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고통이 살아있는 걸 느끼게 했죠
오후의 은색 바다가 부드러운 윤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모래밭의 낡은 모터보트가 밀려오는 부드러운 물결에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그 광경은 갑자기 영화 ‘버킷리스트’를 떠올리게 했다.
우연히 병원에서 만난 두 노인이 바다에서 자연에서 마지막을 어린아이같이 즐겁게 보내는 장면이었다.
같은 실버타운에 있는 여든아홉 살의 노 의사선생과 함께 파도치는 동해바다 위를 달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그와는 지구별 위에서 우연히 잠시 스치고 지나는 인연이었다. 잠시 후 노 의사와 함께 탄 오래된 모터보트는 돌고래같이 파도 위로 머리를 솟구쳤다가 곤두박질치면서 우리를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게 했다.
보트에서 내린 후 우리는 파노라마같이 수평선이 내다보이는 찻집에 앉아 인생을 복기하는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살아보면 곤란이 없이 순탄하고 밋밋하게 사는 건 인생이 아니예요.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삶을 살았었다고 생각되는 순간은 고생하던 때였어요.
인생에는 그런 짜릿한 고통이 있어야 해요.”
“어떤 고통의 자국이 지금도 남아있으시죠?”
의사니까 평탄하게 살아왔을 것 같은 생각이었다.
그게 나의 편견이고 고정관념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남의 고통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의과대학 졸업반때 집이 망했어요. 등록금도 당장 잠을 잘 방도 없었죠.
인턴 레지던트를 할 때도 그 당시는 한 달 혼자 밥을 먹기도 힘든 돈을 받았었죠.
저는 그때 병원의 약사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죠.
아내가 뒷골목에 약방을 차리고 우리는 그 뒷방에서 살았어요.
그러면서 애가 태어나고요.
그때 우리나라가 월남전에 참전하기로 하고 비둘기 부대를 최초로 보낼 때인데
의무장교로 월남에 가기로 신청을 했죠. 목숨이 위험한 전쟁터로 자원을 한 거죠.
매일 같이 훈련을 받고 밤이면 집으로 돌아 왔어요.
월남으로 갈 때 역에 군악대가 나와 연주하고 사람들이 배웅하고 굉장했죠.
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의사 사회도 성공의 길이 있다.
의사들은 대부분 의과대학의 교수로 남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개업을 해서 명의 소리를 들으면서 돈을 많이 벌고 화려한 생활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의사의 성공궤도에서 벗어났던 것 같다.
“월남에서 돌아온 후는 어땠어요?”
내가 물었다.
“그래도 운이 좋았는지 내가 졸업한 의과대학에서 교수로 오라고 하더라구요.
그때 마침 교수 자리가 비는 때였거든요. 타이밍이 괜찮았던 거죠.
그런데 의과대학교수라는 게 명예는 있지만 월급은 쥐꼬리만 했어요.
가족이 먹고 살 수가 없었죠. 그래서 개업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런데 자존심상 내가 교수로 있던 의과대학 지역에서는 하기 싫었어요.
교수를 했다는 이름을 팔고 그 지역에서 돈을 벌려고 한다는 소리를 듣기 싫었던 거죠.
그래서 전혀 낯선 도시인 부산에 가서 의원을 차렸어요.
거기서 몇 년이 지나니까 환자들이 몰려 오더라구요.
제가 거기서 처음으로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넓은 집을 지었어요.
그때 좋았죠. 그리고 오십년 세월을 보냈어요.”
그는 팔십대 후반 의사 생활을 접고 바다의 색깔과 표정이 다른 동해의 실버타운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때로 궁핍은 목자의 지팡이나 막대기 노릇을 하는 것 같다.
궁핍이 그를 전쟁터로 몰기도 하고 또 바닷가 도시로 가게 했다.
그는 영혼 속에 깊이 각인된 그 궁핍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던 순간이라고 회고하고 있었다.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불경에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는 말이 있다.
곤란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기 쉬우니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고 했다.
인생에서 고통은 아름다운 무늬는 아닐까.
그때 느끼는 슬픔 그 물결을 넘었을 때의 기쁨의 감정은 무늬에 덧입혀 지는 색깔 같은 것 그런 게 아닐까.
오늘아침 하나님은 또 이렇게 내게 말해주는 것 같다.
‘내가 그대에게 고통을 주거나 뭔가 그대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주더라도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말라.
나는 그대를 순식간에 곤경에서 구원할 수 있고 그대가 진 모든 무거운 짐을 환희로 바꾸어 놓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