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부귀초두로[生前富貴草頭露]
[살아있을때의 부귀는 풀잎의 이슬]
그리고나서 우국지사는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한지,
"우리 어디 가서 술을 나누며 쌓였던 회포를 마음껏 풀어 보기로 합시다."
하고 김삿갓을 술집으로 잡아끄는 것이었다. 김삿갓도 술을 마다고
할 턱이 없었다.
남강물이 바로 눈앞에 굽어보이는 촉석루 담벼락 밑에
*유천(流川)이라는 주막이 하나 있었다. 김삿갓은 우국지사와 함께 주막으로 들어서다가
간판을보고는 주모를 나무라주었다.
"이 사람아! 전쟁터에서 군사가 많이 죽은 것을
<流血成川>이라고 한다네.
여기는 임진왜란때에 왜놈들을 많이 죽인 곳이니까, 이왕이면
주막이름을(流血成川)이라고 할 일이지, 왜 그냥 <유천>이라고 했는가?"
그러자 주모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잖아도 주막 이름을 <流血成川>이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너무 비참하다고 해서 <유천>이라고 했다오."
김삿갓은 술이 거나해져 오자, 문득 옛날 일이 떠올라 우국지사에게 물었다.
"참, 노형은 그 옛날 임진왜란 유적지를 탐방하면서
<나는 언젠가는 파사현정의 정치가가 되겠노라>호언했던 일이 있지 않소?
만약 그때의 장담이 그대로 실현되었다면 지금쯤은 정치가 되었어야 옳은 일인데 도대체 그 꿈은 어떻게 되셨소?"
우국지사는 뜻밖의 질문에 쓸쓸하게 웃었다.
"허허허, 그것은 젊은 날의 객기에 지나지 않았던 호언장담이었지요.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時運>이란 게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단 말입니다."
"차라리 잘 되었소이다.
옛글에 <영웅은 만인의 적 英雄萬人之敵>이라는 말이 있습디다.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면서 그까짓 영웅은 되어서 무엇하오?"
"삿갓 선생은 워낙 달관하신 양반이니까 영웅을 우습게 여기시겠지만 나 같은 속물에게 영웅이란 그야말로 대단하게 보이는 인물이라오.
그러나 영웅이 되려면 반드시 시운이 따라야 하는 거예요."
우국지사는 그렇게 탄식하며 술을 한 잔 쭈욱 들이키고 나더니,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즉흥시 한 편을 읊어 보이는 것이었다.
[지사봉시소(志士逢時少)
지사가 때를 만나기 어려움은
가인박명다(架人薄命多)
미인이 박명 하는 것과 같도다
생평무소사(生平無所事)
내 평생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두백내하하(頭白奈何何)
머리가 백발이 되었으니 이를 어찌 하리오.]
김삿갓은 그 시를 들어 보고, 우국지사는 아직도 속세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구나 싶어 적이 슬픈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기분을 떨쳐 주기 위해 얼른 이렇게 말했다.
"소동파의 시에,
[생전부귀초두로(生前富貴草頭露)
살아있을 때의 부귀는
풀잎의 이슬이요.
신후풍류 맥상화(身後風流 陌上花)
죽은 뒤에도 풍류는 밭두렁의 꽃과 같다.]
라는 말이 있소.
노형이나 나나 우리 이미 백발이 다 되었는데, 이제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다고 무엇을 바랄 것이오.
그저 남은 나날을 모든것의 시시비비를 떠나서 살면 되겠지요."
우국지사는 김삿갓의 말에서 새삼 느낀 점이 있었던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삿갓 선생 말씀이 진실로 옳은 말씀이시오."
김삿갓은 술을 마셔가며, 우국지사에게 물었다.
"내일 아침이면 서로 헤어져야 할 판인데, 노형은 어디로 가실 생각이시오?"
"여기서 남해 섬들이 멀지 않으니, 그 쪽을 한 번 돌아 볼까 합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우국지사도 나와 마찬가지로 종신 운수객이 분명하구려.
우리가 이번에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나게 되려는지"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글쎄올시다.
사람의 일을 누가 알겠소이까?
운수가 좋으면 다시 만날 날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다시 만날 기회가 또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삿갓 선생은 어디로 가실 생각이시오?" 하고 이번에는 우국지사가 김삿갓에게 물었다.
김삿갓은 잠시 생각하는 빛을 보이다가
"나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이번 겨울만은 따뜻한 지방에서 편히 쉬고 싶지만 그럴만한 곳이 있어야 말이지요."
우국지사는 그 말을 듣고 나더니 눈을 커다랗게 떠 보였다.
"그렇다면 마침 잘 됐소이다.
강진 고을에 안복경이란 진사 친구가 있소 내가 그 친구에게 편지를 써드릴 테니' 이번 겨울은 그 친구 집에서 편히 쉬도록 하시오."
"고맙소이다. 그렇게 폐를 끼쳐도 괜찮을 사람인지요?"
"그 점은 염려 마시오.
그 친구는 돈도 많지만 풍류를 이해하기 때문에
삿갓 선생이 찾아 가시기만 하면 소흘이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김삿갓은 몸이 하도 괴로운지라, 우국지사의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심 하였다.
그나저나 내일 아침이면 우국지사와 작별할 것을 생각하니 김삿갓은 우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국지사에게 술을 권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번에 헤어지면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노형은 어떻게 생각되시오?"
"삿갓 선생은 무슨 말씀을 하시오?
설사 내일 죽는 한이 있어도 사람은 모름지기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김삿갓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조용히 말했다.
"날이 밝으면 우리들은 어차피 헤어져야 할 것이오.
우리가 두 번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지 모르니, 내가 이별의 시를 한 수 읊기로 하겠소."
[우국비가사(憂國非歌士)
비분강개 잘하는 우국지사와
상봉촉석루(相逢矗石樓)
촉석루 다락에서 다시 만났는데
한연응단첩(寒烟凝短堞)
차가운 연기는 담습에 아롱지고
낙엽하장주(落葉下長洲)
가랑잎은 모래받에 딍굴고 있소.
소지위기권(素志違其卷)
우리들은 본래의 뜻은 서로 틀려도
동심기백두(同心己白頭)
마음은 하나건만 이미 백발이 되었소.
명조남해거(明朝南海去)
그대 내일 아침 남해로 떠나가면
강월오경추(江月五更秋)
강산에는 어느덧 가을이 깊어 오리요.
영원한 이별을 상징하는 구슬픈 시였다.
우국지사도 그 시를 듣고 나자 가슴이 메이는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당나라의 시인 고적이
친구를 멀리 보내며 읊었다는 시를 서글픈 목소리로 읊어 대었다.
[십리황운백일훈(十里黃雲白日曛)
누런 구름 길게 뻗어
하루해가 저무는데
북풍취안 설분분(北風吹雁 雪紛紛)
북풍에 기러기 날고 눈발이 사납구나
막수전로 무지기(莫愁前路 無知己)
가는곳에 친구 없다 걱정하지 마오
천하수인 불식군(天下誰人 不識君)
천하의 그대를 어느 누가 모르리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뜻하는 말인지 모른다.
한 번 만난 사람은 생별이든 사별이든 반드시 헤어지기마련이다.
김삿갓은 오늘까지 무수한 이별 속에서 살아 왔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우국지사와의 이별처럼
절실한 비애를 느껴 보기는 처음이었다. >>>> >>>> >>>>
**사평35" 소설/김삿갓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