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헌팅 (The Haunting)
1963년 미국영화
감독 : 로버트 와이즈
원작 : 셜리 잭슨의 "The Haunting of Hill House"
출연 : 줄리 해리스, 클레어 블룸, 리처드 존슨
러스 탬블린, 로이스 맥스웰, 페이 컴튼
유령의 집을 소재로 한 영화의 원조는 정확히 어느 작품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가 아는 가장 오래된 작품은 루이스 알렌 감독의 1944년 작품 '유령의 집(The Uninvited)' 입니다. 제법 괜찮은 영화였죠. 요즘 '컨저링'으로 대표되는 장르이고 '디 아더스' '아미타빌 호러 시리즈' 등 여러 영화들이 등장했지요. '유령의 집' 이후로 이 장르에서 대표적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이 바로 명장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1963년 작품 '더 헌팅' 입니다.
사실 '컨저링'을 비롯해서 후기에 만든 이 장르들은 너무 요란스럽고 비현실적입니다. 그래서 그냥 공포를 자아내기 위한 요란스런 귀신영화로서의 역할만 할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존 '유령의 집'에서 보여주었던 로맨스, 심리 등을 잘 활용한 유사한 분위기의 수작이 바로 '더 헌팅'인 것입니다. 그 '더 헌팅'에 대한 소개를 찬찬히 해보겠습니다.
이런 유형의 영화는 어느 정도 현실감과 판타지 느낌이 적절히 가미되어야 더 재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공포물은 원한에 사무친 머리 풀어헤친 귀신이 등장하여 상당히 강력한 타격을 사람들에게 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귀신 혹은 유령 이라는 존재가 실제로 있다면 매우 가련하고 나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이승을 떠나서 이제 더 이상 이승의 일에 간섭할 수도 역할을 할 수도 없는 존재이고 육체가 아닌 영혼의 존재이고, 즉 실존하는 인간도 아니고 저승에 간 존재도 아닌 떠도는 희미한 존재가 인간이 상상하는 유령입니다. 그래서 '유령의 집'이나 '더 헌팅' 같은 잘 만든 귀신들린 집에 대한 영화를 보면 그러한 유령의 공포에 대한 어느 정도의 현실감과 인간의 심리가 매우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유령이 생생하게 사람 앞에 실체적 모습으로 나타나서 묘기도 부리고 물리적 공격도 가하고 하는 '황당한' 내용 자체가 일단 없지요.
'더 헌팅'은 오프닝의 긴 나레이션으로 귀신들린 집 힐 하우스에 대한 내력을 설명합니다. 9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벌어진 그 집을 구매한 일가의 비극이 차례로 설명됩니다. 그리고 집을 상속받았던 하녀의 비극까지. 그리고 20세기 현재(60년대가 되겠죠)가 되면서 그 귀신들린 집에 대한 학자적 호기심으로 그 집에서의 삶을 체험해 보려는 과학자와 그가 초대한 몇 사람들이 벌이는 내용으로 전개가 됩니다.
힐 하우스에 모인 사람은 총 4명으로 아주 간소화 시켰습니다. 보통 10명 가까이 모이거나 한 가족이 모이는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존 마크웨이 박사(리처드 존슨), 노처녀인 엘레노어(줄리 해리스), 레즈비언인 시어도라(클레어 블룸), 그리고 힐 하우스 소유주의 조카인 젊은 청년 루크(러스 탬블린) 뿐입니다. 이들 4명의 이야기지만 주로 엘레노어의 심리에 이야기를 맞추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로맨스, 공포, 히스테리, 죄책감, 집착 등 여러 심리적 상황을 다 담아내고 있지요.
엘레노어는 별 매력은 없는 노처녀인데 11년 간 병든 어머니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고생하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두 달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언니 부부의 집에 사실상 얹혀살고 있는데 결혼도, 자유도 없이 젊은 청춘을 흘려보낸 것입니다. 언니 부부의 집과 물건에 대해서 절반의 소유권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는 뭔가 죄책감이 있으며 또한 어머니가 빼앗은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도 있습니다. 즉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여성입니다. 그녀는 마크웨이 박사의 초대에 정말 오랜만에 얻는 휴가라는 기쁨에 언니 부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귀신들린 집 체험 프로젝트에 응합니다.
루크에 대한 이야기나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고 시어도어는 엘레노어와 친구가 되어주고 돌봐주려고 하는 쿨하고 세련된 여성인데 영화에서 레즈비언이라는 직접적 언급은 나오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랬다고 합니다. 처음에 시어도어가 자기 집에서 여친과 헤어지는 장면을 보여주려다가 결국 취소했다고 하네요. 노골적인 보여줌은 애초에 꼭꼭 지양하려고 한 영화지요. 다만 시어도어가 엘레노어와의 침실 대화나 행동 등을 통해서 미약한 암시는 하고 있습니다. 특히 결혼을 안했다고 하면서 자기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 '나는'이 아닌 '우리는' 이라는 표현을 하고. 수수하고 매력없는 엘레노어와는 달리 시어도어는 꽤 멋스럽고 세련된 것으로 설정하고 별도의 의상 담당자가 스탭에 배정되기도 했습니다.
자, 그럼 이 거대하고 음산한 유령의 집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질까요. 불과 며칠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머리 푼 귀신이 나타나서 으스스하게 만드는 건 당연히 아닙니다. 영화는 교묘하게도 물리적인 자연현상과 심령과학적인 초자연적 현상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듭니다. 지나치게 비과학적이지도 않고 지나치게 가벼운 물리학 정도로 치부할 상황도 아니지요. 쿵쾅거리는 소리, 바람소리, 발자국 소리, 집안이나 문의 흔들림 등을 이용한 기괴하고 음산함을 묘사하지만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뭔가를 보여주려고 하진 않습니다. 이미 이 음산하고 외진 지역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고딕풍의 저택 자체가 어느 정도 공포스러운 배경을 설정하고 있고, 동상이나 기물, 닫혀진 문이나 창, 커튼 등을 활용한 음산함도 잘 설정하고 있지요. 특히 요철처럼 휘어지듯 보이는 문은 특스렌즈 촬영이나 특수 목재의 제작 등을 통해서 그럴싸하게 표현합니다.
이 집에서 귀신이 진짜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사실 영화가 흘러가면서 크게 의미가 없어지는 느낌입니다. 귀신보다는 여러가지 혼란스런 상황과 심리상태가 된 엘레노어의 불안감이 훨씬 위태로워 보이니까요. 조금씩 엘레노어의 심리를 나레이션 형식으로 보여주면서 관객은 귀신보다 엘레노어의 행동에 대한 불안감으로 영화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리고 엘레노어가 마크웨이 박사를 사모하고 그와의 행복을 꿈꾸는 것을 노골화 시키면서 그런 '허상의 로맨스'도 잘 이용하고 있지요. 이런 상황은 마크웨이 박사의 부인인 그레이스(로이스 맥스웰)가 등장하면서 더욱 긴박감이 더해집니다.
귀신이 무섭거나 위험한 이유는 귀신이 그래서가 아니라 인간의 공포 때문이다 라는 것도 대사로 슬쩍 흘리는데 굉장히 공감되는 부분입니다. 유령이나 귀신은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타격을 가하지는 못해도 그 존재 자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인간이 미쳐가거나 위험한 행동을 하거나 사고가 날 수 있지요. 그런 심리를 엘레노어라는 여주인공을 통해서 잘 보여준 작품입니다. 결국 귀신, 유령 따위도 인간의 건강하지 못한 심리나 영적인 부분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니까요. 건강하지 못하고 불안정하고 히스테리한 심리가 바로 유령이며 위험한 부분입니다. 즉 귀신을 가장 무력하게 만드는 인간은 바로 그런 것 자체에 무관심한 인간인 것이죠.
사실상 '에덴의 동쪽' 만으로 기억되는 배우 줄리 해리스가 매력없고 히스테리한 주인공 엘레노어를 연기하는데 줄리 해리스는 촬영기간동안 클레어 블룸에게 냉담하게 대하고 나머지 주연 3인(러스 탬블린, 리처드 존슨까지)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도 받았고, 그런데 그게 이 역할에 좀 더 충실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랬다고 하네요. 실질적으로 극중 역할과 유사하게 행동한 것입니다. 중년으로 접어드는 평범한 여배우라 할 수 있는 인물이 이름있는 명감독의 영화에 주연으로 발탁되면서 꽤 연기의 의욕을 보인 것입니다. '대해적' '라임라이트' '카라마조프의 형제'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알렉산더 대왕' 등 50년대에 영국, 미국을 오가면 제법 활약을 했던 클레어 블룸이 세련된 모습으로 등장하고 우리나라에는 '라스트 콘서트'를 통해서 감성연기를 보인 리처드 존슨이 마크웨이 박사를 연기합니다. 아역 출신 러스 탬블인이 루크 역인데 당시 29세 였음에도 '7인의 신부' '페이톤 플레이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보다 훨씬 어른처럼 자란(?) 느낌을 줍니다. 007의 머니페니 역을 가장 오래한 배우 로이스 맥스웰은 단역 정도 비중인데 그럼에도 꽤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유령의 집(44)' '공포의 대저택(61)' '더 헌팅(61)' 등은 귀신들린 집에 대한 소재를 꽤 절제적이고 수준있게 묘사한 고급 공포영화입니다. 요즘 이런 영화들 대신 너무 노골적으로 요란하고 귀신 혹은 괴물 같은 존재의 가해 위주로 다루어지는 영화들만 많이 남발되는 게 아쉬운 부분입니다. 하긴 괴물스런 존재의 직접적 묘사없이 영화를 흥미롭게 끌고가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런 면에서 '더 헌팅'은 이런 소재 영화 중 손꼽힐 수작입니다.
평점 : ★★★☆ (4개 만점)
ps1 : 마로니에 북스의 '죽기전에 꼭 봐야 할 1001편의 영화'에 포함된 작품입니다.
ps2 : 엘레노어가 '내 엄마는....' 이라는 대사를 사람들에게 굉장히 여러 번 하는데 뒷말을 꺼내지 않습니다. 이런 행동으로 무언가 엄마에 대한 죄책감을 갖고 있다는 걸 암시하죠. 나중에 박사에게 비로소 털어놓지요.
ps3 : 귀신이 무서운 게 아니라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두려움에 젖어있는 사람이 훨씬 무서운 겁니다. 이런게 결국 죄의식, 집착, 양심 등에 의해서 부풀어지는 히스테리 현상이고 결국 크게 사고를 칠 수도 있으니까요. 이 영화에서 그런 점을 정말 절묘하게 잘 묘사했습니다.
ps4 :로버트 와이즈 감독은 평생 두 번의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는데 '웨스트 사이트 스토리(61)'과 '사운드 오브 뮤직(65)'을 통해서 입니다. '더 헌팅'이 1963년 작품이니 가장 절정기에 연출한 작품인 것입니다. 칼라 대작 뮤지컬 사이에 흑백 고딕 호러물 같은 영화를 연출한 것이죠.
ps5 : 1999년 리암 니슨 주연으로 리메이크 되었는데 참담할 정도의 혹평을 받았습니다.
ps6 : 약간 유사 영화로 빈센트 프라이스 주연의 '심야의 별장(House on Haunted Hill, 59년) 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그 영화는 국내에 개봉되었습니다.
[출처] 더 헌팅 (The Haunting, 63년) 귀신들린 집 영화의 수작|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