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86]『사상계』 창간 72주년 기념특별호
놀라지 마시라. 진실로 놀라운 잡지가 최근 나왔다. 『사상계』 창간 72주년 기념 특별 ‘2025 봄’호가 그것. 내주엔 여름호를 선보인다고 한다. 엄혹한 군사독재시절, 1970년 5월호에 김지하의 통렬한 풍자시 <오적(五賊)> 게재를 빌미로 폐간을 당해 종간호가 되어버린 사상계 205호 이후 명실공히 처음이니 55년만의 복간이고, 불세출의 통일운동가 장준하 선생이 53년 창간한 이후로는 72년만이다. 일단은 올해 계간으로, 내년부터 격월간을 목표로 한 ‘문명전환 종합지’ 사상계는 ‘思想界’인가 ‘思想系’인가? 어떤들 무슨 상관이랴? 뜻있는 지식인과 지성인이 총궐기하듯, 힘을 합쳐 펴낸 이 잡지가 지향하는 가치가 ‘문명전환 종합지’임이 이채롭지 않은가. 그만큼 이 시대의 지구촌 위기가 심각한 탓일 터. 2025년은 '응답하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사상계 세대>가 아님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르나, 당시 논객들의 언론활동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장준하 선생의 권두언(잡지의 발행인 머리말)들과 함석헌선생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나 “5.16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아무도 쓸 수 없는 글들이었다. ‘낙양의 지가’를 올릴 정도로 지식인과 지성인 세계에서는 정기구독 필독서였음이 틀림없다. 휘문동 헌책방 주인으로부터 그 가치를 잘 알지 못하는 종간호를 은근슬쩍 구입한 후 뿌듯해 했던 기억이 새롭다. 일본인들이 한국의 현대사를 연구하기 위해 창간호부터 205호까지 ‘한 질(帙)’을 엄청나게 구입해 가는 바람에 국내에서는 구할 수조차 없다는 후문도 있었다. <씨ᄋᆞᆯ의 소리>가 그 뒤를 이었건만, 1980년 전두환독재의 철퇴를 맞았다.
아무튼 ‘원조 사상계’의 맥을 잇는 만큼, 명예편집인, 편집고문, 편집주간, 부주간, 편집위원, 편집기획위원 등 사상계를 만드는 70여명의 면면을 본다. 과문의 소치로 모르는 필진도 많으나, 이 잡지를 왜 펴내고 무엇을 지향하여 만들 것인지는 봄호에 실린 글들의 목록만 봐도 금세 알 수 있다. 그들은 ‘젊은 세대는 나라의 기둥’인 만큼 미래세대 청년잡지를 지향하며, 아날로그 잡지로서 생태적 교양학술지와 계몽지식지 그리고 사상계의 이념(민족통일, 민주사상, 민족자존, 경제발전과 신문화 창조)을 계승하는 잡지를 자임하고 나섰다. 당시의 사상계와 다른 것은 ‘인류세(홀로세)의 문명전환 사상계’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뚜렷하지 않았던 환경파괴와 그로 인한 기후위기가 지나친 인간중심주의의 산물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이미 계몽과 진보는 낡은 이상이 된 듯해 보이므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게 '행성(行星)적 차원의 문명전환'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겠다고 약속한다.
잡지 체제도 재밌다. 세계 최초로 앞뒤가 따로 없는 양면형 잡지. 특집중심으로 꾸미고, 문명전환, 미래세대, 기후문제를 ‘고갱이 말’로 삼는 지식인 종합지, 지역주도형 잡지, 한번 보고 버리는 게 아니라 대를 물려가며 읽는 잡지, 정부나 기업 지원없이 오직 국민의 십시일반으로 만드는 국민잡지, 가능하면 우리말글을 살려 쓰되 바깥말글도 존중하겠다는 잡지, 서점에서 팔지 않고 정기구독만 받는 잡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주창하는 요소들이 모두 너무나 마음에 든다. 1년 정기구독료 6만원, 소장용 구독자는 1년 10만원. 거저랄 정도로 좋은 글투성이이다. 서너 달 읽다보면 다음 계절호가 올 것이다. 결코 화려한 책이 아니다. 재생지 사용과 색채인쇄를 최소화하는 것도 좋다.
앞뒤로 만들어진 ‘한글 사상계’와 ‘한문 사상계’의 목차와 필진들을 보시라. 그들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읽어보시라. ‘思想界’(총 208쪽)에는 시국이 시국인만큼 ‘계엄의 사상계’와 노벨상을 받은 ‘한강의 상상계’ 그리고 ‘살림의 생태계’로 꾸려져 있는데 편편이 정독과 숙독을 해야 한다. 그런가하면 ‘사상계’(총 159쪽) 표지는 복간을 기념하는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의 ‘생태사상시’로 장식하고 있는데, 감상해 보자. 제목 '개미'. 의미하는 바가 심상치 않다.
<점/점/점/점이 움직인다//점/점점/점점점/점이 점점 많아진다//점들이 모여 메를 이룬다/메가 움직이니, 해도/따라 비춘다>
사상계 옛글을 갈무리한 '오적'을 읽어보자. 짱짱한 연재물이 9편이나 있다. 그리고 '양념격'인 문예편도 있다. 아아-, 멋있어도 너무 멋있다. 사상계 복간은 정말로 잘한 일이다. 발간 타이밍도 절묘한 듯하다. 복간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는 알지 못해도, 발행인 성함이 장호권(장준하 선생의 장남)인 것으로 보아, 복간 과정에 그분의 역할도 크지 않았을까 싶다. 한 권 속의 두 권인 잡지 중간에는 ‘숨비소리’라는 이름으로 낙서와 메모, 단상 등을 적을 수 있는 여백과 잉여의 공간 3쪽이 있는 것도 이채롭다. 숨비소리는 해녀들이 물질하다 숨 쉬러 올라오면서 내는 휘파람소리를 일컫는 말로 ‘쉬어감’을 뜻한다. 언제까지나 순전히 국민들의 십시일반으로 21세기 내내 장식하기를 축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