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보이스피싱 가담” 60대이상 피의자 올들어 1384명
고령층 피의자 작년보다 10% 늘어
알바 구인광고에 속아 현금 수거책
의심 피하려 처음엔 사무업무 시켜
“몰랐다” 주장해도 무혐의 어려워
“늘그막에 용돈벌이 삼아 일했을 뿐인데 범죄자가 되다니…. 참담할 뿐입니다.”
서울 강남구에 사는 권모 씨(66)는 29일 동아일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은퇴 후 용돈이라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렸던 것”이라며 “올 9월 말 시장조사업체라는 곳에서 연락이 왔을 때만 해도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에 가담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돌이켰다.
○ “처음에 상권분석 맡기다 본색 드러내”
자신을 시장조사업체 직원이라고 밝힌 남성은 권 씨에게 “인턴으로 채용할 테니 상권 분석 업무를 해 달라”며 “출근할 필요 없이 텔레그램 애플리케이션(앱)을 깔고 이를 통해 연락하면 된다”고 했다. 제안을 수락한 권 씨는 지난달 초부터 한동안 서류를 출력해 배달하고, 수도권 빌라 주변 환경을 분석해 리포트를 제출하는 일을 맡았다. 남성을 만나거나 사무실로 찾아갈 일은 없었고 연락은 주로 텔레그램으로 했다.
2주가량 지나자 이 남성은 권 씨에게 ‘정직원’ 자리를 제안하며 “정상적 은행 거래가 불가능한 신용불량자 고객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회사 계좌로 입금해 달라”고 했다. 돈 거래를 맡길 정도로 신용을 얻었다고 생각한 권 씨는 의심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권 씨는 지난달 중순부터 업체가 시키는 대로 4번에 걸쳐 3450만 원을 받은 후 업체 측에 전달했다. 그런데 이달 1일 현금 1500만 원을 업체 계좌로 송금하던 중 경찰이 다가왔다. 그제야 권 씨는 보이스피싱 피해자로부터 현금을 받아 조직에 전달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걸 알게 됐다.
권 씨는 “체포되는 순간에도 경찰에게 ‘이것만 송금하고 얘기하자’고 했을 정도로 순진했다”며 “보이스피싱은 검찰이나 금융감독원을 사칭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후회가 크다”고 토로했다.
○ 피싱 ‘피해자’에서 ‘피의자’ 된 고령층
고령층은 전통적으로 보이스피싱 범죄의 피해자로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에는 자신도 모르게 보이스피싱에 가담했다가 경찰에 붙잡히는 ‘피의자’ 중 고령층이 늘고 있다.
경찰청의 ‘보이스피싱 피의자 연령별 검거 현황’에 따르면 올 1∼10월 보이스피싱 전체 피의자는 2만2134명으로 지난해 2만2045명보다 0.4% 늘었다. 그런데 같은 기간 60대 이상 피의자는 1256명에서 1384명으로 10.2% 증가했다.
보이스피싱 조직들은 그동안 돈이 궁한 젊은층을 대상으로 현금 수거책을 모집하곤 했다. 하지만 젊은층의 경각심이 커지자 상대적으로 속이기 쉬운 장년층이나 고령층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방과 후 교사로 일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일자리를 잃은 A 씨(52)도 최근 보이스피싱에 가담한 혐의로 붙잡혀 재판을 받고 있다. 그는 지난해 고용노동부가 운영하는 취업포털에 이력서를 올렸다가 “거래처에 현금을 전달하는 단순 업무”라는 말에 속아 보이스피싱 현금 수거책으로 일했다. A 씨는 23일 동아일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범죄에 연루됐다는 사실이 괴로워 자녀들에겐 알리지도 못했다”며 한숨을 쉬었다.
○ 경찰 “현금 수거는 무조건 보이스피싱”
체포된 후 피의자가 몰랐다고 주장해도 처벌을 피하긴 쉽지 않다.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 대부분이 몰랐다고 진술하기 때문에 정말 몰랐다는 걸 입증하지 못하면 처벌받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과거에는 범죄 조직이 ‘고액 알바’ 등의 문구를 사용했지만 최근에는 일반 사무직 구인광고처럼 위장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취업 경험이 많지 않은 고령층은 구분하기 어렵다. 다른 경찰 관계자는 “현금을 수거하는 아르바이트는 모두 피싱이라고 보면 된다”고 강조했다.
전혜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