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과 자유에 이르는 길
대담 : 이 향봉 스님
불교도들의 근기가 제각기 다르나
필경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곳은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자각(自覺)의 길이다.
해탈과 자유에 이르는 길
향봉스님=큰스님을 뵙기 위해 왔습니다. 큰스님께서 지난 종정(宗正) 추대식에도 참석치 않으시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법어만 내보이시어 세상이 요란할 만큼 한때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제 자신은 부끄럽게도 월정사 사건과 관련되어 원주교도소에서 90일 동안 안거하고 나왔는데도 오도송(悟道頌)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큰스님께서 저 같은 길 잃은 미아(迷兒)들을 위해 생명의 말씀을 부어주십시오.
宗正(큰스님)=그래, 건강은 괜찮나? 내가 지금 묻고 있는 것은 육체적인 건강도 염려되지만 정신적인 건강이 더욱 염려되어 하는 말이다.
네가 교도소에 있을 때는 창살이라는 물질적인 감옥에 갇혀 육체적인 건강이 허물어졌지만 이제는 불교신문의 편집국장이라는 직책에 갇혀 정신적인 건강이 허물어지고 있으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무릇 구도자는 방하착(放下着)할 줄 알아야 하며 한 생각을 접어 두며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다 방하착(放下着=일체를 놓아버림) 하고 가야산에 와서 살았으면 좋겠구나.
향봉스님=자신을 잊고 남을 위해 살려 해도 언제나 생각이 앞설 뿐 행동이 따라주질 않습니다. 자기를 잊어버릴 수 있는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宗正(큰스님)=자기는 아주 잊어버리고 오직 일체 중생을 위하여서만 살아야 한다.영원에서 영원이 다하도록.
법성이 무진하므로 법계가 무한하며 법계가 무한하므로 시분(時分)이 무량하다. 시분이 무량하므로 중생이 무변하며 중생이 무변하므로 자비가 무궁하다.
이렇듯 중중무진(重重無盡)한 법계연기(法界緣起)의 대원리는 화엄정경(華嚴正經)에 원만구족하였으니, 이는 우주의 근본법칙이며 불타(佛陀)의 구경교칙(究竟敎勅)이다. 광대무변한 법성의 지혜와 자비로써 무진법계의 무량중생을 위하여 무한시겁이 다하도록 무애자재한 대활동을 하되 추호의 피로도, 염의(厭意)도 찾아 볼 수 없는 성행(聖行)으로 접근키 위해서는 자기를 모두 잊어야 한다.
자기를 잊고 일체중생을 위하여 살아갈 때 시방진계(十方塵界)가 극락정토 아님이 없으며 모든 중생이 묘각여래(妙覺如來) 아님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바세계의 모든 모순과 투쟁은 영원히 사라지고 평화와 자유로써 장엄한 대낙원의 무한한 광명이 항상 우주를 비취 널리 싸고 있을 것이다.
현현묘묘(玄玄妙妙)한 이 진리를 이름하여 불가사의 해탈경계라고 한다. 삼라만상이 일초일목이 다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다 해탈경계니 참으로 불가사의 중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오로지 이론에 있지 않고 실천에 있는 것이다.뜻만 앞서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것은 구두선(口頭禪)일 뿐이요, 통막대기 일 뿐이다.
향봉스님=「진인(眞人)만이 참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라고 설파 한 사람은 장자(莊子)입니다.
그는 이 주장을 더욱 확대하여
「바른 사람이 사악한 법(法)을 말하면 사악한 법까지도 바르게 되고 사악한 사람이 바른 법을 주장하는 경우에는 바른 법까지 사악해진다」고 하였습니다.
노자는, 「이야기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고〔言者不知〕아는 사람은 이야기하지 않는다〔知者不言〕라고 하였습니다.
큰스님께서 종정 추대식에도 참석치 않으시고 오로지 산에만 계시어 세간에 더욱 화제가 되었었는데 큰스님께서 구태여 <선문정로>란 책자를 펴내신 이유는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宗正(큰스님)=선문은 견성이 근본이니 견성은 진여자성(眞如自性)을 철견(徹見)키 위함이다. 견성 방법은 불조(佛祖)의 공안(公案)을 참구함이 가장 빠른 첩경이다..
그러나 조사스님들의 정법상전(正法相傳)이 세월이 감에 따라 날로 깊어져 그에 따른 가지가지 이설(異說)이 횡행해 오고 있다.
종종 이설이 오히려 스님들의 뜰을 황폐케 하므로 만세토록 이어나갈 정법을 위하여 틈틈이 써왔던 글을 <선문정로>란 이름으로 펴낸 것이다.
향봉스님=예전에 중국의 조주스님에게 어는 신도분이 찾아와 빈손으로 왔음을 사과하는 투로,
「이렇게 빈손으로 왔습니다.」
「그러면 내려놓게 !」
「아무것도 안 가져 왔는데 무엇을 내려놓습니까 ?」
「그러면 계속해서 들고 있게나 !」
참 재미난 일화인 것 같습니다. 조주스님은 빈손으로 왔음을 미안해 하는 따위의 마음을 털어버리고 빈 마음(空心)을 지녀야 한다는 뜻으로 「내려놓게 !」하였는데 그 신도분은 그 조주스님의 높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외형적인 빈손으로 온 것만을 탓하고 있었으니 매우 재미있는 일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와 흡사한 예로 큰스님께서 종정 추재식에서 보이신 법어에 「산은 산(山是山)이요, 물은 물(水是水)」이라 하신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네 마음대로 해석을 붙여 항간에 이설 아닌 이설이 파다합니다.
큰스님께서 이에 대하여 「산은 산이요 물은 물」에 대한 뒷귀절이 있으시면 덜 열린 중생들의 개안(開眼)을 위해 한 말씀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宗正(큰스님)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니
해와 달과 별이 일시에 암흑이구나.
만약 이 가운데 깊은 뜻을 알고자 하면
불 속의 나무말이 걸을걸음 가는도다.
(山是山兮 水是水兮
日月星辰 一時黑이라
欲識箇中 深玄意인댄
火裏木馬 步步行이로다.)」
향봉스님=요즘 세상 사람들은 일상생활을 엮어가는 데 있어 불만과 권태로움에 항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일상의 즐거움과 고마움을 항시 누릴 수 있으며 구속과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으로 넉넉함을 만끽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 해탈과ㅏ 자유에 이르는 길을 하교(下敎)해 주셨으면 합니다.
宗正(큰스님)=사람이 물질을 지배해야 한다. 도덕과 윤리의 혼란은 물질이 사람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물질이 사람을 지배하게 된 것은 물질에 자기 존엄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물질의 지배를 받지ㅣ 않기 위해서는 상실한 자기 존엄성을 회복시켜 모든 생활방향을 사람이 물질을 지배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억만금의 재산이라도 정당하지 못한 것은 받지 않아야 된다. 부당한 물건을 받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고 물질만 추종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는 좋은 예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아무리 막대한 금액이라도 부당한 것은 받아들이지 않아야만 자기 존엄성을 살릴 수 있다.
그래서 물질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바른 자세를 끝끝내 지키는 것이 자유회복에 이르는 첫길이자 지름길이다. 불만과 권태를 극복하는 길은 자기 마음 속에 숨겨진 무한한 능력을 개발, 유감없이 발휘하는 데에 노력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의 소우주이므로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 극락도 지옥도 공존하게 마련이며 불안과 여유도 마음가짐에서 좌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항시 주위 사람들에게 감사드리며 나보다는 남을 위해 살 일이다..
향봉스님=큰스님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을 엿볼 수 있게 우주의 본원과 생명의 실체에 대하여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宗正(큰스님)=여기에 한 물건이 있다고 하자. 유무(有無)를 초월하고 시공(時空)을 포함하여 말로 설명할 수 없고 붓으로 그릴 수도 없으나 부득이 거짓으로 한 물건이라 하는 거다.
이는 우주의 근원이며 만물의 본체로서 일체가 한 물건의 발현이어서 일체가 한 물건이 아님이 없다. 비유하자면 한 물건은 가없는 바닷물과 같고 만물은 수없는 파도와 같다. 파도가 천태만상으로 일다가 깨져도 물을 떠나서 파도가 없으니 파도가 곧 물이요, 물이 곧 파도이다.
파도가 일어날 때 물이 파도로 나타났을 뿐, 물이 조금도 없어지지 않으며 파도가 깨져도 물로 나타났을 뿐 파도가 없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파도가 곧 물이며 물이 또한 파도이므로 바다에는 생멸과 증감이 없어 영원토록 변함없이 항시 그대로인 것이다. 우주만물도 이와 같아서 시시각각으로 천변만화하여도 만물 전체가 한물건이며 한물건 전체가 만물이어서 생멸과 증감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멸과 증감이 없는 세계를 영원한 세계, 무한한 우주, 절대적 존재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가 낱낱이 영원하며 절대이니 이것이 일체의 본 모습이다. 이 세계에는 어는 존재나 다 나와 한몸이요, 전부가 나의 부모님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를 나의 몸과 같이 아끼고 모든 생명을 부모로 섬겨야 한다. 그러하니 남을 해치는 것은 나의 몸, 나의 부모를 해치는 것이 된다.
이 도리를 깊이 알게 되면 아무도 자기 몸, 자기 보무인 남을 해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향봉스님=큰스님께 말씀드리기에도 진정 부끄럽고 죄송스런 일입니다만 조계종 사찰이 분명한데도 「대학입시 합격기도」나 「삼재풀이」등이 횡행하는 처지입니다. 이에 큰스님께서 바른 신앙에 이르는 길을 훤히 보여주셨으면 하는데요.
宗正(큰스님)=글쎄, 참으로 부처님의 가르치심과는 거리가 먼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기가 본래 부처이니 자기 부처만 믿고 석가과 아미타불도 멀리 해야 할 것이다. 설사, 석가와 미타(아미타불을 줄인 말)를 믿고 의지하려는 생각이 나면 이것은 자기가 본래 부처님임을 모르는 까닭이다. 불교도들은 근기가 각기 다르나 필경에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곳은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자각(自覺)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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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런 자리에 한번 구경이라도 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해보고 싶습니다.
그래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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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그치만 말없는 저 나무도, 저 하늘도 좋기는 합니다.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참 희한해요.
흔히, 공부를 하든 실수에 있어서든 .. 무엇을 성취하겠다고 하잖아요.
가령, 일심을 증득한다, 지혜를 얻겠다 .. 등등 그러잖아요.
그런데, 저는 갈수록 그런마음이 팍팍 없어져요.
중생은 어쩔 수 없이 무지 그자체인데요.
저는 그것도 감사해요.
그참.. 이상하단 말이죠.
그렇게 되면, 마치 본원력에 대한 신심에 반한 모양새가 되잖아요.
아! 저는 정토행자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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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과 자유에 이르는 길은 없지 않으나,
해탈과 자유란 없는 거이 ....
붕어빵은 먹어 봤으니 분명히 있었으나,
붕어는 없고 이름만 있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