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 이야기 보충
고갱을 대중에게 알리는 일등 공신은 모옴의 소설 ‘달과 육펜스’이다. 고갱의 삶을 조금 미화한 경향도 있지만, 가족들에게는 고통을 주었고, 고갱도 가족에게 버림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고갱이 죽고 난 후에 그의 막내 아들 폴 고갱이 아버지의 전기를 썼다. 아버지이다보니 미화한 부분도 있지만, 일반 사람들이 ‘달과 육펜스’로 고갱을 알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아버지는 페루계 여자(대통령의 인척이라 파워가 있었다고 한다.)와 결혼하여 고갱을 낳는다. 진보 성향의 기자였던 아버지는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로 집권하자 리마로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고갱은 선원생활을 하다가 어머니를 따라 파리로 온다. 주식 중계회사에서 돈을 잘 벌면서 취미로 미술계를 기웃거리고, 인상파 미술을 중심으로 사모운다. 그러다가 자기가 직접 그림을 그린다. 회사가 망했는데도 여전히 미술계만 기웃거리니 부인은 아이를 데리고 덴마크로 가버리면서 가족과 헤어진다. 부인이 자들과도 만나지 못하게 해서 --- 딸을 무척 좋아했는데,, 죽을 때까지 못 만났다고 한다
고갱은 색채화가이다. 고호는 색채를 통하여 감정을 극대화하여 표현하였다면, 고갱은 색상과 형태로 심리적 움직임을 표현하려 하였다. 색상으로 원시적 상태로 접근하려 하였다. 그때 당시의 유럽사회가 겉과 속이 다른, 가식으로 점철된 사회임을 알고, 원시사회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래서 고갱은 감정의 표출보다는 원시사회로 돌아가고자 하였다.(부루주아지 사회로 백토리아조의 예의를 존중하는 사회였다)
고갱의 그림은 색채가 화려하다. 색채를 이용하여 영적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황색 그리스도’는 노란색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어떤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노란색의 상징적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관람자가 결정한다.
(고갱의 색채를 가지고 상징세계를 해석하는 책도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해석이다.)
퐁타벤에서 한 무리 화가들이 고갱을 우두머리로 모시고, 상징주의 미술을 하였다.
이들은 ‘나비파’라 한다
, Nabi는 유대교의 랍비로서, 예언자. 라고 할까. 예언은 상징적 표현이다.(그의 제자에 세뤼시에도 있다. 당시에 르동, 모르 등의 화가들이 중심으로 상징주의가 유행했다. 이에 편승한 것이 아닌가 한다.
*당시의 유럽에는 과학이 종교였고, 합리성이 성서였다. 이에 반발하여 정신성을 되찾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 중에 하나는 꿈처럼 모호하고 신비로운 세계를 찾아나셨고, 개인의 상상이나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당시에는 합리성을 내세우면서, 부합하지 않으면 억압해버렸다. 그러나 사회는 더욱 부패해지고,--- 일부 시인 등의 예술가들은 환멸을 느기고 삐딱하게 나갈려고 하였다.
그 중에도 미술가는 억눌린 인간의 감정을 색채로(색채의 신비성 등) 표현하려고 했다. 작품이 내용이 논리적이기보다는 꿈, 상상처럼 비합리적인 요소를 담았다.
그중의 하나로, 윤곽을 굵은 선으로 하고, 색면을 평면화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미술이 나타났다. 이것을 ‘클로아조니즘’이라 했다.(마치 퍼즐을 맞추어서 표현하듯이)
이것이 ‘나비파’ 양식이고, 신비주의라고 하였다.
그는 원시미술에 심취하여 --> 그가 타히티로 가게 된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