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34
7월30일[연중 제17주간 회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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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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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X9WwX-gTl3I
[수원교구 한용희 대건안드레아(광북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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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메마르고 척박한 사막 한가운데를 지날 때도 자비하신 주님께서 늘 우리와 동행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는데 선봉장이 되었던 영도자 모세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파라오의 횡포를 뒤로 하고 갈대 바다를 건너 탈출한 기쁨은 잠시뿐이었습니다.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 앞에 펼쳐진 장면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나 지상낙원이 아니었습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황량한 광야를 지나며 노숙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기약 없는 나그네 신세였습니다. 찌는 듯한 불볕더위와 살을 에는 강추위, 굶주림과 갈증의 연속이었습니다.
요즘 캠핑이나 차박이 유행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일주일, 한 달, 일 년 계속된다면 다들 힘들어 혀를 내두를 것입니다. 며칠만 지나도 어서 빨리 안락하고 쾌적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 날 것입니다.
큰 무리를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느라 정신없던 모세의 귀에 슬슬 불평불만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이런 저런 민원이 접수되어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입니다.
어떤 민원들은 너무나 사소하고 짜증나는 것이어서 화도 났을 것입니다. 어떤 민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것이어서 절망도 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찾아와서 대놓고 따지기도 했습니다. 왜 우리를 이집트에 그냥 놔두지 않고 끌어내서 이 광야에서 쌩고생을 시키는가? 이집트에는 맛난 고기며 신선한 야채나 과일이며, 얼마나 먹을 것이 많았던가? 하루 삼시 세끼 맨날 똑같은 메뉴도 이제 신물이 난다고!
다양한 측면의 위협으로 인해 리더십이 흔들릴 만도 한데, 지도자로서 모세의 모습이 놀랍습니다. 틈만 나면 공동체 분위기를 흐리게 하는 사악한 사람들로 인해 마음고생이 많았지만, 결코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저 같았으면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 내가 지금 왜 이 쌩고생을 하고 있지?“ 하면서 당장 때려치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 마다 백성을 잠깐 떠나 주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수시로 조언을 구했고, 지혜와 도움을 청했습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변덕투성이인 백성들을 대신해서 용서와 자비를 청했습니다.
모세의 기도는 강렬하고 간절했는데, 한번 주님과 대화를 시작하면 밤낮으로 사십 일을 단식하며 기도를 바치기도 했습니다.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탈출기 34장 9절)
이런 모세의 모습을 어여삐 보신 주님께서는 흡족해하시면서 마치 절친에게 하듯이 친밀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때그때 적절한 말씀을 해주셨고, 항상 함께하실 것임을 약속하셨으며, 든든한 바위가 되어주셨습니다.
배우자나 자녀들, 손주 손녀들이 오래전부터 성당에 나오지 않는 문제로 마음고생이 많은 자매님들께 제가 단골로 드리는 제안이 있습니다. 모세처럼 기도하라고 부탁드립니다.
주님과 점점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이 실망스럽고 슬프기도 하겠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고, 자매님께서 그들 몫까지 대신해서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보시라고 권고해드립니다.
고달픈 광야 생활이 길게 느껴지겠지만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메마르고 척박한 사막 한가운데를 지날 때도 자비하신 주님께서 늘 우리와 동행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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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마지막 희망은 오직 주님께 두어야 하겠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울부짖음이 섞인 하소연은 마치 오늘 우리의 고달픈 현실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처녀 딸 내 백성이 몹시 얻어맞아 너무도 참혹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들에 나가면 칼에 맞아 죽은 자들뿐이요 성읍에 들어가면 굶주림으로 병든 자들뿐이다. 정녕 예언자도 사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라 안을 헤매고 다닌다. 당신께서 완전히 유다를 버리셨습니까?'
우리네 인생이 언제나 만사형통하고 가화만사성하며, 종일 웃음꽃이 만발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호시절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결코 원치 않은 고통이 줄줄이 찾아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이 혹독한 시련에 괴로워하고, 사랑하는 딸이 눈물로 밤을 지새웁니다. 멀쩡하던 내가 갑자기 쓰러져 비참한 몰골로 변해갑니다.
우리가 이토록 참혹한 괴로움 속에서 울며 부르짖는데도 그 누구 하나 도움의 손길을 건네지 않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주님은 대체 어디 계시냐? 우리를 아주 잊으셨냐?며 외치지만, 그분께서는 그저 묵묵부답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현실이요,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 앞에서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할 진리가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시간과 우리 인간의 시간은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보폭과 주님의 보폭은 천지차이입니다. 우리의 천년이 주님께는 하루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지극히 사소한 고통 앞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할것입니다. 때로 희망이 없어 보여도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해야 하겠습니다. 그 마지막 희망은 오직 주님께 두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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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wZdbe00zm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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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이 될 것인지, 가라지가 될 것인지는 이것 하나로 결정된다>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마지막 때에 밀은 의인으로 인정받고 하늘에서 별처럼 빛날 것이지만, 가라지는 불붙는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안타깝지만, 진리입니다. 지옥이 없다느니, 상태를 말한다느니 하며 진리를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지옥에 어떻게 가지 않아야 하는지가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의 힌트가 있습니다. 가라지는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와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왜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을 죄짓게 할까요? 그들을 이용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모파상의 ‘비곗덩어리’란 소설은 진정한 인간의 가치는 인간이 평가하는 기준과는 다를 수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프랑스의 루앙시를 프러시아군이 점령하고 있을 때 몇 명의 귀족, 정치인, 부자, 종교인이 함께 탈출을 감행합니다. 그중에 비곗덩어리로 불리는 창녀 한 명도 끼어 있었는데 조금 뚱뚱하기는 했지만 아름다운 눈을 가졌고 자신이 가진 음식을 일행과 나눌 줄 아는 아름다운 마음도 지녔습니다. 무엇보다 프러시아의 시민이 될 수는 없다는 애국자 중 하나였습니다.
일행은 토트 시에 잠깐 머물게 됐는데 그 젊은 창녀에게 눈독을 들인 프러시아군 장교가 그녀와 잠자리하지 않으면 그들을 통과시켜 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그러나 프러시아가 싫어 탈출한 애국자가 프러시아군 장교와 잠자리할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여관방에 갇혀 지내다 보니 일행도 서서히 짜증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창녀 주제에. 한 번 자 주면 되지.’
그래서 그녀가 장교의 말을 들어줄 수 있도록 설득하였습니다. 심지어 함께 탈출하는 수녀들까지도 그녀를 설득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위대한 행동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쩔 수 없이 창녀는 장교와 하룻밤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일행은 창녀를 벌레 보듯 합니다. 음식도 챙겨올 시간이 없었던 그녀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애국심에 가득 차 자신들만의 목소리로 혁명가를 크게 부를 뿐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장 밀과 같았던 이들이 가라지로 드러났고 비곗덩어리로 불리며 쭉정이인 줄 알았던 창녀만이 밀로 드러났습니다. 창녀는 다른 이들을 이용하지 않았고 죄짓게 하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녀를 죄짓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창녀를 죄짓게 한 이유는 자기들 이익 때문입니다. 무슨 이익을 얻었을까요? 자신들은 몸 파는 사람이 아니라는 교만함과 육체의 자유와 자신들이 가진 소유를 잃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신이 되려고 하는 것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진짜 신이 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죄가 신이 되려고 하는 마음이 아닌, 하느님 없이 신이 되려고 하는 마음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거룩한 상태에 있게 하시고, 영광 안에서 충만히 ‘신화’(神化)하기로 정하셨다. 그러나 악마의 유혹으로 인간은 ‘하느님 없이, 하느님보다 앞서서,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서’ ‘하느님처럼 되기를’ 원하였다.”(CCC 398)
하느님께서 주시는 살과 피, 곧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 없이 신이 되는 방법은 타인을 죄에 빠뜨리며 이용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돈을 통해서 내가 주님이 되고, 육욕을 통해 내가 창조자가 되며, 교만을 통해 내가 심판자가 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새 소설 ‘고양이’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개의 생각]
인간은 나를 먹여 주고 지켜주고 사랑해준다. 인간은 신이 분명하다.
[고양이의 생각]
인간이 이렇게 나에게 잘 해주니 나는 신이 분명하다.
개와 고양이의 생각은 다릅니다. 개는 주인을 통해 신이 되려 하고 고양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신이 되려 합니다. 누구나 신이 되려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피조물로서 신을 통해 신이 되려고 하거나, 아니면 나를 본래 신으로 여겨 신 없이 신이 되려는 방향 두 개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름도 넣어졌고 액셀러레이터도 밟혔습니다. 이제 방향만 잡으면 됩니다. 밀이 될 것인지, 가라지가 될 것인지. 내가 신이 되려고 하거나, 신을 통해 신이 되려고 하거나! ‘착한 뜻’은 결국 나 스스로가 아니라 내가 ‘신을 통하여 신이 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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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엘 며칠 다녀왔습니다. 신문사에 있는 계좌를 정리하려면 제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의 계좌는 닫았고, 다른 하나의 계좌는 결재권을 후임 신부님에게 넘겨 드렸습니다. 인수인계를 하면서 은행 업무도 같이 마무리해야 했는데 깜빡했습니다. 덕분에 뉴욕에서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직원들은 후임 신부님과 호흡을 잘 맞추고 있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문사 홈페이지의 변화였습니다. 후임 신부님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뉴욕에서 돌아오니, 수녀님의 도움으로 청년들이 창고에 ‘벽화’를 그렸습니다. 지난번 창고를 만들면서 어른들이 매주 토요일에 만났습니다. 그렇게 4개월 만나면서 저는 본당 교우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창고는 단순히 물건을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창고는 친교와 나눔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청년들에게 벽화를 그려보라고 하였습니다. 벽화는 청년들의 마음을 담은 그림이지만, 벽화를 통해서 청년들이 친교와 나눔을 가질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저의 뜻대로 청년들은 벽화를 그리기 위해서 자주 만났고, 재능과 끼를 모아서 아름다운 벽화를 만들어냈습니다.
‘身土不二’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과 땅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서양의 철학과 학문을 배우면서 분석하고 나누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어쩌면 ‘통합과 통섭’ 속에서 찾아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원리와 기초를 생각하는데 자꾸만 죄가 떠오릅니다. 죄는 부끄럽고, 죄는 멀리해야 하겠지만 우리 삶의 발자국에 함께 따라오는 것입니다. 병은 우리 몸에 깊은 상처를 주지만 우리 마음은 그 병 때문에 오는 ‘근심, 걱정, 두려움’에 더욱 큰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완전하게 에너지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체는 음식을 섭취하고 나서 배설물을 남기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입니다. 배설물은 혐오스럽고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배설물은 살아있는 생명은 모두 갖게 됩니다. 굳이 오래 간직할 필요가 없으므로 우리는 에너지로 사용되고 남은 배설물을 밖으로 배출하는 것입니다.
죄란 어쩌면 우리의 몸과 둘이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면서 죄라는 배설물을 남기게 됩니다. 죄는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식은 우리 영혼에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죄의식은 2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교만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약함을 거짓으로 감추는 행위입니다. 다른 하나는 열등감입니다. 이 또한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죄인은 회개를 만나면 은총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죄인은 주님을 만나면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많은 죄인은 죄를 용서받고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주님을 만나서 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주님의 길을 충실히 따라갔습니다. 우리가 아는 많은 성인도 죄 중에 있었지만 회개하였고 신앙의 별이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 프란치스코 성인도 그랬습니다. 우리들 역시 그렇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밭은 우리의 몸과 같습니다. 밀은 건강한 지체입니다. 가라지는 병들어 아픈 지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양의학에서 하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가라지를 제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동양의학처럼 말씀을 하십니다. 지켜보면서 몸의 기능을 강화해 나가라고 하십니다. 건강한 지체들이 활력을 얻으면 건강하지 않은 지체들이 치유될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전에 감동적인 경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육상경기에서 1등으로 달리던 선수가 넘어졌습니다. 그 뒤로 오던 선수가 넘어진 선수가 일어나기를 기다렸고 둘은 서로 선을 잡고 결승점에 도달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중들은 모두 일어나서 박수쳤습니다. 넘어진 1등을 뒤로하고 2등으로 오던 선수가 1등이 되었다면 그렇게 감동적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공동체에서도 그렇습니다. 여러 단체가 있습니다. 각 단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지체들입니다. 어떤 단체는 열심히 봉사합니다. 어떤 단체는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지내야 합니다. 잘못이 있는 사람, 단체를 배제하고, 공동체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주변에 부족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잘못을 하는 사람들도 보일 것입니다. 그럴 때 오늘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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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36-43: 추수 때에 가라지를 추려내어
예수님은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세상이라는 밀밭에는 선인과 악인이 현재는 서로 섞여 살아가지만, 밀밭도 추수 때는 밀과 가라지가 따로 추려지듯이 밀과 같은 선인이나 가라지 같은 악인도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준비하라고 말씀을 하신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여기서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판단은 우리의 소관은 아니다. 그것을 가리는 작업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그분께 맡겨야 한다.
밀과 가라지가 싹 트고 자랄 때에는 서로 구별이 안 되듯이 세상에서 하느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엄밀히 구별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선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나 사실상 가라지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가라지처럼 보이지만 하느님 앞에는 좋은 밀일 수도 있기에 판단은 우리가 할 수 없다. 그 사람의 전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조급하게 서둘러서 남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쉽게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하고 쉽게 판단할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이웃을 이러한 모습으로 판단하고, 쉽게 뽑아버릴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내가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순간 나 역시 가라지가 된다. 쉽게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심판은 하느님께만 유보된 것이다.
우리가 모두 가라지가 없는 집안, 공동체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각자가 좋은 밀알이었다가 불시에 순간적으로 가라지와 같은 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두려운 마음과 함께, 매일 우리의 마음의 밭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고 무슨 열매를 맺을 것인가를 돌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판단보다도 지금, 이 순간 충실한 삶으로 언제나 좋은 밀알로서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이 중요하다. 또한 내가 올바르게 살지 못한다고 하느님 앞에 나오지 못한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될 수 있으나, 다시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즉 좋은 밀알로 변화될 수 있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노력하는 삶을 원하신다. 항상 깨어있는 삶이 있어야 한다. 아무도 완전한 자는 없으며 완전을 향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 있는 자들이다. 항상 하느님의 뜻으로 되돌아가는 삶을 통하여 좋은 밀알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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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을 왜 믿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3-14).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주님 부활로 시작되는 ‘영원한 생명’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가 왜 하느님을 믿고 있는지를 잊은 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한 번이라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여 보았다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많이 바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악인들에 대한 심판은 마지막 날에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라는 말씀처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이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제1독서는 우리가 마지막 날에 하느님을 ‘의인’으로 만날 수 있는 길을 알려 줍니다. “참으로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이름을 위해서 저희를 내쫓지 마시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옥좌를 멸시하지 마소서. 저희와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을 깨뜨리지 마소서.” 죄로 넘어질 때마다 우리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느님께 자비와 용서를 청하는 믿음을 가지고 다시는 그 죄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회개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마지막 날에 ‘의인’으로 하느님을 만날 것입니다. ‘성찰’과 ‘고해성사’를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를 이 신비의 주인공이 되게 하여 줍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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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의 정의 구현도 사랑입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36-43)
1) ‘가라지의 비유’는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신 말씀’은 ‘심판’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 구현’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가라지의 비유’를 보면, 밭의 주인은 종들에게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고 말합니다.(마태 13,29-30)
여기서 ‘내버려 두어라.’는, “관심 두지 말고 방치하여라.”가 아니라, 밀로 변화되기를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물론 실제 상황에서 가라지가 밀로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든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지금 ‘가라지 같은 사람’이라도(죄인이라도) 회개하면 ‘밀 같은 사람’으로(의인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의인으로 잘살고 있다가 타락해서 죄인이 되는 일도 있습니다.>
어떻든 하느님께서는 죄인이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기다리시는가? ‘무기한’은 아닙니다. 수확 때가 되기 전까지, 즉 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입니다. 심판이 시작되면, 또는 심판의 날이 닥치면 회개할 기회 자체가 아예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은 좀 막연한 느낌이 드는데, 개인의 임종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누구나 실감이 날 것입니다. 임종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의식이 있다면 회개할 수 있지만,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회개는 지금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회개와 구원에서, ‘나중’이라는 시간은 하느님의 시간이고, 우리에게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기회밖에 없습니다.
2) 우리는 ‘가라지의 비유’를 사회 정의 구현의 관점에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분명히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는 세상이고, 거의 항상 의인들이 악인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무작정 최후의 심판만을 기다려야 하는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정말로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냥 참기만 해야 하는가?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고, 그 사랑은 ‘자비’를 통해서 드러날 때가 많지만, 사실 ‘정의 구현’도 하느님의 사랑을 잘 드러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자비이신 분이고, 동시에 정의이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인간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기도 하고, 심판 날까지 기다리지 않으시고 바로 벌을 내려서 당신의 정의를 드러내실 때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헤로데’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첫 번째 헤로데는 말년에 끔찍한 병에 걸려서 비참하게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였고,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던 두 번째 헤로데는 왕좌에서 쫓겨나서 헤로디아와 함께 귀양살이하다가 죽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를 죽였고, 베드로 사도를 죽이려고 했던 세 번째 헤로데는 ‘천벌’을 받아서 죽었습니다.(사도 12,23) 그 일들은, 하느님의 심판은 종말에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당신이 작정하신 때에 이루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3) 하느님의 정의 구현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큰 희망과 위로가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슨 일을 당할 때마다, 악인들에게 천벌을 내려 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불의와 악을 결코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악을 심판하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메시아 시대’를 갈망한 다음 시편이 연상됩니다. “그가 풀밭 위의 비처럼, 땅을 적시는 소나기처럼 내려오게 하소서. 그의 시대에 정의가, 큰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저 달이 다할 그때까지.”(시편 72,6-7)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종말의 하느님 나라만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 ‘메시아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이 땅에 하느님의 완전한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신앙인 공동체는 바로 그 희망의 실현을 위해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편에 서야 하고, 온갖 사회악과 불의를 없애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앙인 공동체의(교회의) 사명이고 본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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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추수의 기본원칙>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상세한 해설을 담은 대목이다. 무대는 군중을 떠나 야외에서 집안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이 해설은 오직 제자들만을 위한 것이다.
해설의 내용을 살펴보면 비유 자체만큼 쉽게 이해된다.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이며, 가라지는 악의 자녀이다.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 당신이시고, 독을 품은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이다. 이렇게 세상이라는 밭에 뿌려진 밀과 가라지를 주인이신 하느님은 추수 때까지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하셨다. 그것은 가라지를 뽑으려다 자칫 밀을 뽑아 낼 수도 있다는 주인의 염려와 배려 때문이다.(29-30절)
추수 때는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고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가을에 잘 익은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뽑아 처분하는 것이 추수의 기본 원칙인즉, 세상의 종말에도 이런 원칙이 적용된다.
세상을 심판하실 인자(人子)는 천사들을 보내어 선인(善人)을 뽑아 아버지의 나라에 살게 하고, 악인은 뽑아 모조리 불구덩이에 처넣는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읽다 보면 제자들이 바로 앞에 있었던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31-33절)는 놔두고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두고 가라지를 특히 강조하여 예수께 설명을 부탁한 점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왜 그랬을까? 밀과 가라지의 비유말씀이 마태오복음의 고유한 전승인 점을 감안한다면, 저자는 마태오복음 공동체 안에 있었던 문제점들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미 주지하고 있다시피 상당히 이른 시일 안에 벌어질 세상 종말과 최후심판의 도래, 그리고 인자의 재림(再臨)에 관한 기대는 초기 거의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갖고 있었던 생각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지체 현상을 보이자 어쩔 수 없이 기대를 수정하게 된 것이다. 기대의 수정은 학습을 통해 이루어진다.
교회 공동체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 생각보다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학습하게 되고,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교회와 세상 안에 선인과 악인이 세상 끝까지 공존한다는 것을, 악인을 섣불리 제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악인과 선인의 구분은 공동체의 소관이 아니라 재림하실 인자의 소관이라는 점들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구성원의 관점은 자연히 세상종말에 가서 선인과 악인이 각각 받게 될 보상과 대우에 치우치게 된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가 세상 종말에 비유된 추수 때의 일들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 듯하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배경에 두고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신앙인을 돌아보면, 우리 각자는 언제든지 좋은 밀알이 될 수도 있고, 가라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가라지는 올바르고 바람직한 신앙생활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온갖 악의 요소들이다. 이런 악의 요소들은 이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확연히 드러났다.(연중 제16주간 금요일 복음산책 참조)
사람은 자기 마음에 뿌려진 씨앗을 이렇게 가꿀 수도 있고 저렇게 가꿀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예수께서 가라지를 뿌린 원수를 악마로 규정하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세상 안에 분명히 악의 세력이 있다는 말이다. 이미 경험한 적이 많겠지만, 많은 사람은 이런 악의 세력에 비교적 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결코 악이 선을 이길 수는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J. W. 괴테(1749-1832)가 쓴 불후의 명작 ≪파우스트≫를 감상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비유설교 안에서 좋은 밀알은 영원히 좋은 밀알로 남고, 가라지 또한 영원히 가라지로 남아 있을 것이지만, 신앙의 실제 생활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자신을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 안에 성전(聖殿)을 마련하신 성령께서 그 변화를 도와주실 것이라 믿는다.
사람의 마음 밭에 뿌려진 좋은 복음의 씨앗이 좋고 많은 열매를 맺을 때까지 씨앗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인내와 끈기로 기다리신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누구에게나 철저한 추수의 기본원칙이 적용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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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구경국 알로이시오 신부님]
안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느 학생이 나이가 지긋이 드신, 신앙심이 깊은 교수님을 찾아가 내세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물었습니다. 잠시 숙고한 후에 교수님은 몇 분 정도면 충분하다는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자신에게 앞으로 남은 수십 년의 세월을 만끽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것에 동의하였습니다. 잠시 후 학생이 방을 나가려고 할 때 교수님은 갑자기 학생에게 그가 언제쯤 죽게 될 것인지를 아는지 물었습니다. 모른다는 학생의 대답에 교수님은 조용히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부터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지 않을까?”>
그렇습니다. 내가 언제 죽는지를 확실히 알 수만 있다면 그 순간 이전의 며칠을 회개와 보속의 시간으로 비워두고, 나머지 시간에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살아도 좋을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언제가 될는지 알 수 없기에 우리는 순간순간을 죽음을 대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죽음을 대비하는 삶이란 이 세상의 모든 기쁨을 멀리하면서 지내는 것은 아닙니다. 평상시의 삶을 주님의 뜻에 따라 충실히 꾸려나가는 것에 다름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종말을 대비하는 삶이란 종말에 대해 고려를 할 필요 없이 오늘을 주님의 뜻대로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의 주님의 태도는 도무지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데에 전혀 도움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이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매 순간을 주님의 뜻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그것 자체만 해도 우리에게 결코 쉬운 것이 아닌데 세상에는 복음에서 밀로 비유되고 있는 착한 사람과 가라지로 비유되는 그다지 착하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섞여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나 주님의 말씀과는 전혀 무관하게 자신의 이익과 현세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여러 면에서 훨씬 더 부유하고 잘 사는 것으로 나타나는 현실은 우리를 더욱더 힘들게 합니다.
이런 마당에 단지 세상 종말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와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라는 말만으로는 우리의 마음에 평안을 주기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래서 밀로 비유되는 착한 사람이 마음이라도 편안하게 살게 하려고 주님이신 주인은 악인을 지칭하는 가라지를 당장에 뽑아 버리라고 명령을 내리거나 스스로 나서서 가라지를 뽑아버려야 함에도 오히려 가라지를 제거하겠다는 종을 만류합니다. 그것은 확실히 우리가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을 눈앞에 두고 가라지를 지금 당장 뽑을 것이 아니라 종말인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주인의 말과 행동은 언뜻 듣기에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아 수긍할 수 없지만 또 묵상 중에 깊이 생각해 보면 그런대로 이해돼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 같기도 합니다.
어차피 인간을 판단하는 것은 주님 고유의 몫이니 우리가 나설 수도, 나서서도 안 되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손수 가라지를 다 뽑으실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고, 또 주인의 말대로 가라지를 서둘러 제거하려다 밀까지 상하게 할 위험도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사실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닌 인간의 눈으로 밀과 가라지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적대적인 계급이나 종족을 근절하여 순수하게 좋은 민족을 만들려는 시도는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지속하여 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소위 말하는 ‘인종 청소’라는 방법으로 저지른 범죄 행위보다 반인륜적인 범죄는 인류 역사상 찾아보기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얼마 동안 밀과 가라지가 섞여 있게 두는 것에서 생기는 문제가 가라지를 서둘러 제거하려다 생기는 위험보다도 적은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당장 가라지를 뽑지 않고 주인의 말처럼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좋은 사람이 일순간에 좋지 않게 변할 수 있듯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은총으로 불릴 수 있는 어떤 계기를 통하여 좋게 변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늘 좋은 것을 행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어서 항상 좋게 변할 수 있으며 그 좋은 상태를 지속시킬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께서는 기회를 주십니다. 주변의 나쁜 사람을 무조건 배척하기보다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인내를 가지고 지켜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도 지금에 만족하지 말고 끝까지 주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마지막 날에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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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정원순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
<하느님은 빛의 근원이다.>
타지마할은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인도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황제 샤 자한이 사랑하는 아내, 뭄타즈 마할을 추모하기 위해 22년간 세운 묘궁이다.
건축에 사용된 대리석과 장식을 위한 돌들을 러시아·중국 각지에서 전량 수입하는 등 국가 재정이 휘청거릴 정도로 무리한 공사를 강행했던 무덤이다.
타지마할 중앙에는 정교하게 잘라 만든 대리석 병풍석 돔이 있고, 벽은 수천여 개의 준보석이 아름다운 문양을 이루고 있다. 순백색 대리석에 각종 문양을 파내고 그 자리에 다른 색 돌이나 준보석을 박아넣는 피에트라 두라(상감) 기법의 아름다운 벽….
우리는 여기서 빛의 요술을 보았다. 어둠 속에 고요히 가라앉아 있던 문양이 플래시를 들이대자 그 영롱한 빛을 발하며 아름답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냥 어둠 속에 있을 땐 대리석 벽과 다를 바 없는, 다만 색깔있는 암석 조각일 뿐이다. 그런데 빛이 들어가자 그 돌조각들은 찬란한 몸빛을 드러내며 빛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플래시 빛을 받자마자 영롱한 색깔로 빛을 발하며 찬란한 보석으로 변하는 돌조각들. 우리의 빛된 바탕은 그 빛을 만든 근원과 맞닿아야 빛을 발할 수 있다. 하느님은 빛의 근원이다.
우리는 빛된 그분께 나아가야만 우리 존재의 빛을 발할 수 있다. 빛은 빛을 부른다. 우리의 존재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빛을 받을 때만 찬란하게 빛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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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13,40)
「교회-순결한 창녀」는 교회론에 관한 책 제목이며, 순결한 창녀라는 표현은 어쩌면 오늘 복음의 좋은 씨와 겨자씨의 비유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밭인 세상의 현실은, 교회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우리 각자의 영혼 안에서도, 좋은 씨와 겨자씨 곧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선이 있는 곳에 필연적으로 악도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악은 선에 의하여 완전히 제거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았음을 역사를 통해서,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는 이미 겪었고 체험하고 있습니다.
경험적으로 내가 악을 미워하면서 그 악을 완전히 뿌리 뽑겠다고 결심하고 실행하는 그 순간에, 나의 선의 실행 결심은 이미 독선의 악이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선량한 지킬 박사가 밤이면 괴물인 하이드로 변하는 스티븐슨의 소설은 선악이 별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야누스의 얼굴처럼 이중적이라는 점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고 선악이 같다고 궤변을 늘어놓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선악이 다르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공존하고 있기에 다만 ‘수확 때까지, 종말 때까지’ 우리 가운데 견디어 내며 아빠 하느님께 내어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선 이런 우리의 마음을 읽은 듯, 사람의 아들에 의한 세상 종말의 때에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잡게 된다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물론 성서학자들은 이 부분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마태오 저자의 해설이지만, 이 해설에는 당대의 그리고 오늘 우리의 바람이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거부와 배척 그리고 박해의 와중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닥칠 악의 위세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마지막 날 단죄하시고 심판하실 사람의 아들에 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 마음에 드는 선을 행하면서 견디어 내려고 분투 노력하였습니다. 어쩌면 초대 교회의 신자들처럼, 오늘 우리가 직면한 악의 실체를 직시하면서 어떤 대응과 실천을 해야 하는지 배워야 할 것입니다. 악은 결코 악으로 이겨내지 못하고 선 하나만이 가능성이 있음을 믿는다면 선하고 슬기로운 우리는 지난 역사의 위기에 때마다 함께 힘을 모아 굳건히 어려움을 이겨낸 것처럼 작금의 위기가 기회로 전환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극복해 나가도록 합시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내”(13,41)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질 것이며”(13,42) 의인은 “해처럼 빛날 것”(13, 43)임을 믿고 살아갑시다. ‘좋은 씨’와 ‘가라지’는 이 세상에서 한때 함께 공존하겠지만, 마지막 날이 되면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고, 가라지는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릴 것이다.”(13,30)라는 말씀은 꼭 실현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이며, 그 약속은 실현될 것입니다. 악은 결코 승리할 수 없으며, 하늘나라는 악을 통해서 결코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전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화해와 치유재단’ 해산과 대법원의 강제 징용 피해자의 배상 판결에 따른 보복 차원에서 시작했던 일본 정부의 반도체 핵심 재원과 다른 품목에 대한 수출 규제를 기억하고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강제 동원이 대규모로 이뤄졌던 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이 7월 2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가운데 한·일 정부가 사전에 ‘강제노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일본 언론이 보도했습니다. 이 소식은 의식 있는 이들에게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고 분노할 내용입니다. 2015년 7월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가 있었던 군함도(하시마) 등이 세계유산에 등재될 당시엔 일본 정부는 ‘본인의 의사에 반해’(against their will)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로 노역’(forced to work)을 했다‘라고 밝히는 등 강제성을 명확히 한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은 여전히 합의한 사안까지 무시하고 반성할 줄 모르고 오히려 왜곡해서 발표한 것을 보면서, 이미 돌아가신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과 밤낮으로 그치지 않을 그 가족들의 눈에서 눈물을 봅니다.
오래 전 「녹두 꽃」이란 드라마의 ‘우금치 전투’ 장면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서 무참하게 죽은 수많은 이들의 허망한 죽음을 보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정말이지 이 땅에서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자존심을 야비한 방법으로 또다시 짓밟으려는 일본 자민당 정권과 극우파에 대한 저의 솔직한 심정에서, 구전 노래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보냅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너 뭣하러 나왔느냐 솔잎 댓잎 푸릇푸릇 여름인 줄 알았더니 백설이 덜덜 엄동설한이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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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람들은 고통의 시간을 모두 기억할까요? 대니엘 카니먼과 그의 동료들은 하나의 실험을 했습니다. 이 연구팀은 참가자들에게 얼음이 둥둥 떠 있는 차가운 물 속에 손을 담그고 버티게 했습니다. 이때 A 집단은 1분 동안 얼음물에 손을 담그고 있게 했고, B 집단은 1분에 30초 더 얼음물에 손을 담그게 했습니다. 그러나 B 집단은 1분 30초 뒤, 30초 동안 따뜻한 물에 손을 담글 수 있게 했습니다. 정리하면, A 집단은 1분 동안 찬물에, B 집단은 1분 30초 동안 찬물에 그리고 30초를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근 것입니다.
이 중 어느 집단이 더 고통을 호소했을까요? 얼음물에 1분 30초 담근 B 집단이 더 오랫동안 찬물에 있었으니 괴로웠을 것이라고 예측하지만 실제로는 A 집단이었습니다. 얼마나 오래 괴로웠는가보다 최후의 경험이 중요했습니다. B 집단은 따뜻한 물 30초가 괴로움을 한껏 낮춰준 것이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힘들다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고통과 시련의 무게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무엇인가를 해야 했습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기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했습니다. 고통과 시련 안에서 나올 수 없다며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해서 좋은 기억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고통과 시련을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이 역시도 지나갈 하나의 과거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밭의 가라지 비유 말씀을 설명해 주십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안에 가라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을 만나면 힘이 들고 또 큰 아픔과 상처를 겪게 됩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라지 같은 저 사람 때문에 도저히 못 살겠어!’라면서 포기하고 좌절해야 할까요? 가라지에 눌려서 제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세상 종말 때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울 것이기 때문에, 포기하고 좌절하는 삶이 아니라 어떻게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의인이 되어 하느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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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인생의 끝에 서면>
이건숙 씨의 “꼴찌의 간증”에 보니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장수비결*
“인생은 육십에 시작하는 것이니
칠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잠깐 밖에 나갔다고 전해다오.
팔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아직 이르다고 말해다오.
구십에 와서 가자고 하면
뭘 그리 서두르냐고 달래다오.
백 살에 와서 가자고 하면
이제 서서히 좋은 시기 봐서
가겠다고 전해다오.”
인생의 끝에 서면 하루라도 더 이 세상에 머물고 싶어지나 봅니다. 욕심이라고 하기에는 모두가 가진 기대요, 바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자기의 육에 뿌리는 사람은 육에서 멸망을 거두고, 성령에 뿌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라 6,8-9).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시는데 아주 쉽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사실 세상의 종말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죽음의 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 여정의 수확 때인 죽음의 순간에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가라지의 상태로 있다면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의 상태였다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 삶은 해처럼 빛나게 됩니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런데도 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쉽게 알아들은 만큼 삶의 모습도 맑고 밝아졌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마지막 날에 좋은 씨앗인 하늘나라의 자녀 가운데에서도 내적으로는 악한 자의 자녀로 밝혀질까 두렵습니다. 얼마나 오래 살아왔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의 문제가 더 소중함을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은 이 세상의 삶을 살면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지는 것보다 죽음을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야말로 “의인은 희생의 제물이고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제사입니다”(성녀 벨라뎃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는 만큼 지금 여기서 참 신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늘은 이미 지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상 여정은 알곡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알곡은 추수 때 곳간에 쌓일 것입니다. 의인의 삶이 빛나듯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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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의 끝 그 너머>
마태오 13,36-43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길의 끝 그 너머>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마태 13,40)
아무도
피할 수 없는
마지막을 향한
언젠가는
너의 끝과
나의 끝으로 갈릴
아직은
너와 나 함께
우리의 길을 걸으며
늘 그렇게
너 아닌 나를
다그치되
가끔씩
나 아닌 너를
살피는 까닭은
네가
바르면
너를 닮고
내가
바르면
홀로라도 이렇게
너로
말미암아
나를 잃음 없이
끝을 향한
지금 여기에서
한걸음 또 한걸음 내딛어
마침내 닿을
길의 끝 그 너머까지
영원히 걷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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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이냐 멸망이냐?>
-더불어Together, 귀가歸家의 구원 여정-
"주는 온유한 자 의를 따라 걷게 하시고, 겸손한 자 당신 도를 배우게 하시나이다."
오늘 복음은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 친히 하신 설명이기보다는 초대교회의 우의적 해설이라 함이 맞지만, 예수님 역시 동의하리라 생각됩니다. 우의적 해설이라 더욱 현실감있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1.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2.밭은 세상입니다.
3.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입니다.
4.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입니다.
5.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입니다.
6.수확 때는 세상 종말입니다.
7.일꾼들은 천사들입니다.
비유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가라지의 비유는 원래는 하느님의 ‘인내’에서, 우의적 해설에서는 그 초점이 ‘심판’으로 바뀝니다. 저는 세상 종말을 죽음으로 바꿔 이해합니다. 죽음을 통해 인생 모두는 끝나고, 구원이냐 멸망이냐의 세상 종말과 같은 현실이겠기 때문입니다. 세상 종말시 두 부류로 나뉘는 모습이 그림처럼 선명히 드러납니다.
1.“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그들은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첨예하게 대비되는 구원과 멸망의 상태 인간들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선택하라면 누구든 둘째 번일 것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둘 중 하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 미사도, 수행도, 회개도, 사랑도, 기도도, 공부도, 감사도, 희망도, 믿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더 기도하라고, 회개하라고, 사랑하라고, 공부하라고, 깨어 살라고, 찬미하라고, 감사하라고, 기뻐하라고, 믿으라고, 희망하라고 연장되는 우리의 생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회개한 이들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오직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의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힘껏 사는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의 말씀처럼,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날마다 하루하루의 선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요즘 널리 깊이 회자되는 이름이 김민기입니다. 사후 이처럼 큰 울림을 주는 아름다운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매스컴 모두가 다루고 있으며 일간신문에는 사설에서 칼럼에서 끊임없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종교란을 보니 무종교라지만 종교인 이상으로 가난하고 겸손하고 순수했던 삶이었습니다. 길다싶지만 여러 대목을 나눕니다.
“우리는 모두 김민기에게 빚을 지고 있다. 삶과 예술이 합일하는 드문 경지를 보여준 김민기는 위대한 예술가이자 그의 노래 제목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늘 푸르렀던 사람, 그가 떠난 자리가 너무도 황량해 우린 한동안 몸살을 앓을 것이다. 명복을 빈다.”
“나직한 음성 하나하나가 마음으로 들어오는 ‘봉우리’. 맑고 슬픈 서사가 입에 감기면서 가슴을 감싸는 ‘백구’, 그리고 무던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한 발 한 발 걸어가던 그분의 뒷모습이 떠오르는 사람 ‘아름다운 사람’. 어눌하기는커녕 너무나 아름다운 그 노랫말들을 다시 천천히 되뇌며, 공자가 진정으로 추구한 문질빈빈(文質彬彬;의견이 좋고 내용이 충실하여 잘 조화를 이룬 상태를 말함) 을 감히 떠올린다. ‘잘 가시오, 친구여. 부디 안녕히.”
제가 볼 때 김민기는 익명의 크리스천이요 세상 속의 누구 못지않은 구도자이자 수행자였습니다. 김민기 님을 위한 전주교구 이병호 퇴임 주교의 장례미사시 추모 강론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이미 신화가 전설이 된 김민기입니다. 제가 한 개인을 이렇게 길게 강론에 인용하기는 난생처음입니다. 혹자는 윤동주와 비교하는데 그 이상일 것이며, 아마 곧 평전도 나오리라 봅니다. 이분의 '아침이슬'과 '늙은 군인의 노래'는 제가 요즘 즐겨 부르는 애창곡이기도 합니다. 1951년 생이니 저보다 두 살 아래로 참 자신을 많이 성찰 분발하게 합니다.
그러니 결국 가라지의 비유가 의도하는 바는 회개와 더불어 현재의 삶이겠습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로 직결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왔던 길을 돌아보는 까닭은,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헤매지 않고 바른길로 나아가고자 함이다.”<다산>
과거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나쁜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억, 감사, 희망의 순서입니다. 과거의 기억에서 감사가 샘솟고 감사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꽃피어납니다.
“뉘우침이 마음을 길러주는 것은 똥이 싹을 북돋우는 것과 같다. 똥은 더러운 것이지만 싹을 북돋아 좋은 곡식으로 만든다.”<다산의 여유당 전서>
뉘우침은 기도와 성찰이 포함된 회개로 읽으면 됩니다. 회개와 더불어 새롭게 샘솟는 신망애信望愛의 삶입니다.
엊그제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맞이한 교황님의 담화문 한 대목을 나누고 싶습니다. 어떻게 노년을 맞이할까에 대해 좋은 도움이 되는, 우리를 각성하게 하는 조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가능한한 독립적이고 다른 사람과 분리된 삶 안에서 개인적 성취를 추구합니다. 공동체의식은 위태로워지고 개인주의가 찬양받고 있습니다. 곧 ‘우리’에서 ‘나’로의 전환은 우리시대의 가장 명백한 징표입니다. 우리가 혼자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반박하는 가장 근본적인 논거가 되는 가정마저 이러한 개인주의 문화의 희생양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이들고 쇠약해지기 시작하면, 우리가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고 사회적 유대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개인주의의 환상은 그 본색을 드러냅니다. 실제로 우리는 삶에서 더 이상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다른 이들이 옆에 없고 기댈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때에야 그 모든 것이 필요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이 너무 늦은 시점에서 이를 깨닫습니다.”
교황님이 더불어의 공동체 삶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혼자와 더불어가 조화된 삶이요, 우리의 여정은 더불어의 여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더불어의 여정중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이 내 삶을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압축할 때,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할 때,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는가에 대한 확인입니다. 이래야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선물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요셉수도원 공동체에 부임한 후 36년동안 정주하고 나니 하루로 하면 정오 12시에서 오후 4:30분쯤 된듯하고, 일년사계로 하면 늦여름에서 초겨울로 진입한 듯 이제 노인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런 자각이 하루하루 절박한 심정으로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을 찾게 합니다. 제1독서 예레미야의 고백은 이런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를 대표한 예언자의 고백입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저희를 내쫓지 마시고, 저희와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을 깨뜨리지 마소서. 이민족들의 헛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비를 내릴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 스스로 소나기를 내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 분은 주 저희 하느님이신 바로 당신이 아닙니까? 그러기에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궁극의 미래이자 희망입니다. 하루하루 아버지의 집으로의 더불어, ‘귀가의 구원 여정’ 중에 있는 우리입니다. 과연 일일일생, 일년사계 중 어느 시점에 있는지요?
"귀있는 사람은 들어라!”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비유의 진리를 깊이 듣고 깨닫고 알아 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종말론적 구원의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흐뭇이 즐거워하라. 올바른 이라야 찬미가 어울리도다."(시편 33,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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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구별과 차별을 하는 것이 가라지다.>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우리 공동체를 보면 가라지가 꼭 밀 가운데 섞여 있는데, 그 가라지들을 우리가 뽑으려고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서는 가라지를 잘 솎아낼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오늘 저는 다른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까 합니다.
지금 나는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를 밀이라고 생각하는가? 가라지라고 생각하는가?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자기를 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라지입니다.
자기를 가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밀이고 다른 사람을 가라지라고 생각하고 솎아내려는 사람이 실은 가라지입니다.
오늘은 이 짧은 묵상 나누기만 하겠습니다.
이것이 지난 토요일 저의 나눔이었습니다. 오늘의 나눔은 이것에 이어지는 것입니다.
가라지는 구별과 차별하는 것이 가라지입니다. 이것을 뒤집으면 구별하지 않는 것, 특히 차별하지 않는 것이 밀입니다.
불교에서 구별은 부처가 할 짓이 아니고, 그러니 깨닫지 못한 자가 하는 짓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과 불행은 이 구별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악이라는 것 또는 가라지라는 것은 선에서 시작되지요.
이것이 선이라고 하는 순간은 이것이 아닌 것이 악이잖습니까? 이것만이 선이라고 하는 순간 이것이 아닌 것이 악이잖습니까?
양단의 개념이란 것이 다 이렇습니다. 흑백논리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것을 백이 아니면 다 흑이라고 보는 것은 위험하고, 그 이전에 흑과 백을 나누고 구별하는 것 자체가 나쁩니다.
구별이 이렇게 나쁘면 차별은 더 나쁩니다. 구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일 뿐인데 악한 것이라고 하고, 오늘 비유에서 가라지를 뽑아내려 하는 것처럼 악한 것이기에 없애야 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늦잠을 잔 관계로 여기까지만 나누기 하려고 하는데 위의 나눔에서 악이란 죄의 악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밝힙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존재(선)를 파괴하는 죄악까지 괜찮다고 하거나 그런 죄악을 우리가 없애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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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13,42ㄴ)
<예언자의 눈물!>
오늘 복음(마태13,36-43)은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밭의 가라지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은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마태 13,37-40)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가라지들을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13,41-43)
'예언자의 눈물!'
'사람들을 회개의 길로 이끄는 소명을 받고 파견된 예언자들의 외침과 그들의 고뇌와 눈물에 대한 묵상'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이기에, '예언자의 눈물'은 '하느님의 눈물'이며, '참 예언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입니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처녀 딸 내 백성이 몹시 얻어맞아, 너무도 잔혹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예레14,17)
"주님, 저희의 사악함과 조상들의 죄악을 인정합니다. 참으로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예레14,20)
성녀 베로니카가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린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회개로', '나의 회개로' 하느님의 눈물을 닦아드리고, 지금 파견된 예언자들의 눈물을 닦아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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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마태 13, 40)
종말은 끝없는
욕심과
교만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제어 장치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결정하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가라지의
마지막 모습을
봅니다.
물이 바다를
향하듯이
좋은 씨도
악한
가라지도
모두
하느님께로
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아십니다.
인격의 반성은
그래서
생활의
반성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좋은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관망만 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섭리하시고
생활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태울 것은
태우시고
흐를 것은
흐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종말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입니다.
믿음을 갖고서
살아가는 삶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삶을 망치는
악한
가라지의
모습은
태워버리고
하늘 나라의
자녀로
천사들과 함께
사는 삶이길
바라십니다.
새로운 그림을
새로운 삶을
그려나가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살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에
이미
참 생명이
있습니다.
좋은 삶을 위한
새로운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들지 않는
새로운
시작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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