니다(4~11절).
이스라엘은 늘 빈 약속이나 일삼고, 거짓 맹세나 하며, 쓸모없는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들은 독초처럼 불의가 퍼졌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송아지 형상은 결국 그들에게 탐욕을 부추겨 오히려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지 못하는 결과를 만들어 냈습니다(4~8절). 하나님은 오래도록 인내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주님을 멀리하고, 내 멋대로 살아간다면 결국 징계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사사시대에 베냐민 지파의 범죄로 인해 일어났던 동족 간의 끔찍한 사건이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이스라엘 안에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목에 멍에를 메고’ 밭을 갈아야 하는 더 힘든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9~11절).
이스라엘이 더 용서받을 수 없는 이유는 그 죄악이 매우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으로 인정하지도 않고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다가 어려움을 겪었지만 여전히 자기 맘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진실해야 합니다. 거짓과 헛된 욕망 속에 사로잡혀 있으면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들과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이 물 위에 있는 거품처럼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열매는 없고, 독초만 돋아나는 황무지와 같은 인생이 되지 않도록 주님의 손에 붙들린바 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식적인 섬김에 속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언제나 진실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죄악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내가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지 심각하게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우상과 탐욕을 버리고, 진실하게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공의를 심고서 인애를 거두는 삶입니다(12~15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로 멸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오래 참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이스라엘에게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을 찾을 때입니다.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하여 우리 마음의 밭을 새롭게 일구어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받아들일 준비를 해 나아가야 합니다(12절).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악을 밭 갈았고...’ 그 결과로 ‘죄를 거두고 거짓이라는 열매를 먹었을 따름...’(13절)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의지하던 산성들도 모두 파괴되고, 백성은 잔혹하게 학살을 당할 것입니다. ‘살만’은 앗수르 왕 ‘살만에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왕하 17장).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는 벧엘에서의 금송아지를 숭배를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정녕 망하리로다...’(15절)..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이스라엘은 멸망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직한 마음과 진실 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굳어버리지 않도록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계속해서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겉으로만 회개하는 척하는 모습이 아닌 진심으로 통회하고 자복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과 섬기는 교회의 지금의 모습이 어떠한지 냉정하게 살펴보아 주님이 주시는 이 기회가 어쩜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지하여 회개하여 회복하게 하시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내 뜻대로 방황하다가 황폐한 삶을 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평안과 풍요를 좇을 때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지만, 하나님만 의지할 때 하나님이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는 삶을 통해 하나님만을 찾고, 신뢰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는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유일한 주인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중심으로 삼고, 세상의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치는 용기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호 10:1~15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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