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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믿음과 순종 (눅1:46-56절)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또 다시 기쁜 성탄이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은 가장 큰 경사이며 온 우주와 세계가 기뻐해야 할 축제입니다. 길거리에는 크리스마스 대형 트리가 세워지고 성탄의 불이 온 누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날을 축하하는 의미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산타 할아버지가 주는 선물을 기다리고, 어떤 사람은 멀리 떨어진 가족을 기다리고, 어떤 사람은 연휴로 인해 모처럼의 휴가 여행을 계획하고, 어떤 사람은 이웃을 돌보는 자선의 기회로 삼고, 어떤 사람은 망년회 모임을 주선하고 친구들을 만납니다. 우리 주님께서 탄생하시던 그날 밤은 오늘처럼 이렇게 복잡하고 어수선한 성탄은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실 때 주의 사자가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의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둘러 비추며 말하기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천사가 전하여준 이 메시지가 우리를 향한 성탄의 의미이자 내용입니다. 성탄을 맞아 우리가 진정으로 기뻐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때 홀연히 허다한 천군과 천사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이 천사들의 찬송은 성탄의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밝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불행한 인생에게 행복을 주고, 슬픈 자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평화였습니다. 그러므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온 우주와 역사에 미치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탄생은 극히 제한적인 기쁨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성탄의 기쁨을 받았습니다.
세 명의 동방의 박사들, 들에 있는 목자들, 사가랴 제사장과 그의 아내 엘리사벳, 그리고 주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 이들만이 성탄을 알았고 성탄을 노래했고 성탄을 기뻐하였습니다. 비록 불완전하지만 메시야 대망사상의 성취로 받아들이고 메시야를 영접하였습니다. 제한된 사람들에게 제한된 기쁨의 성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성탄의 소식이 비밀에 붙여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따라가다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을 하였습니다. 그 후에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 때 저들은 대답하기를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고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하였습니다. 이로 보건대 성탄의 소식은 모든 제사장들과 서기관, 온 예루살렘과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단 한 사람도 동방박사들을 따라나섰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메시야를 만나겠다고 베들레헴을 방문하였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거민들은 충격을 받고 소동만 일으켰습니다. 성탄의 소식을 듣고 증오심을 일으켜 부들부들 떨며 당장 아기를 죽이겠다고 이를 가는 헤롯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성탄이 기쁨의 소식이 아니라 심판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박사들을 보내고 나서 음모를 꾸밉니다. 왕의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또 다른 유대인의 왕이 나셨다는 소식은 자기 왕위에 대한 위협일 뿐 아니라 반역이었습니다. 겸손하게 오신 그리스도가 그에게는 심판이었습니다. 그래서 즐겁고 기쁜 성탄이 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성탄은 교만한 자의 마음이 부서지는 시간입니다. 인격의 아성이 무너지는 시간입니다. 부자가 공수로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인간의 영화와 권세가 몰락하는 시간입니다. 거대한 성 바벨론이 무너지는 시간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시간이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비천한 자, 감옥에 있는 자, 눌린 자에게는 메시야의 출현으로 복된 소식이지만 교만한 자, 권좌에 있는 자, 거짓되고 죄인 된 자에게는 왕의 무서운 심판의 소식입니다. 기뻐하심을 입은 자,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기쁨의 소식이요, 진정한 평화의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의 소식이 기쁨의 소식인지, 불안과 심판의 소식인지는 우리의 자세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누가 성탄의 소식을 제일 기뻐했으며 가장 올바른 의미로 성탄을 맞이하였을까요. 그 사람은 주님을 잉태했던 동정녀 마리아였습니다. 그녀는 성탄의 약속을 천사로부터 받았습니다. 그 약속대로 예수님을 잉태하게 됩니다.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수태고지를 받고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산 중에 있는 친족 사가랴 제사장의 집에 달려갑니다. 그곳에 이르러 엘리사벳에게 문안할 때에 엘리사벳으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찬송을 부릅니다.
*눅1:46-48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측량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으로 큰 찬송을 부릅니다. 이는 마리아만이 가지는 기쁨입니다. 나는 기쁘다. 나는 복되다. 모든 사람이 대대로 나를 복이 있다 할 것이다. 여러분! 이러한 기쁨을 느껴보셨습니까. 마리아의 현재의 모습은 비천한 계집종입니다. ‘비천하다’ 라는 헬라어는 ‘타페이누스’로 매우 낮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나사렛 목수의 정혼자인 자신의 신분을 잘 나타내 주는 표현입니다. 보잘 것 없고 하잘 것 없는 나약한 여인이지만 그의 마음에는 엄청난 기쁨이 있습니다. 이유는 자기 몸에 메시야를 잉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만 기쁜 것이 아니라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복되다 할 것이라고 가슴 벅찬 감격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 기쁨은 미래지향적인 기쁨입니다.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잉태하고 주를 찬양합니다. ‘나는 기쁘다. 나는 복이 있다. 이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되다 하리라.’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직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기쁨으로, 그리스도를 모시는 구체적인 감격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복이 있습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그 시간부터 축복의 사람이 됩니다. 모든 사람의 복의 근원이 되고 복을 베풀고 나누어주는 복의 전령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택을 하는 일에는 엄청난 희생이 따릅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믿어줄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오해하고 비판하고 정죄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자신에게 닥칠 모든 불이익을 감내합니다. 파혼이 되든지, 부정한 여인으로 전락하든지, 간음한 여인으로 정죄를 받든지, 마을에서 추방당하고 돌에 맞아 죽든지, 이러한 모든 위험과 희생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나는 메시야를 잉태하였노라” 이 한 마디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벅찬 기쁨과 감격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전적으로 자신을 위착하고 맡겨버립니다.
*눅1:49-50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리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에게 큰일을 행하셨다는 믿음과 확신이 그녀가 찬송하는 두 번째 이유였습니다. 다윗이 노래한 바로 그 전능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시89:8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력 있는 이가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모든 사람이 굴복할 수밖에 없고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때 그녀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생명과 동기와 방법과 마지막 운명까지도 다 바치는 순종의 태도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어떻게 낳으며 어떻게 키우며 어떤 어려움이 닥칠 것인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나님께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위탁하였습니다. 제물로 바쳤습니다. 다 바치고 나니 이제는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무한한 기쁨만이 그의 가슴에 충만합니다. 이것이 복 받은 여인이 부르는 찬송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찬송이며 성탄의 기쁨입니다.
그는 믿음의 눈으로 자기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안목에서 세상을 보았고 하나님의 크신 경륜 속에서 하나님의 선물이 임하고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놀라운 역사, 이 거룩한 역사, 이 구원의 역사에 부름받아 하나님의 도구로 쓰인다는 사실, 질그릇 같이 비천한 여인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는 사실 앞에 그녀는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땅에 오실 메시야를 잉태하고 그 메시야를 키우고 메시야를 세상에 전하는 대임을 맡았다는 기쁨으로 그녀의 가슴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예언하는 선지자가 많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전하는 사명을 받은 선지자도 있었지마는 대개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전하는 선지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전하는 메신저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선지자가 끊어진 지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사람들은 지치고 모든 것은 끝이 난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때에 하나님의 진노가 끝나고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 바로 그 도상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선포하는 귀한 일에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진정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행사되는 일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진노의 시간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시간이요 잃어버린 자식을 찾으시는 순간입니다.
마리아가 메시아를 잉태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의 증거입니다. 그 긍휼 속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들어있습니다.
*눅1:51-53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복중에 있는 메시아를 바라보면서 마리아는 지금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은 바로의 말과 병거를 바다에 던지시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낮추셨습니다.
*단4:24-27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이가 명령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그런즉 왕이여 나의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
메시야의 오심은 모든 교만을 헛된 것으로 만듭니다. 교만할 이유를 다 무효로 돌립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 부자를 빈손으로 보내시는 역사를 마리아는 지금 바라보고 있습니다. 복중의 메시아를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환하게 전망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하실 때 이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라.’ 이제 마리아는 메시아를 영접하되 마음으로만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몸을 제물로 드려 영접합니다. 전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위탁하고 운명을 바칩니다. 다른 사람들이 믿든 안 믿든 그녀는 믿었습니다. 온 세상이 다 못 믿어도 그녀는 예수의 잉태를 믿은 것입니다. 그 믿음이 그녀로 하여금 많은 슬픔과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내게 하였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소망이요 미움을 넘어서는 사랑입니다. 슬픔을 이기는 기쁨이요 장래를 내다보는 감격입니다. 마리아는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 속에 쓰임 받는 감격으로 즐거워합니다. 이제 마리아는 주님 앞에 “예”라고 대답합니다. “예”라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리아는 믿음이 훌륭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하나님이 친히 하신 일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적적 은혜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는 사람의 믿음 또한 반드시 필요합니다. 마리아가 메시야를 잉태한 것도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이지만 그 다음으로 마리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 결과 그녀에게 성령으로 잉태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로 마리아는 순종이 훌륭하였습니다. 믿음이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처녀가 구주를 잉태하는 축복을 맏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놀라운 일이 성취되었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기 전날 밤에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경이로운 일은 우리 안에 예수께서 내주하시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마리아가 가졌던 믿음과 순종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주님의 역사 앞에 “예” 라고 대답하여 내 안에서 그리스도를 탄생하게 하는 진정한 의미의 성탄을 맞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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