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요한3;1-16
성경은 하나님의 러브스토리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죄인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러브스토리입니다. 그것도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한 사랑이야기입니다. 2000년 역사를 거쳐 많은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들은 변화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전설이나 소설이 아닙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였고 그들은 위대한 생애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므로 영생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의 끝없는 사랑의 시간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가면 뭐하라 뭐하지마라 하며 강요한다고 그것이 싫어서 교회 안가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율법적으로만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어떤 자매가 남자친구를 사귀면서 율법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자친구를 사귀면 밥해줘야지 빨래해주어야지, 애기낳아줘야지 아-- 난 시집안가” 사랑을 하는데 이렇듯 율법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이 너무 행복해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사랑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교회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성도님들은 하나님과의 사랑이 기쁩니까? 아니면 하나님과의 시간이 재미없습니까? 오늘 말씀에는 최고의 지성인이였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여 고민하는 니고데모가 나옵니다. 그는 이 문제에 부딪혀 예수님을 찾아와 장시간 대화하며 하나님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배웁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셔서 기쁨이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비결과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니고데모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데도 곤고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발견하심으로 거듭나서 심령에 기쁨이 가득한 신앙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1절은 니고데모가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였고 당시 유대인 이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잘 지키며 살았습니다. 지도자란 이스라엘 최고 기관인 산헤드린의 의원이란 뜻입니다. 그는 당시 최고 엘리트층에 속한 사람이였습니다. 10절에서는 그는 또 율법 선생이였고 요21장에 보면 그는 부자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런 사람은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잘 살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항상 어려운 문제가 있는 분들은 예수님께 나옵니다. 소경, 문둥병자, 중풍병자, 귀신들린 사람등 위로가 많이 필요한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사회적인 지위도 있고 부족함이 없이 보이는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나아오다니 얼른 이해가 안갑니다. 그것도 사람들 이목을 피해 밤에 예수님을 만나고자 찾아왔습니다. 이를 볼 때 아무리 세상적으로는 아무리 갖추고 산다할지라도 세상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내면의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은 영혼의 존재라서 이런 외적으로 부족함이 없다할지라도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2절을 보면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일일이 보았고 이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왜 나는 하나님을 믿는데도 마음이 이렇게 허전한지를 상담받고 싶었습니다.
3절을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보시고 바로 거듭나지 않았기에 하나님나라의 기쁨과 평강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믿고 마음의 평안을 얻고 하나님의 사랑때문에 감격스럽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웠습니다. “왜 나는 하나님을 믿는데도 감격의 눈물도 한번 안나오고 평안도 없고 재미가 없을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위해 구원의 은혜와 감격, 평안과 희열, 의와 평강, 기쁨과 소망, 권세를 가득히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부터 우리 심령이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누리며 복된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나라는 우리 영혼이 참 안식을 누리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요 현자요 부자였던 니고데모가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인생에서 성공했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다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행복과 평강이 없었습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우리인생들이 왜 부를 추구하고 명예를 얻고자 하고 권세를 차지하고자 합니까? 이런 것을 통하여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얻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다 차지하고도 그 마음에 참 평안이 없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성도님들 마음은 예수님믿고 행복하십니까?. 천국입니까? 아니면 천국을 다른 곳에서 찾는 중입니까? 술집에 가서 천국의 평안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분위기좋은 찻집에 가서 천국을 찾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을 찬양하는 우리의 마음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 마음천국일세” 하는 이런 고백이 절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니고데모처럼 그 마음에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아 고민하는 것인지? 자신을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첫째는 3절,7절을 보면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거듭나야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는 뜻으로 영어로는 "You must be born again" (7)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영으로 태어난다” 즉 영적이 출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영혼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엄마뱃속에서 태어날 때는 육이 만들어지고 육으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모든 감각을 다 갖추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성에 대한 감각은 없습니다. 이 감각은 사춘기되면서 살아납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영의 감각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이 감각으로 살아나게 합니다. 이 영의 감각이 살아나면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지옥 심판받을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이이든 어른이든 이 영의 감각이 살아나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영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잠재해 있던 이성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면 이성 또래를 보면 좋고 설레이는 것처럼 이 영의감각이 살아나야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고 그 은혜가 감격스럽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때에 심령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과 감격이 벅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혼의 존재라서 누구나 이 세상과의 사랑만으로는 만족과 희열과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좋은 집에 고급 승용차를 굴리며 주말마다 외식을 하며 산다할지라도 이 평강과 희락은 누릴 수 없습니다.
전 과기처장관이고 현원자력연구소 고문인 정근모장로는 약관24살에 미국 플로리다 대학의 교수로 임명된 천재였습니다. 그러나 10살 된 아들이 불치병에 걸렸을 때 첨단과학자인 자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자임을 알게 되었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의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령을 통하여 뜨거운 믿음을 갖기위해 부흥회에 참석했어도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부흥회가 끝난후 새벽기도시간에 에베소서2:1-8절을 봉독할 때 마침내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렸고 .. ” 이 말씀을 읽어내려 갈 때 그의 두 눈에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같은 교만한 인생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감격적으로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그의 눈물샘이 터진 것처럼 구구절절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들의 질병을 하나의 벌이라고 생각하였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어야하는가 불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이 그의 신앙을 위해 아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아들의 병을 오히려 감사하며 아들의 병으로인해 가족전체가 구원을 받게 되었던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정근모장로는 감사치 않은 죄부터 세상체면과 속교만을 하염없이 회개하였고 거듭나서 기뻐하면서 아들을 천국으로 보내주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는 길에 대하여 설명해주십니다. 5절을 보면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우리나라는 참좋은 나라입니다. 사계절이 있고 치안이 잘 유지되어 있습니다.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경제적으로도 세계12위입니다. 탈북자들이 북한사회에서 통제받고 굶주리다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너무나 좋아합니다. 인권이 보장되어있고 나라가 안녕을 지켜주고 열심히 살면 얼마든지 나은 삶을 보장해 줍니다. 의료기술도 세계 어느나라보다도 발전되어 있으면서도 병원비가 이렇게 싼 나라도 드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도 너무도 좋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에 지금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는 영토개념은 아니지만 분명 존재합니다. 마귀도 얼씬 못하고 죄의식을 씻음받고 진정한 자유와 사랑과 감격이 있는 나라, 하나님께서 통치하셔서 사랑과 평화로 다스려주십니다. 이 하나님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만 아닙니다. 지금 이 땅에서부터 가는 나라입니다. “예수믿었더니 내 마음이 너무 편해졌어, 진작에 믿을 것을”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그 사람이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인생의 파도가 일고 문제가 복잡하지만 하나님나라에서 사는 사람은 마음은 고요하고 평안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까?
먼저 1) 물(회개)로 들어갑니다. 물이란 씻는 기능이 있습니다. 구약 성막에서보면 성소에 나아가기 전에 먼저 물두멍에 가서 물로 손을 씻었습니다. 이 행위는 우리의 죄를 물에다 씻고 부정을 씻어내는 회개의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죄는 오늘날 회개하면서 씻어낼 수 있습니다. “저가 부족해서 이 이렇습니다. 저가 못나서 그렇습니다. 저가 어리석어서... 저가 불순종해서 다 이렇습니다. 저가 잘못했습니다. 다신 안그러겠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너 때문에,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누구때문에” 하기보다는 내가 부족해서 다 이 모양입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2) 그러면 성령께서 역사해 주셔서 거듭나게 됩니다. 이는 거듭나게 하시는 주체가 바로 성령님이란 뜻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요한복음16:8절에 보면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해주시고 또한 의 즉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죄사함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둘째사망이라는 심판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이 아니면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오직 성령님이 가르쳐주시기(증거) 때문입니다. 성령은 무엇보다 독생자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피와 물을 쏟으신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때 아 바로 나의 죄 때문에 이런 죽음이 있었구나를 깨닫고 믿게 됩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칭의받고 중생하게 됩니다. 이것을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7절에서 “당신은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는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마치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눈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소리를 통해 바람이 있는 것처럼 성령으로 나는 거듭나는 것도 언제 어떻게 거듭나는지는 잘 몰라도 눈물로 감사하며 말씀에 감동하게 됩니다. 이로써 그 사람의 영혼이 성령으로 거듭난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의 증거(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11) 예수님은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하며 못믿는 니고데모에게 11절 말씀으로 지적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이 말씀에 근거해보면 거듭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이 증거하시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증거를 보여주어도 우리 마음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귀신을 쫓아내며 죽은 자를 살려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교회에서도 아무리 귀신이 쫓아내며 귀신이 이와 같이 있다, 귀신이 시험들게 한다고 해도 안받아들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모두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도 신비요, 십자가에 달려죽으심으로 죄사함이 있다는 것도 신비요, 3일만에 부활하심도 신비요 승천하심, 재림하심도 모두 우리이성으로 헤아릴 수 없는 신비입니다. 우리성도님들은 이성적으로 이해안된다하여 이를 거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받아들이면 이해가 됩니다. 우리성도님들은 겸손히 말씀에 귀기울이고 나도 다 안다는 교만은 버리고 겸손히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거듭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16) 예수님은 이제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모세의 놋뱀이야기를 가지고 거듭나서 영생을 얻는 길을 가르치시고자 하십니다. 민수기21장을 보면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길이 험하다고 하나님께 불평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불뱀에게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처방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놋쇠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고 백성들더러 그것을 쳐다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쳐다보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황당한 방법입니다. 아니 약초를 주시던지 아니면 해독제 조제요령을 가르쳐주시면 몰라도 놋뱀을 쳐다보라 그러면 살리라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이성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쳐다본 사람은 다 살아났습니다, 반면에 그런 일이 어디 있냐고 자기생각을 고집한 사람들은 새끼뱀에게 물렸더라도 죽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구원의 핵심입니다. 14,15절을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자도 들려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과 승천사건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놋뱀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무슨 병에 걸렸던지 무슨 죄에 빠졌든지 무슨 문제로 고통하든지 이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는 자는 모두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듭나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생각이 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과 내가 죄 용서받고 영생을 얻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가 안갑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십자가를 쳐다보면 이상하게 나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그 죽음의 댓가로 내 죄가 모두 용서된다는 것이 깨달아지게 됩니다.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들고 눈물흘리도다”
16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죄로 영원히 멸망할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친히 인간의 모습으로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고자 십자가에 모진 고통을 당하시고 피흘리시며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는 자는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인종에 관계없이,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돈많고 학식있고 존경받고 명예가 있는 사람도 그 내면은 어둡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성도님들은 거듭나서 하나님나라가 내 마음속에, 내 가정에 우리교회안에 이루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