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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중세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종족은 비하하고 괴물로 묘사하기 일쑤였다. 중국 한나라 때 지리서 『산해경』도 그렇고 존 멘데빌의 『멘데빌 여행기』*에도 가보지 못한 지역의 사람들은 반인반수(半人半獸)의 괴물로 그렸다.
*멘데빌 여행기 : 벨기에 사람이었던 멘데빌이 1322년 1356년까지 34년 동안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기록한 여행기
책의 제목이 영어라서 고상하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야기는 어려운 이야기도 고상한 이야기도 아닌 그냥 고고학 이야기다. Tera Incognita는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이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자신의 저서인 『지리학교정』에 처음 사용했는데 ‘미지의 땅’또는 ‘미개척 영역’이라는 의미다.
고고학에서 역사를 말할 때는 보통 세계 4대 문명을 우선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4대 문명이란 개념은 20세기 들어서 정립된 학설로 그전에는 세계 모든 곳이 문명의 발상지가 될 수 있었다. 최근 소련 시절부터 나온 주장들이 DNA 연구로 증명되고 있는데, 바이칼 호수 근처 유적에서 출토된 치아를 분석한 결과 1만 4000년 전후에 여기에서 살았던 인류가 베링해를 거쳐 아메리카로 이동했음이 확인되기도 했다.
구석기 시대에는 돌을 갈거나 쪼개서 연장으로 사용하고 불을 피워서 음식을 익혀 먹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지만 1994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발굴되고 있는 키르키예 남부의 ‘괴베클리 테페’유적은 1만 3000년에서 1만 년 전 구석기 시대 유적으로 높이가 15m, 넓이 300m의 넓은 언덕을 인공으로 쌓고 여기에 200여 개의 돌기둥과 돌담을 원형으로 세워 제단을 만든 것이다. 이것은 구석기 시대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고도의 석조기술을 보여 준다.
[괴베클리 테페 유적의 석조물, 구석기 시대의 것으로
믿기 어려울 만큼 정교하고 사실적이다]
구석기 시대의 시작을 1만 5천 년 전으로 잡고, 인류가 지구에 나타난 것을 400만 년 전으로 본다면 구석시 시대는 그리 오래된 시간이 아니다. 많은 구석기 유적에서 이런 정교한 유물들이 나온다면 인류 문명발달사를 다시 짐작해 보게 할 것이다. 우리는 기록이 있거나 그림이 있는 시대를 역사시대라 하는데 그러면 그전의 99.93%는 역사가 아니라는 말인가.
【1】 오랑캐로 치부된 사람들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는 흔히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부터라고 하고, 거기 사는 사람들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아메리카에도 분명히 고대가 있었다. 아시아와 아메리카 양 대륙에서 후기구석기시대에 발원한 유사한 유물이 나오고 있기 때문인데, 소련이 해체된 후 러시아와 미국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대륙간 관계를 증명하는 자료들이 등장했다. 미국 동북부에 있는 몽크스 고분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 나도 그랬다 – 유타주에서 발견된 대형 암각화는 시베리아에서 발견된 것과 매우 흡사하다.
[경주 황남대총의 1.5배가 되는 몽크스 고분-미국]
한반도 문화의 원류라고 주장하기도 하는 홍산문화(紅山文化)는 양쯔강 유역의 량저(良渚)문화와 함께 5000∼6000년 전 동아시아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문명이다. 랴오닝성(遼寜省)링위안시에 있는 이 유적에서는 여러 제단과 무덤이 있는데, 그중 5000㎡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 신전도 있다. 이렇게 큰 제단을 만든 홍산문화 사람들은 5000년 전쯤에 흔적 없이 사라졌는데 왜일까. 흔적을 남기지 않은 사실은 고고학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한다. 홍산문화 유적은 내이멍구에서 랴오닝성으로 가는 너른 도로 한쪽 허허벌판 위에 있다. 지금은 국가사적으로 지정되고 돔을 씌워 보존하고 있지만, 10년 전만 해도 돌무더기와 무덤, 토기들이 마구 흩어져 있었다.
[홍산문화 제단]
이런 유적에서 발견되는 전염병의 흔적은 인간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환경이 바뀌고 전염병이 창궐해 홍산문화 사람들은 모든 것을 과감히 버리고 떠남으로써 강력한 생존 본능을 지키며 지혜롭게 문명을 폐허로 만든 사례가 아닌가 짐작된다. 고대의 옥과 청동은 병균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지혜가 숨어 있었고, 유목민은 약초를 이용해 스스로를 지켜냈다.
[홍산문화 옥장식]
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적들과 싸웠다. 심지어 과거의 유물에도 공포를 느껴 진시황릉은 수은이 가득 차 있어서 발굴이 어렵다거나 1922년 이집트에서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한 이들이 미라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고 하는 풍문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는 가십거리를 찾던 언론이 발굴 관련자 중 죽은 사람들을 짜깁기해 만든 일종의 가짜뉴스일 뿐이다. 정작 투탕카멘 발굴 담당자였던 영국인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는 65세까지 산 것을 봐도 미라의 저주라는 것은 허황한 이야기다.
인류도 세상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멸종과 생존을 거듭해 왔다. 지구 최초의 인간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등장한 이후 최근까지 최소 20여 종의 인류가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그들은 지금의 우리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만 현생인류 직전, 3만 년 전까지 살았던 네안데르탈인은 2∼5%의 유전자를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은 멸종했지만, 그들의 유전자 일부가 현생인류에 남아 있다. 현생인류 이전의 인류는 멸종하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았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최초의 현생인류가 ‘미개한 원시인’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슬기롭게 질병을 이겨내고 경험으로 습득한 지혜를 공유하고 그것을 후손에게 전달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중세에 창궐한 페스트나 천연두 같은 팬데믹은 오히려 문명의 산물이 되었다. 만약에 위기 상황을 지혜 대신에 공포나 미신으로 해결하려 했다면 한두 번은 운 좋게 넘어갈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멸망했을 것이다. 지난 수천, 수억 년 동안 수많은 바이러스와 세균은 돌연변이를 일으키며 인간을 공격했고, 인간은 집단의 지혜로 그에 맞서왔다. 우리는 공포를 지혜롭고 슬기롭게 극복해 온 그들의 후손이다.
누가 “당신은 식인을 믿습니까?”하고 물으면 얼른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식인이 이루어진 배경은 다양하지만 첫째, 먼저 떠나간 가족과 친구를 보내는 환송 의식으로 그랬을 수 있고, 둘째, 극도의 적대감으로 상대를 죽여 먹었을 수도 있고, 셋째, 고대 중국 기록에 등장하는 것처럼 극심한 기근 상황에서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상륙할 당시 거기에 살았던 인구는 약 6000만 명으로 추산한다. 이후 100년이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에 인구의 90%가 감소했고, 지금은 겨우 500만 명 남짓만 남았다. 10명 중 9명이 죽은 이 일은 구대륙에서 옮겨온 전염병과 잔혹한 학살의 결과였다. 이런 것이 식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식인 풍습은 미개함과 관련이 있다. 살을 베어 죽이는 것보다 마음을 베는 근대 이후, 지금이 더 잔혹한 식인 시대일지 모른다.
우리와도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는 – 신라인은 흉노족의 후손이다 – 흉노족과 고대에 유럽을 뒤흔든 훈족은 같은 민족인가 하는 문제는 학자들의 오래된 숙제다. 유목사회는 다양한 집단의 융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들이 같은 민족인가 하는 것은 애초에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흉노족과 훈족 관계의 핵심은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문화교류의 문제다.
러시아 볼가강 서쪽에는 칼미족이란 종족이 사는데 이들은 칼미족자치공화국에 살며 유럽에서 유일하게 불교를 믿는다. 유럽인들의 동양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의외로 역사가 깊다. 현대의 관념이 투영된 ‘훈족=흉노족’동양을 악으로 규정한 황화론(黃禍論)*은 지금도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서양 우월주의는 최근 동아시아의 발전과 유럽의 경기침체, 그로 인한 포플리즘에 기반을 둔 극우 세력이 부활하고 있다. 세계를 뒤흔든 코로나19는 미국과 유럽에서 동양에 대한 해묵은 차별과 편견이 다시 심화되는 양상이다. 동양에 대한 편견을 빚는 흉노와 훈족에 대한 평가는 새롭게 다시 이루어져야 한다.
*황화론 : 청일전쟁 말기인 1895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주장한 황색인종 억압론, 황색인종의 융성은 유럽의 백인 문명에 위협이 될 것이므로 유럽의 열강이 단결하여 그에 대처해야 한다는 주장.
여기서 이 책의 저자 강인욱에 대해 알아본다.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고고미술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러시아과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는 부경대에서 강의하고 경희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시베리아와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북방 고고학을 연구하고 유라시아 관점에서 고대를 바라보고자 한다고 한다. 저서로 『유라시아 역사여행』『춤추는 발해인』『옥저와 읍루』『고고학 자료로 본 고대 시베리아의 예술세계』등이 있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중국인이 아니고 서양인이었다면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재미있어할지 모르겠다. 2012년 진시황릉 서쪽에서 발견된 99개의 무덤에서 발굴된 인골 대부분이 젊은 여성들로 후궁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그중에 특히 신분이 높은 인골을 복원한 결과 외모가 중앙아시아나 페르시아 사람들과 닮았다. 또 20대 젊은 남성 혹은 왕자로 추정된 무덤에서도 서양인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이에 대해 언론에서는 진시황의 아들 호해(胡亥)와 공주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호해가 나이 20살 무렵에 살해당한 뒤 사지가 찢겨 죽었는데 그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2017년 경주 월성에서 6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터번을 두른 듯한 토우가 출토되어 학자들이 소그드인(동서무역을 주도한 스키타이인, 원성왕릉의 석상 참조)인물상이라고 했지만, 소그드인은 터번을 쓰지 않았으며, 아랍에서 터번을 쓰기 시작한 것은 신라가 멸망하고도 한참 뒤부터다. 반대로 중앙박물관에 보존된, 부산박물관에서 나도 보았던 고려 시대 희랑대사 인물상은 얼굴이 길쭉하여 마치 서양인처럼 보이지만, 서양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서양은 미지의 땅이라거나 서양인은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는 선입견에 앞서 이웃이라는 인식 전환이 필요한 때다.
일본열도의 진정한 주인은 도래인인가 아니면 토착인인가 그도 아니면 남방인인가? 일본인들은 자기모순에 빠져있다. 스스로 ‘순수한’단일민족이라고 하면서도 자기 세력 내 다른 민족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열등화한다. 조몬인이 1만 년 이상 살아왔음에도 야요이인들에 동화되어 사라진 것처럼, 현대에는 아이누인들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일제강점기 때에 한국인을 열등하다며 집요하게 일본인으로 만들려고 한 모습이 생각난다.
홋카이도를 대표하는 원주민 아이누인은 7세기 에미시(蝦夷, 하조-새우)라는 이름으로 일본 역사에 처음 등장했는데 아이누인들은 1500년 가까이 큰 충돌 없이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1869년 메이지유신과 함께 일본이 이 지역을 개발하면서 현지 주민들을 말살했다. ‘에미시의 땅’이라는 ‘에미치’대신에 홋카이도(北海島)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지금은 관광지 이미지로 남았다. 홋카이도 사뽀로역 구내에는 아이누인의 형상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던 모습이 생각난다.
[삿뽀로 역 구내의 아이누인] 2019.1.7찍음
아이누인은 덩치는 크지만 눈이 작고 다부지다. 그들은 처음부터 홋카이도에서 살아 북방인으로 오해하기 쉬우나 그들은 13세기까지는 일본의 본토 도후쿠에 살았다. 홋카이도로 밀려간 것은 그러니까 700년 전이다. 그들은 북방인이 아닌 남방인으로 볼 소지가 더 많다. 홋카이도에 누가 살았을까. 극동지방과 사할린 사이를 가르는 네벨스코이 해협은 거리가 8㎞에 불과하고 겨울에는 얼어붙어 걸어서도 건널 수 있다. 대륙에서 홋카이도로 건너갔던 말갈계통의 사람들이 13세기 몽골제국이 아무르강(黑龍江)하류에 군대를 주둔시키자 더이상 건너가지 못했다. 말갈계통은 몽골과 중국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쿠릴섬을 따라 북쪽 캄차카반도로 이동했다. 알래스카에서 발해와 말갈의 유물이 발견되는 이유다.
【2】 역사에 숨은 진실, 그리고 오해
여기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우리 역사에서 쟁점이 되는 기자 관련 내용이다. 기자가 정말로 조선에 와서 왕이 되고 ‘기자조선’을 다스렸는가 하는 것이다. 기자(箕子)는 상나라 왕족으로 성이 자(子)고, 이름은 서여(胥餘) 또는 수유(須臾)라고 한다. 기는 기자 씨족이 통치한 지역을 말하고 자는 공자처럼 선생이란 의미다. 기 지역은 오늘날 산시성, 베이징, 산둥반도을 포함한다. 기자가 알려진 것은 『사기』*의 기자동래설 때문인데 기자는 상을 멸한 주나라 무왕이 신하로 삼고자 했으나, 듣지 않아 조선으로 보냈다는 것인데 그가 죽은 후 1000년이 지난 한나라 때 등장하는 인물이다.(武王乃封箕子于朝鮮而不臣-주무왕이 책봉했지만 기자는 신하로 복종하지 않았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왕검이 스스로 기자에게 양위했다고 하고, 중국 기록은 주나라가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책봉했다고 하였는데 각각 다른 이유는 하나의 사건을 두고 후대에 윤색을 더한 결과다, 분명하고 중요한 것은 한나라 때 기자동래설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가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서기 109년 한 무제가 고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에 있다. 고조선은 원래 중국 사람을 보내 세운 나라라는 것을 조선정벌 명분으로 삼고자 한 것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평양에다 기자묘를 만들고 그를 받들었는데 왜 그랬을까. 성리학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채택하면서 고려의 불교를 대신할 국가이념을 뒷받침할 고대 역사의 축이 필요했다. 평양에서 지역적으로 모시던 기자를 국가 차원으로 숭앙해 한국사에 자리매김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도 기자릉이 있었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 실제 역사가 아님에도 사대주의를 지탱하는 버팀목 역할을 한 것이다.
역사란 고대로 갈수록 자기들 상상을 덧붙이고 옛이야기를 전하기 마련이지만, 실제로 기자묘는 중국 하남성에 있는데도 우리가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 왜 기자의 묘를 만들었는지 안타깝고 송구스럽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피는 사치품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난방이 미비했던 고대 모피와 짐승 가죽은 모두가 선호한 방한복이었다. 특히 모피는 감촉과 강렬함의 상징이다. 모피를 구하려고 목숨을 거는 것마저 주저하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필연적으로 문명지대에서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기물인 이것이 유물로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고조선 당시에 백두산 일대에서 모피 사냥꾼들과 교역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흥미로운 자료는 남아 있는데 명도전은 전국시대 연나라 화폐지만, 압록강과 청천강 유역 산간 오지에서 이것이 가득 담긴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한두 개가 아니라 40여 개가 나왔는데 이 항아리를 조사한 일본인 학자 고이즈미 아키오는 고조선은 자체 화폐를 만들지 않은 대신 중국화폐를 들여와 모피 무역에 이용한 것이라고 했다.
고조선의 모피는 중국 전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모양으로, 관포지교로 알려진 관중의 『관자』에 고조선의 모피를 사 와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관중이 제환공에게 고조선의 모피를 사와 제후들에게 나눠주어 환심을 사야 한다고 말한 것이지만 그만큼 고조선의 모피가 인기 있었다.
‘신라의 미소’라고 여기는 수막새(기와)에 새겨진 얼굴 모양은 많이 보지만 고조선 당시의 우리 얼굴은 별로 볼 기회가 없다. 1990년 고조선의 중심이었던 랴오닝성 랴오양시의 타완(塔灣)촌에서 밭 갈던 농민에 의해 발견된 청동기를 만드는 거푸집이 발견되었는데 이 거푸집에 머리카락을 말아 올려 상투를 틀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코가 낮고 눈이 작은, 흔히 볼 수 있는 우리의 자화상이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인물상이 나왔다. 거푸집에 새겨진 얼굴은 그들의 조상이나 신을 새긴 것으로 짐작되는데 청동을 주조하던 사람들이 의식에 사용하고, 그 주인공이 죽자 함께 무덤에 묻은 것이다.
[수막새 얼굴 – 신라시대]
타완촌과 멀지 않은 선양(瀋陽)시에는 대표적 고조선 무덤인 정가와자(鄭家窪子) 무덤이 있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비파형동검 등 여러 청동기 유물과 타완촌 유물은 거의 똑같다. 타완촌 유물은 2500년 전의 것으로 고조선이 세력을 기워가던 기원전 6세기 사람들의 생생한 얼굴을 드러낸 모습이다.
[상투를 튼 거푸집 인물 – 고조선]
온돌은 우리 한민족 고유의 문화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우리 스스로도 뿌듯하게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다. 책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온돌은 기원전 4세기경 두만강 일대에서 농사를 짓고 마을을 이룬 옥저인들이 처음 만들어 사용했다. 그들은 혹독한 추위를 극복하기 위해 불을 땐 뒤 그 열기를 방바닥으로 보내 열효율을 높이는 방식인 온돌을 개발했다.”지금 생각해도 이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한다. 내가 어릴 때 새벽에 방바닥이 뜨끈해지면 아버지께서 벌써 소죽을 끓이고 방을 덥혀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다.
방바닥으로 열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세계 곳곳에서 사용되기는 했다. 고대 로마에도 알래스카와 러시아 아무르강가에서도 온돌과 비슷한 난방시설이 있었다. 이들이 옥저인과 달리 열기가 멀리 퍼지지는 못했는데 옥저에서 만든 온돌은 집 모서리에 아궁이를 만들어 불을 태면 그 연기가 방바닥을 한 바퀴 돌아 굴뚝으로 나가는 방식이었다. 이것이 고조선과 고구려를 거쳐 멀리 바이칼까지 옮겨가 사용되었음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와 흉노의 관계는 극히 제한적이었지만 『한서』에는 “고조선이 흉노의 왼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유라시아를 호령하던 흉노는 1세기 무렵 한나라에 밀려 서쪽으로 도망가 훈족을 이루었고, 바이칼호 주변에 살았던 흉노는 선비족에 흡수되었다. 초원지역에는 삼림이 없기 때문에 온돌이 성행하지는 못했는데 몽골도 마찬가지였다. 흉노 이후 돌궐, 유연 같은 초원제국은 정착된 성지 건설을 포기하고 온돌 전통도 사라졌다. 몽골에 온돌이 다시 등장한 것은 흉노가 멸망 한 후 1000년이 지난 발해의 유민들에 의해서였다.
신라인은 흉노의 후예인가 하는 것도 우리 역사에서 쟁점이자 미스터리이다. 삼국 중에서 북방과 서역의 유물, 유적이 가장 많이 발견되는 점도 그것을 부추긴다. 신라는 4∼5세기 마립간 시기부터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면서 북방계인 적석목곽묘를 만들고, 삼국통일 무렵에는 자신들이 북방 흉노의 후예라고 묘비명 등에 당당히 밝히고 있다. 신라는 다른 부여계 나라와 맞서 뒤늦게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1000년의 역사를 이어온 데는 작지만 강한 나라, 흉노의 후예가 자랑이었다.
진과 한이 망한 3세기 말에 편찬된 진수(陳壽)의 『삼국지』에는 유독 학자들이 해석하기 쉽지 않은 구절이 있다. 경주를 중심으로 번성한 진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중국의 진秦나라에서 도망친 사람들이라고 한 구절이 그것이다. “진한의 노인들이 전하여 말하길 ‘진나라의 힘든 일(장성 쌓는 일)을 피하여 진한으로 왔다.’(…) 그들의 언어는 마한과 달라서 나라를 방(邦)이라고 하고, 활(弓)을 호(弧)라고 한다. (…) 그 언어는 진나라 사람들과 흡사하며 연나라, 제나라의 것과는 다르다.”진시황의 학정을 피해 신라, 즉 진한으로 왔다는 말인데, 뜬금없는 소리 같다. 실물 자료가 없었던 탓에 물음표로 남았다.
이 미스터리한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자료는 2010년 경주 탑동에서 발굴된 나무관이다. 나무관 안에서 초원유목인들이 애용하는 동물장식이 대량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중국 북방, 특히 진나라 변경인 서융인의 무덤에서 발견된 동물장식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았다. 서융(西戎)은 서쪽의 오랑캐를 지칭하는 것으로 나중에 진나라에 편입되었다. 뿐만아니라 진한에서는 마한, 변한에서 발견되는 세형, 비파형 동검이 아니라 안테나식 동검과 호랑이, 말 모양 허리띠 등 북방 유목인들의 유물들이 많이 발견된다. 진수의 기록은 허언이 아니었다.
[안테나식 동검]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온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진시황은 통일 후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고 만리장성을 쌓으며 북방 유목민을 압박했다. 그 결과 일부는 중국에 동화되고 일부는 흩어졌다. 유라시아를 뒤흔든 거대한 세력 변동이 한반도와 멀리 일본에까지 확산된 것이다. 최근에 일본에서는 북방계 동검 거푸집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는 북방의 흔적이 한반도를 넘어 일본으로까지 넘어갔다는 증거다.
우여곡절이 많고 아직은 직접 보지 못한 문무왕 비문에는 『삼국사기』에는 없는 그의 출신에 대한 비밀이 적혀 있다. 문무왕은 자신의 선조를 중국 서북방에 살다가 중국에 귀의한 흉노족인 소호금천씨와 김일제라고 했다. 문무왕뿐 아니라 『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도, 당나라로 이주한 김씨 성을 가진 부인도 그녀의 묘비명에 흉노 후손이라고 적혔다. 아마도 김씨들은 모두 당연히 흉노의 후손으로 생각한 것일 것이다.
기마민족이 남하해 신라 정권을 탈취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박약하다. 반대로 한반도는 물론 북방 유라시아 여러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막연히 흉노 같은 초원의 유목문화는 신라와 지역적으로 거리가 먼데 설마 관계 있을까 하고 의심하는 좁은 시야도 버려야 한다. 당시 흉노는 유라시아 전역에서 롤모델의 강국이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과 그들을 둘러싼 국제정세를 정확히 파악했기 때문이다. 흉노와의 관련을 강조하여 국력을 키운 그들의 선택은 옳았다. 현대의 편견보다는 신라의 입장과 당시 국제정세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3】상상의 나라를 찾아서
고대인들도 힘들고 어려울 때는 상상을 했던 모양이다. 아틀란티스나 무릉도원, 유토피아가 그런 낙원으로 그려지는 곳이었다. 최초의 이상향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등장하는 아틀란티스로 아테네와 전쟁을 벌이다 패한 후 지도자 솔론이 건설한 꿈의 도시라는 것인데, 플라톤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지만 그것은 가공의 이상적 도시일뿐 실제로는 플라톤이 만든 우화이다. 그 이상향의 도시가 과욕을 부려 아테네를 공격하는 바람에 제우스가 벌을 내려서 하루아침에 바다속으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유럽인들은 이상향으로 아틀란티스를 주목했고, 욕망을 자극하는 작품으로 되살려냈다. 1516년 간행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아틀란티스에 대한 환상이 만들어 낸 소설이다. 1627년에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가 출간되었는데 이 책은 사람들에게 아틀란티스에 대한 왜곡된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플라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지만 고대 문명의 신비를 찾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고 실제로 바다속에 있을 것이라고 믿는 수많은 고고학자들이 지중해 일대를 부단히 조사했다. 그러나 그것이 헛된 것이 아니었던 게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알려진 크레타섬의 미노아 문명을 발견한 계기가 되었다. 달려오는 황소의 뿔을 잡고 제비넘기를 하는 벽화는 특히 유명하다. 어떤 학자들은 미노아 문명이 화산 폭발로 갑자기 사라지기는 했으나 이곳이야 말로 아틀란티스가 아니겠는가 하고 주장하기도 한다.
[미노아 문명의 회화]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는 세형동검과 잔물무늬거울(세문경), 청동거울은 청동기 유물의 상징이며 기원전 4세기경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 중 청동방울은 전차에 매달아 전령이 하늘에서 전차를 타고 내려온다고 믿었던 것인데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마찬가지다. 방울은 전차와 동시에 하늘의 뜻을 전하는 도구였다. 다만 한반도에서는 전차가 아니라 신의 대리인인 샤먼들이 쓰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시베리아에서 시작한 전차문화와 아주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유럽과 시베리아를 나누는 우랄산맥 아래 첼랴반스크라는 도시가 있다. 이곳은 소련 시대 공업도시로 성장했고, 제2차 대전 당시에는 소련에서 탱크를 만드는 탄코그라드(탱크의 도시)로 유명했다. 당시 이 도시 남쪽에 댐을 건설하기로 하면서 유적을 조사했는데, 말과 함께 묻은 전사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4000년 전 세계 최초의 전차가 같이 출토되었는데, 도시는 마치 중국의 샤먼(廈門-하문)의 토루를 연상케 하였는데 직경 150m 안에 2열로 46개의 집터가 있었고 여기에 최소 2,000명 이상이 산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축사와 무덤은 주택 밖에 두었는데 여기까지 합치면 10만 명 이상이 산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중국 샤먼(厦門) 토루]
애니메이션에서 영화까지 만들어진 〈겨울왕국〉은 정말로 존재할까. 있다면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첨단과학과 탐사 기술이 발달해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거의 없는 지금도 인간은 여전히 겨울왕국의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고고학 자료는 먼 북극해까지는 아니지만, 우리와 이웃했던 시베리아와 만주 북방에도 매우 발달한 문명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며 살아남았던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했던 역사의 일부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유럽의 북쪽, 중국의 서쪽 혹은 북극 탐험에 관한 이야기도 겨울왕국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곳들은 제쳐두고 우리와 관련된 겨울왕국이 만주 북쪽 러시아와 접경한 곳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최근 발굴에 따르면 남한의 2/3 정도 광활한 평원지대인 싼장(三江)평원이 그곳인데, 1월 평균기온 영하 21∼18도, 1년에 7∼8개월이 겨울인 이곳에 있는 성터가 200여 개, 그중 가장 큰 것이 높이 4m 둘레가 6.3㎞, 풍납토성 둘레가 2.2㎞인 것과 비교해도 엄청나다. 여기서는 글자가 새겨진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당나라 기록에는 북부여의 후예가 두막루(豆莫婁)라는 나라를 세웠다고 하여 여기서 산 사람들이 부여의 후예이며, 실제로 성안에서 부여 계통의 토기와 온돌이 나오기도 했다.
편두(扁頭)에 관한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삼국지』「동이전」에는 변한 사람들이 편두를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보다 훨씬 이전인 신석기시대에도 편두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마를 납작하게 만들거나, 머리를 뾰족하게 만드는 편두를 왜 한 것일까. 한반도에서 아무르강까지 이어지는 환동해 사람들은 편두를 한 사먼을 신과 하늘과 닿을 수 있게 한다는 상징으로 여기고 숭배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흉노 멸망 후 이들이 훈족에 융화되어 대이동 단계에 들어서면 편두는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난다. 3∼5세기 유라시아 전역에서 황금과 철제가 마구로 널리 쓰이면서 훈족의 문화가 유라시아 전역으로 퍼졌다. 편두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전해졌으며 최근 스위스 둘리에서 5세기쯤 편두를 한 몽골계통 여인의 무덤이 발견되기도 했다. 김해 예안리 고분에서는 대량의 편두가 발견되기도 했으며 김해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토기들도 머리가 뽀족한데 편두를 한 것으로, 가야와 신라 고분에서 북방계 유물인 편두가 발견된다는 것은 북방유물의 상징이다.
[예안리 유적의 편두 여인-복원]
차를 실어 나른 교역 루터를 차마고도(茶馬古道)라고 한다. 차마고도는 3500년 전 고원지대 사람들이 만든 산물로 산악지대 사람들이 한반도 북부 만주와 관련이 있다는 설을 낳았다. 돌무덤, 동검, 토기 등 티베트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이 만주 일대 비파형동검 문화와 유사하다는 것으로 1980년대 중국의 저명한 고고학자 동은정(童恩正)이 티베트에서 만주에 이르는 거대한 산맥을 따라 문화교류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텐안문 사건 이후 미국으로 망명해 더이상 연구는 진행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론의 가능성은 아주 크다.
지금까지도 그런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있지만 티베트를 국가 통치에 이용한 인물은 아돌프 히틀러다. 히틀러와 나치는 꽤나 진지하게 티베트의 신비주의를 믿었다. 히틀러 측근 중에 오컬트(신비주의)에 빠진 인물로 하인리히 힘러가 있는데 그는 티베트에 탐험대를 파견해 티베트인을 조사했다. 조사 배경은 20세기 초 서양에서 유행한 우생학과 인종주의였다. 그들은 순수한 유럽인을 찾는다며 열등한 타민족에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산악지대에서 찾은 것이다. 그들은 경쟁적으로 파미르고원과 티베트를 탐사했다.
하지만 그들이 단일민족으로써 자기들끼리만 종족을 유지했다면 근대 유럽의 왕족이나 고대 이집트 왕족들처럼 유전적 문제로 자연스럽게 멸족했을 것이다. 나치의 패망과 함께 순혈이라는 아리안족을 찾는 이야기는 더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 대신 그들이 티베트에서 했던 경험은 극도로 미화되어 서양에 전해졌고 그들이 티베트에서 벌인 만행은 숨기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로 이용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한 이후 달라이 라마를 비롯해 지속적으로 티베트는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다. 2006년 중국과 티베트를 잇는 2000㎞ 칭짱철도가 개통되면서 티베트는 빠르게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21세기 들어 중국과 인도 거대 나라 사이에 낀 티베트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지정학적 문제 때문에 강대국 사이에서 갈등의 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인도와 중국은 티베트 서부 카슈미르가 자신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2019년 10월 세계인구의 1/4을 차지하는 두 나라 정상이 만나 화해의 제스처를 보였지만, 얼마 후 아크사이친에서 두 나라 군인들이 충돌해 수십 명이 전사했다.
분쟁의 해결은 티베트 이전에 존재했던 상웅국(象雄國)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티베트 사람들의 기원인 상웅국은 중국도 인도도 아닌 고원지대에서 유목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다. 독일 나치가 밝히려고 한 순혈민족도 아니었고 은둔의 외톨이도 아니었던 그들은 훨씬 넓은 지역에 살면서 동서를 이어주던 또 다른 문명의 개척자였다. 현대 국가 국경으로 그들을 규정짓지 말고 태베르틀 하나의 문명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티베트를 7세기 이후의 불교국으로만 한정되는 실정은 안타까운 일이다.
스키타이 제국의 한 부분이었던 소련과 우리나라가 수교를 맺은 한 달 뒤인 1991년 11월 예르미타시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던 황금 유물 203점이 우리나라에 왔다. 그리고 전시회 폐막 후, 한 달 뒤에 소련은 해체되었다. 전시회는 한국에서 열린 처음이자 마지막 전시였다. 그 후에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등도 한국에서 유물을 가져와 전시회를 열렸는데 대부분 황금 유물 전시회였다.
러시아 표트르 대제(1672∼1725)는 20대 왕자일 때 네덜란드에 갔다가 유럽의 문물과 막 생기기 시작한 박물관에서 여러 유물을 보았다. 당시 코사카인들은 경쟁적으로 황금유물을 찾아다녔는데 사금을 찾는 사람도 있었지만 더 손쉬운 방법으로 황금을 찾았다. 그것은 유목민들의 쿠르간을 도굴하는 것이었다. 유물을 꺼내고 시신에 붙어 있는 금장식을 떼어냈다. 그때 이미 서양의 골동품 시장에서는 시베리아 유물들이 거래되고 있었고 많은 유물들이 모스크바 궁정으로 들어갔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러시아 – 우크라이나 전쟁은 황금이 원인이기도 한데 1991년 러시아의 전시회가 끝나고 20년이 지난 2011년 겨울 ‘스키타이 황금문명전’이 서울에서 열렸다. 이번에는 우크라이나에서 온 황금유물이었다. 스키타이문화란 우크라이나 초원에서 만리장성까지 이어지는 문화의 통칭으로써 총 260점의 황금유물이 한국에서 전시회를 가진 것이었다.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스키타이 문화 원조를 자처했고 러시아의 최초 독립국가 키예프공국의 수도역시 지금의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였다. 이 전시회를 통해 스키타이 황금이 시베리아가 아닌 우크라이나가 원조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순회전시의 일환이었다.
황금 원조 논쟁은 2014년 제대로 터졌는데, 3월 크림자치공화국이 주민투표로 러시아와 합병을 선언한 것이고 이때 크림반도의 스키타이 유물을 네덜란드 알라드 피어슨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었으므로 네덜란드로 갈 때는 우크라이나 것이었지만 전시회가 끝나고는 러시아 것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서로 자신들에게 반환되어야 한다며 소송전이 이어졌다. 그런데 크림반도 병합은 전쟁이 아니라 주민투표 방법으로 이루어졌으며 실제로 크림반도에는 러시아인 다수가 살고 있었으므로 유물의 발굴시점에서 보면 러시아와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 유물을 발굴하고 보존한 사람들은 러시아인이기 때문에 러시아 것이라고 하고, 우크라이나는 자신들의 세금과 주권하에 발굴된 만큼 주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유물은 네덜란드에 그대로 있는 상태로 방황하는 스키타이 황금유물이 된 것이다.
마야문명은 스페인의 침략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일부가 남아 당시 영화를 말해준다. ‘마야’는 원주민들이 자신들을 지칭하는 말로 기원전 1500년부터 스페인 정복전까지 3000년간 멕시코 동남부와 과테말라, 유카탄반도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대표적인 신대륙 문화를 창조했다. 이들의 전성기는 우리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250∼900년 사이로써 인구 10만 명이상의 도시가 70여 개 이상이었다. 1649년 마지막 도시가 멸망할 때까지 수천 년을 이어왔으나 이제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잊혔다.
200년이 지난 뒤 고고학자들이 다시 마야 유적을 발견했지만 정작 그들이 사용했던 글자를 해독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만든 달력과 책은 세 권(혹은 4권)만 남아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독학으로 연구한 소련의 ‘크노로조프’는 1952년 마야 문자를 해독했다. 당시 냉전시대에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크노로조프는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마야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미지의 땅과 그 안의 사람들을 알아간다는 것은 그들을 정복하고 얻은 전리품을 박물관에 채우는 것이 아니라 편견 없이 문화의 보편성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300∼500년경 신 차크를 새긴 마야의 비석]
【4】분쟁과 약탈의 고대사
[둔황에서 가져간 관음보살상-하버드대학교 박물관 보관]
위의 관음보살상은 1925년 하버드대학 고고미술사 교수인 랭던 워너가 중국 둔황(頓煌)에서 가져간 것이다. 20세기 초 중국 신장 일대는 서구학자들의 실크로드 탐사 각축장이었다. 영국, 러시아, 프랑스, 스웨덴보다 미국은 훨씬 뒤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대부분 유물은 이미 다 가져가고 미국은 벽화라도 가져가기로 마음 먹었다. 벽화는 서양 탐험대 이전부터 수난을 겪었는데 금칠을 한 벽화를 끍거 가기도 하고 불교를 믿지 않는 위구르인들이 우상숭배라면서 파괴하기도 했다. 손상과 벽화를 뜯어가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탐험대는 벽화를 뜯어내는 기술도 없었다는 데 문제가 많았다.
미국 탐험대는 무리하게 벽화 26점을 떼어냈다. 그나마 여섯 개 굴에서 떼어낸 벽화 11점만이 현재까지 남아있다고 하는데, 그것도 절반 이상이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랭던 위너는 일본에서 영웅대접을 받고 있다고 하는데 무슨 말일까. 그는 일본인 학자와 같이 연구한 경험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 일본의 중요 문화재 151점을 정리한 ‘워너 리스트’를 작성했는데, 목록을 중심으로 미군이 핵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하였으나 투하 직전 교토가 제외되었으므로 그 덕에 천년고도 교토가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극적인 소토리로 전후 일본은 위너를 신격화했으며, 1955년 교토와 가마쿠라에 추모비를 세우기까지 했다. 패색이 짙은 일본 본토에 원자탄을 투하해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었던 미국은 원자폭탄 투하 도시로 인구 100만 명 이상인 도쿄, 오사카, 나고야, 교토로 선정했으나 천황이 있는 도쿄는 일본인 분노를 감안해 제외하고 교토가 유력했다. 지금은 17개 세계문화유산이 있는 교토지만 당시 미군 수뇌부는 교토가 역사 도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실제 교토를 폭격 대상에서 변경한 이는 당시 미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으로 그는 투하 2주 전 대통령과 면담하고 교토를 제외시켰다. 대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선정되었는데, 이곳들은 애초에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위너 리스트는 폭격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군이 일본에 상륙해 적국의 문화재를 접수할 때를 대비한 목록이었다. 미국도 전쟁 직후에는 핵폭탄 투하에 따른 일본 여론의 악화를 막기 위해 워너 리스트를 신화로 만들었다. 문화재 접수 목록을 만든 사람을 지일파로 둔갑시켜 널리 선전하고 기념비까지 세워졌으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인디에나 존스로 대표되는 20세기 고고학자들의 행위는 미화되고 선전되어 온 것이이런 것이다.
일본의 자기 모순적 역사관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같은 전쟁피해 당사자임에도 한국과 중국에게 극도의 반감과 혐오감을 표시하는데 이는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동아시아 침략과 문화재 침탈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은 자신들이 대륙에서 온 천손민족이라 자처했다.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건 자신들의 고향을 찾은 것이고, 만주와 중국까지 침략한 것은 일본인의 북방기원설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100년간 일본의 왜곡된 한국관, 역사관은 이런 자기 모순에서 나온 산물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제국주의 고고학에도 적극 관여해 한국을 정식 침탈하기 전인 1899년부터 한국의 문화재를 조사했다. 그것은 일본의 기원을 한국에서 찾겠다는 목적이었고, 청일전쟁 이후 랴오둥반도를 비롯해 타이완, 오키나와, 시베리아까지 일본군을 따라 현지를 조사했다. 도쿄대학 교수이던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는 지역의 원주민을 조사하여 열등한 집단과 우월한 집단을 구분해 그 안에서 대륙을 건너온 일본인의 기원을 찾고자 했는데, 그는 1910년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총독을 만나 한국에서 일본 민족의 기원을 찾는 조사를 도와달라고 설득했다. 한반도 조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위대한 일본인’조상이 있다고 믿었고 그들이 북방에서 왔을 것이라는 인식은 우리의 인식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에서도 북방 유라시아는 원래 우리의 영토였다는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 떠도는데, 그 뿌리는 일본 군국주의가 주장하는 침략의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고대의 사람들이 교류하고 공존했던 사실을 현대 국가의 영토 범위로 치환시키는 것은 오히려 문화의 진정한 의미를 퇴색시키는 일본 군국주의의 논리에 동조하는 것일 뿐이다.
쇼군(將軍)에게 지방의 영지를 나누어주고 통치하던 바쿠후(幕府)시대는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종말을 맞았다. 이와 함께 일본은 서양의 식민지 개념을 본떠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 목적으로 정한론(征韓論)을 들고나왔다. 1000년 가까이 바쿠후 체제로 살던 그들이 바다 건너에 식민지를 만들려니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꺼낸 것이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였다. 한반도 남부에 일본 식민지인 임나일본부가 존재했고, 북부에는 중국의 식민지 낙랑이 존재했다고 한 것이다.
정한론이 대두되면서 가야는 이래저래 일본 침략의 상징으로 이용되기 좋은 조건이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한국사 중에도 가야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은 것은 이런 경향이 이어진 탓이다. 작지만 잘 살고 사방과 교역하며 자신들만의 문화를 꽃피웠던 가야의 진면목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지난날 가야사가 어떻게 왜곡되어왔고, 그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어떠했는지 돌아보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앞서 보았지만 홍산문화는 기원전 5500∼5000년경 중국 내이멍자치구 츠펑시에 위치한 신석기 문화를 말한다. 츠평(赤峯)과 홍산(紅山)모두 붉은 산봉우리를 뜻하는데, 츠펑시는 허허벌판 위에 자리 잡은 거대한 붉은 산으로 이것은 수백 킬로 떨어진 곳에서도 보인다. 이 홍산문화가 우리와 관련 있다고 하는 주장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와 만주 조사를 도맡았던 이들이 경성제국대학 교수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은 1960∼1970년대 문화대혁명과 1980∼1990년대의 개혁개방을 거치면서 중국민족주의 상징으로 홍산문화를 발굴하고 자리매김했다.
홍산문화가 중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결정적 계기는 그곳에서 출토된 옥기 때문인데, 전통적인 중원문화 옥기와 아주 유사한 옥기가 여기서도 출토되었으며, 특히 C자형 용머리 옥기는 주둥이가 뭉툭해서 돼지코를 연상케 하므로 옥저룡(玉猪龍)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태아와도 유사해 부활하는 생명을 상징하기도 한다. 중국인의 홍산문화 사랑은 대단해 은행의 로고, 지하철 손잡이 등에도 이것을 모티브로 사용한다. 비록 홍산문화는 청동기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옥기와 제사를 기반으로 다른 지역과는 구분되는 동아시아만의 문명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5000년 전의 신석기 시대에다 맞추어야 하고, 21세기 한국과 중국 같은 뿌리의 국적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까 싶다.
‘터키’(키르키예)라는 나라는 우리나라를 형제국으로 생각하고 아주 친근감을 보인다. 왜일까. 한국전쟁 때 참전한 16개국 중에 4번째로 많은 전투병을 보내주고 도와주었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역사는 아주 깊다. 1453년 오스만튀르크의 메흐메트 2세가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 동로마제국을 무너뜨리면서 터키인들은 현재의 아나톨리아반도를 중심으로 정착했다. 오스만제국 전성기는 그 뒤에 이어졌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패망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 의해 분해될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건국영응 아타튀르크가 1923년 지금의 터키를 건국했다.
아타튀르크는 친서방 정책을 표방하며 아랍을 탈피하고 유럽에 동화되고자 했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에 비하면 터키는 작은 땅이었다. 거기다 쿠르드족을 비롯해 쉽게 조화될 수 없는 민족들이 섞여 있었다. 민족주의를 지향하던 유럽의 국가들이 득세하는 분위기 속에 신생 터키는 그들도 민족국가를 표방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인들은 터키를 황인종, 또는 2급 인간으로 차별했고, 대내외적 갈등 속에 터키는 자신들의 역사를 강조할 필요성이 커졌다. 이에 아타튀르크는 유라시아 깊숙한 미지의 땅으로부터 터키인이 기원했다는 ‘터키 역사의 테제’를 발표했다.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기원한 튀르크인들이 아나톨리아 고원(현 터키)로 와서 근동 문명의 한 축을 이루었다는 내용으로 유라시아 전역에 펴져 있는 튀르크인을 터키의 역사에 포함시킴으로써 자존심을 세우고자 한 것이다. 이런 튀르크 계통의 역사에 자신들의 최초 국가로 간주하는 흉노는 고조선과 인접해 있었고 고구려 시기에는 돌궐이라는 이름으로 국경이 맞닿아 있었다. 그러니 튀르크 계통 사람들은 고대 한국은 이웃한 형제와도 같은 나라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