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계를 생각하지만 세계는 나를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세계와 나 사이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다. 비대칭성이 갖는 특징은 서로 마주보지 않는다는 점이 하나요 둘 사이에서 기준점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 또 하나요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듯 세계를 볼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각각의 세계관을 가지고서 살아간다. 그러기에 서로간의 충돌 갈등 분쟁은 마치 돈키호테가 가상의 적을 삼은 풍차와 싸우기 위해 돌진한다. 그에게는 그 풍차가 진짜 적인 셈이니까. 결국 세계속의 전쟁들은 모두 허상과의 전쟁인 것이다. 비대칭 관계를 대칭 관계로 번역해 오기하고 그 오기된 기록 혹은 말과의 전쟁이다. 바보는 자기가 바보인 것을 모르듯이 착각을 착각으로 여기지 못하는 것은 결국 인간 한계의 노정이다. 붙들어매려는 아귀다툼도 멀리 떼어놓으려는 냉정한 배척도 공수래공수거다. 결론은 헛짓을 하며 산다는 것이다. 집착하고 탐욕스럽고 분노하는 이유도 결국 스스로 설정했던 관계가 깨지고 생각했던 기준점이 초점을 잃었기 때문이다. 각자의 기준대로 각자의 관계설정으로 각자의 세계관으로 각자도생의 삶을 어울리고 뭉치고 흩어지며 자아도취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들이 누대에 걸쳐 재현되고 재생된다. 새로운 것은 없다. 존재로서는 없고 단지 인식의 영역에서 새롭다는 뜻이다. 무릇 모든 것이 나요 나 아닌 것이 없다. 또한 이율배반으로서 나 조차도 없다. 필름이 돌아가고 영화가 상영되면 보여지는 그것이 전부다. 마치 영화 속 장면들이 세계인 듯하다. 그로부터 대칭점들을 하나하나 골라내어 짜집기하고 재구성해서 자기화한다. 그로부터 다시 세계화한다. 공간 획득과 시간 배열은 하나의 장치다. 영화가 되기 위한. 다시 또 설정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시나리오를 쓰고 배역을 정하고 장면들을 탐색하고 각각의 연기력을 단련하며 완성이라는 이름하에 몰입하고 관객을 동원해서 박수소리와 찬사에 혹한다. 유혹이다. 유인되어서 마치 빨려들어가듯 끌려들어가 거기서 자발적으로 혹사당한다. 눈물 콧물 박수 환호 탄성이 뒤섞여 아우르는 그 모든 장과 장면들을 인생으로서 다시 엮어낸다. 그리고 그것을 세계의 역사로 받아들인다. 세계는 변한 적도 없고 변하지도 않는데 오래도록 무수한 변화들을 세계로서 인식한다. 비대칭을 대칭으로 탈바꿈시키는 역전가설이다. 역설적이다. 니체가 말하는 비극의 탄생일까? 아니면 님이여 벌써 강을 건너가셨소? 하는 공무도하의 노래가 될까? 디오니소스의 비극이든 푸념의 노래이든 내가 겪고 있는 인생은 하루도 쉬지 않는다. 기쁨도 잠시요 짙던 슬픔도 엷어져간다. 공허를 허무로 덮고 허무를 무우 베듯 하며 지난날의 추억으로 옷깃을 여민다. 인생의 갈음이다. 갈음하여 그래도 세계는 있다고 자조한다. 그래야 나도 존재하니까. 내 생각도 역시나.
첫댓글 보름달 아래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는 무척 낭만적일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