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율곡 선생을 모르는 우리 나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율곡 선생이 독실한 불교 신도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는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죽고 아버지가 재혼을 하자 금강산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그런 사유로 철저한 排佛인 조선에서 벼슬길이 순탄하지 않았답니다.
서인인 그는 다른 당파인 동인과 남인의 집중 공격을 받았답니다
특히 허목(허미수), 윤선도(오우가로 유명)는 율곡을 "학자의 탈을 쓴 중"이라는 폭언까지 합니다
"봉이 김선달"운운한 야당의원 비슷하게 폭언을 합니다.
그 단초는 율곡선생이 지은 "김시습전"때문이랍니다
율곡 선생은 김시습을 "백대의 스승"이라며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리고 숨기 전 김시습이 소리친것을 소개하였답니다
" 이 착한 백성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 못된 벼슬아치들 아래서 저 고생을 하는가!"
김시습은 기력이 다해 죽어 가면서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하면서 저렇게 소리쳤답니다.
수앙대군이 계유정난으로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후 왕과 한명회를 비롯한 못된
벼슬아치들이 성삼문 등 사육신을 죽이는 등 폭정이 극에 달하였습니다.이와 같은 세태를
김시습을 통해 고발하니 율곡은 당대의 벼슬아치들에게 얼마나 미움을 받았겠습니까?
아무튼 수박 겉 핡기지만 조금 김시습을 볼까요!
金時習! 이름부터 볼까요.
그 아버지가 논어의 첫 구절에서 따서 지었답니다.다들 잘 압니다.논어의 첫 구절이요.
"學而'時習'之...배우고 때로 익히니 ..."그러면서 평생을 "心儒踐佛"로 살았답니다
즉 "마음은 공자요 행실은 부처"로 살았다고 율곡 선생은 김시습을 극찬합니다.
김시습이 신동으로 소문이 나자 다섯 살인 그를 불러 테스트해 보았답니다. 그의 천재성에 감탄한
세종이 그의 호를 지어 주었답니다. 호가 "五歲"였답니다.그 후 김시습은 "김오세"로 한 동안
불렸답니다. 그는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삼각산에서 사흘간 통곡을 한 뒤 공부하던 모든 책을 불 태우고 하산합니다.저잣거리에 버려진
사육신의 시신을 전부 거두어 묻어 주었답니다.무서워서 아무도 근처에도 못 가는 것을 혼자서
사지가 찢어진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 주었답니다.
그 것이 바로 지금 노량진의 사육신 사당입니다.
그 후 김시습은 스님이 됩니다.법명은 설잠입니다.
천하를 떠 돌다 경주 금오산에 정착하다가 부여 무량사에서 열반합니다.
김시습이 평생 가장 혐오한 것이 정치하는 인간들의 탐욕과 불의였답니다.
당시 한명회,홍윤성, 유자광 등 공신들의 횡포는 눈뜨고 못 볼 지경이었답니다.사방의 비난에도
세조는 공신이라며 그들을 감싼 일은 아주 많답니다.
김시습이 유일하게 친밀감을 보인 관리는 徐居正이었답니다.
김시습은 자기보다 열 다섯 연상이요 벼슬이 당상관을 찾아가서는 "방에 누워서 양다리를 벽에 세우고
조정과 벼슬아치들을 비난했답니다.그런데도 서거정은 김시습을 탓하지 않았답니다.하여 서거정이
궁지에 몰리기도 했답니다.그러나, 서거정이 워낙 바른 사람이어서 화를 면했답니다
율곡이 김시습을 " 百代의 스승"이라 칭한 것을 보면서 매월당 김시습을 조명해 봅니다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엘프리드 마셜이 케임브리지대학 교수 취임사에서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 나는 가슴이 따뜻하고 머리가 차거운 제자를 가르치러 왔다"고
요즈음 매튜 조셉슨이 말한 "The Robber Barons,강도 같은 귀족들" 과 여의도 나리들이 오버랩되어
입안이 씁쓸합니다.그런데, 익명의 독지가가 630억원 되는 거액의 재산을 고려대에 기부했다는 뉴스!
그래도 살만한 세상입니다! (펌글)
첫댓글 전혀몰랐던 야사같은
이바구 인지~
펙트 인지는 몰라도
꽤 구수합니다!~^^
오세라는 야그까지도
처음 접해보는~
현세의 넝마구리 같은
일천한 정치꾼들~
차라리 야바위꾼은
사기라도 잘치지~
이런 어설픈 사기꾼들
잡다리 많은 협잡구리
야당무리들 ~
아!~
대한민국의 운명이
우찌 되려고
이리도 정치시련이
난무하는지~~~
한동안 김시습에 매료되어 신행하면서
매월당정자도 일부러
산행하고 이제는 둘래길을 도니 가보지를 못하네
요번엔 문인이자 시인인 서거정의
자취가 있는 둘래길을 간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