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익 前수석의 외교비사② 1994년 가을 대사관저 전화벨이 울렸다 정태익 한국외교협회 회장 ‘정태익 전 청와대수석의 외교비사’는 해외 공관에서 활동하는 외교관들에게 특별 공개됩니다. 외교부가 해외 공관 외교관들에게 지침이 될 수 있도록 기사 전문을 공개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편집자주> 외교부 미주국장 임무를 마친 필자가 주카이로 총영사로 임명돼 현지에 부임한 것은 1993년이었다. 우리는 이집트와 영사 관계를, 북한은 대사급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우월적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북한은 언제나 기세가 등등하였다. 과거에는 북한 외교관이 외교단 행사에서 우리 공관장에게 “참석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트집을 잡으며 몸싸움을 걸어온 적도 있었다. 필자가 부임 할 당시 주이집트 북한대사는 60대의 김영섭이었다. 걸프전으로 이집트에서 남북한 외교 역전 북한은 중동의 맹주(盟主)인 이집트에 상당한 공을 들여왔다. 무엇보다 먼저 이집트가 1993년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할 때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전쟁 후에도 이집트인이 가장 자랑하는 전쟁기념관을 지어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군사박물관에 걸려 있는 방대한 양의 이집트의 역사적 장면을 북한 화가들이 모두 그려주었고, 무바라크 대통령의 초대형 동상도 만들어주었다. 우상화에 익숙했던 터라 북한은 동상 제작에는 탁월한 수완을 발휘할 수 있었다. 장승길 이집트 주재 북한대사(사진 오른쪽)가 망명하기 전 북한대사관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참석자들을 안내하고 있다. 하지만 카이로에서 북한의 외교적 지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킬레스건은 쇄락한 경제력이었다. 정치와 안보 분야에서 드높았던 북한의 위상도 경제력이 쇠퇴함으로써 추락의 운명을 맞아야 했다. 실제로 현대의 포니를 비롯한 한국 자동차가 카이로 시내를 질주하고 있었고, TV와 세탁기 등 삼성과 LG의 가전제품이 중산층 가정을 점령하고 있었다. 남북한 역전은 걸프전쟁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전선국가 지원계획의 일환으로 한국 정부가 지원한 한국산 군용차, 경찰차가 민간택시와 함께 카이로와 전국의 주요 도시를 누비고 다니자 북한은 더 이상 한국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집트 외무성도 대사급 관계와 영사급 관계를 전혀 구분하지 않았다. 외교단 행사에서 북한 외교관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이 거의 없을 만큼 북한의 존재는 미미해졌다. 필자는 오히려 풀이 죽어있는 김영섭 대사에게 다가가 대화를 주도하였다. “미주국장으로 재직할 때 판문점에서 한반도 비핵화 담보를 위한 상호사찰 규정을 마련하기 위해 1년 가까이 협상을 진행하였는데 최우진 대사의 고집불통 때문에 협상이 진척되지 못했다. 김영섭 대사가 대신 대표로 나왔더라면 협상이 잘 되었을 것이다”라는 취지의 농담도 건넸다. 김 대사는 65세 정년이 되어 1994년 5월에 귀국하였다. 북한대사 아내는 ‘꽃 파는 처녀’ 주연배우 다음 달인 6월에 후임으로 장승길 대사가 카이로에 부임하였다. 장 대사가 주재국 정부에 아그레망을 요청하였을 때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당시 ‘장승길’의 영문 이름이 ‘Chang Sung Gil’로 표시돼 있고, 나이가 40대 초반으로 매우 젊은 편이고, 북한 외무성 중동담당 차관을 역임하였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우리는 처음에는 북한의 실세인 장성택의 동생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였다. 나중에 이름이 ‘장성길’이 아니고 ‘장승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소동은 끝났다. 다만 장 대사의 부인이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만든 것으로 알려진 가극 ‘꽃 파는 처녀’의 주연배우였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아마도 김 위원장이 중매도 하고 경력을 관리해 주었기 때문에 장 대사가 승승장구한 것으로 짐작되었다. 이것은 북한사회의 모든 인사가 최고 지도자의 영향력 하에 있다는 증거의 하나가 될 것이다. 망명한 장승길 이집트주재 북한대사의 처 최해옥씨가 1989년 만수대예술단의 가극「꽃파는 처녀」에서 주인공 꽃분이역을 하고 있다. 장승길 대사의 신임장은 7월 20일 제정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7월 12일 김일성 주석의 사망이 변수로 작용했다. 북한이 스스로 조문기간 내에 신임장을 제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바람에 상당한 기간에 걸쳐 북한대사관은 외교적 공백을 감수해야 했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이 1995년 한·이집트 수교 그리고 1996년이 북한대사 망명이라는 초대형 북한 외교참사의 전조가 되었다. 1994 김일성 주석 사망→1995년 한·이집트 수교→1996년 북한 장승길 대사 망명 북한 외교참사 전조 시작 당시 이집트 외무성의 아유브 한국담당 과장은 자택에서 파티를 여는 방식으로 필자가 장승길 대사와 접촉할 기회를 만들어주려고 노력했다. 필자는 파티에 필요한 용품을 지원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장 대사는 비교적 자유롭게 행동을 하는 편이었지만 수행원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부인도 한복을 입고 리셉션장에 자주 나타났으나 항시 몇몇 실무 외교관 부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따라서 대화를 깊게 나눌 수 있는 기회는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 1994년 가을 어느 금요일로 기억된다. 한국대사관저에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는 가정부가 잠시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필자가 직접 전화를 받았다. 북한 억양을 가진 젊은이의 목소리였다. “한국에 가면 공부를 할 수 있습네까?” 필자는 전화를 건 주인공이 장 대사의 아들인 장철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왜냐 하면 장 대사에게 2명의 아들이 있는데 당시 장남은 평양에 인질로 잡혀있고, 18세의 차남은 카이로의 영국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정보를 미리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 대사관저 번호를 알고 감히 전화를 할 수 있는 북한 젊은이는 장 대사 차남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흥분한 상대를 진정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했기에 필자는 차분한 목소리로 응대했다. “젊은이. 그런 중요한 일은 전화로 말하는 것보다는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오.” 그런 다음 필자는 “의논할 수 있는 아저씨 전화번호를 알려줄 테니 직접 연락해 보라”고 권유하고 전화를 끊었다. 며칠 후에 장철민은 우리 파견관에게 전화를 하였다. 나중에 보고받은 사연의 전말은 다음과 같았다. 1994년 가을 대사관저에 전화벨이 울렸다. 장승길 대사 아들의 망명의사 타진 전화였다. 장철민에게 학교에서 필리핀 여자친구가 생겼다. 여자친구와 사귀느라고 귀가시간이 자주 늦어져 아버지와 다툼이 생겼고, 급기야는 감금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에 격분한 사춘기의 장철민이가 아버지에게 반발해 여자친구와 함께 한국으로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필자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북한 최고위층 자녀의 망명 기도에 직면한 필자는 심사숙고에 들어갔다. 그리고 관계관과도 충분히 상의한 끝에 장철민을 제3국으로 보내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하여 본국에 그런 방향으로 유도하겠다고 건의하였다. 한국으로 망명하게 되면 북한은 필경 우리 정부가 미성년자를 납치하였다고 항의하며 외교적 쟁점으로 삼아 우리의 수교 노력을 방해할 것이 분명했다. 이는 수교를 목표로 하고 있는 우리의 외교 노력에 심대한 지장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장철민은 우리의 도움으로 여자친구와 함께 이스라엘을 경유하여 캐나다로 망명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이 사건에 대해 철저한 보안조치를 취하였다. 특히 언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이것이 훗날 장 대사 가족의 미국망명의 토대가 되었다고 판단된다. 장승길대사 망명으로 외부인 출입이 엄격히 차단된 주 카이로 북한 대사관 내부. 귀국하는 필자에게 “축하한다” 뜻밖 인사 필자는 1995년 4월 수교에 성공하여 초대 주이집트 한국대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1년 후에는 정무차관보로 승진하여 금의환향을 하게 되었다. 한편 장승길 대사는 부인 덕분에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관리해주는 외교관으로 특권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들의 캐나다 망명과 한·이집트 수교 성사에도 불구하고 본국으로 송환되지 않고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필자가 본국의 외교부 차관보로 영전하게 되어 이임 리셉션이 열렸다. 필자가 마지막으로 장승길 대사를 만나게 되었다. 내가 장 대사에게 악수를 나누며 작별인사를 건넸더니 뜻밖에도 “축하한다”는 말을 하였다. 그는 나 때문에 막대한 업무상 피해를 입었을텐데 사태를 외면하기 보다는 직면하는 인간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북한 최고위 외교관 망명으로 국제사회가 깜짝 놀라 조선일보 이상철 정치부장, “장승길 사진달라” 귀국 후 정무차관보로 재직하고 있던 1996년 7월 장승길 주이집트 북한대사가 미국으로 망명하였다는 기사가 도하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장 대사와 그의 가족과 접촉했던 당사자로서 만감이 교차하였다. 당시 조선일보 이상철 정치부장이 전화를 걸어와 장승길 대사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고 장 대사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는지 찾아봐 달라고 신신당부하던 광경이 문득 떠오른다. 카이로 주재 북한 대사 장승길부부에 앞서 잠적한 장대사의 형 장승호씨가 근무해 온 파리 주재 북한 무역대표부가 들어서 있는 건물전경. 장승길 대사 부부는 먼저 서방으로 망명한 차남 장철민을 끝내 잊지 못했던 모양이다. 결국 프랑스에서 외화벌이 요원으로 활약하던 동생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을 하기로 결심했다. 장 대사 부부는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는 날에 모든 절차를 밟은 다음 공항으로 가는 척하고 요원들을 따돌린 다음 카이로 소재 미국대사관으로 직행하였다. 이들은 이후에 미국에서 차남과 감격적 조우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평양에 남아 있는 장남에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는 비극이었을 것이다. 장승길 대사의 미국망명은 남북한 분단이후 북한의 최고위 외교관의 망명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북한에 수교와 망명이라는 이중 치명타를 가한 이 외교사건은 남북한 분단의 비극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불행한 역사를 만들어냈다. 장승길 대사는 미국에게 북한이 중동에서의 미사일 판매 활동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신변의 안전을 제공 받아 은둔의 생활을 지금도 하고 있을 것이다. 통일만이 참담한 인간 드라마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달동네 2천억원 빼돌린 권력층을 문건날조해 덮어주는 충견 LH https://blog.naver.com/ynk53/22120068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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