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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묵상글 (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 구도자요 인도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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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30 05:20
- 구도자요 인도자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안드레아 사도는 형 베드로와 떼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공관복음이건 요한복음이건 안드레아를 소개할 때
늘 ‘시몬(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라고 소개합니다.
저라면 나로서가 아니라 늘 누구의 동생이라고 부르는 것이
짜증이 나게 하고 화가 나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형이 늘 같이 있고 또 공동체의 대표로 있으니
같이 날뛰거나 두드러지지 않으려고 곧 잠자코 있으려
무던히도 애써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만 보면 안드레아는 형의 피해자입니다.
실제로 안드레아는 나서지 않았고 잠자코 있던 제자였습니다만
그렇다고 토라져 있거나 뒷짐만 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주님을 제일 먼저 따른 이는
베드로가 아니라 안드레아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안드레아는 원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로서
세례자 요한과 함께 오실 메시아를 준비하고 기다리던 무리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도 같은 무리 중 하나였는지 모르지만
세례자 요한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했을 때
주님을 따라간 제자는 베드로가 아니라 안드레아였고
그래서 안드레아가 베드로를 주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의 안드레아는 먼저 구도자였고 다음으로 인도자였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찾는 구도자였고
메시아께 사람을 인도하는 인도자였으며,
우리 공동체로 말하면 앞에 나서는 회장이 아니라
뒤에서 사람들을 공동체로 끌어들이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신으로 자기를 자리매김하는 사람이
제가 보기에는 정말 내공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내공이란 어떤 것이고 무슨 뜻입니까?
내공이란 한자어로 內工이니 내적 장인이라는 뜻이고,
풀어 말하면 자기 내면을 갈고 닦아 내적으로 실력을 갖춘 대단한 경지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는 자기 안의 실력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음을 포함하니,
대단한 겸손을 뜻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안드레아는 자기도 주님을 따라 행복한 사람이고,
남도 주님께 인도하여 남도 행복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도 그렇게 주님께 인도하였고,
그리스인들이 주님을 찾아왔을 때도 주님께 인도했으며,
특히 오천 명 먹이는 빵의 기적 때 오병이어를 가진 아이도 주님께 인도했습니다.
이런 안드레아가 내공이 부족하고 겸손에서는 거리가 먼 저를
아주 부끄럽게 하지만 그래서 제게는 귀감이 되는 사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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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의 사회심리학과 교수인 코리 키스는 자기 수업인 ‘행복의 사회학’ 첫 시간에 학생들은 무엇을 가장 추구하는지 묻습니다. 대부분 행복을 이야기했습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첫 번째 과제를 줍니다.
“오늘 오후에 밖에 나가서 행복해지는 일을 해 보세요. 그리고 그 행복이 한 시간, 더 나아가 오후 내내 이어지는지 알아보세요.”
다음날 수업에 들어온 학생들에게 과제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오후 내내 행복감을 유지한 학생이 있었을까요? 그저 기분 좋은 하루였을 뿐, 한 시간 이상 행복을 느꼈다고 말한 학생은 없었습니다.
저 역시 이 점을 떠올려 봅니다. 행복을 한 시간 이상 쭉 느끼기란 불가능했습니다. 하루 24시간 내내 행복하기만 하다면 이런 사람이 더 문제 아닐까요? 행복은 ‘나’의 전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저 가지고 있는 많은 감정 중에서 하나일 따름이었습니다. 한 가지 감정에만 쌓여 있다면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행복을 위해서 분노, 공포, 혐오, 놀람, 슬픔 등의 부정적인 감정도 있어야 했습니다.
행복을 원한다면 다른 부정적 감정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고통과 시련 없이 행복만 쏙 뽑아서 간직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그렇게 된다면 더 큰 아픔이 자기에게 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행복만 주시지 않은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을 위해 때로는 어렵고 힘든 시간도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100% 행복만을 원하고 있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오늘은 베드로 사도의 동생인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그는 형과 함께 호수에서 어망을 던지고 있을 때, 예수님으로부터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는 말씀에 곧바로 그물을 던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곧바로 따랐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쁜 소식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기쁜 소식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처럼 십자가 위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름이 결코 행복만 있지 않았고,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은 이렇게 고통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름이 진짜 행복이 되어 기쁜 소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따름으로 100% 행복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진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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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간다(아프리카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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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안드레아는 공관복음에 따르면, “사람 낚는 어부”(마르 1,17;마태 4,19)가 되리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형인 베드로와 함께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특히 <마르코복음>에서는 열병으로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는 장면에서 등장하며(마르 1,29-30), 예수님께서 성전파괴를 예언하셨을 때에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느냐며 궁금해 하기도 합니다(마르 13,3-4).
<요한복음>에서는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께서 부르신 첫 번째의 제자가 되었으며(요한 1,35-40), 형인 시몬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소개하면서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습니다(요한 1,40-42). 또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에는 한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드렸고(요한 6,8-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는 예수님을 만나 뵈러 온 그리스인들을 예수님께 소개하기도 합니다(요한 12,20-22).
초기의 동방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아 사도는 “맨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프로포클레토스)으로 불립니다. 그는 흑해 주변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그리스의 아카이아 지역인 ‘파트라이’에서 순교하였고,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그의 성화나 성상에는 X자 형의 십자가와 함께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 스코틀랜드의 국기에 새겨진 X자는 그 나라의 수호성인인 안드레아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의 유해는 베드로 대성전에 모셔져 오다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서 그리스 정교와의 화해의 표시로 그의 순교지인 ‘파트라이’에 모셔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라고 말씀하시자, 안드레아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마태 4,20).
그런데 ‘고기를 낚는 어부’와 ‘사람을 낚는 어부’는 어떻게 다를까?
그것은 ‘고기를 낚는 어부’는 살아있는 고기를 죽이기 위해 잡아들인다면,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죄로 죽은 영혼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잡아들입니다. 또 ‘고기를 낚는 어부’는 고기를 골라서 낚아 올리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고기가 좋든 나쁘던, 곧 전교대상이 선하든 악하든 간에 낚아 올립니다. 또 ‘고기를 낚는 어부’는 자신의 그물을 치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성령의 그물을 칩니다. 곧 자신의 방식으로 그물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가라는 데로 가고 그물을 던지라는 쪽으로 던지며, 그분이 명령하는 방식으로 그물을 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해타산의 머뭇거림이 전혀 없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온전한 응답이 요구됩니다. 그러니 우리도 먼저, 안드레아 사도가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밤을 묵어가며 양성을 받았듯이, 그분과 함께 머물며 ‘그분 안에서 양성을 받는 제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
주님!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소서
내가 만든 그물이 아니라 성령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위험하더라도 깊은 곳, 당신이 원하신 곳에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먹이로가 아니라 그들을 살리기 위한 사랑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 입맛에 맞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모두를 거두어들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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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따름으로써 얻게 되리라
축일을 맞이한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사도의 모범적 삶을 잘 살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기원합니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다른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기꺼이 따름으로써 큰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온전히 따르려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했고, 마침내 버림으로써 주님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지향은 어떤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인 의지로 따름으로써 끝까지 가야 합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단지 순명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행동의 변화와 더불어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리재고, 저리재고 하지 말고 "곧바로" 버리고 떠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에, 주저한다면 그것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시 응답할 수 있는 영혼은 자유롭습니다. 도전할 때 새 일을 만날 수 있고 또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순명과 실행을 통해서 주님의 섭리와 안배를 깨닫게 됩니다. 나의 힘을 빼는 것이 믿음이고, 그리하면 주님의 권능을 제대로 만나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말씀은‘나를 믿어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라오너라’하셨습니다. 믿어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따름으로 확고하게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따를 수 있는 믿음을 지닐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내가 선택했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나를 뽑아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시몬 베드로와 형제지간입니다. 특별히 요한과 길을 걷다가 예수님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1,41). 하며 형에게 말하고 예수님께 자기의 형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도 소개하였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요한6,8-9)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간 사람도 안드레아입니다. 그는 혼자만 메시아를 따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하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그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생활에 참여함으로써 삶의 쇄신과 회개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의 체험을 전해야 합니다. 마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주님을 따름으로써 믿음을 견고케 할 수 있듯이, 믿음이 약한 이들이 우리를 보고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먼저 우리의 믿음을 다져야 하겠습니다.
큰 나무는 잘 부러지지 않고 큰 강물은 소리를 내지 않으며 깊은 샘물은 마르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모인답니다. 예수님께서 크신 분이셨듯이 우리가 큰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의 모범과 표양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과 줄다리기를 하지 말고 곧바로 따릅시다. “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할 수 있기를!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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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동창 신부와 공항엘 가는 길이었습니다.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려고 트렁크 문을 열었는데 안 열렸습니다. 열쇠로 트렁크 문을 열어 보려 해도 안 열렸습니다. 순간 당황했습니다.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원인을 알았습니다. 자동차의 기어가 주행 상태에서는 트렁크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자동차의 기어를 주차로 해야만 트렁크는 열렸습니다. 자동차의 안전을 위해서 주행 중에는 트렁크가 열리지 않도록 해 놓았습니다. 은행의 계좌도 그렇습니다. 본인이 입금했어도 비밀번호를 모르면 찾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가야 할 하느님 나라도 그럴 겁니다. 나의 경험, 나의 능력, 나의 직책, 나의 외모로는 하느님 나라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나누었는지, 얼마나 희생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오늘은 11월 30일입니다. 교회의 전례력으로는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묵상하며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착하고 성실한 너희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걸 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걸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 함께 해 주었다. 너희 중에 가장 굶주리고, 헐벗고, 병든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오늘은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베드로 사도의 동생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름이 ‘반석’이라면 안드레아 사도의 이름은 ‘남자다움, 용기’입니다.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들 또한 용기를 가지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면 좋겠습니다. 안드레아 축일을 지내면서 제가 아는 안드레아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한 분은 평신도로서 복음화 학교를 통해 많은 사람을 신앙의 뜨거움으로 인도하였던 정 치우 안드레아 선생님입니다. 저는 1991년에 복음화 학교와 인연을 맺었으니 33년이 되었습니다. 2002년에서 2005년 그리고 2011년에서 2018년까지 10년 동안 담당 신부로 함께 하였습니다. 복음화 학교는 1단계부터 5단계의 과정이 있습니다. 매월 기도회 미사와 후원회 미사가 있습니다. 단계를 마치면 피정과 미사가 있습니다. 저는 미사에 함께 하였고, 성지순례를 같이 다녀왔습니다. 복음화 학교의 각 단계는 모두 평신도 강사들에 의해서 진행됩니다. 졸업생 중에서 특별히 선발된 사람은 강사로서의 교육을 다시 받습니다. 자신이 들었던 복음의 기쁨을 학생들에게 전하는 강사가 됩니다.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처럼 강사들은 세상을 향해 던졌던 그물을 버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됩니다. 평생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정 치우 안드레아 선생님께 주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다른 한 분은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입니다. 저는 2002년부터 2005년 그리고 2013년부터 2018년까지 8년 동안 교구청에 근무하면서 추기경님을 모셨습니다. 안드레아 추기경님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드리면서 제가 곁에서 본 추기경님의 모습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추기경님은 소탈하십니다. 격식과 절차를 굳이 따지지 않으십니다. 마치 동네에 사시는 인자하신 어르신 같습니다. 소탈하신 만큼 함께 있는 신부들에게도 많은 걸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사제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시고, 지지해 주십니다. 추기경님은 조금 느리신 것 같지만 꾸준히 일을 하십니다. 산행을 하실 때도 천천히 오르시지만 한 번도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느린 거북이가 빠른 토끼를 앞설 수 있었던 것은 꾸준함 때문이었듯이, 한국교회의 어르신이 되신 것도 추기경님의 꾸준함 때문인 것 같습니다. 추기경님은 기록의 달인이십니다. 저는 잊고 있었던 일들도 추기경님께서는 기억하고 계십니다. 저와 면담하셨을 때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적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앞선다는 ‘적자생존’의 법칙을 잘 알고 계십니다.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께서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를 지내면서 ‘나는 누구인가? 하느님께서 나를 어떻게 이끌어 주셨고, 나는 어떻게 응답하였는가? 지금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가?’를 묵상한다면 11월의 마지막을 피정하는 기분으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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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전례력으로 오늘이 마지막 날이네요. 지난 일 년을, 오늘 하루를 주님 안에서 평화로이 마무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특히 오늘은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십니다. 그들은 모두 어부였습니다. 물고기를 잡아 가족들을 돌보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바라보며 주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손에 쥐고 있던 그물을 던져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섭니다.
참 영화 같은 장면입니다. 말씀 한마디로 그물을 집어 던지는 모습 말입니다. 그런데 너무 영화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떻게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손에서 놓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손에서 그물을 놓았다는 것은 그들의 가족들이 그만큼 궁핍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보살핌이 필요했던 가족들을 주님 말 한마디로 떠났다는 말이 됩니다.
눈앞에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나섰다는 뜻은 재물과 피로 이어진 연줄을 주님의 말 한마디로 져버렸다는 뜻입니다.
이런 모습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성경 말씀이고 제자들이니까 그럴 수 있었겠지.’라고 하며 넘길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가요? 지난 일 년 동안 우리는 주님 부르심에 얼마나 ‘곧바로’ 응답했나요? 주님의 뜻을 알면서 뒤로 물러난 적은 없었나요?
제자들이 어떻게 주님 말씀에 ‘곧바로’ 응답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님의 부르심이 지금 우리에게 똑같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 말씀에 ‘곧바로’ 응답할 때입니다. 주님 말씀을 따르고자 다짐할 때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다시 대림으로 한 해를 시작하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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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갈비 김치찜
외국 생활하며 즐겨 만들어 먹었던 음식
바로 돼지갈비 김치찜이었습니다.
우선 갈비의 핏물을 제거해 줘야 합니다. 찬물에 설탕 2큰술을 넣고 갈비를 담가주세요. 30분 정도 지난후 한 번 씻어주시고 갈비를 삶아주세요. 이때 마늘과 후추를 함께 넣어주면 잡내를 더 확실하게 잡아줄 수 있어요. 10분 정도 삶아낸 갈비를 꺼내고 씻어주세요.
이제 묵은지와 양파가 나설 차례입니다.
묵은지라면 양념을 씻어주세요. 양파도 큼지막하게 썰어주시고요.
이제 냄비에 묵은지와 양파 그리고 돼지갈비를 넣고 물을 부어주세요. 조금 넉넉히 부어주셔도 됩니다. 맛술과 고춧가루, 다진 마늘, 설탕 한 스푼 정도와 국간장으로 간을 해주세요.
이제 충분히 끓여주세요. 중간에 물이 모자라면 걱정하지 말고 더 넣어주세요. 이제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1시간 정도 중불로 끓여주세요. 예쁜 김치찜 색이 나오면 그 위에 대파 썰어놓은 것을 올리고 고춧가루 한 스푼을 둘러 다시 살짝 끓여주세요.
오르막도 내리막도 있었던 일 년을 열심히 살아온 그대에게 주는 완벽한 선물이 완성됐습니다.
즐거운 저녁 식사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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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를 따라라
“예수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
“주님을 찬양하라, 모든 민족들아.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 하여라.“(시편117,1-2)
오늘은 11월 위령성월 마지막 날이자 연중 34주간 마지막날이고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이며, 오늘 저녁성무일도부터는 희망과 기쁨으로 가슴 설레는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새삼 끝은 새로운 시작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도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연민과 질투, 모두 사람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그러나 질투와 맞서지 말고 질투하는 이들을 연민하라.”<다산>
“훌륭한 장사꾼은 재물을 깊이 감춰 없는 것처럼 하고, 군자는 덕을 갖춰도 겉모습은 모자라 보인다.”<사기>
새삼 겸손과 연민이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야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겠습니다.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사도는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형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어부로 살았고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대체로 벳사이다에서 태어나 카파르나움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안드레아 사도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사내다움’ 또는 ‘용기’를 뜻하며, 형 베드로와는 달리 성실하고 온건하며 신중한 성격의 인물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한 뒤에는 그리스 지방으로 전교여행을 떠났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가서 제자인 스타키스를 초대 주교로 임명했다하며 그래서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안드레아를 초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봅니다. 형 베드로는 로마의 초대 총대주교, 동생 안드레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초대 총대주교가 되니 이 또한 놀라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어부, 생선장수, 밧줄 만드는 사람, 그리고 그리스와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이며 키예프에 가서 선교했다는 전승 때문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러시아의 최고 훈장 이름이 사도 성 안드레아 훈장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가 순교한 곳은 그리스 아카이아 지역의 파트라이라고 하며,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합니다. 안드레아가 X자형 십자가를 선택한 이유는 그리스어로 X자는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첫 글자였기 때문입니다. 안드레아는 형장에 끌려갔을 때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높이 쳐들면서 기쁨에 넘쳐 기도합니다.
“오, 영광의 십자가여! 너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서는 나를 부르시는가! 속히 나를 이 세상에서 끌어올려 주님의 곁으로 가게 해다오.”
그래서 안드레아 사도를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상에는 십자가를 든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사도가 활동한 지역은 아니지만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스코틀랜드의 국기도 파란 바탕에 흰색의 X자형 십자가를 사용합니다. 아일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이 성 파트리치오의 축일인 3월17일에 축제를 벌이는 것처럼, 스코틀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은 성 안드레아의 축일인 11월30일에 축제를 벌입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의 X자형 십자가의 순교로 끝나는 생애가 감동적입니다. 사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가 순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부르십니다. 주님과의 운명적 만남이요 첫눈에 이들의 내적갈망을 알아채신 주님임이 분명합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버림, 떠남, 따름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서로가 첫눈에 반했음이 분명합니다. 만약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가정법의 물음은 부질없는 질문이니 하느님의 섭리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성소 역시 가정법의 질문은 부질없는 질문이니 하느님의 자비로운 섭리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우연의 부르심이 아니라 필연의 부르심입니다. 곧 이어 제베데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역시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릅니다.
한번의 부르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우리를 날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부르시니 우리 삶의 여정은 성소의 여정, 부르심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결같이 시종여일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버림, 떠남, 따름의 여정”에, 순교적 선교의 삶에 충실하다 먼 이국땅에서 X자형으로 순교한 사도의 생애가 가슴 먹먹한 감동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복음 선포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사람들이 결코 듣지 못하면 믿을 수 없고, 선포가 없으면 결코 들을 수 없고, 사람들이 파견되지 않으면 선포도 없다고 강조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옛 사도들과 선교사들처럼 날마다 선교사로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선교없는 교회는 죽음 교회요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새삼 선교는 우리 교회의 존재이유요 우리의 본질적 사명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자체가,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주님 사랑을 알리는 선교입니다.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요 밖으로는 주님의 선교사입니다. 오늘 따라 미사시 주님의 강복후 마지막 파견 말씀이 깊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감사의 참 좋은 응답이, 하느님을 참으로 기쁘게 하는 일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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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의 눈길을 지니셨나요>
“예수님께서는 … 보셨다.”(마태 4,18)
그분의 눈길을
지니셨나요
믿음 희망 사랑을
곱게 담아 건네는
그분의 눈길 말이에요
그분의 눈길을
지니셨나요
스쳐 지나도
늘 머무는
그분의 눈길 말이에요
그분의 눈길을
지니셨나요
겉만 핥지 않고
속 깊이 스미는
그분의 눈길 말이에요
그분의 눈길을
지니셨나요
눈길 받는 이의
눈길이 간절한
그분의 눈길 말이에요
그분의 눈길을
지니셨나요
모두를 온전히 품되
올곧이 하나에 깃든
그분의 눈길 말이에요
그분의 눈길을
지니셨나요
하나하나에 깃들어
모두에게로 향하는
그분의 눈길 말이에요
그분의 눈길을
지니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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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4,18-20)
그 가난한 어부들이 얼마나 많이 버렸는가?
혹시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셨을 때, 이 가난한 두 어부가 버렸으면 무엇을 얼마나 많이 버렸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사람의 재산이 아니라 뜻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사람은 많은 것을 버렸습니다. 그는 가진 것이 별로 없어도 모든 것을 버립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들에 애착하기 쉽고 우리가 가졌다고 할 수 없는 것들에 좀처럼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탐내는 마음과 무엇을 소유하려는 마음을 버렸을 때, 그들은 많은 것을 버렸습니다. 자기가 소유한 것과 그것을 가지려는 마음 자체를 버리는 사람은 많은 것을 버린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 그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아 마음대로 탐낼 수 있었던, 그들보다 잘 사는 사람들이 가진 것만큼 많이 버렸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많이 버린 것을 보고 ‘이 세상을 경멸하는 저 사람을 본받고 싶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버릴 것이 없구나’ 하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속된 욕망을 끊으면, 여러분은 많은 것을 버리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밖의 것은 아무리 조금이라도 충분하다고 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재물이 아니라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의 희생을 얼마나 많은 것이 관계되어 있나로 판단하시지 않고, 그 희생이 얼마나 큰마음으로 이루어졌는지 보십니다. 물질로만 따지자면, 우리의 거룩한 상인들은 자신들의 그물과 배를 천사들의 영원한 삶과 맞바꾸었습니다.
-대 그레고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3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6).
도대체 하나 됨은 무슨 뜻인가? 하나 됨은 부정의 부정이자 거부의 거부다. 그것은 모든 분리의 철폐, 대립과 차이의 용해다. 피조물들이 하나 됨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분리되어 있고, 대립되어 있으며, 차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멀어지느라 분주할 따름이다. 모든 피조물 안에는 부정이 들어 있다. 피조물은 저마다 다른 피조물이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러한 부정이나 그러한 거부 속에서는 활동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하나다. 그분은 부정의 부정이다.
하지만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 안에 있다. 때문에 모든 피조물은 잠에서 깨어나, 자신들도 하나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신성 안에서의 하나 됨을 보도록 초대를 받는다. 하느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은 부정의 이름이다. 우리는 “하느님은 무엇인가?”라는 물음보다는 “하느님은 무엇이 아닌가?”라는 물음을 통해서 더 깊이 알 수 있다. 하느님에 대하여 말할 때, 최고의 긍정은 부정이다. “하느님에게 어울리는 이름은 부정도 아니고,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하느님에게 어울리는 이름은 부정의 부정이다. 하나는 부정의 부정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하나다. 부정의 부정은 가장 순수하고 가장 충만한 긍정이다."ㄴ 하느님은 분리도 아니고. 부정도 아니고, 거부도 아니다. 하느님은 하나 됨이며 부정의 부정이며, 거부의 거부다. (287)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하느님 신앙과 불교와의 지평 융합
대승불교의 반야공 사상이 말하려는 본래 의도는 인간의 주체적 자아의 허망한 집착과 희론에 근거한 허구적 우상들을 파사현정하려는 적극적 인 것이었다. 파사(破邪)가 곧 현정(顯正)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론(中論)의 공(空) 사상이 '부정의 논리'에 치우친 나머지 진여, 일심(一心), 묘공(妙空)이 담지하는 더욱 적극적이고 생산적이고 충만한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점이 있다고 보고, ‘마음이 갖춘 궁극적 실재성과 만법(萬法)이 ‘한 마음’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유심연기(唯心緣起)설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이제 원효, 의상, 지눌 등 한국 불교의 기라성 같은 거성들이 말해 온 한 마음’(一心)이 무엇인지를 알이보자. 우선 ‘일심'이라는 어휘에서 매우 잘못된 오해 두 기지를 걸러내야 한다. 첫째는 테카르트가 말하는 사유 주체로서의 개체아의 ‘자의식'이 곧 불교가 말하는 ‘일심' 이라고 오해하는 경우이다. 둘째는 현대 심리힉에서 말하는 희비애락 같은 감각 작극에 반응하는 인간 내면의 심리적 기세를 일심(一心)이라고 좁게 해석하는 오해이다.
물론 깨닫고 보면 평범한 중생의 마음을 떠나 별도로 존재하는 형이상학적인 ‘절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승 불교에서 말하는 일심 곧 한 마음이란 ‘궁극적 실재’를 말하는 것이며, 불교적 용어로서의 ‘진리 그 자체'인 진여에 대한 보다 대중적인 표현이다. 일심은 큰 마음이요, 밝고 환한 우주적 마음이며 , 만유를 포용하고 길러내고 생성시키는 한민족의 ‘하느님' 에 대한불교적 표현이다. 대승 불교의 핵심 진리를 간명하게 추려낸 논서(論書)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마명(馬鳴)의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마음 진여는 오직 하나의 실재, 일체의 사물과 현상을 총체적으로 포괄하는 본체"이다.(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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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사도 베드로의 동생이며 형과 함께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였던 안드레아는 본디 형보다 먼저 영적 세계에 관한 관심과 열정이 더 강했나 봅니다. 그러기에 그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지만, 스승이신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눈여겨보신 다음,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요1,36)라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1,38)라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에 이미 안드레아가 무엇을 찾고 있는 사람이며 누구를 기다리는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과 함께 머문 다음, 안드레아는 이내 자기 형 베드로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하며 형을 예수님께 이끌었던 분이십니다. (요1,40~42참조) 이는 안드레아 사도는 심성적으로 온건하고 신중한 분으로 예수님께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요6,9)라고 어린아이를 인도하고,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요12,22)라는 그리스 사람들을 예수님께 이끌어 주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앉아 계시는 예수님께 다른 사도들과 함께 “그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마르13,4)라고 물으심으로 사람들이 재난을 준비하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하신 분이십니다. 이처럼 안드레아 사도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추종하고 동행하시면서 많은 사람을 예수님께 이끌어 준 사도이자 선교사였습니다. 사도 안드레아는 자신의 이름처럼 ‘사내다움, 용기’ 넘친 분이셨지만 늘 무리의 중심적인 존재라기보다 협력자와 조력자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신 사도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먼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어부인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4,19)하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첫 제자 그룹인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역시 부르십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제자이자 사도들의 또 다른 칭호와 역할이 바로 사람 낚는 어부들이라고 호칭하게 된 배경을 우리는 알 수 있을 겁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부르신 첫 제자 그룹인 네 명의 사도들은 이후 사도단의 중심과 핵심적인 인물들이었으며, 이는 곧 사도단의 안정성과 견고성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됨의 기본은 바로 이들처럼 “곧바로 배와 그물을 버리고,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4,20.22)라는 표현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 제자란 무릇 모든 것을 버리고(=포기), 가족과 안정을 떠나야만(=이탈) 따를 수 있음을 복음의 첫 제자들을 부르신 순간에 벌써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는 말씀은 네 명의 사도들이 본디 어부였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면서 쉽게 자신들이 장차 되어야 하고 살아야 할 소명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신 것으로 봅니다. 결국 예수의 제자이자 사도들인 그들은 예수님처럼 묶임과 눈멂 그리고 억눌림에서 해방시키고 눈 뜨게 하며 자유롭게 하는 구원 운동(루4,18참조)에 동참함으로써 세상의 많은 사람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는 사람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보다 명확하게 하는 복음의 비유가 바로 그물의 비유(마태13,47~50)인데, 사도들은 바로 하늘나라의 일꾼으로서 그물을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이는 사람이며, 그물이 가득 차면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버리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사도 안드레아는 자신의 부르심을 통해 갈릴래아의 어부로서 삶을 마치지 않고, 더 넓은 세상으로 파견되어 나가 하늘나라의 복음을 증거하면서 영혼들을 예수님께 인도한 사람 낚는 어부로서 자신의 성소와 소명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10,9.10)라고 말한 바를, 안드레아 사도는 이미 자기 발과 삶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어쩌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10,15)라는 표현은 그러기에 오늘 교회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사도 안드레아를 두고 하신 말씀처럼 들려옵니다. 사도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했던 안드레아 사도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혼자 구원받지 않고 구원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많은 영혼을 예수님께 인도하신 분이십니다. 맨 처음 부르심을 받은 사도답게 안드레아 사도는 흑해 주변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그리스의 아카이아 지방의 파트라이에서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셨다고 합니다. 그런 연유에서 안드레아 사도의 성화나 성상에는 X자형의 십자가와 함께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면은 스코틀랜드 국기에 새겨진 X자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이 안드레아를 상징하는 것이라 합니다. 성인의 유해는 본디 베드로 대성전에 모셔져 오다가, 1964년에 교종 바오로 6세께서 그리스 정교회와의 화해의 표시로 성인의 순교지인 파트라이에 지금은 모셔져 오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 안드레아 축일을 맞아 축일을 맞는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주님, 오늘은 교회 전례력으로 가해가 끝나는 마지막 날입니다. 금년 저희 모두에게 베풀어 주신 당신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새해에도 많은 은총과 사랑을 저희에게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저 마지막 날만이 아니라 매일 새롭게 저희에게 오시는 당신을 맞이하면서 당신 앞에 깨어 설 수 있도록 저희를 당신 말씀으로 흔들어 깨워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시작 Α요, 모든 것의 마침 Ω이시니 영광 받으시옵소서. 아멘.”
*** 오늘로써 전례력으로 한해가 끝나고 내일부터 새해가 시작되며 대림 시기를 맞습니다. 어제를 보내고 새로운 내일을 맞아들이면서 오래전에 어느 수녀가 보낸 「기도」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면서 <떠나보냄>과 <새로 맞이함>의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소유가 아닌 빈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받아서 채워지는 가슴보다 주어서 비워지는 가슴이 되게 하소서. 지금까지 해왔던 내 사랑에 티끌이 있었다면 용서하시고 앞으로 맑게 흐르는 강물이 되게 하소서. 위선보다 진실을 위해 지혜로운 진실 주시고 넓은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쓰러지는 육체로 살지라도 악 앞에 강해지는 내가 되게 하소서. 크신 님이여 그리 살게 하소서. 철저한 고독으로 살지라도 사랑 앞에 낮아지고 깨어져도 겸허한 내가 되게 하소서.』 (작자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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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그분 부르심으로 따라나선 우리는 /
박윤식 [big-llight] 241129. 19:46 ㅣNo.178045
성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로서, 갈릴래아 벳사이다의 사도 베드로의 친동생이다.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 바르요나’로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이다. 그는 형과 함께 어부로서 생활을 한, 참 남성적인 성격을 가졌던 모양이다. 안드레아라는 이름이 그리스어로 ‘사내다움’이라는 의미를 지녔던 것으로도, 그의 성격을 내심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는 처음에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곧장 예수님 제자가 되어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이끌었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곧 ‘물고기 낚는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다. 우리 그리스도인 또한 사람 낚는 어부이리라. 그렇다면 과연 어떤 요건을 가진 어부가 정말 훌륭한지? 첫 번째로 어부에게는 반드시 그물이 있어야 한다. 그 그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사로잡히도록 해야만 한다. 우리를 통하여 스스로를 드러나는 게 아닌, 그분께서 드러나야만. 나에게가 아니라 예수님께 사로잡혀야 하는 것일 게다.
두 번째로 어부에게는 배가 필요하다. 배를 타고 나가야 그물을 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배는 바로 교회이다. 교회 안에 머물러야만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게다. 밖에서의 모든 선행, 기도, 봉사는, 마치 육지에서는 바다에서처럼 그물질이리라. 이렇게 교회 안과 바깥에 머무르면서 성사 생활과 교회가 가르치는 계명 등에 충실해야 할 게다. 교회 가르침에 ‘순명’하는 것이리라.
세 번째로 어부에게 꼭 필요한 자질은 고기가 많은 곳을 잘 알아야 한다. 곧 황금 어장을 잘 찾는 이가 어부의 자질을 제대로 갖춘 이다. 우리에게 황금 어장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처럼 신심 깊은 데이다. 그곳으로 손수 빨리 달려가야만 정말 훌륭한 어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은 고향과 친척과 친구를 떠나 낯선 떠돌이의 여정에 나섰다.
마지막으로 어부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이다. 어부가 그물질할 때마다 고기가 바로 잡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언젠가는 많이 잡힐 것이라는 희망으로 기다릴 줄 아는 것이, 어부가 가져야 할 미덕이다. 그리고 그 그물질에도 이런 인내가 반드시 필요하리라.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네 제자를 직접 찾으셨다. 그들은 즉시 삶의 자리를 떠난다. 그분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역시 우리를 애타게 부르는 그들에게 여정에서 벗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우리 세례 받은 이는 모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또 그분을 따르겠노라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선 이다. 예수님에 관한 기쁜 소식을 들음으로 직접 확인한 우리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라는 말이 있다. 물론 듣는다고 하여 모두에게 믿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 제자들 가운데서도 정말 소수만이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였다. 또 믿음을 얻게 되었다하여 누구나 죽을 때까지 그 믿음을 충성스럽게 지켜 내는 것만도 아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그러니 언제나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하도록 노력해야만 할 게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우리도 사람 낚는 어부다. 상대방에 대한 나의 작은 배려와 희생, 인내가 그를 편안하게 평화를 줄게다. 주위에는 여전히 많은 이들이 걱정, 아픔을 안고 산다. 우리가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안아주고 벗이 되어준다면, 우리도 분명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게다. 그날 불려간 그 네 사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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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성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며, 베드로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가장 먼저 받은 제자였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베드로와 함께 부르심을 받았다고, 요한 복음서에서는 베드로보다도 먼저 예수님을 따랐다고 소개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는 예수님을 따라 하루를 함께 보내고 난 뒤,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형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갔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부르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가장 먼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고, 복음을 전한 사도입니다(요한 1,41 참조).
안드레아 사도가 보인 행적의 특징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의 경우도 그렇고,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 때에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이끌었으며(6,8-9 참조), 예루살렘 입성 뒤 몇몇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뵙기를 바라자 그 말씀을 예수님께 전하였습니다(12,20-22 참조).
이처럼 안드레아는 예수님과 사람들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였습니다.
안드레아는 주님을 가장 먼저 알아보았지만, 주님을 차지하려 하거나, 적어도 가장 먼저 부름받은 지위를 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었으며, 자기 사람을 만들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이끌었습니다.
교회는 안드레아 사도처럼 세상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교회 스스로 주님보다 더 중요해져서는 안 되고, 세상에서 교회의 지위와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주님 말씀의 날카로움을 누그러뜨리거나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면서가 아니라,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으로 교회는 그 본연의 역할을 다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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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2&id=2106768&menu=4770
굿뉴스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체험.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241129.
안드레아 사도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제자의 길로 들어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입니다. 이게 복음이니까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반 소설이나 수필 같으면 이해가 불가한 것은 아니지만 글의 흐름이 조금은 어색합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어떤 기록을 바탕으로 해서 쓰여진 게 아니고 구전을 통하여 그것도 몇 십년이나 지나서 췌록해 기록된 것이고 또한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져 쓰인 것이라 복음을 작성하는 사도들의 개인적인 성향과 더불어 그 사도가 전하고자 하는 의도도 숨어 있기 때문에 마치 소설의 구성과 같은 편집을 생각해본다면 약간 묘사나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있는 측면도 있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빈 공간이 있기 때문에 그 공간을 오늘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무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묵상을 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고 생각해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표현을 한번 잘 묵상해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호숫가에 있는 시몬 베드로와 동생 안드레아들 부르십니다. 앞으론 이 사람들의 운명도 이미 새로운 운명이 되게 하시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십니다. 고기를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말입니다. 그들이 응답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묘사한 부분은 오늘 복음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단순히 그물을 버리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상황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해서 대비시켜 묵상하면 좀 더 실제적인 의미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마치 어느 주교님께서 강릉 바다 주변을 산책하시며 거니실다가 뱃사람 하나를 보시고 당신을 앞으로 내 비서로 일하게 하겠다고 하시니 네 하고 바로 주교님을 따라나서는 이런 상황과 마치 아주 흡사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신다면 어쩌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하지만 실제 그냥 상식적인 생각에서 이와 같은 게 이루어진다면 일반적인 사람으로서는 잘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럴까요? 설령 그렇게 한다고 해도 집에 가족들과도 연락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상의를 한다든지 하는 그런 절차가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건 이해를 돕기 위한 하나의 가정입니다.
2000년 전 상황으로 다시 되돌아가보겠습니다. 복음에 나온 상황만 가지고 묵상을 해본다면 그들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그런 상황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의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어부에게 있어서 그물을 버린다는 것은 먹고 살 수 있는 생계수단의 도구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그걸 포기한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면을 보고 오늘을 사는 우리 신자가 이와 같은 것을 신앙의 롤모델로 삼는다는 생각으로 전적으로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고 성당일을 하며 살아야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걸 알려준다고 해석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상황은 같지만 보는 각도를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이 복음을 들여다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달리 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한다면 완전 올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든지 아니면 고기 잡는 어부가 되든지 둘 중 하나를 확실히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도 되고 싶기도 하고 또 고기 잡는 어부도 되고 싶기도 하다면 이도저도 둘 다 다 아무것도 잡기 힘들게 될 것입니다. 그럼 이런 묵상을 바탕으로 해서 사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앞으로 예수님을 뒤따르는 제자로서 어떤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나머지 부분은 각자의 몫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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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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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안드레아를 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이 표현은 공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된 표현하고
다릅니다.
부유한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을 때는
'나를 따르라'는 동사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나오는 표현을 직역하면
'내 뒤로 오너라'가 됩니다.
나의 제자가 되라는 뜻을 가진 동사가 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왜 그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실까 생각하게 됩니다.
시몬과 안드레아를 부르신 장면은
공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람을 부르신 첫 장면입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안드레아가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먼저 제자가 되지만
거기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는 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암튼 공관복음에서 시몬과 안드레아는
첫 제자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되라는 표현이 아니라
내 뒤로 오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이 방식은 당시 다른 스승들과 달랐습니다.
예를 들면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사람들이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다는 것은
그에게 가르침도 받으러 온 것을 뜻했습니다.
즉 세례를 받으면서 그의 제자가 됩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
가르침을 주고 받는 관계가 생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예수님의 뒤로 가면서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똑같이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물론 그 안에 가르침을 주고 받는 관계도 있지만
그에 앞서 삶을 똑같이 모방하는
모방을 넘어 함께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함께함은
시몬과 안드레에게서
죽음의 모습으로도 나타납니다.
알려진 것처럼
이 둘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제2의 그리스도, 제3의 그리스도로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가진 한계 때문에
예수님을 온전히 흉내낼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삶을 하나하나 뒤따라갈 때
우리도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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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고기보다 사람을 낚읍시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저를 불러주셨는데, 바닷가에 산다는 핑계로 너무 사람보다 고기를 더 많이 낚아 송구한 마음이 드는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원래 안드레아는 형 시몬과 함께 갈릴래아 호수를 배경으로 고기잡이를 하며 생계를 꾸려가던
전문직 어부였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여느 여부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보통 어부들의 삶은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물때가 좋고 운이 좋아 고기가 많이 잡히면 그것을 팔아 한 며칠 신나게 놀기도 했겠지요.
안개라도 자욱이 끼여 조업이 불가능한 날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술로 하루를 지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지도자들 안주삼아 독주도 많이 마셨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내면은 영적생활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피 안에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 모세와 다윗의 전통과 신앙이 힘차게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의 시선은 임박한 메시아의 도래에 초점이 맞춰져있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자신의 신앙을 좀 더 성숙시켜나가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영적생활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려는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안드레아 앞에 나타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입니다.
안드레아는 깊은 광야에서 자신의 내면을 열심히 갈고 닦던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서 참 구도자로서의 모델을 찾았습니다.
안드레아는 세상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그릇된 권력 앞에 혈혈단신으로 당당히 맞서던 세례자 요한을 자신의 정신적 지주, 멘토로 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때가 지나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도래하자 세례자 요한은
안드레아를 예수님께로 안내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본 세례자 요한은 지체 없이 안드레아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는 이제 나의 때가 지나가고 예수님의 때가 도래했으니 저분을 따라가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지체 없이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지도에 힘입어 영적인 눈이 이미 많이 트여있었던 안드레아는 즉시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확신합니다.
한 걸음에 자기 형 시몬을 찾아간 안드레아는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름 안드레아의 의미는 ‘사내다움’ 혹은 ‘용기’입니다.
용기 있게 세례자 요한을 스승으로 모셨던 안드레아, 사내답게 예수님을 따라나선 안드레아는 형 시몬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단순하고, 과격하고, 급하고, 다혈질적이었던 형 시몬에 비해 안드레아는 성실하고 온건하며
신중한 성격의 인물이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아는 그리스 북부 지방의 에피루스에서 선교하였습니다.
안드레아는 70년경 로마 황제 네로의 대대적인 박해 때 아카이아에서 체포되어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안드레아는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로 X자형 십자가를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어로 X는
그리스도의 첫 글자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안드레아에 관해 정말 놀라운 이야기가 한 가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안드레아는 십자가에 매달린 이후 꽤 오랫동안 죽지 않고 매달려있었습니다.
이틀간 매달려있었는데, 그 순간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그러나 안드레아는 십자가 위에서도 복음 선포 활동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십자가 주변에 둘러서있는 군중들을 향해 설교를 계속했답니다.
이를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던 적대자들은 안드레아를 십자가에서 끌어내렸는데, 그 순간 하늘에서 한 줄기 강한 빛이 안드레아를 오랫동안 감쌌답니다.
그 강렬한 빛 한 가운데 안드레아는 숨을 거두었다는군요.
임종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사람 낚는 어부로 살고자 노력했던 안드레아, 그리스도의 향기였던 안드레아 사도의 삶과 신앙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 신앙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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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즉시 그물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다.
안드레아는 남성적이라는 뜻으로 친절하고 항상 준비되어 있고 열린 마음을 가진, 열심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전승에 의하면 안드레아 사도는 자신의 사도직을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폈다고 전하고 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는 소위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라는 X형으로 된 십자가 위에서 Patrasso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에 보관되어 있던 안드레아 사도의 유해를 동방 교회에 되돌려 주었고, 후에 Patrasso로 옮겼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고 계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그물을 버렸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즉각적인 순종을 바라신다. 그러면 이 가난한 두 어부가 버렸으면 무엇을 얼마나 많이 버렸겠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사람의 재산보다도 그 마음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사람은 많은 것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탐내는 마음과 무엇을 소유하려는 마음을 버렸을 때, 그들은 많은 것을 버린 것이다. 그 버림을 얼마나 큰마음으로 이루었느냐이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19절). 이 말씀을 따라 어부들은 하늘의 아버지를 얻기 위해 세상의 아버지를 떠났다. 세속적인 낚시에서 거룩한 낚시로 바뀌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물고기를 낚듯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깊은 오류의 바다에서 사람들을 낚도록 부르셨다. 그리고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세상,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그들이 하느님 말씀의 그물로 사람을 잡도록 사도로 삼으셨다.
사도들은 즉시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름으로써 주님의 제자로서 살면서 결국은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하고 자신 있게 말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른 사람들의 복음선포는 은총 체험을 통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은 한창 일하던 중이었지만, 미루거나 꾸물거리지 않았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20.22절) 하느님의 뜻 앞에는 한 치도 망설임을 허용하지 않으시는 모습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는 어떻게 응답을 드리며 살고 있는지, 듣기는 하면서도 실천을 올바로 하면서 그분을 따르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우리도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우리의 생각과 고정관념을 모두 버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생활을 하지나 않는지 살펴보고 주님 앞에 나의 자세를 올바로 가져야 할 것이다. 좀 더 우리의 삶의 자세를 하느님 안에 이어가게 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기심, 교만 그리고 집착을 피하면서 주님의 부르심에 언제나 응답을 드리며 실천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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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심판 때 그리스도 앞에 설 힘은 기도로 얻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
오늘 복음에서 종말의 긴 말씀 가운데 마지막 당부가 나옵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우리 대부분은 마지막 때에 하느님 앞에 설 힘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힘은 곧 그분의 뜻을 따랐느냐에 의해 생겨납니다.
중동에서 남편들이 나가 돈을 보내줄 때 아내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아껴 쓰면서 자녀를 잘 키워 몇 년 만에 남편이 돌아올 때 기쁘게 김포공항에 나가는가 하면,
어떤 자매들은 남편이 돌아올 때 도망을 치거나 자살을 했습니다.
그 돈을 제비에게 다 가져다 바치고 빚까지 졌기에 남편을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사랑했다고 주님 앞에 설 수 있을까요? 야곱은 장자권을 받아 구원에 이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20년 동안 많은 고생을 했음에도 감히 에사우 앞에 나설 힘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세상에서 자신이 낳은 자녀들과 모은 재물들을 먼저 선물로 보냈지만, 여전히 에사우
앞에 설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남아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천사와의 씨름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천사는 축복을 청하며 밤새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야곱의 정강이뼈를 부러뜨리고 그의 이름을 바꿔주었습니다.
이름을 바꾸었다는 말은 새롭게 태어났다는 말이고 새 정체성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정강이뼈가 부러졌다는 말은 더는 남자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기도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 앞에 서는 힘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산다”라는 믿음입니다.
사람 앞에 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누구의 앞에도 설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나는 사랑으로만 죽는데 부모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한 이들은 자아가 강해서 남들 앞에 잘 서지 못합니다.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는 자아가 상처받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무대 공포증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두려운 이유는 자아가 살아 있어서 잃을 것을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알게 되면 하느님의 사랑으로 부모가 죽여주지 못한 자아까지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비로소 누군가의 앞에 설 힘이 생깁니다. 나 대신 그리스도께서 나서주신다고 믿으면 사람들 앞에 설 수 있고 하느님 앞에도 설 수 있습니다.
조두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소원’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소원이네 문방구, 그리고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아빠, 이들은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원이는 늦게 학교에 가게 되고 아저씨가 우산을 씌워달라는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소원이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소원이는 우산을 씌워준 것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고 자신에게 상처만 주는 세상과 담을 쌓습니다.
아빠가 들어와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빠도 세상에 속한 한 남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호스를 낀 옆구리로 변이 새어 나와서 그것을
닦아주기 위해 바지를 벗기려는 아빠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아빠 말고는 아이의 상처를 치유해 주어 세상과 소통하게 할 사람은 없습니다.
아빠는 소원이가 냉장고 나라 코코몽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코코몽 인형 안으로 들어가 소원이와 친해지려 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을 좋아합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도 점심시간에 소원이만 볼 수 있는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코코몽 인형 속에서 소원이를 응원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이 보이면 그 무시무시한 학교 앞길도 힘 있게 걸을 수 있습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이 지켜주기에 학교도 갈 수 있고 남자친구들과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빠는 그것으로 만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원이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그 코코몽이 아빠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소원이는 아빠를 조금씩 받아들이면서 세상도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빠의 희생 덕분으로 잃어버렸던 말도 되찾아 말을 하게 되고 아이들과도 이전처럼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소원이는 자신을 쫓아다니는 코코몽에게 다가와 인형 얼굴을 벗기고 아빠의 땀을 닦아줍니다.
아빠는 눈물을 흘립니다.
사실 우리도 같은 상황입니다.
상처받아 자아가 커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동행해주심을 믿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동행해주시는 하느님의 땀과 피를 봅니다.
그리고는 그분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과정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나아갈수록 상처받은 나는 사라집니다.
죽는 것입니다.
마치 태양으로 다가가는 것처럼 주님께 다가갈 때 나는 타버립니다.
그렇게 나도 하느님의 인형 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에게 다가갑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시는 것이기에 타인이 나를 모욕하고 상처 주어도 크게 두렵지 않습니다.
나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 다 받아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이 믿음을 증가시켜 줍니다.
결국, 야곱이 에사우 앞에 서는 힘은 기도로 내가 죽고 에사우에게 속한 사람임을 고백할 수 있을 때 가능했습니다.
야곱은 에사우에게 일곱 번 절하며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며 하느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과 같음을 고백합니다.
마치 마지막 만찬상에서 요한이 예수님께 그랬던 것처럼 에사우에게 안기고 그의 땅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소원이가 아버지의 땅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세상 사람들과도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처럼,
하늘나라에서도 하느님 품에서 살 수 있게 될 때 하늘나라 백성들과도 소통할 수 있게 됩니다.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기도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나를 죽이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분 품에 안겨있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마지막 때에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십자가를 거친 요한이나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숨는 일 없이
기쁘게 그분께 엎드려 그분 품으로 달려들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유일한 일이 있다면 바로 그분 앞에서 설 힘을 얻기 위해 기도하여 자기를 죽이는 것뿐입니다.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인정해야 합니다.
소원이가 아빠의 사랑을 인정했듯이. 이것이 기도의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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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남을 인도하려면, ‘내가 먼저’ 잘 걸어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마태 4,18-22).”
1) “나를 따라오너라.”는 “나의 제자가 되어라.”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신앙생활은 ‘부르심’에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직무나 직책을 맡는 것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자체가 그렇습니다.>
자기가 종교를 선택한 것이고,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결정한 것도 자기가 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그런 생각은 어리석고 오만한 착각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4-5).”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부르심’은 사랑이고, 은총입니다.
2)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는
“너희는 지금까지는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사는 인생을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사도의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도로 뽑으신 것은, 그들이 사도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지,
사도로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들은 처음에 부르심을 받을 때에는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도 많았고, 미숙한 점도 많았습니다.
그랬는데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깨달았고, 또 그들 자신들이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완성’을 향해서 나아갔고, 결국 ‘완성’에 도달했습니다.
<따라서 ‘사람 낚는 어부’로서 사도들이 첫 번째로 낚아야 할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먼저 ‘구원의 길’을 잘 걸어가야만
다른 사람들을 그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사제들의 서품도 완성된 상태에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신품성사는 ‘시작’일 뿐이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제의 삶’은 ‘사제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신품성사를 받는 그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완성된 것으로 착각한다면, 세상에서 제일 교만한 사람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세례성사도 마찬가지인데, 세례성사는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고, ‘종점’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만일에 세례성사를 받자마자 신앙의 완성 단계에 도달했다고 착각한다면, 곧바로 교만과 위선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3) 요한복음에는 어부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요한 1,35-37).”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 라고 번역되는 말이다(요한 1,40-42).”
요한복음의 이야기와 마태오복음의 이야기를 합하면, 예수님을 만나서 믿게 된 일이 먼저 있었고, 몇 달쯤 뒤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나서게 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 몇 달은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 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어부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따라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구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받기를 바란 것은, 첫 번째가 자기 자신의 구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이 아니라...
그 직무를 받게 된 것은 제자가 된 다음의 일입니다.
<사실 세례성사도 그렇고, 신품성사도 그렇고,
모든 성사는 일차 목적이 각자 자기 자신의 구원입니다.
‘나의 구원’을 생략하고서 ‘남의 구원’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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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4,18-22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의 삶과 신앙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공관복음을 보면 안드레아 사도가 사도들 중에서도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며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고, 요한복음에는 그가 원래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스승의 권고에 따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따라갔다가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게 된 이후에는 자기 형인 시몬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소개하며 신앙으로 인도한 최초의 ‘선교’를 실행하기도 했지요. 또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에는 그분을 만나러 온 그리스인들을 예수님께로 데려가 소개해드리기도 합니다. 이렇듯 다른 어느 사도보다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선교사’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안드레아 사도는 흑해 주변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파트라이’라는 곳에서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안드레아 사도가 어떤 연유로 ‘선교’라는 소명에 그토록 충실하게 임하게 되었는지 그 동기와 이유에 대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시다가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를 만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고기를 낚는 세상의 어부와 사람을 낚는 하느님의 어부는 어떻게 다를까요? 첫째, 고기를 낚는 어부는 그것을 먹기 위해, 즉 죽이기 위해 잡아들이지만, 사람을 낚는 어부는 죄의 수렁에 빠져 고통을 겪는 이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모아들입니다. 둘째, 고기를 낚는 어부는 크고 싱싱해보이는 물고기만 골라서 낚아 올리지만, 사람을 낚는 어부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나 조건으로 사람을 차별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자신이 만나는 모든 이를 주님 손에 넘깁니다. 셋째, 고기를 낚는 어부는 자기가 치고 싶을 때, 치고 싶은 곳에 그물을 치지만, 사람을 낚는 어부는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데로 가서, 그분께서 던지라고 명하시는 쪽으로 그물을 던집니다.
안드레아는 평생 어부 일을 하며 살아왔기에 ‘사람 낚는 어부’ 안에 숨어있는 이런 구체적인 의미들을 어렴풋이 알아 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울지도 충분히 각오했겠지요. 섣부른 각오와 어설픈 노력으로는 절대 해낼 수 없는 큰 일임을 알았기에, 세상과 주님 양쪽에 다리를 걸쳤다가는 이도 저도 안될 것을 알았기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두듯이, 오래 고민하고 갈등했다면 세상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끊어내지 못하고 주님을 따르는 길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듯 주님을 따르겠다고 즉시 결단하고 실행했기에 사도의 길을 걸을 수 있었지요. 이제 그에게는 주님이 전부였고, 그것이 얼마나 복되고 기쁜 일인지를 깨달았기에 다른 이들을 자신과 같은 길로 인도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을 따르며 그분 뜻을 실천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아 사도처럼 단호하게 버리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면 그분께서 차고 넘치는 기쁨으로 나를 충만하게 채워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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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나를 따라오너라.”
주님께서 장차 당신과 함께 일할 일꾼들을 모으시지요.
갈릴리 호숫가에서 네명의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를 지나시다가 시몬과 그이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라고 말씀하십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야고보와 요한이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시지요.
놀랍게도 그들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 나섭니다.
아합과 그이 부인 이지벨을 피해서 엘리야는
그 옛날 모세가 하느님을 만났던 멀고도 먼 호렙산으로 도망가듯 갑니다.
그곳에서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벨 므홀라 출신 사팟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1열왕 19,16)
그래서 엘리야 예언자는 그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가까이 가서 그에게 걸쳐 줍니다.
그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며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즉시 엘리야에게 달려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1열왕 19, 20)라고 청합니다.
엘리야는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고 그길로 그는 부모에게 가서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워서 사람들에게 대접하고 약속한대로 엘리야를 따라 나섭니다.
여기에 비해서 주님께서는 당시의 관습이던 겉옷을 걸쳐 주는 것도 없이 말씀으로만
바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지체 없이 주님을 따라 나서지요.
다른 기회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아버지 장례를 치루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자 주님께서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이런 문맥으로 보아서는 주님께서는 구약의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보다도
더 단호하게 그물 뿐 아니라 부모도 떠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부모에 인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유대민족에게서 중요하게 여기는 부모의 장례까지도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께서 주시는 소명은 인간관계를 넘어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시사하시는 것이지요.
사도 바오로는 잠자기 쉬운 우리에게 특별한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15)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사도들이 갖고 있는 복음선포의 소명을 잊거나 아니면 소극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이사 52,7)라는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하며 복음 선포자의 소명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말씀에 귀를 기우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고 사도 바오는 이사야의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53,1)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렇지만 사도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0,17)라며 그리스도에게서 말씀이 이루어지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 특히 바닷가에서 불렸던 이들,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로 뽑힌 바오로도 다
주님과 말씀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살아서 박해를 받으면서도 복음, 편지, 묵시문학 형식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도들, 특히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도 그렇고
바오로도 성실하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명까지도 바쳤던 것입니다.
주님과 말씀에 대한 ‘증인(마르튀리온 μαρτύριον)’을 위해서는 생명까지도 바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의 소명의 정신을 받들어 우리 자신도 그들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말씀을 위해서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열정과 성실을 다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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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곧바로 버리고 따르는 거룩한 모험>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4,20)
베드로 사도의 동생인(요한 1,41) 사도 안드레아는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의 어부로서(마태 4,18)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이끌었으며,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직접 깨우치고 체험하여 열정적으로 선포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예수님의 승천 후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러시아 남부에서 발칸반도를 거쳐 희랍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선포하다가 체포되어 에케오 총독에게 심문을 받고 십자가에 X자로 못 박혀 순교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부르심, 제자직, 복음선포에 대해 돌아보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불림 받는 이들의 처지가 어떤지를 묻지 않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부르시어 제자로 삼으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하느님 나라에로의 초대이며 사랑의 초대입니다. 따라서 매순간 부르심을 받는 우리는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사랑으로 부르시기에 응답해야 함을 깨달아 감사한 마음으로 기꺼이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불림 받은 이들의 응답의 자세는 제자직의 길을 보여줍니다. 호수에 어망을 던지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아, 그물을 손질하던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은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곧바로”(4,19. 21)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그들은 그 어떠한 계산도 하지 않고 부르시는 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따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마티아 사도 축일의 복음 말씀을 알아듣고는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바로 그것이다!”라고 하며 즉시 복음선포에 나섰습니다.
갈릴래아의 어부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애정을 가지고 해오던 기존의 삶의 방식의 방편들인 그물과 배, 그리고 인간적으로 가장 깊은 애정의 뿌리인 아버지마저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완전하고 철저한 버림은 자신을 절대 가난의 상태로 내몰고 보호막이 없는 광야에 내던지는 엄청난 모험입니다. 그런 선택과 응답은 완전히 비워진 그 자리에 모든 선이요, 행복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채워지리라는 믿음이 있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모험이 우리를 행복으로 인도합니다.
제자들은 때로는 넘어지고, 예수님을 배반하기도 하지만 ‘버리고 떠남’을 계속합니다. 그들은 단순하게 응답하였듯이 예수님에게서 배우고 체험한 하느님 나라의 진리와 선과 사랑을 열정적으로 선포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9) 사도들은 예수님을 믿었을 뿐 아니라 복음 선포를 통해 우리에게 행복의 길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수도축성을 받고 주님께 삶을 봉헌한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나는 매순간 모든 것을 통해 부르시는 주님의 사랑에 ‘곧바로’ 응답하고 있습니까? 제자들이 버렸던 그물과 배, 아버지는 모든 애착과 소유와 무의식의 습관, 고정된 사고의 틀을 말해줍니다. 내가 버리지 못하고 붙들고 매여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자유와 해방을 간절히 원한다면 과감히 버리고 주님을 향해 떠나는 모험을 해야겠지요.
오늘도 곧바로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거룩한 모험을 통해 행복을 전하는 도구가 되는 멋진 날이 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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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교회 전례력으로 2019년 다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마침 성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로 한 해를 마무리하게 되었네요. 파견과 선포로 이어지는 교회의 사명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합시다.
오늘 복음의 부르심 기사는 참 담백합니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이 간결한 언어로 이어집니다. 부르시는 분이나 부르심 받는 이들의 심리 묘사도 부연 설명도 없이 착착 진행됩니다. 너무 간결해 건조해 보이지만 덕분에 모호함 없이 명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시다가"(마태 4,18).
그러고 보니 예수님은 혼자셨네요. 오늘은 특히 호숫가를 지나시는 예수님이 "홀로"이셨음이 눈에, 그리고 가슴에 들어왔습니다. 그분은 세례를 받고 성령에 이끌려 들어간 광야에서 목숨을 건 단식 여정을 거치신 뒤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셨지요. 그렇게 얼마간 그분은 혼자셨을 겁니다.
성 삼위 하느님과 일치 안에 계시는 그분께는 홀로이심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비록 인성을 입으셨으나 홀로 충만하고 완전하신 분이니까요. 하지만 그 충만한 사랑을 나누고,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널리 선포하기 위해서 함께할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바로 오늘이 그 역사적 순간이지요.
"그들은 어부였다"(마태 4,18).
예수님께서 어망을 던지고 있는 두 사람을 보십니다. 어부들입니다. 다른 이들, 좀 더 학식 있는 세도가의 전도 유망한 젊은이를 원하셨다면 성전이나 회당 근처에 가셨겠지요.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현장에서 땀흘려 노동하며 일상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특별할 것 없이 일상 안에 움직이는 우리를 "보시고"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예수님은 상대방의 일상성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인정하고 존중하십니다. 어부들에게 '힘들게 그러고 살지 말고 다른 일을 하자'고 꾀시는 게 아니라, 어부로서의 자질과 경험을 살려 진짜 어부로 함께하자고 손을 내미신 겁니다.
언젠가 낚시를 좋아하는 지인에게 "낚시는 운에 달렸는지 기술에 달렸는지" 물은 적이 있습니다. 내심, '물고기가 와야 미끼를 무는 거니까 순전히 운에 달린 게 아닐까' 선입견을 가지고 물은 건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습니다. 운도 필요하지만 결국은 기술이라고요. 다가감, 집중력, 인내, 아주 미세한 움직임도 알아차리는 섬세함과 민감함, 최적의 순간을 포착해 낚아챔, 밀고 당김, 힘 조절...
어부의 일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협력하는 모든 일과 노동에는 나름대로의 영성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걸 발견하면 일상이 새롭고 경이로운 영성의 장이 되고, 간과하고 무시하면 지루하고 피곤한 소모적 일터일 뿐이겠지요.
"그물, 배, 아버지"(마태 4,20.22).
부르심을 받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곧바로" 버린 목록입니다. "그물"은 생계 유지의 직접적 도구이고, "배"는 그보다 좀 더 규모 있고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는 운송 수단도 되는데 둘 다 세상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자기를 성장시키는데 필요한 자산들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혈연으로 묶인 일차적 가족관계입니다.
이 모두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세상 원리와 혈연에 집착하는 삶을 초월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지상 원리에 자신을 묶기보다 천상 원리에 속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고요. 당시 한창 노동 중이던 그들이 그 순간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과 역사 인식을 소홀히 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일 겁니다. 해방자 메시아의 출현과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열망하고 꿈꾸면서 일상에 충실히 몸담고 있던 중이었을 겁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교회의 본질인 선교 사명의 원리를 들려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먼저 말씀이 계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로부터 파견되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하느님의 뜻을 말씀과 행동으로 전하십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듣는 이의 귀뿐만 아니라 마음도 울립니다. 가르침과 기적뿐 아니라, 그분의 수난과 죽음까지도 선포의 일환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이 선포를 들은 이는 믿게 됩니다. 말씀이신 성자와 그분이 이루신 하느님 나라를 믿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친히 희생되신 구원자 메시아이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가 받아들인 말씀이 목 끝까지 차올라 이를 선포하러 달려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온 존재로 들은 말씀이 그의 심장에서 타오르기 때문에 그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10).
그의 믿음과 고백이 울려퍼지면, 들은 누군가의 귀와 마음에서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가 충실히 채워오던 일상의 자리에서 그 선포를 껴안고 믿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 믿음을 고백하러 또 달려나갈 것입니다. 이렇듯 구원의 고리는 파견과 선포와 믿음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일상을 채워가는 가운데 믿고 듣고 파견되고 고백합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세례와 함께 성령의 인장을 받은 우리는 존재 전체로 그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정체성과 실존을 무시하지 않고 함께 끌어안으셨기에, 우리는 온 존재로 주님께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우리의 선포는 온 존재로 이루어집니다.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화답송).
그러니 말주변이 없다고 숫기가 없다고 움츠러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입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눈빛, 미소, 손짓, 말투, 움직임, 관심, 기도, 눈물과 한숨에서도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맞아 주님의 충실한 제자이고 사도인 여러분을 축하합니다. 지난 한 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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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2024.11.30> 아침을 여는 묵상 (호 11장 1~11절)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성도의 삶❞
❚ 하나님은 고난받는 당신의 자녀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모든 위기에서 건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은 어떤 삶입니까?
➲ 하나님의 사랑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는 삶입니다(1~4절).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보다 극명하게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 불러냈다’(새번역,1절). 그런데 그들은 점점 더 하나님에게서 멀어져갔고, 바알들에게 제사했으며, 온갖 우상 앞에서 분향(2절)하는 죄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걸음마를 가르쳐 주셨고, 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 죽을 고비에서 그들을 살려 주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새번역,3절).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과 애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대단했습니다.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새번역,4절).. 그러나 정작 그들의 마음은 음란으로 가득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애정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중간지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우상을 가까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부정한 것으로 가득해서 영의 눈이 어두워짐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이 결여 되지 않도록 스스로 말씀으로 쳐서 복종해야 합니다. 나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격 없는 내가 이처럼 감당할 수조차 없는 사랑과 은총을 누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과 사랑과 은총은 결국 나의 선택 여하에 따라 영원히 누릴 수 있거나, 사라져 버리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면 내 삶에 거리끼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매 순간 주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려다 보니 너무나 많은 유혹이 내 마음을 파고들어 오고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마음을 채워야 하겠습니다. 물론 실수 하여 넘어질 때도 있겠지만, 말씀이 나로 하여금 다시금 주님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을 멀리하고 계책을 꾸미지 않는 삶입니다(5~7절).
하나님은 패역하고, 배은망덕한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고, 당신의 그 사랑과 애정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끝끝내 여호와께로 ‘돌아오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앗수르 사람이 임금 노릇하는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5절). 그들이 헛된 계책을 세웠으니 칼이 그들을 모조리 삼킬 것입니다(6절). 또한 그들은 끝끝내 하나님을 하나님을 떠나 바알을 불러 지금 처한 그들의 처지를 하소하지만, 그들을 일으켜 세우지 못할 것입니다(7절).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자유로울 수도 없고, 또 나의 생각, 내가 세운 계획, 나의 활동 등.. 이 모든 것이 세상적인 것이 되며, 악한 것에 속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의 위기 앞에서 세상은 일시적으로 나에게 피할 길을 가르쳐 줄 수 있지만, 또 다른 험준한 산 앞에서 망연자실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끌어 가게 될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 나를 향해 내미시는 주님의 따뜻한 손, 위로의 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환경을 누구보다 더 잘 아시고,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갑니다. 이스라엘이 생각한 계책이 결국 이방의 침략으로 고난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처럼, 우리의 생각대로 살아가면 더욱 험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지혜로운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을 버리지 않는 삶입니다(8~11절).
끝끝내 하나님을 떠난 그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아드마와 스보임처럼 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 인근에 위치한 도시(창 10:19)입니다. 즉, 소돔과 고모라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더더욱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신다고 말씀하십니다(8절). 그분은 아무리 화가 나도 화를 내지 않으시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이십니다(9절). 그리고 포로 된 그들을 끝내 고향집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10~11절)하십니다.
우리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야 하며, 동시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심판하고 징벌하기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지켜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할 뿐 아니라 친밀하게 여기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넘이지는 모습, 연약한 모습 모두 안타깝게 여기시며 도우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그 사랑을 힘입어 신실하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을 버리지 않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고 믿음을 갖게 하신 것이 무엇보다 큰 은혜임을 깨달아 영원하신 사랑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거친 광야와도 같은 인생의 길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함이 최고의 기쁨으로, 행복으로 여겨 감사로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호 11:1~11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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