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조건
원제 : The Rat Race
1960년 미국영화
감독 : 로버트 멀리간
음악 : 엘머 번스타인
출연 : 토니 커티스, 데비 레이놀즈, 잭 오키
케이 메드포드, 돈 릭클스, 노만 펠
Rat Race, 쥐의 경주란 뜻이죠. 보통 복잡한 도시에서 벌어지는 극심하고 치열한 생존 경쟁을 의미하는 관용어 이기도 합니다. 1950년대 뉴욕에서 벌어지는 이 치열한 삶의 경쟁을 다룬 이야기가 가슨 캐닌 이라는 작가에 의해서 희곡으로 쓰여졌고, 그게 영화화 된 것이 1960년 입니다. 당시 참 잘 나가는 배우였던 토니 커티스와 다재다능한 여배우 데비 레이놀즈가 남녀 주인공으로 출연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인생의 조건' 이라는 좀 철학적 제목으로 개봉하였습니다. 영화 내용을 보면 '인생의 조건' 보다는 원제의 의미가 더 어울리죠. '삶의 경쟁' 뭐 그런 제목이 적절합니다.
밀워키 출신의 섹소폰 연주자 피트(토니 커티스)는 청운의 꿈을 안고 아버지와 작별하고 뉴욕에 도착합니다. 무거운 악기를 들고 호텔에 방을 잡으려고 하지만 비싼 요금에 그는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어느 바 에서 사람 좋아 보이는 주인 맥의 소개로 저렴한 자취방을 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방은 원래 페기(데비 레이놀즈) 라는 댄서가 살고 있었는데 돈이 없어서 쫓겨날 상황이 된 것입니다. 집 주인 갈로 부인은 아직 페기가 짐을 정리하지도 못했는데 피트를 들여보냅니다. 페기가 쫓겨 나가는 모습을 본 피트는 그녀를 바래다 주는데 당장 오갈데 없는 처지라는 것을 알고 그냥 계속 그 방에 머무르기를 권유합니다. 다행히 침대가 두 개 있었고, 커튼으로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에 둘은 원룸이지만 각자 침대를 쓰면서 동거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젊은 두 미혼 남녀가 좁은 원룸형 공간에서 같이 생활한다.....당연히 둘이 뭔 일이 벌어지거나 사랑에 빠질 거라는 걸 예상 혹은 기대하게 됩니다. 이런 내용은 우리나라 영화에서도 이후에 등장을 했었죠. 신성일, 임예진이 주연한 '땅콩 껍질 속의 연가' 라는 작품이 있었고, 송승환, 김현주 주연의 '젊은 시계탑' 이라는 작품도 있었습니다. 그 두 한국영화 역시 한 방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에 플라토닉한 동거를 하게 되는 남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요. '인생의 조건'은 내용으로 보면 '젊은 시계탑'에 많이 가깝습니다. 아마 그 영화가 '인생의 조건'을 참고로 만들어진 것 아닐까 싶네요.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두 남녀가 단칸방에서 어쩔 수 없이 동거를 하면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나중에 사랑하게 된다 라는 내용이 엇비슷하지요.
페기는 수년 전에 뉴욕에 와서 몸 파는 일 빼고는 이것저것 다 해 본 여인입니다. 그래서 뉴욕이 얼마나 더럽고 험난한 곳인지 너무 잘 알고 있지요. 결국 자리 잡지 못하고 아직 피폐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의 눈에 악기 몇 개 들고 와서 성공하겠다는 포부룰 가진 피트 라는 젊은 남자가 얼마나 무모하게 보였을까요? 페기는 직업상 전화가 꼭 있어야 하는데 요금을 못 내서 정지 당할 위기에 철거를 하러 온 수리공에게 애원하여 겨우 2주 유예를 받는 대신 나중에 그에게 몸을 맡기기로 약속했었습니다. 피트가 온 첫날, 그 수리공이 찾아오고 피트는 잘못 찾아온 것으로 생각하고 그를 강제로 돌려 보내는데 수리공이 페기의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알고 있는 것을 보고 페기를 문란한 여자로 오해합니다. 페기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을 겪어도 몸을 함부로 굴리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 항변합니다.
페기는 유흥업소에서 남자 손님의 댄스 파트너로 일하지만 소위 2차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큰 돈을 벌지 못했고, 아직 업소 사장 넬리에게 몇백 달러 빚이 있었습니다. 피트는 악단의 오디션을 보려고 하지만 치열한 경쟁에 밀리는데 어느날 우연히 인기 재즈그룹이라는 남자를 만나서 새 연주자가 필요하다는 제안을 받습니다. 이날 너무 기뻐서 트럭에서 가짜 밍크를 싸게 파는 자에게 속아서 페기의 선물로 덜컥 사온 피트, 페기는 드디어 일류 재즈단에 들어갔다고 기뻐하면서 가짜 밍크를 진짜로 알고 내미는 피트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 합니다. 그날 페기는 뉴욕이 얼마나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세상이고 무서운 곳인지 순진한 피트에게 충고하지만 피트의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합니다. 결국 피트는 크게 사기를 당하고 악기마저 잃어버리게 됩니다. 모든 것을 잃은 피트에게 그의 연주를 들은 이웃 악단이 크루즈호 여행의 악단에 합류할 것을 제안하게 되고 페기는 악기를 잃고 난감해 하는 피트를 위해서 업소 사장에게 300 달러를 가불하고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합니다. 그 돈으로 피트에게 악기를 사준 페기, 피트는 돈이 없어 방에서도 쫓겨날 뻔 했던 페기가 무슨 돈으로 악기를 샀는지 걱정하면서 크루즈호 일정을 떠나고 매일 페기에게 편지를 씁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느덧 사랑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피트에게 떳떳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페기, 그러나 돈을 빌린 댓가로 손님을 모셔야 할 상황으로 내몰리는데....
많은 인구가 몰려 사는 대도시 뉴욕, 밀워키에서 온 순진한 피트라는 청년의 험난한 분투기입니다. 이미 앞서 뉴욕을 경험한 페기 라는 여인이 그런 피트에게 도움을 받아 간신히 방에서 쫓겨나지 않았지만 그런 피트를 안스럽게 바라보는 내용이지요. 어려운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가난한 두 남녀의 치열한 뉴욕 생활기 입니다. 어떠한 판타지도 없는 영화이고 치열하고 암담한 현실을 잘 담아내고 있지요. 특히 가짜 밍크를 순진한 남자를 유인해서 파는 사기꾼이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뉴욕에서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저도 과거 사회 초년생 시절쯤 그런 사기꾼을 만난 적이 있거든요. 백화점에서 어쩌다 덤핑으로 나온 밍크인지 뭔지를 완전 헐값에 판다고. 제가 관심없다고 하니 아주 바보 취급을 했지요. 그거 말고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무슨 생선을 아주 싸게 판다는 사람도 있었고. 지금은 우리나라가 발전해서 그런 사람들이 거의 없어졌지만 정보에 어둡던 옛날에는 그런 야바위꾼 같은 사람들이 있었죠. 뉴욕도 다를 게 없었던 것입니다.
토니 커티스는 당시 아주 잘 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영화속 처지와는 완전 반대) '바이킹(58)'에서 실질적 주인공, '흑과 백(58)' 이라는 영화도 호평 받았고, '뜨거운 것이 좋아(59)'에서도 연주자로 나와서 여장 남자 역할도 하는데 아주 걸작으로 호평 받았죠. 그리고 1960년 '스팔타카스'라는 대작에 비중있게 출연했고, 같은 해 출연한 작품이 '인생의 조건' 이었습니다. 1962년에는 또 다른 대작 '대장 부리바'의 주인공이었습니다. 50년대 후반~60년대 초반까지 최고의 시기를 보낼 때 출연한 작품입니다. 순진해 빠진 밀워키 청년이 뉴욕에 와서 험한 세상을 톡톡히 경험하는 역할입니다.
데비 레이놀즈는 재능이 많은 배우입니다. '사랑을 비를 타고'를 통해서 뛰어난 안무와 노래를 선보였는데 그런 뮤지컬 재능 외에도 연기력도 상당한 배우입니다. 50년대 초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 꽤 꾸준한 주연급 여배우로 활약했는데 영화가 별로 방영이나 출시가 안되어 잊혀진 여배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법 재미난 작품을 많이 남긴 그녀입니다. '사랑은 비를 타고' 외에도 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서부 개척사'에서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등장한 배우였고, '그것은 키스로 시작되었다'에서 글렌 포드와 달달한 로맨스를 벌였고, '노래하는 수녀'에서는 실제 인물인 자닌 데케르를 모델로 한 캐릭터를 연기했습니다. 전성기는 60년대까지 였지만 2016년 사망하기 전까지 꾸준히 연기 활동을 하였습니다.
매우 가난하지만 아직 젊음이 있고 순수함이 있고,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그들, 판타지 없이 여전히 험난한 앞길이 놓여 있겠지만 젊음과 사랑으로 극복해 나가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내용이지요. 요즘 물질만능 시대가 더 높아진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사랑 자체가 비현실적이 되어 버려서 그냥 과거의 '가난한 낭만'이 보여지던 영화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전 어렵던 시절에는 단칸 월셋방이나 지하방에서 신혼을 시작하는 부부들이 꽤 많았으니까요. 다 옛날 이야기죠.
토니 커티스는 음악가 역할이지만 많은 직업 중에서 재능순으로 꼭 성공하지 않는 것이 뮤지션의 운명 같습니다. 특히 악기 연주자들은 여전히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각광 받았던 유진박의 가슴 아픈 사연도 그렇고. 최근 많이 벌어지는 오디션 방송을 보면 정말 실력있는 많은 가수들이 무명인 채로 살아가고 있으니 음악을 한다는 것은 참 어렵고 험난한 경쟁입니다. 섹소폰 연주에 자부심을 가졌지만 뉴욕에 와서 어설프게 행동했다 큰 사기를 당한 젊은이의 분투기를 다룬 내용이 당시로서는 매우 현실적 내용이었을텐데 '알라바마에서 생긴 일(앵무새 죽이기)' '버려진 본능' '42년 여름' 등 인간의 삶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다룬 사회파 감독 로버트 멀리간이 연출했습니다. 스티브 맥퀸과 나탈리 우드 주연의 '버려진 본능'도 유사하게 힘겨운 남녀의 이야기였었지요.
1961년에 국내 개봉되었지만 현재는 아주 초희귀작입니다. 1981년에 한 번 TV 방영된 적이 있을 뿐, 출시도 안되었고 심지어 영상을 구하는 것조차 어려운 영화인데 감독과 배우의 인지도를 생각하면 보기 드문 경우입니다. 몇 년전 운좋게 영상을 구했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영상 릴을 구하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화려하거나 오락적인 작품이 아닌 소박하고 힘겨운 삶을 다룬, 연극에 가까운 작품이다 보니 묻혀버린 고전영화가 된 것이 다소 아쉬운 부분입니다.
평점 : ★★★ (4개 만점)
ps1 : 데비 레이놀즈의 영화들이 좀 더 많이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 정도의 배우가 '서부 개척사'와 '사랑을 비를 타고' 두 영화 만으로 기억되는 건 안타깝네요.
ps2 : 엘머 번스타인이 음악을 담당했는데 주인공에게 사기를 치는 재즈 연주단 멤버 중 한 명으로 출연하기도 합니다.
ps3 :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나라 서울도 70-80년대 지방에서 올라온 여러 젊은이들이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혹독한 삶을 느끼는 전쟁터 였으니까요. 많은 꿈을 갖고 서울에 올라왔지만 가진 것 배운 것 없고 젊음만 갖고 성공하기는 정말 어려운 환경이었지요.
[출처] 인생의 조건 (The Rat Race, 60년) 가난한 젊은 남녀의 뉴욕 분투기|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