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득림=수양대군의 김종서 제거 등에 큰 역할
송익필=아버지가 역모 조작 후 밀고하여 출세
반석평=부잣집에 양자로 들어간 뒤 과거 합격
유극량=어미가 종인 줄 모르고 무과에 급제해
조선 성종 재위(1469~94) 내내 임금의 골치를 아프게 만든 사람이 있었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로 파산군(巴山君)에 봉해진 조득림이다. 그는 모략으로 나라의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들거나, 남의 집과 땅을 권력을 이용해 빼앗기 일쑤였고, 아버지 상중에 처를 버리고 새장가를 들려고 하여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문제아였다.
그런데 이 골칫덩이 조득림은 바로 노비 출신이었다. 조득림은 원래 정희황후(세조의 비)의 아버지 윤번의 가노(家奴)였다. 어려서 총명하여, 정희황후가 수양대군(나중의 세조)에게 시집온 후에 눈에 들었는데, 수양대군이 집권을 위해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안평대군을 역모사건으로 몰 때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세조가 즉위하자 그를 3등 좌익공신(세조의 즉위에 도움을 준 공신)에 임명했다. "충성을 다하여 나를 도와서 이미 비상한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차례를 뛰어넘는 은총을 베풀어야 하겠다.
| 17세기 경주김씨 가문의 노비 소송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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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건대, 그대는 성품이 빼어나고 일을 처리하는 데 공경하고 삼가며, 어린 나이에 나를 따라서 항상 좌우에 있었으나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해이하지 않고 받들어 순종하는 데 어긋남이 없었다.(중략) 충성이 왕가에 있으니, 내가 그대 공적을 아름답게 여긴다. 이에 좌익 3등 공신에 임명하여 그 부모와 처에게도 작위를 내리고 밭 80결, 노비 8구, 은(銀) 25냥중 등을 내리노라. 앞으로도 충성을 다하여 나를 섬기도록 하라."
이렇게 아버지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조득림이고 보니, 아들인 성종이 어찌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이 때문에 공신이 된 노비의 자식은 특별대우를 받았던 것. 노비 출신이 양민이 되기도 어려웠던 시절, 고급 관리가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이처럼 역모를 고발한다든가, 권력자의 종복으로서 공을 세우고 관리가 된 경우는 가끔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식은 과거를 볼 수도 있었다. 조득림은 공신에 봉해지기 전 역시 종이었던 여자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고, 공신이 된 후에는 양반의 딸과 다시 결혼을 해서 자식을 보았는데, 모두 과거를 보았다.
공신이 된 노비의 자식으로, 입신한 대표적 예가 송익필(1534~99)이다. 송익필은 학문에 전념하여 율곡 이이 등과 교류했고, 조선 예학의 태두로 칭송받는 김장생 등을 제자로 길렀다. 그는 서인 세력의 막후 실력자로, 훌륭한 유학자로 당세에 이름을 떨쳤다. 그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이 노비였다. 신분에 한을 품은 송사련은 역모를 조작, 밀고하여 관리가 되었고, 그 덕분에 송익필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동인 세력이 집권하고 무고 사실이 밝혀지면서 송사련은 물론 그 아들도 다시 노비로 환천되었지만, 서인 세력이 재집권하면서 사면을 받아 풀려나게 되었다.
그러면, 스스로의 힘으로 노비의 신분을 딛고 관리가 된 사람은 없을까? 실은 자력으로 노비 신분을 벗어던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반석평이다. 그는 어려서 사람됨이 총명하여 학문에 뜻이 있었지만 천민이라는 신분적 한계가 있었다. 그의 할머니가 반석평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천민임을 숨기고 가문을 일으키고자 손자를 이끌고 서울로 와서 셋집에 살면서 길쌈과 바느질로 의식을 이어가며 공부를 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종의 신분에 불과했다. 그때 그는 어느 재상집 종이었는데, 이 재상이 다행히 사람 볼 줄 알았다. 반석평이 글을 익혔고 또한 총명하다는 것을 알고 면천시켜 아들 없는 부잣집에 양자로 보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 조선시대 노비 추쇄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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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평은 중종 2년(1507년)에 마침내 과거에 급제를 한다. 할머니의 노력이 빛을 본 것이다. 그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중종의 총애를 받아 함경도 병마절도사(정3품)를 역임했고, 평안도, 함경도, 충청도, 전라도 등의 관찰사를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중종 26년(1531년)에는 조선을 대표해 명나라에 성절사로 다녀오기도 했다. 노비 출신으로,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다른 노비 출신들이 노비 문제를 거론하기 꺼린 것과는 달리 문서를 위조하여 종을 만드는 폐단 등을 임금에게 직언하여 바로잡으려 노력하기도 했다.
유극량(?~1592년)의 경우는 자신이 노비인 줄 모른 채 장군이 된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는 재상 홍성의 집에서 종으로 일했는데, 재상집의 큰 술잔을 깨뜨리고 처벌이 두려워 도망가 양민과 결혼해서 유극량을 낳았다. 당시에는 종모법(從母法)이라고 하여 어미가 천민이면 자식도 모두 천민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유극량은 그 사실을 모르고 무과에 응시, 급제하여 벼슬이 수군절도사(정3품)에 이르렀다. 그는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로 오기 직전 전라좌수사를 지냈는데, 임진왜란 때 임진강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함으로써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연안 유씨의 시조로, 무의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종이 될 처지였지만 한 성씨의 시조로 자신의 운명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이들 노비 출신들은 비록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바꾸었지만 다른 양반들의 견제를 피할 수 없었다. 앞서 송익필도 노비 출신이었기에 과거를 보기보다는 학문에 전념했고, 동인과 서인의 집권 다툼의 와중에 반대파가 득세하자 다시 노비로 환천되었다. 또 반석평은 노비 출신이라는 이유로 임금과 함께 경서를 논하는 자리에 참석할 수 없다는 주장에 따라야 했으며, 임금이 공조판서나 병조판서로 임명하려 할 때 여러 관료들의 반대를 받았다. 유극량의 경우엔 애초 어머니가 종으로 있던 재상 홍성이 너그럽게 모른 척 해주었기에 다행히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노비가 관료가 된다는 것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하늘의 별 따기?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 「조선왕조실록」을 전부 뒤져도 노비 출신 관료는 몇 되지 않는다. 노비들은 대신 돈으로 신분상승을 꾀하거나 민란에 참여했다. 그들에겐 출세는 그저 꿈이었고, 그 꿈을 현실 속에서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세상을 뒤집어 엎는 것, 즉 혁명뿐이었다. 우리가 사는 현대야말로 조선 노비들의 이상향인 셈이다. 세상살이란 여전히 힘들고 고달프지만 우리는 그들이 목숨을 던져서 만들고자 했던 행복한 세상에 살고 있다. 다만,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출처: 굿뉴스피플 goodnewspeople.com /고운석 주필 gnp@goodnewspeop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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