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35
7월31일[성 이냐시오 데 로올라 사제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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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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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YW3MMlvr64A
[예수회 양승환 크리산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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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기쁜 마음으로 한다면!>
삼복더위에 70명, 80명의 식사를 준비하다 보니, 주방 온도가 40도를 훨씬 넘어섭니다. 하는 일은 언제나 단순 작업의 반복입니다. 다듬고 썰고, 지지고 볶고, 삶고 끓이고...
때로 이 나이에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다가도 아이들이 깔깔대며 맛있게 먹는 광경을 생각하면 얼굴에는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요즘, 자주 생각합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기쁜 마음으로 하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로 생각하면, 그 작은 일들이 우리를 성화의 길로 이끄는 가장 좋은 도구가 된다는 것을.
스페인 로욜라에 있는 이냐시오 성인의 생가를 들렀을 때였습니다. 고풍스런 성채 안에는 그분께서 탐독했던 책들부터 시작해서 그의 가족들이 쓰던 식기, 가구, 입던 옷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성 이냐시오 대성당 중앙 제대 뒤편에는 그분의 청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인의 손은 어떤 글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글귀는 예수회 회원들의 살아가는 이유이자 모토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
예수회 회원들은 창립자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과 정신에 따라 오직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릴 뿐 자신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서원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 창립자나 카리스마는 다르지만 ‘동종 업계 종사자’인 동료 수도자로서 생각할수록 멋진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오늘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혹시라도 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이 아니라 내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심각한 성찰을 하게 만듭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생애는 풍파 많고 우여곡절 투성이인 우리네 삶에 큰 위안과 위로를 건네주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걸어갔던 그의 여정은 참으로 파란만장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기사(騎士)로서의 큰 성공을 꿈꾸었습니다.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그는 왕에 대한 대단한 충성심을 드러내며 목숨까지 걸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한 하느님의 뜻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1521년 침략해온 프랑스군과 맞서 싸우던 그는 큰 부상을 입게 됩니다. 날아온 포탄에 맞아 한쪽 다리는 부러졌고, 다른 쪽 다리마저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얼마나 상황이 심각했던지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병자성사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은혜롭게도 이냐시오는 그 시점에서 자신의 인생 여정 안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 하나를 마련합니다.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 그는 회복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열전’이란 영성서적을 손에 듭니다.
처음에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읽기 시작했던 그 책들이 그를 천천히 주님께로 안내했습니다. 그는 조금씩 세상의 덧없음과 허무함을 알아갔습니다. 그리고 보다 가치 있는 일, 보다 의미 있는 일, 보다 영양가 있는 인생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세속적인 성공하기 위해 아낌없이 쏟아 부었던 에너지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왕의 충직한 기사를 꿈꾸었던 그는 이제 하느님의 충성스러운 군사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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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6dOi5Rmu9y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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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다란 진주를 팔려고 이리저리 들고 다니는 거지 아이와 같다>
사람에게 가치가 있을까요? 그리고 나와 나의 삶에 가치를 따지는 게 의미가 있는 일일까요? 진화론에서는 사람이나 아메바, 모기나 기생충의 가치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각자가 생존을 위해 진화한 최종단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 진화론자들에게는 인간에게 가치를 매기거나 윤리, 혹은 존엄성을 말하는 게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자신에게 느끼는 가치는 인간의 생존을 위해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람은 왜 죽고 싶은 마음이 들까요? 그 마음 안에는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반면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 여겨질 때 세상에서 살아갈 힘이 납니다.
사람이 이런 존재로 진화했다고 하는 것은 참 역설적입니다. 정말 뛰어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고 여겨 우울증과 자살 시도를 한 이들은 많이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랬고,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그랬습니다.
실비아 플라스의 삶에 대해 알아볼까요? 실비아 플라스는 미국의 시인입니다. 그런데 이른 나이에 가수 오븐에 머리를 넣고 자살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비아는 미국 명문 여대를 졸업하고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하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고 두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실비아는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덟 살 때 아버지를 잃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 같았으나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는 못했습니다. 또 친구와 이야기하다 어느 날 친구 둘이 낄낄대며 자기들끼리 떠나버렸습니다. 실비아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없었던 것입니다.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았지만, 남편까지 외도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천재로 명성에 자자했지만, 자신은 가치 없는 존재라 스스로 여겼기에 살 의미를 잃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가치를 측정하며 살고 그 측정한 가치로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거나 잃기도 합니다. 그냥 그런 존재입니다. 이 말은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저절로 자기 삶의 가치를 측정하여 가치가 없다면 죽어버리는 존재로 진화했을까요? 진화의 이유가 생존인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게 필요합니다.
먼저 나의 가치를 알려면 누가 나의 가치를 평가하는가, 또 그가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나 혼자서는 나의 가치를 알 수 없습니다. 타인의 평가를 믿는 것입니다.
“1997년, 대한항공 괌 추락사고 희생자 유가족들은 대한항공으로부터 평균 2억 5천만 원의 보상금을 받았으나 미국 정부를 상대로 미연방법원에 소송을 냈던 피해자 14명은 1인당 평균 230만 달러(30억 원)를 받아 냈다. 2001년, 국내 법원에서는 조종사의 무모한 조종이 인정되어 7억여 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항공사의 과실이 없는 경우에는 국제조약에 의거 보상금은 1억 5천만 원 선이다.” [출처: ‘하기 싫은 일을 해야 몸값이 오른다’ 중에서, 『세이노의 가르침』]
여기서 특별했던 것은 이것입니다. 보통 1억 5천의 보상금을 주는데, 국내 항공사에서는 유가족들에게 평균 2억 5천을, 국내 법원에서는 7억 원을, 그리고 미국 정부에서는 30억 원을 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가치는 그 가치보다 ‘누가 측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가장 높게 평가해주는 이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를 믿기 위해서는 실제로 나를 평가한 가치가 나에게 주어져야 믿을 수 있습니다.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나를 온 우주보다 귀한 존재라고 말했다고 해서 내가 그 말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천재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평생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 말하며 자기 주머니에 돌을 가득 담아 집 근처 강에 몸을 던져 죽는 경우와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이나 책 몇 권을 사 주는 정도로는 살아갈 용기를 주는 나의 가치를 믿기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의 가치를 가장 잘 알았던 존재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나를 낳고 길러준 부모입니다.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면 그 아이는 커서도 다른 어떤 것으로도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생명을 내어줄 만큼 자녀를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니 자녀도 그런 부모 덕분으로 살 용기를 낼 수 있기에 부모가 자기 생명처럼 소중합니다.
그러나 자녀는 부모가 나의 생명을 바쳐야 할 정도로 충분한 가치를 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때가 사춘기입니다. 자녀는 이때 자신의 가치를 높여줄 새로운 것들을 찾습니다. 친구도 있고 꿈도 있고 좋은 스마트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위해 내 목숨을 내어놓을 만큼 나의 가치가 존귀하다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나 자신을 맡겨야 할까요?
한 소년이 할아버지에게 인생의 가치에 관해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돌 하나를 주며 먼저 시장에 가서 팔고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값을 물어보거든 손가락 두 개만 펼쳐 보이라고 했습니다. 시장에서는 그 돌을 자기 집에 장식하겠다고 하며 아이의 손가락 두 개를 보고 2달러에 사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를 다시 박물관으로 보냈습니다. 박물관에서는 2천 달러에 산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보석 채굴장에 가서 팔아보라고 합니다. 책임자는 그 귀한 돌을 20만 달러에 사겠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세상에서 내 인생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내가 그를 위해 무엇까지 지불할 수 있는지를 알면 됩니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을 나에게 가장 많은 값을 치러주는 이를 위해 내어놓을 것입니다. 그 보물을 발견하는 게 하늘나라 행복의 핵심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팔아도 될 누군가가 필요한데, 그 보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나의 가치를 알려주시기 위해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 가치는 얼마일까요? 온 우주보다도 큽니다. 이것을 믿는다는 말은 나도 그 가치를 주시는 분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 행복의 가치를 아는 이의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내가 목숨을 내어줄 부모가 있는 존재가 없는 아이보다 더 행복한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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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느덧 7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미국의 라스베이거스에는 유명한 카지노가 있습니다. 카지노에서 게임을 하기도 하고, 공연을 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카지노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박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노다지가 묻혀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즐기면서, 공연을 보는 건 좋지만, 노다지를 찾겠다고 올인하면 자칫 몸도 상하고, 가진 재산도 모두 날리게 됩니다. 한마디로 패가망신하게 됩니다. 매일 복권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박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노다지가 묻혀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즐기면 좋지만 복권에 올인하면 역시 몸도 상하고, 영적으로 메마르게 됩니다. 주식에 투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박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노다지가 묻혀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말처럼 투자는 분산해서 하면 좋다고 합니다. 적당한 투자는 좋지만, 주식에 올인하면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저는 카지노, 복권, 주식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할 줄도 모르고, 일단 겁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밭은 ‘카지노’가 아닙니다. ‘복권’도 아닙니다. ‘주식’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밭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밭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밭은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부른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들어간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오늘은 이냐시오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이라는 보물을 우리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영신수련은 4주간에 걸쳐서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길잡이입니다. 준비기도, 구할 은총, 주어진 성서말씀 묵상, 마침기도, 묵상내용 정리의 순서로 30일 동안 하루에 5시간 정도 기도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10년 동안 신학생들과 함께 30일 피정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미국 있기 때문에 아쉽게도 30일 피정에 함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신수련은 그 내용이 모두 좋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원리와 기초’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따름으로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 세상 모든 걸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데 유익하면 그것을 사용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삶의 기준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병환자가 되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스스로 가난한 이가 되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큰 노력을 기울입니다. 기꺼이 기러기 아빠가 되기도 합니다. 자녀들의 성공을 위해서 희생을 감수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한 노력보다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손에 작은 가시가 박혀있으면 빼려고 노력합니다. 우리의 영혼에도 많은 가시가 박혀있습니다. ‘분노와 원망, 시기와 질투, 욕심과 교만’의 가시들입니다. 이런 가시가 박혀있으면 우리는 참된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지 못합니다. 내 영혼의 쓰레기를 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영신수련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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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44-46: 밭에 묻혀있는 보물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44절) 밭에 숨겨진 보물은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선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이 보물을 가지려면 밭을 사야 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서라도 밭을 사야 하는 것처럼, 하늘나라의 보물은 세상의 것을 버리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세상의 것이란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들로, 우상숭배를 버려야 한다. 밭이란 성경이나 예수 그리스도이다. 밭으로 오는 사람은 그 안에서 보물인 지혜를 찾는다. 신앙인은 성경을 알려고 노력하며, 예수님을 따르려 애쓰는 가운데 보물을 발견한다. 보물을 숨기고 있는 밭이 그리스도라면, 우리도 그렇게 할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즉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를 것이다. 거기서 보물을 차지하게 된다. 보물이 숨겨져 있는 밭을 합당한 비싼 값을 치르고 살 수 있게 된다.
값진 진주는 율법과 예언서보다 더 귀한 살아계신 말씀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다른 모든 것을 잃는 한이 있어도 영원한 삶이라는 진주를 찾는다. 하느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이 은총으로 하느님을 알아보고는 과거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하찮게 여기고 그분만을 따르게 된다.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게 되면 인간은 속된 욕망에서 돌아서게 한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을 발견하면 나머지 모두도, 즉 율법과 예언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처럼 거룩한 삶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면 자기가 세상에서 사랑했던 모든 것을 기쁘게 버린다. 그 진주와 비교할 때 다른 모든 것은 하찮을 뿐이다. 그 마음은 하늘의 것, 오직 값진 진주의 광채, 즉 그리스도만을 원한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아가 8,6) 한다. 영원한 삶에 대한 불타는 열망은 물질에 대한 사랑을 끊어버리게 한다. 하느님께 깊이 빠진 사람은 속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우리가 찾아야 하고 가져야 할 값진 보화란 무엇인가? 영원한 생명과 천국으로 인도해 주는 보화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파헤쳐서 그 보화를 스스로 발견하고 찾아 얻는 기쁨을 가져야 한다. 무엇을 성취하기 위해서도 그만한 희생을 해야 하는 것처럼, 구원도 우리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참 기쁨을 우리에게 주며,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것임을 생각하며 노력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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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밭에 숨겨진 보물”의 비유는 ‘우연히’ 발견된 보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밭을 가는 사람은 보물을 ‘찾으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밭을 갈다 우연히 모습을 드러낸 보물을 찾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선물’처럼 다가옵니다. 보물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만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보물을 차지하게 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의 소중함을 알아본 이들만이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의 비유는 밭에 숨겨진 보물의 비유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상인은 주도적으로 ‘좋은 진주’를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좋은 진주를 발견하자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진주를 차지합니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찾고 열망하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발견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바로 좋은 진주를 찾고자 길을 나선 것과 같습니다. 기도하는 삶,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믿음과 함께 그 말씀을 이웃에게 실천하는 삶, 주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삶, 미사 안에서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삶, 이 모든 것이 하느님 나라라는 좋은 진주를 찾아 나선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선물처럼 우연히 그 실체를 드러내기도 하고, 또 신앙생활로 우리 삶 안에서 발견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보물과 진주를 발견한 이들이 그 가치를 알아보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것들을 차지한 것처럼, 하느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진 이들만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사랑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2티모 3,16-17).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 말씀은 우리의 믿음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줄 수 있는 힘을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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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은 보물과 진주를 ‘이미 얻은’ 사람입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마태 13,44-46)
1) 유아세례를 받았든지, 구원의 진리를 찾아 헤매다가 발견했든지, 어쩌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든지, 어떻게 시작했든지 간에 신앙인은 ‘하늘나라’라는 대단히 귀한 보물과 진주를 ‘이미 얻은’ 사람입니다. <우연히 얻든지 적극적으로 찾아서 얻든지 간에 그 모든 일에는 ‘하느님의 섭리와 부르심’이 작용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여기서 ‘보물’과 ‘진주’는, 하느님 나라,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기쁜 소식), 구원의 진리 등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그것을 다시 숨겨 둔다는 말은, ‘기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가진 것을 다 판다는 말은, ‘기쁨’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고, 발견한 그 보물이 그만큼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야만 겨우 얻을 수 있는 ‘값비싼’ 보물이라는 뜻이 아니라, 가진 것을 모두 기꺼이 버릴 정도로 크게 기뻐한다는 뜻이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최선을(전력을) 다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 그래서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기뻐하며’라는 말입니다. 보물과 진주의 가치를 알아본다고 해도 그것을 발견한 일을 기뻐하지 않으면, 그것을 차지하려고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그것을 차지한다고 해도 기쁨 없이 한 일이라면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고, 사실상 차지한 것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복음을 들었을 때, 복음이 구원의 진리라는 것을 알아들었다고 해도 기뻐하지 않는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혹시 받아들인다고 해도 겉으로만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쁨’은 신앙생활의 필수 요소이고, 핵심 요소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기쁨 없이 하는 것이라면, 그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강제노동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강제노동 수용소가 아닙니다. 그 나라는, 복음을 들었을 때 정말로 ‘크게 기뻐하면서’, 그곳에 들어가서 살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 그리고 들어가서 참 기쁨과 행복을 영원히 누리게 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에 관한 소식을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누구에게나 큰 기쁨을 주는 소식이기 때문인데, ‘모든 사람’이 듣고 기뻐하는 것은 아니고, 하느님 나라가 아닌 다른 것을 원하는 사람은 복음을 들어도 기뻐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으니까 그 나라에 들어가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3) 모든 것을 다 판다, 또는 전력을 다한다는 말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8-30)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보물과 진주를 얻었다고 해도 그것은 ‘씨’를 얻은 것이고, ‘열매’를 맺는 일의 시작일 뿐입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는 것은 구원을 향한 여정의 시작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잘 가야만,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온전히 받아야만 그 여정이 완성됩니다. 만일에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그만둔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4) 하느님 나라, 또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은, 다른 사람들 모르게 감추고 숨기면서, 혼자서만 가지고 있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 합니다. 보물과 진주로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금고 같은 곳에 감추고 숨겨야 하는 물건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자랑하고 나누어야 하는 ‘구원의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등불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함지 속에 감추어져 있는 등불은 제 구실을 못하는 ‘빛 없는 등불’이고, 그것은 더이상 등불이 아닙니다. ‘복음’이라는 보물을 얻은 다음에, 그것을 혼자서만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나누지 않으면, 그 보물은 더 이상 보물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하느님 나라, 또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이라는 보물과 진주는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소개하면서, 나누면 나눌수록 더욱더 확실하게 ‘나의 것’이 되는데, 다른 사람들 모르게 감추고 숨기고 있으면, 점점 빛을 잃다가 없어집니다. 신앙은 증언하면 할수록 더욱더 강해지고 깊어지는데, 사람들 모르게 신앙을 감추고 있으면 점점 힘을 잃다가 결국 사라져 버립니다.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안 믿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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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인호 루카자 신부님]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가 귀한 보물이라는 사실과, 그 보물을 발견한 이의 기쁨이 우리의 것이 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값비싼 보물을 집이 아닌 땅속에 묻어 보관하던 팔레스타인에서는 가끔 전쟁이나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땅 주인이 바뀌는 일이 있었습니다. 땅 주인이 바뀌면 땅속에 묻힌 보물은 새 주인의 소유가 되지만, 정작 그는 그 사실을 모를 수 있기에 오늘 복음의 상황처럼 주인이 아닌 소작농 같은 이들이 보물을 발견하는 일이 생깁니다. 주인의 땅에서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그 땅을 사고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파는 선택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보물은 움직입니다.’ 과거의 보물이 지금은 하찮게 여겨지기도 하고, 과거에는 별스럽지 않았던 것이 지금은 모든 것을 포기할 정도로 큰 보물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 우리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보물의 움직임을 체험하고 있는지요?
한편 오늘 복음에서는 보물과 진주를 발견한 이의 기쁨이 중심 주제임에도, 보물의 존재를 모르고 밭을 판 사람과 값진 진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판 이들의 속상함도 크게 느껴집니다. 보물이 묻힌 밭과 좋은 진주를 알아보지 못한 이들은 신앙이라는 보물, 하느님 말씀과 교회와 성사라는 보화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들과 같습니다. 나와 교회, 세상 안에서 보물을 찾고자 더욱 노력하고, 또 그 보물을 얻기 위한 선택과 포기가 좀 더 과감해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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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예레미야 예언서 15,10.16)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우리 삶이 너무 고단하고 힘들면 한번씩 내뱉는 소리이지요. 나만 힘든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이지만 사실 모든 사람에게 삶이 버거울 때가 있답니다.
예레미아도 하느님의 예언자로 불림받아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답니다.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렇지만 예레미아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위로와 기쁨과 즐거움을 맛봅니다. 그 힘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도 삶이 너무 힘드시나요? 예레미아처럼 한탄이 나오나요? 괜찮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기가 참으로 어렵답니다. 내 맘과 같지 않고 참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난감할 때도 있답니다.
그때 우리의 유일한 위로와 희망은 하느님의 말씀이랍니다. 오늘도 말씀의 힘으로 힘들지만 하루를 또 살아보자구요. 아무리 힘들어도 그분이 나와 함께 있어주신다니 그것 하나만 믿고 그냥 웃어보자구요.
여러분의 얼굴에 작은 기쁨과 즐거움이 살~짝 멤도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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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13,44)
오늘 복음의 핵심인 발견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전에,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과학자인 아르키메데스에 기인한 상징적인 감탄사 ‘유레카!’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유레카는 발견의 기쁨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오래도록 이어져 왔습니다. 유레카라는 용어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기원하며, 이 단어는 ‘찾다’ 또는 ‘발견하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동사 ‘heuriskein’에서 유래했습니다. 발견의 기쁨을 압축하는 유레카는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는 짜릿한 경험을 구체화하는 표현입니다. 아울러 유레카라는 감탄사는 의미 있는 발견에 도달하기 위해 요구되는 끊임없는 추구와 인내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위대한 업적들이 종종 변함없는 헌신, 지칠 줄 모르는 노력, 그리고 포기하기를 거부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역사적 의미를 넘어, 유레카는 모든 분야, 곧 과학기술부터 예술, 문학, 종교 그리고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어떤 분야에서든 돌파구와 영감의 순간이 일어날 수 있다, 는 점을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유레카의 정신은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도전에 접근하고, 호기심을 포용하며, 해결책과 개인적 성장을 추구하는 데 있어 끈기를 유지하도록 격려합니다. 이렇게 유레카는 시간을 초월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다양한 영역에 걸쳐 개인들에게 계속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발견의 기쁨, 의미 있는 돌파구에 필요한 끈기, 지적이거나 영적 성취의 본질적인 기쁨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이 지녀야 할 태도를 가르쳐 주는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물을 우연히 발견하든 또는 진주를 애써 찾다가 얻었든 귀중한 것을 발견한 이들은 한결같이 “가진 것을 다 팔아”(13,44),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13,46) 구매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보물이나 진주가, 자신들이 소유한 것을 다 처분해서 구입할 만큼 투자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모든 것을 처분함을 통해 여러 가지 불편하고 어려운 점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자신들이 찾길 원하던 귀한 것을 획득했다는 기쁨이 더 컸기에 그런 결단을 내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그 귀함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겐 별로 의미가 없지만, 아주 하찮은 것이라도 그 귀함을 아는 사람에게는 큰 기쁨과 함께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그것을 얻고 싶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나라는 마치 보물과 진주를 발견하고 지금껏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다 매각하고 처분해서 구매할 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늘나라의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하늘나라를 발견했을 때, 그것을 발견하고 찾은 기쁨이 너무 행복했기에 기꺼이 자신의 전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사는 결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물과 진주를 발견하고 그것을 구매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이 바로 하늘나라의 놀라운 가치를 대면한 제자들이며, 그들은 그 가치에 압도되어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 적절한 삶을 살아가고자 전 존재를 바쳐 투신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외칩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고귀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3,8)
이런 발견의 기쁨을 누리길 바라면서, 다음 노랫말로 기도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는 없네. 이 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도, 이 세상 모든 영예와 행복도,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의 크옵신 사랑이여. 세상 즐거움 다버리고 세상 명예도 버렸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는 없네. 세상 어떤 것과도.』 (성가61 주 예수와 바꿀 수는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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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혼자 여행을 갔을 때입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인터넷 검색으로 맛집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짬뽕 맛집이 있었습니다. 메뉴는 딱 두 가지였습니다. ‘짬뽕과 탕수육’. 그런데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도 ‘언제 이 집에 와서 짬뽕을 먹어보겠어?’라는 생각으로 줄을 섰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마침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이 있어서 들어갔는데, “상 다 치우면 들어오라니까요.”라면서 짜증을 냅니다. 뻘쭘하게 앉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상 다 치우는 것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습니다.
자리에 앉자, “무엇을 드릴까요?”라고 퉁명하게 묻습니다. “짬뽕과 탕수육만 있는 거죠?”라고 묻자, “메뉴 보면 알잖아요.”라고 대답하십니다. “물은 어디 있나요?”라고 물으니,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지도 않고 “물을 셀프입니다.”라고 말만 합니다. 기분이 너무 안 좋았습니다. 한마디 하려다가 다시 오지 않을 집이라는 생각에 참았습니다. 음식은 맛있었을까요? 별로였습니다. 그냥 평범한 짬뽕 맛입니다. 기분도 좋지 않아서 두 젓가락 먹고 그냥 나왔습니다. 화났다는 것을 이것으로라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제 감정을 눈치챘는지 주인은 계산하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죄송합니다. 오늘 손님이 너무 많아서 힘들었어요.”
더 짜증이 났습니다. 짜증의 원인이 손님이라니…. 결국 저 때문에 짜증이 났다는 말이 아닙니까?
누구나 남 탓하는 사람 곁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감사할 이유보다 자기 힘든 것만 생각하는데 어떻게 가까이 있을 수 있을까요? 맛집이 된 이유가 단순히 음식 맛 때문일까요? 근본적으로는 이 집을 찾는 손님 때문이 아닐까요? 나중에 보니 결국 폐업했습니다. 손님에게 감사하지 않으니 망하지 않으면 이상한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식당 주인에게 중요한 것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오는 손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손님을 짜증의 대상으로 생각하니, 장사가 제대로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중요한 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밭을 산다는 것, 좋은 진주를 발견한 상인이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해서 그것을 샀다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어떻게든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좋은 것 발견하면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죄를 지어서라도 자기 것을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자기 것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사랑의 삶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마치 하나의 짐으로 생각하고 계속해서 남 탓만 했던 것이 아닐까요? 남 탓만 하다가는 우리도 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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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진정한 보물,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아무리 값진 보물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의 눈에는 보이고 어떤 이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값진 진주를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찾아다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애쓰지 않는 사람이 보물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보물이고 따라서 보물을 얻기 위한 희생과 헌신이 요구됩니다.(마태 13,46)
값진 보물을 발견했으면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하여 그보다 못한 것들을 처분하게 됩니다. 새 옷을 장만하면 전에 입던 옷을 정리하게 되듯이 더 좋은 것을 얻으면 하나는 자연스럽게 정리됩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차지하면 다른 모든 것은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내가 참으로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때입니다.
마태복음 19장의 부자 청년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다고 온 젊은이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하셨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주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희망을 지니고 있었지만, 자기의 재산을 포기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양다리 걸치기나 어중간은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참으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요구됩니다. “하느님을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기도입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결국, 하느님을 얻으면 모두를 얻은 것이요, 모든 것을 얻어도 하느님을 차지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나라를 성인들이나 가는 곳으로 어렵게만 생각한다면 아무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마태 6,33)을 구하고 그리하여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지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러 오지 않으시고 오히려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실망과 좌절보다는 하느님의 자비를 갈망해야 합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사람의 마음이 머물고 세상의 어떤 것도 다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지 말고’(루카 9,62) 내 삶의 자리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 보물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주님, 정녕 당신은 저의 등불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저의 어둠을 밝혀 주십니다”(2사무 22,29). 이제 당신이 밝혀 주시는 보물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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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은 하늘나라입니다>
마태오 13,44-46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당신은 하늘나라입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마태 13,44)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마태 13,45)
하늘나라를
가려도
하늘나라를
없애려도
하늘나라가
있기에
하늘나라를
믿고
하늘나라를
바라며
하늘나라를
사랑하여
하늘나라를
찾아서
오롯한 마음으로
길 떠나는
당신은
아직
하늘나라에
닿지 않았어도
이미
하늘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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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오늘은 성 이냐시오의 축일입니다. 그는 원래 스페인의 귀족 출신으로, 로욜라에 있던 성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싸움이나 노름, 연애에 일가견이 있었으며 기사 교육을 받은 뒤 나라 재상의 부하가 되었고 군인으로써 용맹을 떨쳤습니다.
그러던 중 팜플로나 전투에서 프랑스 군대와 싸우다 포탄에 다리를 맞아 다시는 군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됩니다. 후송되어 치료를 받는 동안, 그는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기사들의 사랑을 다룬 소설을 읽고 싶었지만, 마땅한 책이 없어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을 읽게 됩니다. 그리고 이 책들을 통해 그는, “나도 성인들처럼 회개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습니다.
결국 그는 성지 순례를 떠나고 동굴 속에서 여러 시간 자신의 죄에 대해 성찰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새로운 삶에 대한 의혹과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느님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얻고 싶었지만, 돌아온 것은 의기소침한 마음과 우울증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소리치곤 했다고 전해집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어떤 사람에게서도 어떤 피조물에게서도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습니다. 어떤 종류이든 약간의 도움이라도 희망할 수 있다면 어떤 수고라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어디서 제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알려주십시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일이라면 개 뒤를 쫒아가는 일이라도 기꺼이 하겠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그는 하느님과 화해했다는 특별한 확신을 얻게 되었으며, 자기 죄를 쉴 새 없이 고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깨닫게 됩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보았고, “로마에서 너에게 호의를 보여주겠다”라는 예수님의 계시를 받고 교황으로부터 “예수의 동반자” 수도회, 즉 “예수회”의 인가를 받아 이를 설립하게 됩니다.
이냐시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당신의 동료를 우리 가운데서 개별적으로 찾고 계신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만이 우리의 전부를 차지하는 그런 사람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고 하십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자신이 귀중하게 여겼던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여야 더욱 값진 보화를 정당하게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삶의 목표나 야망에 집착하는 생활 태도를 포기했으며 지난 죄를 꾸준히 성찰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모든 직위, 명예를 기쁜 마음으로 모두 포기하고 더욱 값진 보화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하고 가져야 할 값진 보화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줍니까?
그것은 바로 하느님 사랑, 즉 그리스도의 은총입니다. 그리고 이를 취득하기 위해 희생해야 할 것은 바로 온전한 나 자신, 나의 이기심 혹은 자존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범한 생활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기쁨을 직접 찾아 나서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누린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든 소중하고 귀한 것에는 희생과 노력이 필요한 법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 오늘 기념하는, 이냐시오 성인이 설립한 예수회의 삶의 목표입니다.
오늘의 복음을 묵상하며,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나의 욕심, 미움을 팔아 넘기고 더 큰 보화를 얻을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길 청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냐시오의 기도를 읽어 드리며 오늘의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주여, 거두어 받아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나의 지성과 나의 모든 의지를
내게 있는 것과 소유한 모든 것을.
당신이 그것을 내게 주셨으니
주여, 당신께 그것을 되돌려 드리나이다.
모든 것은 당신의 것, 오로지 당신 뜻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
내게 당신 사랑과 은총을 주소서.
그로써 나는 족하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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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보물찾기>
-일상이 보물밭이다!-
“내 힘이시여, 당신께 이 눈이 쏠리오니, 하느님은 나의 성채시나이다.”(시편 59,10)
오늘 역시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하늘 나라의 비유를 통해 하늘 나라의 기쁨을 살 수 있는 비결을 배웁니다. 바로 보물의 비유와 진주의 비유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오늘 복음의 두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진정 이런 하늘 나라의 보물을 발견한 이들이 참부자요 참행복한자요 참자유로운자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모두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하늘 나라의 보물입니다. 사람 누구나 마음 깊이에는 이런 참보물을 찾는 갈망이 있습니다.
이 참보물을 찾지 못해 방황이요 불안이요 혼란입니다. 길을 찾는 마음, 희망을 찾는 마음, 빛을 찾는 마음은 바로 이런 참보물을 찾는 마음입니다.
평생 이 참보물을 찾지 않고, 찾지 못하고 살았다면 그 인생 얼마나 허망하고 억울하겠는지요! 참보물을 찾아 행복한 인생 살아보라고 주어진 인생인데 말입니다. 이런 하늘 나라의 참보물을 찾지 못해 무지와 허무, 무의미의 어둠 속에 방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참보물의 발견이요 소유임을 깨닫습니다
희망이라 다 희망이 아니듯, 평화라 다 평화가 아니듯 보물이라 다 보물이 아닙니다. 거짓 보물이 아니라 참보물이, 가짜 보물이 아니라 진짜 보물입니다. 참보물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일상이 보물밭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보물을 찾지 못하면 다른 어디서도 찾지 못합니다. 다음 고백 그대로입니다. 선물을 보물로 바꿔 읽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보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이런 보물은, 참보물은 돈주고 사오거나 빼앗아 올 수 없고, 새삼 간절히 찾을 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자 발견이요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그 옛날 초등학교 어린 시절, 봄소풍이나 가을소풍때 소풍이 끝날 무렵에는 꼭 보물찾기 놀이가 있었습니다. 보물찾기가 시작되자 마자 보물 종이 쪽지를 발견하려 이리저리 뛰는 아이들이요, 보물 종이 쪽지를 발견했을 때, 설렘의 기쁨은 얼마나 황홀했던지요!
지금 생각하면 하잘 것 없는 보물이었지만 당시는 가슴을 가득 채워 설레게 했던 보물 종이 쪽지 였습니다. 이 보물 종이 쪽지를 하나도 찾지 못했을 때의 쓸쓸하고 허전함 또한 잊지 못할 것입니다.
보물찾기! 참 심오한 상징입니다. 새삼 우리는 보물찾기 인생을 살아갑니다. 날마다 죽는 그날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참보물을 찾아야 합니다. 참보물을 찾는, 발견하는 기쁨과 행복이 참기쁨이요 참행복입니다.
일상이 보물밭입니다. 제가 볼 때 눈만 열리면 함께 하는 형제들이, 매일 만나는 이들이 보물입니다. ‘신의 한 수’라 할 수 있는 우리 수도형제들 하나하나가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독특한 그 고유의 참보물입니다.
사람이 희망이듯 사람이 보물입니다. 아무리 자연환경 좋고, 건물이 좋고, 전통이 좋아도, 그 수도원 건물 안에 살아 있는 보물 수도자가 없다면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하겠는지요! 수도자를 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겠는지요!
이런 사람 보물, 아기 보물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할 자리에 애완견이 반려견이 자리하고 있는 병리적 쓸쓸한 현실에 개탄합니다. 결코 사람 보물을 대체할 수 없는 애완견, 반려견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아이들만 보면, 젊은이들만 보면 너무 반갑고 사랑스러워 살아 있는 보물을 발견한 듯 신기하고 기쁩니다.
하느님은 보물찾기의 달인이요 대가요 최고의 전문가입니다. 하느님을 대변하는 가톨릭 교회 역시 그러합니다. 하느님이, 교회가 찾아 낸 최고의 보물이 바로 성인들입니다. 세상이 교회가 필요로 할 때 하느님은 성인 보물을 찾아 보내주십니다. 꽃의 색깔, 향기, 모양, 크기가 다 다르듯 성인도 그러합니다. 시대마다, 환경마다 보내 주신 성인 보물들은 다 다릅니다.
오늘 하느님은 정말 기막힌 살아 있는 보물을 찾아 혼란한 세상, 교회에 보냈으니 바로 예수회의 창립자이자 초대 총장을 하며 예수회에 견고한 토대를 놓았던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입니다. 성인의 생애와 활약은 참으로 눈부십니다. 이런 보물을 찾아내신 하느님의 눈이 경탄스러울 뿐입니다.
당시 16세기는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큰 위기를 겪을 때 였고, 중세 초에 베네딕도 성인을 보내 교회를 구했고, 12세기 경에는 성 프란치스코를 통해 교회를 구했고, 16세기에는 성 이냐시오를 통해 종교개혁의 격랑으로부터 교회를 살렸습니다. 16세기 이후 가톨릭교회에서 예수회의 활약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현재 눈부신 활약을 펼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예수회 출신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Ad Maiorem Dei Gloriam)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의 표어이자 예수회의 표어입니다. 예수회 전 회원이 이 단일 목표를 향해 매진합니다. 이냐시오 로욜라의 파란만장한 더불어의 여정, 회심의 여정을 보면 하느님의 선택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당시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세운 세가지 목표는 1.교육에 힘쓰고, 2.자주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개혁하고, 3.선교지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며 이단과 싸운다는 것이었고 이것은 예수회 활동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후방에는 ‘베네딕도 수도회’가 있다면, 세상 한복판 최전방에는 일당백의 최정예의 전사들의 수도회인 ‘예수회’가 자리하고 있었으니 교회를 위한 기막힌 상호보완의 관계였음에 감탄합니다.
역시 믿는 이들의 삶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성인 축일은 기념, 기억할뿐 아니라 우리 모두 살아 있는 교회의 보물이, 성인이 되어 살라고 있는 축일입니다.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으며, 인생 유일한 존재 의미이자 목표입니다.
성인들이 누구입니까? 보물중의 보물인, 유일한 참보물인 예수님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 만난 분들입니다.
우리 수도자들 역시 똑같습니다. 한두 번 찾았다, 만났다 하여 끝나는 참보물 주님이 아니라 매일 일상의 보물밭에서 찾아 만나야 합니다. 참보물을 주님을 만날 때 무지의 눈이, 마음의 눈이 열려 세상 진짜 보물들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이냐시오가 놀라운 보물이 된 것은 참보물 주님을 평생 찾고 만났기 때문입니다. 성인들의 이구동성의 고백은 다음일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참보물인 하느님과의 관계가 감동깊게 적나라하게 표현됩니다. 살아있는 참보물인 하느님과 날로 깊어지는 신뢰와 사랑의 우정관계가 주님을 닮은 살아 있는 참보물 예레미야 예언자로 만들었음을 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두 번째 고백 중 주님과 주고받는 진솔한 대화가 감동적입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 곧 이어 반전입니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주 만군의 하느님, 제가 당신의 것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
아, 또 반전입니다. 예언자의 회의, 고뇌, 아픔이 욥처럼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를 가득 채운 당신의 분노 때문에, 당신 손에 눌려 홀로 앉아 있습니다. 어찌하여 제 고통은 끝이 없고, 제 상처는 치유를 마다하고 깊어만 갑니까? 당신께서는 저에게 가짜 시냇물처럼, 믿을 수 없는 물처럼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최종적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네가 쓸모없는 말을 삼가고 값진 말을 하면, 너는 내 앞에 나의 대변인이 되리라. 내가 너를 요새의 청동 벽으로 만들어 주리라. 그들이 너를 대적하여 싸움을 걸겠지만, 너를 이겨내지 못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하고 건져낼 것이기 때문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신 우리의 영원한 살아 있는 참보물 임마누엘 예수님이 우리 모두 당신을 닮은 참보물이 되어 살게 합니다. 평생 보물찾기 여정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시니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내 힘이시여 당신을 찬양하오니, 주는 내 성채, 나 하느님, 내 사랑이시니이다.”(시편 59,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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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오늘 주님의 비유를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하늘나라는 보물입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 살만큼 대단한 보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습니다. 그래서 눈이 없는 사람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으라!”라는 시편이 생각납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좋은지, 우리가 맛보고 깨달았다면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그것을 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맛보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왜냐면 그것은 세상 단맛들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쓴맛 덕분에 천국 단맛을 찾게 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예레미야서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의 저주를 받는 덕분에 하느님 말씀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 그러나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과 사랑을 받을 수 없으니 방향을 하느님께 돌린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칭찬과 사랑을 받았다면 결코 하느님께 눈을 돌리지 않았을 겁니다. 한 사람에게서라도 칭찬과 사랑을 받았어도 하느님께 눈을 돌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레미야처럼 인간의 저주를 주님의 강복으로 바꿔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들 행진단이 요즘 그렇습니다. 비가 오면 비를 은총의 비로 바꿔 듣습니다. 은총으로 바꾸지 않으면 자기만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 그것에 빠지는 일도 많습니다. 어제는 북한강 길을 걸었는데 물안개가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때 물안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유행가가 제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다가 술에 취하듯 물안개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는 저를 보고는 슬펐고 그래서 이내 노래를 멈췄습니다.
그러면서 지혜서의 경구가 생각났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을 보는 기쁨에서 그것들을 신으로 생각하였다면 그 주님께서는 얼마나 훌륭하신지 그들은 알아야 한다. 아름다움을 만드신 분께서 그것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의 업적을 줄곧 주의 깊게 탐구하다가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도 아름다워 그 겉모양에 정신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찬을 받을 때 정신을 차려야 하고, 아름다움을 볼 때 정신 차려야 하며, 좋은 것들이 우리 눈앞에 있을 때 그것들이 보물을 숨기는 밭이기에 오히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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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마태13,44ㄱ)
<십자가 뒤에 숨겨진 보물!>
오늘 복음(마태13,44-46)은 '하늘 나라에 대한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마태13,44-46)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물과 좋은 진주를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산(buy)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땀을 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반한 사람들, 마음에 끌려 홀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누군가를 크게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인 나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니라면, 신앙 공동체가 아닌, 친목 공동체의 모습을 지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값진 보물이나 좋은 진주는 숨겨져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십자가 죽음 뒤에 숨겨져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려면 반드시 십자가를 건너가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외침(루카9,23 참조)'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예수회를 창설하신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나,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를 설립하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등 많은 성인들이 '십자가 체험(허무체험.밑바닥체험.실패체험)'을 통해서 하느님께로 나아갔습니다.
하느님께로 나아가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십자가 체험이 다시 태어남(부활)의 아주 중요한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된 것입니다.
십자가 뒤에 보물이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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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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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마태 13, 45)
사랑을 찾듯이
하늘 나라를
찾게된다.
찾는 자가
드디어
만나게되는
하늘 나라의
신비이다.
좋은 진주를
찾으며
우리는
진주를
닮아간다.
이제부터
우리를
좋은 진주로
살게하는
하늘 나라의
빛나는
복음이다.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한다.
우리에게는
좋은 진주가
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은 확연히
달라진다.
사랑으로
삶을
완성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하늘 나라는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진심으로
사랑하면
알게되는
하늘 나라의
신비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이 바로
진주(眞珠)이다.
소중한 것을
사랑하기에도
짧은 시간이다.
사랑은
가장 소중한
관계에 우리가
집중하는 것이다.
집중이
사랑의
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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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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