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언이설
지난해 가을 아내가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주부들을 상대로 마케팅하는 모임을 참석한 경험이 있다. 시중가 1만원 짜리 상품을 참석자들에게는 1천원에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조직인 셈이다. 그들의 목적은 일단 구매자들을 끌어모은 후 자신들의 마케팅 기술을 총 동원해 그들이 원하는 상품을 판매하기 위함이다.
몇번 참석 후 한번은 원적외선 전기렌지를 20만원에 판매하는데, 구입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한다. 하지만 그들의 논리는 전혀 맞지 않다. 그들의 논리는 원적외선 방식이라 전기요금 걱정을 안해도 된다는 주장이다. 주부들로서는 구미가 당길만 하다. 가스렌지를 사용하면 유해가스가 발생한다. 그래서 전기렌지가 가정마다 보급되는 추세이다. 하지만?
희망에 부풀어 전기렌지로 변경 후 약 50여일 지나 한달분 전기요금 고지서를 받으면 기절을 하게 된다. 한국의 전기요금은 누진제 이다보니 약 15만원 정도가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부들은 일단 마케팅의 수법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만한 능력도 없다면 미끼 상품을 뿌려가며 영업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홈쇼핑 방송을 보다보면 마치 무언가에 말려들듯 빠져드는 마력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먹고 그런 기술만 연구하는 전문가이니 일반인이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조금만 정신 가다듬고 살펴보면 절대로 빠져들지 않을 수 있다. 다만 누구에게나 허영심이 있다보니 자신을 통제 못하고 빠져들게 된다.
안타깝게도 목사들중에도 그런 부류의 설교자가 있다. "당신들이 나처럼 따라해봐라. 그러면 대박이 난다" 그럴듯 하다. 충분히 구미가 당긴다. 자신의 성공담을 들려주니 왠지 나도 따라해보면 그렇게 될 것만 같다. 사실 부흥사들의 전형적인 스타일이라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놓고 "당신들의 보화를 천국에 쌓으라"고 주장하는 부흥사는 매우 초보스럽다. 노련한 부흥사는 접근 방식이 다르다.
30여년전 내가 목회하던 지역 교회연합회에서 연합 기도회로 서울의 이모 부흥사를 초청했었다. 육두문자를 가장 잘 구사하는, 좀 목사답지 못한 목사이다. 이분은 경험이 많다. "천안의 어느 교회 부흥회를 갔더니"로 사작하는 레파토리! 그가 엄청난 축복을 받았는데, 비결을 물으니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제물을 드렸다고 하였다. 그냥 헌금이 아니라 가장 고액권으로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부동산을 구입할 안목을 열어주셔서 버려진 싸구려 땅을 샀더니 그곳에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몇십배로 땅값이 올랐다는 것.
이 말을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마케팅의 성패가 달라진다. 진지하고 간절하게 빠져들도록 해야 한다. 설교 후 헌금시간이 왔다. 과연 얼마의 헌금이 나왔을까?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가 나온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류의 목회자들이 흔하다.
내가 직장생활을 하며 출석하던 교회는 매우 은혜스럽다고 말하는 교회이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목회자가 예배당 신축을 선포한 이후부터 분위기가 급변했다. 지나치게 무리한 추진에 중직자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목회자는 설교시간마다 그들을 저주했다. 이런 목회자들에게는 18번이 있다. 바로 다윗의 이야기.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원했지만 하나님은 "네 아들이 건축하게 하리라"고 하셨다.
즉, 지금 내가 추진하는 성전건축(성전은 없다. 그냥 예배당)은 다윗이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했던 일인데, 왜 비겁하게 도망을 가느냐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목사가 성전이란 용어를 쓰는 일을 매우 거부 한다. 구약의 성전은 장차오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모형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로 성전은 사명을 완료했고, 오로지 예배와 친교를 위한 회당이 필요할 뿐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구변이 좋다고 말한다. 아마도 집안 내력이 아닌가 싶다. 나도 얼마든지 이모 목사처럼 교인들 주머니 탈탈 털 능력이 있다. 하지만 20여년의 목회동안 단 한번도 그런 식으로 헌금을 유도하지 않았다. 내 자신이 겪었던 쓰라린 과거의 경험 때문이다.
요즘 백수로 지내다보니 남는게 시간이다. 아직 텃밭 농사도 시작 전이다 보니 오전 오후 1시간씩 걷기 이외의 시간은 유투브로 설교를 듣는데 할애하고 있다. 두분의 설교자 설교를 집중해서 듣게 된다. 인천에서 요즘 잘나간다는 목사와 올 봄에 은퇴하는 감리교목사의 설교가 내 귀를 붙들고 있다.
두 설교자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인천의 목사는 "당신들도 나처럼 따라해보라"는 식이다. 하지만 다른 한 분은 "당신은 누구와 동행을 하는가?"를 외치는 분이시다. 처음에는 인천의 목사가 마음에 끌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의 정체성이 드러나게 마련. 내가 파악한 그 목사의 이면에는 탁월하고 영리함이 바탕이지 결코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으로 복을 받은 경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떤 귀인을 만났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 일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적인 능력으로 그를 포섭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능력이지 하나님의 능력은 아니다.
로버트슐러 목사는 "당신의 능력을 총동원해 대출을 받으라"고 권한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대출을 받아 크리스탈 빌딩을 지었지만 결국은 파산하고 말았다. 담보물을 소유한 신자를 동원해 은행으로 부터 담보 대출을 받아 새로운 땅을 구입하고, 새로 구입한 땅을 다시 담보잡아 원래의 땅에 건물을 지으면 담보물의 가치는 상승하게 되고 더 많은 대출을 다시 받아 새로 구입해 뒀던 토지에 자신이 원하는 건물을 지을 수 있다.
경제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도전이다. 사업하는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전환사채(CB)이다. 목사가 그런 방면에 식견이 있다면 그것도 능력이다. 어떻든 교인들을 비롯한 제3자들이 보기에는 승승장구임이 틀림없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승승장구해 보이는 실체에 대해서는 결코 밝히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최대한 포장을 하게 된다. "내가 꿈을 꿨더니 하나님은 그 꿈을 이런식으로 채워주셨다"라고 외친다. 매우 은혜스럽다. 감동할만 하다. 하지만 그 내막을 아는 자도 그렇게 감동을 받을까?
홈쇼핑을 진행하는 쇼호스트는 어떻게든 자신에게 맡겨진 상품을 판매해야 한다. 때로 목사도 그렇게 된다. 국가에서 예배당을 지어주지 않는다. 그 렇다고 교단에서도 지어주지 않는다. 오로지 목사의 능력이다. 내가 30여년전 금요철야때 경험했던 헌금유도 방식처럼 교인들의 주머니를 열게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생의 목적을 "내가 만난 예수와 동행"으로 결정한다면,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말씀도 기꺼이 따르게 된다. 복을 받겠다는 기복신앙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내가 아끼는 재물도 드릴 수 있다.
누구를 위해 그토록 큰 건물을 지으려고 애를 쓰는 것일까?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서? 아니면 자식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