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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엽기 혹은 진실..(연예인 과거사진) 원문보기 글쓴이: 마성의 여동생
<이병우, 우는 달 VER.1>
적멸/정한용
스무 해 전에 보낸 편지에
스무 해 지나 메일로 답이왔다
알 수 없는 일, 겨우겨우
가는 목숨을 어찌어찌 이어오던 난 화분에
꽃이 달렸다
모든 목숨은 물같은 그리움이거나
빈집을 흐르는 울림이거나
상처의 흔적이거나
아직 우리는 말하지 않았다/이수익
나는 강물에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강물도 내게 한 마디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본 것은
순간의 시간, 시간이 뿌리고 가는 떨리는 흔적,
흔적이 소멸하는 풍경......일 뿐이다
마침내 내가 죽고, 강물이 저 바닥까지 마르고,
그리고 또 한참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혹시, 우리가 서로에게 하려고 했던 말이 어렴풋이
하나, 둘 떠오를지 모른다 그때까지는
우리는 서로 잘 모르면서, 그러면서도 서로
잘 아는 척, 헛된 눈빛과 수인사를 주고받으며
그림자처럼 쉽게 스쳐 지나갈 것이다 우리는
아직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슬퍼할 권리/노혜경
슬퍼할 권리를 되찾고 싶어.
잔잔하게 눈물 흘릴 권리 하며,
많은 위로를 받으며
흐느껴 울 권리,
핑핑 코를 풀어대며 통곡할 권리.
지나친 욕심일까
- 그러나 울어 보지 못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한 번도 소리내어 울지 못하고
아니야 울고 싶은 마음조차 먹지 못하고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마련하여 눈물나는 영화를 보러 가서는
남의 슬픔을 빙자하여 실컷실컷 울고 오는 추석날의 기쁨.
고작 남의 울음에 위탁한 울음.
하도 오래 살았더니
울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그러니 누가 나를 좀 안아 다오.
그 가슴을 가리개삼아
남의 눈들을 숨기고
죽은 듯이 좀 울어 보게.
화몽(花夢)/이민화
오솔길 빠져나온 한 소녀가
꽃바구니 안고 언덕을 내려온다
동구 밖에서 지켜보던 선머슴 같은 햇살
산그늘 머금은 소녀 입술이 하도 고와
차마 맨얼굴로 바라볼 수 없다며
물에구룸에 자신의 몸, 반을 감춘다
소녀는 자꾸만 무언가 찾으려는 듯
더운 바람이 가슴을 꺼내는 줄도 모르고
불혹의 꽃잎을 따기 시작한다
작은 신발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구니는 쑥부쟁이 울음소리를 낸다
물에구룸은 바구니에 따닥따닥 붙은
햇살의 여진을 모두 찾아내어
소녀의 두 눈과 바꿔치기 한다
갑자기 흩어졌던 수많은 길이
소녀의 기억을 휘휘 젓는다 콩닥콩닥
뜨거운 꽃잎 소리가 길섶마다
오불꼬불 뻗어나간다
상처 가지고 노는 일로 헉헉대던
옛사랑의 입도 오불꼬불 뻗어나간다
꺾여 되돌아온 바람처럼 얼룩진 기억이
민무늬팬티에 수천 꽃으로 피어난다
발끝까지 번진 짜릿한 꽃물
오래도록 선머슴과 노닌다
물의 상처/윤준경
늦은 밤 냇가를 거닐다보면
하염없이 흐느끼는 물의 울음소리 들린다
차르륵 차르륵 제 살갗을 찢으며
낮게 엎드려 우는 소리
저 맑은 물에 누가 상처를 내었나
누가 돌을 던져 물을 울게 했나
풀잎들 선 채로 잠이 깊고
별빛 자부룩히 물 위에 떠오를 때
혼자서 냇가를 거닐다보면
내 속의 상처 하나 둘
아물어 간다
금간 가슴을 살살 쓸어주며
흘러가는 물
알 것 같다, 물이 우는 이유
누군가의 상처를 씻어주다 보면
아파서
물은
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하사탕이 먹고 싶다/박명숙
1.
나 장가 갈 거야
그녀는 눈앞이 깜깜하다
삼십대 후반이 넘은 여자한테는 안 갈 거야
불혹의 그녀는 눈앞이 더 깜깜해진다
전처 또래 쉰 여자들에겐 질렸거든
지천명의 그녀는 머리속이 어지럽다
갑자기 박하사탕을 먹고 싶다
화안한 이별의 맛
그만 일어서야지
빈 찻잔을 드는, 병원에서 갓 퇴원한, 쉰 일곱 살 먹은
그의 약지에 금반지가 반짝인다(벌써?)
입원해 있을 때 그 여자가 와서 끼워주고 갔어.
올해 서른 다섯이야.
(그러나 그는 지상에서 두 번 장가들지 못한다
참을 수 없는 세상이 세상 모르는 그의 숨통을 앞질러 끊어버린다)
2.
이제 너에게 시집가도 돼?
이순의 그녀가 속삭인다.
왜 하필 나지?
죽은 그가 눈을 부릅뜬다.
죽어서 아주 못쓰게 된 그의
옆구리를 끼고
하루쯤 일박하고 싶은
불혹의 지천명의 이순의 그녀가
어금니 깊숙이 박하사탕을 깨문다.
화안한 이별의 취기
와작와작와작, 그가 부서진다.
파란 대문/서규정
가버린 것들은 다만 돌아오지 않을 뿐이다
길가에 콩 팥도, 콩 날 때 콩 나고 팥 날 때 팥 나던 것을
헤 지고 구멍 난 런닝구 같은 마음이 벗겨지질 않아
시방 이 몸통 밀룽밀룽 흔들어 어느 난전에나 가 닿겠는가
구르고 기어서 구례화엄사 문턱까지 왔을 때는
누구에겐가 펼쳐 보이려다 금방 덮고 싶은 욕망이란 그 보따리
땅에서 주워든 건 땅에 돌려주고
허공에서 잡아든 건 허공에 돌려주라고
대나무는 속을 다 비우고 저리 곧추섰다
장대비 한 울음을 소록소록 껴안아 받는 것을
사랑아 그대 흘러가 돌아오지 않을 뿐이라도
지리산 계곡 물을 받아 돌리던 바위도
물의 숨을 골라주려고 파란 이끼를 저토록 오래 품었을 것이다
천년에 한번 만난 꽃잎도 그 다음 천년에 두어 피어나라고
멀리멀리 띄워 보냈을 것이다
아름다운 저 두 손/신경림
소녀의 속옷을 들치고
부두에서 검은 물건을 나르고
저 두 손이
뒷골목에서는 열병도 앓고
죽음과도 맞닥뜨리고
오랜 방황 뒤에는
아내를 얻어 아이를
낳고 기르고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나 이렇게 살았노라
높이 치켜들렸다가는
슬그머니 엉덩이 뒤에 가 숨는
저 두 손이
별이 뜨는 언덕에 꽃도 가꾸고
지상에 가득 나무를 심고
부끄러움을 심고
아름다움을 심고
부끄러운 저 두 손이
아름다운 저 두 손이
상상임신/김금용
발길질 하지 마, 속이 시끄럽잖아
산에 가면 산귀신이 물에 들면
물귀신이 새벽까지 달려들어서
내내 울렁거려 전화 한 통화 하겠다고
천장을 뚫고 영사관 위층으로 올라간 탈북자 아저씨처럼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노동 개조소에서 사내아이를 낳고
이십 년째 남편 소식을 기다렸다는 조선 동포 여인처럼
푸른 비상구를 매일 들여다보며
창틈으로 새드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며 문을 뜯어버릴까,
비상구 푸른 등에 차라리 돌이나 던져버리고 도망칠까,
오늘 내일 다시 내일, 모의에 모의를 거듭하면서도
꼼짝 못하는 나는 햄릿인가 나무늘보인가
몇 날 며칠을 빛 한 점 안 드는동굴에 주저앉아 물만 마시고도
차오르는 가스 때문에 질식할 것 같아 허전해진 자궁이 아기를 찾는 것일까
헛구역질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보름달 하나 냉큼 삼키고 싶은 것일까
만삭의 배를 자랑스럽게 드러낸 브라질 여인이 거리에서 키스를 퍼붓고 있을 때,
치마 아래로 넘쳐흐르는 양수는 양은 냄비 뚜껑을 들썩이며 끓는 라면처럼
고통과 환희의 합창이었어 숨소리, 살아있는 숨소리가 그리워
귀를 대봐 제 목소리를 내며 저마다 와글와글 새 것으로 움트는 소리,
분주한 발자국 통통 내딛는 소리, 어쩌나 저들이 다 일어나 온 천지로 기어 나오면
발바닥 간지러워 걸을 수 없을 텐데 어쩌나 푹푹 신발 밑창을 찌르고 올라올
저 억세고도 눈물겨운 숨쉬기를, 나갈 수가 없어 걸을 적마다
총알 채우며 일제히 내게 조준할 저 숨 막히는 정적,
쉿, 제발 발길질 하지마, 속이 시끄럽잖아
살인의 추억/정한용
1932년 12월 13일, 난징의 남동쪽 싱 루 카오 5번가
삼십여 명의 일본군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문을 열어준 주인을 죽였다.
왜 죽이느냐 소리치는 안주인에게도 총을 쏘았다.
이 집에 세 들어 살던 샤는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 애원했다, 군인들은 샤를 죽였다.
그리고 샤의 부인을 강간한 다음 대검으로 찌른 뒤
성기에 향수병을 꽂아 넣었다.
곁에서 울던 아기도 덤으로 찔러 죽였다.
군인들은 옆방에서 샤의 부모와 네 딸을 찾아냈다.
두 노인을 우선 총으로 쏘았다.
이어 열여섯 열넷, 두 딸을 강간한 후 잔혹하게 죽였다.
담요 밑에 숨어 있던 여덟 살 딸은 대검에 찔렸다.
막내딸은 담요 밑에서 겨우
죽음을 면하는 대신 뇌손상을 입었다.
집을 나서기 전 군인들은
깔끔하게 마지막을 장식하는 기념으로
떨고 있던 안집 두 아이를 데려왔다.
큰 아이는 대검으로 찌르고, 작은 아이는 목을 잘랐다.
이 집의 유일한 생존자인 여덟 살, 네 살 두 아이
엄마 시체 곁에서 쌀 부스러기를 먹으며 보름을 버텼다.
국제위원회에서 이 집을 찾았을 때
탁자 위에는 강간당한 채 죽어 있는 어린 소녀와
아직 덜 마른 피가 흥건했다.
하나님도 부처님도 거기에는 없었다.
후박나무의 장례/김경윤
양지쪽보다는 그늘 쪽으로 마음이 기울면서부터
그녀를 오래 마음속에 두고 살았다
종갓집 며느리처럼 후덕한 잎사귀와 속 깊은
그늘을 가진 후박
아침저녁으로 그녀 곁을 지날 때마다
몇 번인가 말을 걸어보려고 애를 썼지만
끝내 침묵의 문을 열지는 못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올 무렵
나무 그늘 아래서 깔깔대던 여학생들처럼
그녀는 얼굴 가득 노란 웃음꽃을 터뜨렸다
나는 처음으로 나무들도 말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섰던 자리에 그늘이 사라지고
빛방석 같은 그루터기만 둥그렇게 남았다
그늘보다 빛을 쫓는 누군가가 그녀를 참수해버렸다
이 지상에서 그녀가 거느렸던 그늘과 정들었던 눈빛들
문신처럼 나이테로 새겨두고 순명하던 날,
그늘이 사라진 교정에서 나는 보았느니
쟁쟁한 햇살 아래서 키 작은 단풍나무가
눈물처럼 붉은 이파리 몇 잎 떨구고 서 있는 것을,
서녘 하늘에 노을빛 만장이 걸리고
어둠 속으로 구름의 장례객들이 떠나갈 즈음
유언처럼 개밥바라기 별빛이 오롯이 빛나는 것을
능소화/강세화
한창 나이에 죽은 친구 생각이 나면
소백산 구인사 큰법당 내려오는 계단가에
애절한 사랑을 변변히 내색도 못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피어있는 꽃을 보러가자
남몰래 만났다가 아쉽게 헤어지고
가까이 아득히 생생한 기척을 좇으며
한 생애 넘보다 주저앉은 형국으로
뚝 떨어져 빤하게 승천하는 꽃이여
별나게 곰곰이 그리움이 앞서서
대낮을 골라 보란듯이 지면서
훨씬 가까이 잇대고 싶은 사람을 위하여
나도 어쩌면 이 쯤에서 그러고만 싶으니
골다공증/이갑노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날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너무 뚱뚱해서 하늘로 날아갈 수 있을지
어리석은 마음에 걱정이 되었습니다.
새들은 뼛속에 공기주머니가 있어 몸을 가볍게 하거나 척박한
공기 중에서는 공기주머니에 있는 공기로 숨을 쉰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중풍에다 골다공증을 앓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넘어져도 뼈가 부러지고 새가 우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소리를 자주 하시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새가 되려는지 등은 활처럼 굽어지고
다리는 북어처럼 마르셨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새처럼 뼛속에 공기주머니를 만들려고 뛰어다녔습니다.
노력해도 생기지 않던 공기 주머니가 이제 생기려는지
뼛속에서 바람이 일고 소낙비가 거칠게 내리기도 합니다.
돌 속에 갇혀 있던 백로들이 어디론가 훨훨 날아갑니다.
누구나 때가 되면 한 마리 새가 되어 날아가나 봅니다.
몸속에 공기주머니를 만들어…
팔월 한낮 선풍기에서 나오는 바람을 맛나게 먹고 있습니다.
아, 하늘에 있는 새들은 지상에서 숨겨온 동전 한 닢도 너무
무거울 거야.
그런 날 있다/백무산
생각이 아뜩해지는 날이 있다
노동에 지친 몸을 누이고서도
창에 달빛이 들어서인지
잠 못 들어 뒤척이노라니
이불 더듬듯이 살아온 날들 더듬노라니
달빛처럼 실체도 없이 아뜩해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언젠가 아침 해 다시 못 볼 저녁에 누워
살아온 날들 계량이라도 할 건가
대차대조라도 할 건가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삶이란 실체 없는 말잔치였던가
내 노동은 비를 피할 기왓장 하나도 못되고
말로 지은 집 흔적도 없고
삶이란 외로움에 쫓긴 나머지
자신의 빈 그림자 밟기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詩,
소개하고 싶은 시는 많은데, 각 시 분위기와 약간이라도 맞는 사진을 찾아 올리려고 하니 이미지가 턱없이 부족하네요. 중복되어도 양해 바랍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슬퍼할 권리 와 물의 상처가 저는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