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드릴 때마다 갈수록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은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나 자신이 제대로 실천을 못하면서 말로만 앞세우는 것이 아니냐 하는 자책감이 앞서기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더구나 이번에 보내는 편지는 하늘보다도 높고 바다보다도 깊으신 어머님의 은혜와 연관된 내용을 실었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게 느껴지나 봅니다. 어려운 마음으로 띄우는 이 편지는 같이 생각 해본다는 의미를 가지고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옛 말에 "망설이는 호랑이는 벌만도 못하고 제자리 걸음만 하는 기린은 말보다 못하다." 고 했습니다. 그만큼 실천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갈수록 만연되어가는 황금 만능주의에 대한 경각심과 아울러 국가의 "백년지 대계"라는 교육의 현실을 생각한다는 뜻에서 자식을 가르치는 어머니의 행적에 대해 언급 했습니다.
첫 번째 페이지는 왜곡되고 편견된 독선과 아집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나타낸다는 뜻에서 몇가지 실 예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정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에서 예로부터 자식을 가르쳤던 훌륭하신 어머니와 그렇치 못한 경우의 교육방법을 가능한 사실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나같은 사람이 어머니들의 행적을 논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나도 자식을 가르치는 부모의 입장이란 생각에서 이 편지를 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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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로 훌륭하신 가르침의 본을 보여주셨던 페스탈로치도 "가정은 어린이의 도덕학교다." 고 말하면서 한아이가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학교 선생님도 중요하지만 가정이야말로 더욱 중요한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버이를 보면 자식을 알 수 있고 자식을 보면 그 어버이를 알 수 있다." 는 말은 바로 그런 뜻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춘추시대에도 거나라가 적의 침략으로 위급하여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러 왔을 때 제의 환공은 구원병을 보내 주어야 되겠느냐고 신하인 관중에게 묻자. 관중은 말하기를 "옛말에 "신하를 보면 임금을 알 수 있다." 고 했는데 사신의 처세가 자신의 임금이나 백성을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것을 보니 구원병을 보낼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고 말하여 거나라는 구원병을 받지 못해 멸망한 예가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같은 시대 초나라의 신포서라는 사람은 이웃나라의 침략으로 서울까지 함락당하고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기에 직면하자 이웃 진나라로 달려가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에서는 망해가는 나라를 도와봤자 아무런 소득이 없을거라고 모른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신포서는 일주일동안 진나라 궁궐 계단에서 통곡하면서 꼼짝도 안하고 구원을 애원했던 것입니다. 신포서의 정성에 진나라 왕을 비롯한 신하들이 감동해서 결국 초나라는 신포서의 충성스런 노력으로 이웃 진나라의 구원병의 도움으로 나라를 지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사람은 자신에 대한 대접이 소홀하다고 투정을 부리고 나라와 백성의 일은 두 번째로 생각해서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경우이고 또 한사람은 자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기 때문에 나라를 구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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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그러나 결코 우리는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작게는 개인이지만 가정에서는 가정의 대표자가 될 수 있고 직장에서는 직장의 대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행실이 좋고 나쁜 것을 보면 그 집안의 좋고 나쁘고를 입에 올리게 되고 외국에 가면 그 한 사람의 행동을 보고 그 나라 사람의 전체를 평가하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를 읽는 분들은 본문 중에서 나오는 내용 중에서 여러 가지를 의미있게 새기면서
새로운 인식을 했으면 합니다.
여러분은 역사학자로 유명한 단재 신채호 선생님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에 덧붙여서 한마디 붙인다면 "효자를 만들고 싶거들랑 역사를 가르치고 훌륭하고 참된 스승을 만나고 싶거들랑 역사를 배워라." 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역사를 이끌어갔던 수많은 위인 중에서 혹은 폭군 중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인물들의 예를 몇가지 들었습니다.
자신에게 효도하기 바라는 아들의 장래를 망칠까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왕릉의 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남편의 무덤을 팔아서까지 자식을 가르쳤던 우장춘 박사의 어머니가 있고 자신의 젖가슴을 들어내 보이며 자식의 잘못을 깨우쳤던 칭기스 칸의 어머니는 우리에게 새로운 감동을 준다고 여겨져서 본문에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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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히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짧은 지면을 통해서라도 우리가 역사의 진실한 숨결을 찾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이 편지를 읽으면서 많은 이해와 사랑을 부탁드리며 적어도 3번 이상은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편지에는 이이, 김만중, 맹자, 한석봉, 강감찬, 베토벤, 온조, 김유신, 네로 , 연산군, 진시황, 양제, 호동왕자, 링컨, 에디슨, 아인슈타인, 성 어거스틴, 왕릉, 칭기스 칸, 나폴레옹, 우장춘 등의 어머님들의 행적과 신각, 우성룡, 이순신, 이항복, 이원익, 을지문덕, 대문신왕, 프랭클린, 장사숙 등의 등장인물이 나오게 됩니다.
결코 왜곡된 인식이 없기 바라며 누구든지 자신의 마음에 편견된 사고 방식을 가지지 말고 올바른 인식을 가지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상감마마 이런 태평성대에 군사를 많이 기른다는 것은 민심을 흉흉케 할뿐만 아니오라 스스로 화근을 만드는 결과가 되옵니다. 이점 통촉하시옵소서."
유성룡의 이 반대상소는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임진왜란때의 유성룡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당시나 지금이나 훌륭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때 나라를 구한 이순신장군을 추천한 인물도 바로 유성룡이었기 때문입니다.훗날 유성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에 선조대왕이 중신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인재를 천거를 명하자. 유성룡이 제일먼저 나서서 이순신장군을 천거하고 나선 것입니다.
"신 좌의정 유성룡 아뢰오. 지금 이 시대의 인재로는 정읍 현감 이순신을 꼽을 수 있사온데, 그를 전라좌수사로 명하시어 국방을 공고히 하시옵소서." 이 말을 들은 중신들은 한결같이 반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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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6품에 불과한 말단관리를 7계급이나 한거번에 뛰어넘어 정3품인 전라좌수사에 임명한다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성룡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순신의 사람됨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장차 나라에 변란이 있을 때를 대비해서라도 이순신같은 인물을 등용해야 한다고 강력히 밀어 붙인것입니다.
결국 모든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성룡은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임명시키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유성룡은 그가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때도 우리역사에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린 이원익이나 이항복 같은분들이 유성룡이야말로 나라를 위해 필요한 인물이라고 변호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당쟁이나 사리사욕을 떠나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유성룡의 인물됨을 잘 알고 있는 율곡으로서는 다른 사람이 아닌 유성룡이 반대하고 나섰다는데 서운함을 금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율곡은 묘당을 나오면서 유성룡에게 탄식하며
"나라의 힘을 떨친지가 오래 되었소이다. 세속의 선비들은 본디 세상의 물정에 통하지 못하여 한심스런 말들을 한다하지만 공까지도 그런말을 할 줄은 몰랐소."
사실 그때의 말한마디가 역사에 참담한 비극을 탄생시키느냐. 나라의 안정을 도모할수 있느냐? 하는 갈림길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율곡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지내다가 10만양병설을 상소한 다음해에 49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10만양병설을 주장한지 1년이 안되어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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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좌의정으로 있던 유성룡은 율곡의 훌륭한 선견지명에 감탄하면서 "이제와 보니 율곡은 참으로 성인이었소. 만일 그의 주장을 채용했더라면 나라일이 이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을! 당시에는 율곡의 정책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의 예언은 모두 적중하고 있소이다. 율곡이야말로 앞일을 환히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소."고 탄식하며 율곡의 주장을 반대한 것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율곡은 분명 우리 역사에 큰 별이었습니다.
그는 "동호문답" 과 "만언봉사"에서도 구구 절절히 나라를 위하는 상소로 일관 했고 모든 분야에 빠진 곳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관리들의 기강은 물론 형벌제도 개선에도 언급하고 국가 방비의 군졸문제까지, 농사짓는 농부들의 밭갈이, 길쌈일까지, 언급했고 백성들의 굶주리고 배고픔도 생각했으며,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백성들의 고충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입시문제로 교육제도의 논란이 있었듯이 당시에는 과거제도의 헛점이 많았던 관계로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는데 율곡은 참된 학문의 길을 갈 것을 교육시키며 제자들을 위해 교재로 지은 "격몽요결"에서도 배우는 사람의 도리를 상세히 언급하여 바른 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혜동성자"라 불렸던 율곡은 청백리로도 유명하지만 효자로도 유명하여 부모에 대한 효심에서는 어느누구도 따르지 못할 정도로 깊었다고 합니다.
그가 17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가 위급한 병으로 자리에 눕자. 자신의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아버지 입에 넣어 드리고 선조사당에 들어가 빌었다고 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했던 율곡의 지극한 정성에 하늘이 감동 하였는지 그로부터 얼마후에 아버지의 병환이 나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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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율곡의 성장과정에는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교육과 가르침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율곡의 어머니 심사임당은 한국의 어머니 상으로 한국의 여인상으로 빼놓을수 없는분입니다. 한 남편의 아내이자 네 아들의 어머니이면서 그녀는 학문이나 서예. 그림에도 뛰어나 막힘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율곡에 대해 많은 지면을 채운 것은 그의 행적이 너무나 훌륭한데다 보통사람으로서는 감히 따를 수 없는 많은 내용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인품이나 사상은 그분의 행적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지만 그분이 남긴 여섯가지의 생활본보기나 자경문을 통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율곡의 자경문
제1조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 하여야 한다.
제2조 마음을 결정하는데는 먼저 말을 적게 하여야한다.
제3조 놓아버린 마음을 거두어야 한다.
제4조 공손하고 근신하여야 한다.
제5조 일보다 생각이 앞서야 한다. 실천이 없는 독서는 무용의
학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제6조 재산과 명예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된다.
제7조 할만한 일이면 정성을 다하여야 한다.
제8조 온 천하를 얻기 위하여 죄없는 사람을 한명이라도 희생
시켜서는 안된다.
제9조 아무리 포악한 사람이라도 감화를 시켜야 한다.
제10조 때아닌 잠을 자서는 안된다.
제11조 수양과 공부는 서두르지도 쉬지도 말며 꾸준히 해야한다.
율곡이 어머니의 훌륭하신 가르침으로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는것처럼 어머니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에서는 훌륭한 인물뒤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계시고 많은 문제를 일으켰던 인물에게는 어머니의 사랑이나 가르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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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앞에는 무한한 힘과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나약해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용솟음 치는 놀라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라고 하면서도 "강한자여 그대의 이름은 어머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구운몽" "사씨남정기"등을 지어 우리나라 국문학계에 크나큰 업적을 남긴 서포 김만중의 어머니도 그 대표적인 예롤 알려지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피난생활을 하면서 5살된 만기와 뱃속에 아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포 김만중은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채 태어난 것입니다.
난리가 끝난 뒤 김만중의 어머니는 남편을 장사지내고 친정어머니를 도우면서 경서와 사기 등 많은 책을 보며 마음을 위로하며 지냈습니다.
친정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윤부인은 두 아이를 기르며 어려운 살림을 꾸렸지만 워낙 가난해서 윤부인이 몸소 길쌈하고 수를 놓아 조석을 끓이고 자식들의 공부에 방해될까봐 어려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윤부인은 두 아들에 대해 자상했으나 글공부에 대해서는 엄중했습니다.
윤부인은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몇배 더 노력하여 학문에 있어 훨씬 뛰어나야 한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과부의 자식이라 하여 행실을 탓하려 하니 너희들은 마땅히 이 말을 뼈에 새겨라."고 타일렀습니다. 윤부인은 자식들이 공부를 잘못하면 종아리를 때리고 "너희 부친께서 너희 형제를 내게 부탁하고 돌아가셨으니 이제 너희들이 공부를 잘못하면 내 무슨 면목으로 지하여 계신 부친을 뵙겠느냐? 글 못하는 것 보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다."고 비통해하며 식음을 전폐하자, 두 형제는 혀를 깨물며 용서를 빌고 열심히 공부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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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부인 역시 책 읽기를 좋아해 늙어서도 계속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년는 언행을 조심하며 아름다운 옷을 입지 않고 과부가 된 뒤에는 늘 소복을 입었고 남의 잔치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식들이 공부하는 데 필요한 책을 구하기 위해 있는 곡식을 다 주고라도 샀으며 어떤 책이 권 수가 많고 값이 비싸다고 하면 베틀의 명주를 모조리 끊어서라도 샀으며 홍문관(서적 관리소)에 다니는 관리가 있으면 부탁해서 책을 빌려다가 손수 베껴서 아들에게 가져다 줄 정도로 정성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정성을 들인 탓인지 두 아들은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나라의 큰 벼슬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첫째아들 만기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숙종의 왕비가 되는 영광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훗날 김만중이 숙종의 후궁인 장씨의 일로 간하다가 귀양을 가게 되었을 때도 그녀는 늙은 몸을 이끌고 성 밖까지 나오며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길은 옛부터 어진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 다 가는 길이다. 그러니 부디 잘 가서 네 몸을 보살피거라. 내 걱정일랑 말고!"
김만중 또한 어머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습니다. 훗날 나라에서 효자문까지 세워 주었던 김만중은 귀양가 있는동안 어머니가 병들어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구운몽" 을 지어 보냈던 것입니다.
김만중은 구운몽을 지어 어머니께 드리는 편지에서
"평소에 옛 역사와 이야기를 즐기시는 어머님 곁에서 책을 읽어 드리고 이야기도 해 드려야 옳은 일이지만 이제는 남해 구석에 있는 죄인의 몸이라 뜻대로 할 수가 없어 생각다 못해 이 "구운몽"을 지어 보내옵니다. 그러니 소자가 곁에서 읽어 드리는 것으로 여기시면 죄지은 자식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가벼울 것 같이 생각되어 이렇게 올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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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몽의 이야기를 부귀와 공명이 일장춘몽이 되고 만다는 것을 주제로 하였습니다...... (이하 중략) 이것은 외롭게 병석에 계신 어머님을 위하여 지은 졸작이오나 이런 글이나마 지을 수 있게 된 것은 어머님께서 유복자인 저를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시켜주신 덕분이옵니다. 글이 잘못된 부분이 있어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아들 김만중의 편지를 받은 어머니는 몹시 기뻐했습니다.
윤부인은 아들 형제에게 글을 가르칠 때마다
"내가 비록 글을 가르치기는 하나 너희는 우리 나라의 글로 우리 백성의 정서에 맞게 새로 글을 지을 수 있어야 하느니라. 그래서 백성들이 다스리는 관리로부터 상민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도리를 찾는 길을 밝혀 주도록 하여라."
어머님의 이런 자상스런 가르침은 참으로 놀라운 지혜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단순히 자식의 잘됨이나 가정의 문제뿐 아니라 백성들의 어려움까지 생각하고 가르치는 윤부인이야말로 우리 역사에 다시 찾기 힘든 여인이라 할 것입니다.
김만중은 윤부인의 그러한 가르침 때문에 당시에 언문이라 불렸던 우리글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지어 어머님께 들려드리고 평을 받은 것입니다.
김만중은 귀양살이 중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한없이 울었습니다. 너무나 자상했던 어머니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의 작품이 잘 되었다면 모두 어머님의 덕택입니다. 그러나 어머님을 상심케 하고 임종시에도 뵙지 못하니 이 얼마나 불효자식 입니까?" 고 한탄했습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나 할까요 훌륭하신 어머니의 가르침의 덕분에 김만중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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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신문에 난 기사 한 가지를 소개하면서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국민학교에 1학년짜리 딸아이와 5살된 아들을 둔 권모씨는 일요일 집 근처에서 산책을 하던 중 동네 아이들이 술주정꾼 흉내를 내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이 왜 저런 흉내를 낼까?
한편으로 의문스런 마음을 간직한 채 다음날 퇴근 후 시간을 내어서 딸의 등하교길의 주변을 살펴본 권씨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학교가는 근처에는 여관이 50개, 노래방이 8개, 디스코방이 8개, 스텐드바가 4개 등이 불야성을 이룬 것을 보고 "자식농사를 위해 세 번은 아니더라도 한번은 이사 가야겠다." 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교육은 국가의 "백년지대계" 라고 합니다. 국가 장래를 짊어질 새싹들을 가르치는 교육 환경이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얼마 전 TV드라마로 인기를 모았던 "달빛가족"에서도 오늘의 사회 현실을 노래한 가사에서도 거리에는 벌거벗은 여자들이 판을 치고 아이들은 어디로 가야 되느냐고 의문을 던진 적이 있었습니다. 최소한 학교 주변만이라도 우리 아이들을 마음 놓고 맡길 수 없을까요? 우리 모두가 함께 생각해 보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식을 가르치는 부모는 누구나 좋은 환경에서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러나 덮어놓고 아무렇게나 맡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지난봄 강남에 사는 어느 유학생이 부모를 살해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온 국민은 경악과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우리의 교육이 어느새 이 지경이 되었을까? 하고요. 그러나 한편으로 냉철히 생각해 본다면 어른들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세상에는 돈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특히나 자녀들의 교육 문제는 더욱더 그렇게 느껴진다고 봅니다. 옛 성인들의 가르침을 되새겨보면서 지혜를 찾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같아 생각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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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맹모 삼천지교" 에 대해 다시 기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맹자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맹자가 어린 시절 집이 공동 묘지 근처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공동 묘지에 와서 장사 지내는 것을 보고 무덤을 파고, 시체를 묻고, 뛰고, 밟고 하여 무덤을 만들곤 했습니다. 이것을 본 맹자 어머니는 "이 곳은 자식을 기를만한 곳이 못된다." 하시고 새로 이사한 곳이 시장 근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물건파는 흉내를 내자 맹자 어머니는 "이 곳 역시 자식 기를 곳이 못된다." 고 이사를 했습니다. 새로 이사한 곳은 다행히 학교 근처였습니다.
그러자 맹자는 예법에 맞추어 절하고, 서로 사양하고, 나아가고 물러서는 흉내를 내며 놀자 맹자 어머니는 "이 곳이야말로 참으로 자식을 기를만한 곳이다." 고 하시고 계속 그 곳에서 살면서 맹자를 성인으로 키워가신 것입니다.
맹자 어머니는 맹자 교육에 작은 일에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셨습니다. 맹자가 어렸을 때 이웃집에서 돼지를 잡자 맹자가 "저 돼지는 무엇하러 잡나요?" 하고 묻자 맹자 어머니는 "너에게 먹이려고 잡는 것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맹자 어머니는 곧 그 말을 후회하며 "예로부터 태교라고 하여 아직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까지 교육을 실시한다고 들었는데 세상 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아들을 속인다는 것은 곧 그에게 불신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고 돼지고기를 사다가 맹자에게 먹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아들 교육에 말 한마디에도 큰 신경을 썼던 것입니다. 맹모 삼천지교와 더불어 잘 알려진 "맹모 단기지교"의 일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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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맹자가 어느 정도 성장한 뒤의 이야기로 어머니가 혼자서 살림을 꾸려감으로 하루는 공부를 하던 맹자가 학문을 중단하고 어머니를 돕겠다고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맹자 어머니는 베틀에 앉아 베를 짜고 있다가 칼로 짜고 있던 베를 끊었습니다.
학문을 중도에서 그만두면 이와 같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결국 맹자 어머니의 이와같은 가르침으로 맹자는 성현으로 공자 다음으로 유명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맹모의 단기지교와 비슷한 이야기는 우리 나라에도 전해옵니다. 조선 선조 때 유명한 문필가로 활약한 한석봉의 이야기입니다. 원래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재주를 가진 한석봉은 어머니의 극진한 뒷바라지로 서도의 대가가 되어 세상에 이름을 빛낸 것입니다.
한석봉이 어렸을 때 하루는 점치는 사람이 찾아와 "옥토끼가 동쪽에 나니 낙양의 종이값이 올리리로다." 하고 성장하면 서예로 이름을 떨칠 것을 예언했다고 합니다.
한성봉의 어린 시절은 몹시 가난하여 어머니가 떡장사를 해서 학비를 마련하고 아들 한석봉을 공부 시키기 위해 절로 보냈습니다. 석봉은 절에서 학문을 시작한 지 몇해만에 그동안 배운 것에 대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자신감을 갖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때 어머니는 석봉을 맞으며 "어찌하여 공부를 다하지 않고 벌써 돌아왔느냐?" 하고 묻자 석봉은 자신있게 "이제 다 배웠습니다." 하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그래? 그럼 네가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는지 시험해 보자." 하고 방안에 켜놓은 불을 껐습니다. 어머니는 석봉에게 "너는 글씨를 쓰고 이 에미는 떡썰기를 해서 누가 반듯하가를 보기로 하자." 그리고 나서 두 모자는 어두운 방안에 마주앉아 어머니는 떡을 썰고 석봉은 종이를 펼쳐놓고 글씨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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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만에 어머니는 "이제 그만 보기로 하자." 고 불을 켰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썬 떡은 반듯반듯해 하나도 비뚤어지거나 짧은 것이 없었지만 석봉이가 쓴 글씨는 줄이 비뚤어지고 크기도 고르지 않아 엉망이었습니다.
"이래가지고 어디 네가 공부를 마쳤다고 할 수 있겠느냐?" 어머니는 호되게 꾸짖고 석봉을 다시 절로 보냈습니다.
절로 되돌아간 석봉은 더욱 열심히 공부해 최고의 명필가가 된 것입니다. 그것의 어머니의 정성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하는 열망이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석봉은 우리 사신이 명나라로 갈 때마다 글씨쓰는 소임을 맡게 되었으며 명나라까지 그 명성이 알려져 이여송, 마귀, 양찬 등 명나라의 유명한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의 글씨를 가져가 더욱 유명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선조대왕도 그를 사랑하여 군수자리를 주어 한적한 곳에서 서예를 더 익히도록 배려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한석봉의 서체는 지금도 많이 남아 있는데 특히 천자문은 서예교본으로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전사에 길이 빛나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강감찬의 귀주대첩", "이순신의 한산도대첩" 은 두고두고 기억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삼대첩의 승리자 중 강감찬 장군은 을지문덕장군이나 이순신장군과는 다른 문관으로서 장군의 공적을 세웠다는 데 특색이 있습니다.
강감찬은 서울 관악구 봉천동 낙성대에서 태어났는데 얼굴이 못생기고 키도 아주 작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릴 때 친구들이 "내 곁에 오지마라."하고 말하는데 그럴 때면 "왜 그러니" 하고 물으면 아이들은 "너만 보면 그 날은 밥을 못먹어"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강감찬은 어릴 때 은천이라 불렸는데 애들의 놀림에서 그의 얼굴이 얼마나 못생겼나를 짐작케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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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이 동네에 나가기만 하면 "아이 참 흉하게도 생겼네." 한다든지 "어쩌면 저렇게 못 생겼을까?" "고기잡는 그물보다 더 얽었군." 하고 놀렸습니다.
강감찬은 얼굴이 너무나 못생겨 언제나 조롱과 모욕을 받으며 지냈습니다. 어느날 강감찬은 아이들에게 당한 조롱을 참을 수 없어 혼자서 울다가 분함을 참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어디가 아프냐고 묻자, 강감찬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울었느냐?" 고 아들을 바라보며 포근하게 사랑해 주시는 어머니를 바라보자 그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강감찬은 울면서 "밖에만 나가면 아이들이 도깨비가 왔느니, 그물보다 더 얽었느니 하고 놀려요. 저는 그게 너무나 기분 나쁘고 참을 수가 없어요."
이 때 어머니는 우는 아이를 타이르면서 "은천아 네 얼굴이 못생겼다 하여 그것이 분한다면 얼굴이 잘났다 하여 기쁠 것이 무엇이냐? 세상에서 가장 분한 것은 지혜가 없고 지식이 엷어 남에게 부림을 받는 일이다. 네가 아무리 못났다 하여도 지혜와 덕망이 있으면 얼굴 잘났다 하는 그 아이들이 후에 모두 너를 부러워하게 될 것이다. 얼굴 못났다 하여 분하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을 덕이 없이 분하다는 마음으로 돌려라."
어머님의 말씀을 들은 은천은 새로운 결심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어머님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지혜가 많고 덕있는 높은 사람이 되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것은 학문을 많이 배우는데서만 얻게 되는 것이다. 학문을 많이 배워서 지혜를 넓히고 지혜가 넓어짐으로서 덕을 쌓게 되며 덕이 쌓아짐으로서 큰 일을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네 스스로 높다고 아니하여도 남이 너를 높이 보게 될 것이다. 외모가 못났다 하여 기분나빠 하는 사람은 못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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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훈계에 크게 깨달은 은천은 그 날부터 서당에 들어가 글을 배워 학문을 닦아 지혜가 넓어지고 지략이 많아 고려 성종 때 과거인 갑과에 1등으로 뽑혔습니다.
예부시랑 등 요직을 지내고 거란군을 대파하여 왕으로부터 금으로 만든 꽃 여덟송이를 머리에 꽂아주는 상도 받았던 것입니다.
강감찬의 성공은 어머니의 자애로운 사랑과 보살핌으로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려사 열전"에도 "아! 어릴 떄의 못났음을 조롱받던 가엾은 아이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한 이가 누구인가? 그 뒤에는 훌륭한 어머니의 한마디 훈계가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라고 기록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음악은 매우 중요한 존재입니다. 음악은 야수의 마음도 부드럽게 한다고 했던 로마의 사상가 키케로의 말처럼 우리 생활에 활력을 넣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어느 철학자는 "음악은 가장 진실하며 심오한 생명의 총체적인 파악이다." 고 했으며 애국가를 지으신 안익태 선생님도 "음악은 신의 메시지다." 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는 음악을 위해 애쓰는 음악가들의 공적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로는
첫째로 베토벤은 고금을 통하여 불멸의 음악가라는 점
둘째로 어떤 역경에도 굴복하지 않고 고통을 환희로 바꾼 인간 승리자라는 점
셋째로 일생동안 진실된 삶을 누린 사랑의 실천가라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베토벤은 어려서부터 험난하고 어려운 길을 걸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너무나 가난했고 아버지는 술주정이 심해지고 가난한 살림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베토벤에게 돈벌이를 시키기 위해 피아노를 가르쳤고 베토벤은 11살때부터 연주 여행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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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어머니는 술주정뱅이 남편으로부터 아들을 지키기 위해 항상 따뜻한 사랑과 위로로 그를 감싸주었습니다. 베토벤은 아버지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어머니의 포근한 사랑과 위로로 어려움을 찾고 지냈습니다. 원래부터 음악적 자질이 있던 베토벤은 하루가 다르게 연주솜씨가 발전해 간 것입니다.
그가 16세 때 연주한 모습을 본 모차르트는 "매우 놀랐다. 이런 즉흥곡 대가가 이 세상에 있는 줄을 몰랐는걸! 당신은 앞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 것이다." 고 그의 성공을 예견했습니다.
베토벤이 피아니스트가 되게 만든 것은 어머니의 사랑때문이었습니다. 베토벤은 아버지 때문에 피아노 연습은 죽기보다 싫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자상한 사랑과 위로는 그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 넣어 준 것입니다.
그런 자상스런 어머니가 17세 때 돌아가시자 베토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슬픔 속에 지내는 그에게 청각 장애가 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베토벤은 죽기를 결심하고 유서를 써 놓고 몇번이나 시도했지만 어릴 때부터 고난을 극복해 온 의지력이 되살아나 용기를 주신 어머님의 생각 속에 새로운 결심으로 음악의 인생을 다졌습니다.
베토벤은 "손과 손가락이 있는 한 해보자!" 고 노력을 기울인 것입니다. 그는 공기 말고 경관이 좋은 곳에서 영감으로 창작 활동을 해서 피아노소나타 열정, 교향곡 16번 전원을 창작했습니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오직 음악의 길을 끝까지 걸어간 예술가입니다. 그는 자기 고통을 정복하고 9개의 교향곡, 32개의 파이노소나타, 17개의 현악 4중주곡 등 불후의 명작을 남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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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은 "착하게 또한 고결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바로 그러한 사실만으로 불행은 견디어 나갈 수 있다." 고 말하면서 "할 수 있는 선을 행할 것, 무엇보다도 자유를 사랑할 것, 그리고 설령 왕좌를 위해서라 할지라도 절대로 진리를 비판하지 말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베토벤이 완전한 귀머거리가 되었지만 실망하지 않고 수많은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 작곡가로 피아니스트로 성공한 뒤에는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과 정성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했던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공적을 세우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나 한 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숨은 인재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 나라 삼국시대에 크나큰 비중을 차지했던 고구려와 백제를 건설하는 데 주몽이나 온조는 잘 알지만 주몽의 부인이자 온조의 어머니였던 소서노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서노는 고구려 건국은 물론 백제건국의 일등공신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소서노는 졸본부여 우대의 처로 우대가 죽은 뒤 주몽을 도와서 고구려 건국에 이바지한 여걸입니다. 당시 형세로 보아 졸본부여는 부여의 남서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소서노는 우대왕이 죽고 나라를 의지할 수 없는 실정으로 결국 주몽에게 시집가서 고구려 건국을 도운 것입니다.
백제의 건국은 온조왕의 슬기와 덕망도 있지만 그보다 그 막후 소서노의 활약이 컸습니다.
삼국사기에 소서노는 부여왕의 둘째딸이라고도 합니다. 우대에게 시집가서 비류와 온조 두 형제를 낳고 주몽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기에 소서노는 주몽을 도와 국가 기반을 다지는 데 많은 노력을 했다고도 합니다. 소서노는 비류를 낳고 주몽과의 사이에서 온조를 낳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여기서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소서노가 주몽과 20여년을 살면서 비류를 태자로 삼지 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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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여걸 소서노는 욕심을 내지 않고 예씨에게 왕비의 자리도 양보하고 자신이 낳은 비류와 온조는 태자를 유리에게 양보하고 그 곳을 미련없이 떠난 것입니다. 그녀는 온조와 비류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서노는 장자 비류를 왕으로 세우면 국가 장래 분열의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고 온조를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
온조는 동명성왕의 묘당을 세우고 주몽의 통치이념을 국가의 규범으로 삼았습니다. 소서노는 뛰어난 여걸이면서 백제의 국모로서 조금도 손색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녀는 왕가의 법도를 지키기 위해 20년이나 같이 산 주몽을 조강지처인 예씨에게 자리를 양보했으니 훌륭한 여인이라 아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녀가 옹졸한 여인이었다면 고구려는 왕위 계승으로 싸움이 그치지 않고 건국도 못해보고 망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백제의 건국도 없었을 것입니다. 소서노는 파란만장의 생애를 보내면서 지극한 모성애로서 개국의 뜻을 세워 백제를 건국하녀 13년동안이나 아들의 나라를 도왔습니다.
온조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왕모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국모의 예로 묘당을 세우고 제사를 올렸습니다.
소서노는 온조의 어머니로서 뿐만아니라 한 나라의 어머니로서 슬기롭게 살다 가신 것입니다. 연약한 여인이면서 남편 주몽을 왕위에 오르게 만들었고 아들 온조로 하여금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한 것입니다. 아무리 용맹한 주몽이라 할지라도 왕비와 태자문제만은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소너노는 아무런 욕심없이 용단을 내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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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가합니다.
삼국시대에 훌륭한 어머니로는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녀의 신라 왕족은 딸로 처녀시절에 가야국의 왕족이었던 김서현의 인물된에 빠져 부모의 허락도 없이 혼자 김서현의 아내가 되기를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김서현이 만노군의 태수가 되어 그곳으로 부임하자. 그곳으로 따라 갈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만명아 너는 왕족의 딸이다. 그런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은 절대로 안될 말이다." 고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만명은 이미 마음이 굳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않자. 아버지는 골방에다 가두고 하인을 시켜 지키게 했던 것입니다. 만명은 꾀를 써서 골방을 뛰어나와 사랑하는 김서현의 품으로 달려 간 것입니다.
그 당신 사회풍습이나 사회생활 환경으로 볼 때 좀처럼 하기 어려운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적극적 성격의 소유자였던 만명부인은 김서현과 가정을 이룬 뒤 김유신을 잉태하여 유신을 낳은 뒤 김유신을 훌륭한 인물로 키우기 위해 엄하게 교육 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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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김유신은 인물도 잘 생긴데다 성격도 쾌활해 친구들과 함께 주막이나 기녀집에 자주 놀러 가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만명부인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신아 나는 이미 늙어서 머리가 희어졌고 이제는 오직 너의 앞날을 위해서 하느님께 축원하는 마음뿐이다. 어미는 너 잘 되기를 이다지도 바라는데 너는 어찌하여 마을의 못된 아이들과 어울려 못된 곳으로 드나 드느냐? 마땅히 너의 갈길이 따로 있는데 어째서 네 몸을 망치려 하느냐? 사람이 한번 세상에 태어나서 나라와 의를 위해서 몸을 받치고 그 이름을 천추에 남김이 마땅하거늘 너는 어찌하여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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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치자 만명부인은 소리내어 울었다고 합니다. 김유신은 어머니의 간절한 훈계 말씀을 듣고 반성하면서 잘못을 뉘우치고 "어머니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하늘에 맹세하고 다시는 그런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안심 하십시요."김유신은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런일이 있은 뒤 얼마후에 술에 취한 상태에서 돌아오는 길에 말이 자주 다니는 길이라 기녀인 천관의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천관이 반갑게 맞으며 인사하자 김유신은 정신을 차리고 "이곳이 어디냐? 이런놈의 말이 있나 제멋대로 이런곳에 오다니." 하면서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려 칼로 말의 목을 치고 발길을 돌렸다고 합니다.
사실 말로서는 주인이 취한 상태이고 자주가는 길이라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했던 것뿐인데 김유신의 결심이 얼마나 강했나를 느끼게 해줍니다. 이런일을 있은후 김유신은 어머니의 엄한 교육속에 훌륭한 인물로 성장해 갔던 것입니다
김유신이 싸움터로 갈때도 마을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모두 울었으나 만명부인은 김유신의 마음이 약해질까 염려하여 오히려 용기를 묵돋아 주었다고 합니다. 결국 김유신은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부흥과 발전에 큰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자식의 행동을 보고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래서 자식이 잘하면 부모도 대우를 받게 되지만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도 욕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훌륭하신 어머님들의 몇가지 예를 들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의 행적과 그들의 어머니에 대해 언급해 보려 합니다. 우리는역사에서 폭군으로 유명한 3사람을 들라고 하면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연산군을 말하고 중국의 진시황을 말하고 유럽의 네로황제를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한사람 더한다면 중국 수나라의 양제를 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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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폭군으로 유명한 네로는 어머니가 미모의 아그리피나라는 이름으로 제4대로마황제 클라우디우스의 3명의 부인중 한여인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낳은 네로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독버섯 요리로 마침네 황제를 살해하고 자기 아들 네로를 황제로 앉혔지만 네로는 어머니의 과보호속에 지냈기 때문에 고집이 세어지고 성격이 삐뚤어지고 정상적인 성장을 못하게 된것입니다.
네로는 어머니가 맺어준 황후를 싫어하고 노예출신 여자와 놀아나고 어머니와 절연하겠다고 했습니다.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품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아들을 붙들기 위해 사람으로 하기 어려운 방법을 생각 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운 육체로 네로를 유혹한 것입니다.
설마하는 말들도 있지만 네로가 말려 들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결국 네로는 근친상간의 가책과 자기 혐오 끝에 모친 살해의 결심을 하게 되고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네로가 보낸 병사에 의해 살해 당하고 맙니다.
네로의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죽을때도 치부를 드러내어 자식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라난 아들이었으니 네로의 성격이 어떻게 좋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식물에서는 피투아니아 꽃이 자기 꽃가루받이(근친상간)를 받지 않고 동물에서 귀뚜라미도 암컷이 수컷을 선택하기 전에 근친정도를 알아보고 가까운 숫컷과는 짝을 짓지 않는다는데..
우리나라 조선조 10대 임금이었던 연산군은 많은 실정을 했던 인물로 우리역사에 오점을 남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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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데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기억하고 있을것 같아 상세한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연산군은 어려서 뿐만아니라 성장해서도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 윤씨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풍습에 세자가 어릴때는 일정기간 대신의 집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연산군도 당시에 대신의 집에서 교육을 받다가 왕궁으로 돌아갈 무렵에는 어머니 윤비가 투기로 쫓겨 궁밖으로 나갈 무렵이었으니 그가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을리 만무하고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조차 모르고 성장하게 된것입니다.
성종은 연산군이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아 성격이 삐뚤어질 것을 염려하여 폐비 윤시의 일에 대해 입을 여는자는 용서치 않는다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에 누구하나 연산군에게 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산군도 자기 어머니가 아닌 왕비가 자신의 어머니인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훗날 간신 임사홍, 신수근등의 간사한 고자질에 의하여 폐비 윤씨가 비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산군으로서는 크나큰 충격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누적된 사실이 하루아침에 폭발하여 엄청난 참화를 불러 일으키게 되는 결과가 된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어머니의 교육이 없었던 연산군은 모든면에서 원칙도 없고 질서도 없고 자기 하고 싶은데로 했으니 나라의 일이 잘 될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도 어머니의 교육의 중요성을 알게 됩니다.
중국 역사뿐아니라 세계 역사상 유래없는 엄청난 역사를 만들었던 진시황 역시 가정 교육이 문제가 있는 인물입니다.
진시황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문제가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진시황의 어머니는 장사치인 여불위의 애첩에 불과한 여인이었으나 이해타산이 빠른 여불위는 자기나라에 인질로 와있는 진나라의 자초왕자를 유인하여 자신의 애첩인 무희에게 반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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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나라에 인질로 잡혀있는 자초로서는 여불위의 처세가 고맙게 생각되어 그가 원하는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여불위는 지금까지 벌어놓은 많은 돈을 풀어서 자초가 조나라의 인질에서 풀려나 진나라로 가게 만들고 태자가 되도록 주선해 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여불위의 동분서주 노력으로 자초가 태자가 되고 거기에서 태어난 아들 정이 훗날 진시황이 되었으니 바로 여불위의 자식이기도 한것입니다.
자초가 왕위에 오른지 1년만에 죽자. 13살된 자초의 아들 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실권은 자초의 부인이자 옛날 여불위의 애첩인 무희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여불위는 모든 실권을 행사하면서 옛날 애첩인 무희와 다시 놀아나게 되었고 그러한 여인이 자신의 자식교육에 힘썼을리 만무 합니다.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섭정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진시황의 어머니는 나라의 모든 정사를 여불위에게 넘겨 향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자식에 대한 체면이나 백성들의 눈총도 아랑곳 하지 않고 별궁을 만들어 놓구 다른 남자들과 놀아나 자식까지 낳았던 것입니다.
여불위는 여불위대로 자신의 권력이 최고의 지위에 오르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불위가 거느린 식객만도 1만명이나 되었다하니 그의 권세를 짐작할만 할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진시황은 모든게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게 되었고 독선적이고 자기만 아는 성격으로 굳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진시황은 자신의 친아버지가 여불위인지도 모른채 여불위를 몰아내어 죽게 하고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낳은 이복 동생들은 물론 추악한 추종자들을 모두 죽이고 친정체제를 이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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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만리장성을 쌓아 백성을 괴롭혔다든가, 분서갱유를 해서 문화의 발전을 더디게 했다든가, 수많은 전쟁중에 많은 사람을 죽이고, 죽지않기 위해 불로초를 구하려는 법석을 떨었다든가, 하는등의 많은 이야기는 세상에 너무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므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한나라의 어버이되는 황제가 될 사람이 어려서부터 음란과 퇴폐의 환경만 보고 어머니의 사랑이나 정상적이 교육을 안받았으니 자신이 성장하여서도 향락의 극치인 아방궁을 지어놓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정치를 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위에서 말한 네로, 연사군, 진시황, 등에 대해서는 그들의 행적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사람을 이겅해야 될 인물이 있습니다. 진시황 못지 않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백성을 괴롭히고 죽을때까지 곱게 죽지 못했던 인물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중국 수나라의 양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백만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해 을지문덕 장군에게 살수대첩에서 대패하여 패망에 이르게 한 인물입니다.
수나라 양제 역시패륜의 극치라고 하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인데 그 역시 어머니의 성격을 닮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우리나라와 많은 관련이 있는데다 그 사람의 행적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지면을 통해 같이 행적을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
수 양제 역시 그의 어머니부터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중국에는 남북조의 혼란기에서 양견이 용맹을 떨치고 명성이 높아지자 왕으로 나가는 것은 주저했으나 그의 부인인 때를 놓치면 안된다고 부추겨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수나라의 황제가 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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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가 심하고 욕심이 많았던 문제의 황후는 궁궐에도 얼굴이 예쁜 궁녀는 들이지 않고 혹시라도 문제가 다른 여자를 가까이 하는가 감시의 눈초리를 보내다가 어느날 문제가 궁녀 한 사람을 가까이 하자. 그 이튼날 문제의 침실앞에 그 궁녀의 목을 담은 상자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이러한 성격의 어머니 밑에서 자라난 사람이 바로 문제의 둘째 아들 양제인 것입니다. 원래 첫째아들 양요을 태자로 삼았으나 자기아내 아닌 여자와 잠자리 한 사실을 안 어머니 독고황후가 미워하기 시작한데다 왕에 대한 욕심이 많은 둘째 양광이 형을 모함하기 시작하여 태자를 폐하고 서인으로 만든 뒤 자신이 태자가 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독고황후가 50세에 병으로 죽자, 이때 문제의 나이 60세였는데 옆에서 간섭하는 사람이 없자, 마음에 드는 여인을 밤낮으로 불러들였고. 채홍사까지 두고 전국에서 처녀중 미녀들을 불러 탐욕하는 바람에 하루가 다르게 늙어갔습니다.
이때 문제의 후궁중 선화부인이 미모라는 것을 알고 태자가 된 양광이 건드리려 했다는 말을 전해들은 문제는 자신이 태자책봉을 잘못한 사실을 깨닫고 다시 큰 아들을 불러 들이려 했으나 이미 모든 실권이 태자에게 넘어간 현실이어서 태자는 부왕의 명령을 전달하지 못하게 하고 궁궐의 모든 궁녀나 신하들로 하여금 문제의 침실 근처의 출입을 금지 시켰습니다.
이미 쇠약해질때로 쇠약해진 문제는 몸이 아파 신음소리를 냈으나 누구 하나 그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문제는 아흐레동안 병석에서 굶어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책에는 양제가 자기 지위를 잃을까봐 못졸라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렇게 무지막지한 패륜아가 황제가 되었으니 결과가 뻔하지 않겠습니까? 양제의 경우를 가르켜 사람들은 "태간사충"이라고 지나치게 간사한자는 충성스러움을 가장하여 행동하니 경계해야한다. 는 말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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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제는 황제로 있는동안 고구려를 네 번이나 침략했는데 첫 번째 침략에서 군대의 수효가 백13만 3천 8백명의 대군인데 선발대부터 마지막까지 출발하는데만 24일이 걸렸고 행군의 길이가 400킬로에 달했다고 합니다.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에게 대패하고 계속 침략했으나 고구려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나라의 제정이 어려운데도 그는 대운하 건설에 착수해 1천 5백킬로에 달하는 엄청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운하작업에 동원된 연인원이 무려 2백만명에 달했고 남자가 모자라 여자까지 노역에 동원 시켰던 것입니다.
역사이래 여자까지 끌어들인 것은 없는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인부들의 시체가 끊이지 않고 버려지곤 했던 것입니다.
양제가 운하를 지날때는 후궁의 선실만도 120여개가 달했고 수만명의 군대가 호위하고 비단 저고리를 입은 장교호위병만도 9천명이 따랐다고 합니다. 양제는 양현감이란 사람이 반란을 꾀하자 진압한후 양현감에게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사람은 구덩이파고 삼만명이나 죽이고 가족은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양제는 유흥을 위해서 돈을 아끼지 않고 썼으나 잘한 일에는 상을 줄 줄을 못랐습니다.
백성들이 고통이 심해지자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중국역사에 반란이 많기로는 수나라 말기처럼 많은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마큼 그의 통치기간은 백성들의 고통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후에 당나라가 통일한후 양제를 천자의 예로 장나 지내 주었는데 양제라는 시호는 이때 붙여진 것입니다. 시호란 사람이 죽은후 그 사람의 생전을 평가하며 정하는 호이기 때문에 대게 좋은호를 붙이는데 양제는 왕조가 바뀌지 않았어도 좋은호가 붙여지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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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란 이름의 뜻은 색을 좋아하고, 예를 무시한자, 예에 어긋나 백성을 싫어한자, 천에 거역하며 백성을 착취한자, 등에 붙이는 시호입니다. 여기서 흥미있는 사실은 남조 진의 후주가 나라가 망한 수의 신하로 되어 있다가 죽었을 때 당시 야제로부터 받은 시호가 이 양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일은 알지만 자신의 일은 모릅니다. 다른 사람에게 양이라고 보낸 시호가 자기 죽은 뒤 역시 양이라고 받으리라고는 양제 자신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궁무진한데 가끔 회의를 느끼게 하는 사건이 생길 때 마다 그럴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주곤합니다.
지난 초여름 무더위가 장마가 기승을 부릴 때 우리사회에는 끔찍스러운 사건하나가 발생했습니다. 치과의사인 아버지와 계모가 9살짜리 딸을 죽였다는 뉴스 보도 였습니다. 그내용 자체보다 죽이는 과정이 부모의 마음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더욱더 충격을 주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치과의사라면 계모도 분명 엘리트라는 인식을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어떤 인간이기에 그럴수 있느냐는 생각을 하게도 됩니다.
우리나라의 전설이나 소설로 계모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곳에서 나오는데 콩쥐팥쥐, 장화 홍련전 이야기가 대표적인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모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하는 김에 계모로 인해 훌륭한 인물이 죽는 경우와 계모로 인해 훌륭한 인물이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고구려의 호동왕자하면 어린아이들도 아!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에 나오는 사람 하고 금방 압니다. 호동왕자는 얼굴이 잘 생긴데다 용맹스럽고 활달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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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가 낙랑땅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그를 본 낙랑태수 최리는 한눈에 호동의 인물됨에 반했습니다. 최리는 호동이 자신의 적대국인 고구려의 왕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후대했습니다.
이때 최리의 딸인 낙랑공주도 호동왕자의 늠름한 모습에 반해서 둘이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 것입니다. 지극히 짧은 기간이었지만 둘이는 떨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낙랑을 떠난 호동왕자는 어느날 자신을 기다리는 낙랑공주에게 낙랑의 보물인 "자명고를 찢어라." 라는 짤막한 편지속에 그래야 자신을 만날 수 있다는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자명고 때문에 항상 외침을 막았던 낙랑인데 낙랑공주는 아버지와 나라를 배신한채 호동왕자를 위해 자명고를 찢게 되고 고구려는 호동왕자의 지휘아래 오랜 숙원이던 낙랑을 정벌하게 됩니다.
호동왕자의 사랑을 위해서 자명고를 찢었던 낙랑공주의 마음이야 오죽 했겠습니까?
아무튼 호동왕자는 고구려의 영웅으로 온나라 백성들이 받들어 찬양하고 날로 인기가 높아 갔습니다. 그런데 이때 왕비는 호동왕자를 낳은 친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호동에게는 계모가 되는 셈입니다.
투기가 많은 왕비는 자신의 친자식이 왕이 되지 못하고 호동왕자가 왕이 될 것 같아 호동왕자를 모함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왕마마 호동왕자가 신첩을 어머니로 보지 않고 여인으로 대하고 있사옵니다. 호동왕자를 궁궐에서 멀리 떨어지도록 해 주시옵소서." 원래부터 영특했던 대무신왕은 처음에는 곧이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왕비의 계속되는 모함에 나중에는 대무신왕도 호동왕자를 미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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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왕자 주변의 사람들은 해명해서 억울함을 풀라고 했으나 호동왕자는 "내가 해명을 하면 왕비님의 입장이 곤란해지지 않겠느냐? 그렇게 되면 아바마마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리는 것이 되지 않겠느냐?" 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때서야 대무신왕은 훌륭한 아들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죽게 한 자신의 부덕을 탓하면서 후회했다고 합니다.
어른의 스승이자 어린이의 벗인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 링컨은 노예 해방문제로 남북간의 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갈등이 있었던 미국 사회에 새 바람을 일으킨 인물입니다.
링컨은 1809년 켄터키 산골에서 창문이 하나밖에 없는 통나무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이름도 그림으로 그릴 정도이고 어머니는 그것마저도 못했던 사람입니다. 학교는 집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다녔는데 일년에 3개월 정도밖에 안 다녔습니다.
링컨은 평생돈안 학교라고는 6개월밖에 안 다녔습니다. 그러한 링컨은 9살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새로 오신 어머니는 링컨에게 새로운 인생의 갈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계모이면서도 링컨의 새어머니는 자기가 낳은 친자식만큼 더 자상스럽게 가르치고 보살폈습니다. 링컨이 책을 보며 공부하는 데 정성을 다한 새라 부시여사 덕분에 링컨은 미국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 큰 공헌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링컨은 훗날 자신의 새어머니에 대해 "나의 오늘 나의 희망이 모든 것이 다 천사와 같은 내 어머니 덕입니다." 고 말한 것입니다. 계모라 해도 링컨의 어머니의 경우가 진정한 어머니 상의 한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과학 문명에 크나큰 공적을 끼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에디슨은 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돼서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어머니께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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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걱정스런 얼굴로 왜 그러느냐고 묻자 에디슨은 "선생님이 저더러 저능아라고 그래요. 친구들도 자꾸 놀리구요."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학교로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선생님은
"댁의 아드님은 아무래도 저능아 같습니다. 에디슨은 매 시간마다 수업 분위기를 망쳐 놓습니다. 그 애는 국어 시간에도 그림을 그리고, 산수 시간에는 갑자기 큰 소리로 "선생님 별은 왜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을까요?" 하고 질문을 합니다. 그래서 "산수 시간에는 산수와 관계없는 질문을 하면 안돼." 하고 주의를 줘도 엉뚱한 생각만 합니다. 간혹 산수 시간에 "선생님 둘에 둘을 더하면 왜 넷이 됩니까?" 하고 엉뚱한 질문만 합니다."
어머니는 미안해하며 사과하자 선생님은
"아무래도 저로서는 그 애를 저능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군요. 앞으로 더 가르쳐봐야 소용없으니 학교에 안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에디슨의 어머니는 화를 내며
"내 아들은 저능아가 결코 아닙니다.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를 뿐이죠. 저도 더 이상 학교에 그 애를 맡기고 싶지 않습니다."
에디슨의 어머니는 다음날부터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직접 가르쳤습니다. 에디슨으로 하여금 많은 책을 읽혔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웠으나 2-3년이 지나자 혼자서 읽고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디슨은 책 속에서 배운 것을 혼자 실험해 보기 위해 실험실을 만들어 달라고 하자 어머니는 지하실에 실험실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화를 내며 실험실을 폐쇄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에디슨의 어머니는 "과학실험을 못하게 되면 저 애는 모든 것에 흥미를 잃고 불량한 소년이 되고 말지 몰라요." 하고 간청하여 에디슨으로 아혀금 실험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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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슨은 어머니의 사랑스런 가르침과 도움으로 전지, 전화기, 축음기, 전차, 영화촬영기, 전신기, 영사기 등 천여종의 발명품을 만들어 낸 위대한 발명가가 된 것입니다. 그는 훗날 어느 신문 기자가 어느 대학에서 연구하셨느냐고 묻자
"내가 다닌 대학은 내가 자란 집 지하실이고 나를 가르치신 교수님은 나의 어머니 낸시 에디슨 여사입니다." 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우리 생활에 편리함을 가져다 준 에디슨의 어머니야말로 훌륭한 어머니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인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네 살이 될 때까지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였고 국민학교 입학할 때도 심부름정도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들을 상냥하게 가르쳐주고 질문에도 자상하게 잘 대답해 주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학교 가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학교에 가서도 매맞고 돌아올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한 아들을 본 어머니는 "애야 걱정하지 말아라. 네게는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뛰어난 재질이 있단다. 너는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거야." 하고 위로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내성적이고 친구들과 좀처럼 어울리지 못하며 오히려 반 친구들의 공부에 방해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생활기록부에도 "앨버트 아인슈타인 - 아무 것에도 성공할 가능성이 전혀 없음." 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자식이 자신감을 갖고 공부하면 언젠가는 그 재능이 발휘될 것이라고 격려하며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마음이 따뜻하고 이해심이 많으며 매우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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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아인슈타인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주어 아인슈타인이 골똘히 빠져 있다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머리를 식힐 수 있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결국 이 세계적인 과학자는 남들이 모르는 아들의 능력을 이해하고 개발시킨 현명한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훌륭한 인물이 탄생된 것입니다.
참회록의 저자로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 유명한 인물로 알려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청년 시절에 난폭하고 방탕스런 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향락적인 생활 속에서 무질서하게 생활했고 거의 매일같이 싸워서 몸에 상처럴 입거나 흉터를 생기게 하고 들어오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아들을 바로 가르치기 위해 항상 기도하며 고민했습니다.
부드러운 말로 타이르기도 하고 기도도 해봤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성격은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들을 타이르는 어머니를 아들이 구둣발로 걷어차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화가 난 김에 어머니를 발로 차긴 했지만 속으로는 너무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방으로 들어가시는 어머니를 보자 죄스런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발로 찬 곳이 혹시 잘못되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어머니의 방문으로 가서 문틈으로 방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방안에는 어머니가 기도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주여! 그 애가 마음을 바로잡아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혼탁한 그 애의 정신이 맑아지고 선한 사람이 된다면 이 몸은 죽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부디 큰 사랑을 베푸사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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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어머니의 경건한 기도 모습과 그 목소리에 감동했습니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어머니" 하고 외치며 달려들어 고개를 숙인 채 울었습니다.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다스려 주십시오."
아들의 회개하는 모습을 바라 본 어머니는 눈 앞에 기적이 나타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놀랄만큼 달라져 술도 안 마시고 행동도 점잖아지고 공부에만 전념해 만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어머니의 끝없는 사랑과 자애로운 참어머니의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고대 중국에서 진나라가 망한 뒤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천하패권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을 때 왕릉이란 훌륭한 장수가 있었습니다. 왕릉은 한나라의 유방을 섬기고 있었는데 왕릉의 어머니는 초나라의 항우 진영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나라의 항우는 왕릉의 어머니를 이용해 왕릉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생각했던 것입니다.
왕릉은 어려서부터 효자로 이름나 있어서 어머니의 뜻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항우는 사람을 보내 왕릉으로 하여금 어머니를 만나도록 주선했습니다.
왕릉은 어머니가 잘 계시는가 먼저 사자를 보내게 됩니다. 왕릉의 사자가 오자 항우는 왕릉의 어머니를 극진히 대접하는 체 했습니다. 항우가 어머니를 잘 모신다는 것을 알게 하여 왕릉으로 하여금 초나라를 섬기도록 마음을 돌려 놓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자가 돌아갈 무렵 왕릉의 어머니는 사자를 가까이 불러서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거든 릉에게 잘 전해주시오. 한나라 왕은 덕망있는 분이니 그 분을 잘 섬기라고 말이오. 나 때문에 초나라로 돌아오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해주시오. 그리고 그 애가 내 소식을 묻거든 나는 이미 죽었다고 말해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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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마치자 왕릉의 어머니는 미리 준비한 칼로 스스로 자결하고 맙니다. 자식인 왕릉으로 하여금 선한 왕을 모시고 참된 길을 가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자신이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스스로 자식을 위해 죽었던 것입니다. 왕릉은 어머니의 죽음을 듣고 통곡하면서 더욱더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한나라에 충성하고 큰 공을 세워 훗날 한나라의 정승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자식의 장래를 위해 자신이 장애물이 될까봐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 끊었던 왕릉의 어머니의 자식사랑과 가르침은 보통 사람이 따르기 어려운 깊은 뜻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로 유명한 나폴레옹은 지중해의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 레티지아는 궁색한 살림을 하던 중에 큰아들 조세프와 나폴레옹을 낳고 잘 교육시켜 나갔습니다. 나폴레옹은 학교 교육을 받은 지 7년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파리의 육군 사관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나폴레옹은 가난한 코르시카 출생이었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시골뜨기, 가난뱅이라고 놀림을 받았고 진정한 친구도 없이 고독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고향으로부터 오는 어머니의 편지는 위안과 힘을 주었습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남들이 비웃더라도 마음을 상하거나 비굴해서는 안된다. 일찍이 부유한 가운데 영웅이 나온 예는 없다. 빈곤을 극복해 내는데는 검소함이 제일이다. 가정 무서운 적은 사치이다. 그리고 고독의 가장 좋은 친구는 독서다. 그러니 될 수 있는대로 위인전을 많이 읽어라. 세계의 위인이나 영웅들은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인의 숭배를 받게 된 것이다. 몽상과 공상은 내일로 미루거라. 어제 일을 반성하고 오늘은 앞을 보고 힘차게 걸어가거라. 우리집 살림이 어렵지만 이 어미는 앞날에 닥쳐올 어떠한 운명과도 맞싸워 나갈 각오가 되어 있다. 너 역시 이런 각오로 굳세게 싸워 나기길 어머는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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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어머니다운 편지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나폴레옹은 어머니가 보내준 편지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보내주신 <플루타크 영웅전>, <갈리아 전기> 등을 읽으면서 씩씩한 인물로 성장해 갔던 것입니다.
16살 때 소위로 임관된 그는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매우 검소한 생활로 일관했고 독서를 유일한 벗으로 삼았습니다. 나폴레옹이 얼마나 책을 많이 읽었는가 하는 것은 그가 만든 독서노트 속에 정치, 국방, 법률, 역사, 재정, 풍속, 지리, 인구증가, 사망통계에 이르기까지 각 방면에 폭넓은 기록을 남겼던 것입니다.
오직 독서를 벗으로 삼으라는 어머니의 훈계를 잘 따랐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근무시간 외에는 독서다. 속옷은 일주일에 한번 갈아입어도 밤에 잠을 덜 자고 하루 한 끼로 생활한다 할지라도 어머니의 말씀대로 고독의 벗은 독서 뿐이다."
고 열심히 공부한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자기 고향인 코르시카의 독립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실패하고 추방당했습니다.
코르시카에서 추방당한 그에게 행운이 찾아온 것은 반혁명군을 진압하는 데 앞장서 싸운 덕분에 그 공로로 소장이란 지위에까지 오르고 그로부터 불과 11년만에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게 됩니다.
황제의 자리에 있을 때 나폴레옹의 위세는 전 유럽에 뻗치게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나폴레옹의 영광이 길지 않으리라 예견하고 연금의 절반씩 저축하고 나폴레옹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금 가진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겠느냐? 욕심이 지나치면 가진 것도 잃게 되는 법이다." 고 훈계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황제가 되었을 때도 검소한 생활을 했으나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욕심이 지나쳐 결국 러시아 정벌에 실패하고 귀양살이로 괴로운 생활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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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귀양살이 중에도 어머님의 자상한 가르침을 잊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 처하든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코르시카에서 어머니의 자장가를 들으며 어머니께 재롱을 부릴 때 어느 누군들 내가 황제가 될 줄 알았겠는가? 코르시카에서 살던 어린 시절의 빈곤을 생각하면 지금의 이 생활은 고생이랄 것도 없다." 고 말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귀양지에서 죽었는데 훗날 나폴레옹의 세력이 부활되어 그의 동상이 세워지고 영웅처럼 받들어 졌습니다. 이는 오로지 아들 잘 되기만을 바라고 키워오신 어머니 레티지아 덕일 것입니다. 그녀는 영웅의 어머니답게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 내신 장한 어머니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의 많은 영웅 가운데 칭기스 칸은 정렬적이고 강한 인상을 주는 인물입니다. 칭키스 칸이 태어날 당시의 몽고는 대대로 부족국가 형태의 소규모 집단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의 두드러진 활약이나 성공은 더욱더 관심을 모으는 일입니다.
칭키스 칸이란 그가 몽고제국을 통합하여 황제로 추대 받았을때 오색빛깔의 새가 칭기스, 칭기스 하고 울었다는 데서 유래됩니다. 본래 칭기스란 "광명의 신" 이란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테무친은 그의 성장과정이 험난하고 헤쳐나가기 어려운 가시밭길이었습니다. 테무친의 아버지 예스게이는 몽고 유목민의 족장으로 용맹하고 그 세력이 주변의 여러 부족에 미쳤습니다.
그가 그의 아내 오옐륜과 결혼하여 테무친을 낳았는데 예스게이는 다른 부족과 싸움에서 포로로 잡은 나이 많은 사람의 이름이 테무친이라 그 포로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아들 이름도 테무친이라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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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무친이 9살이 되자 예스게이는 아들의 색시감을 구하기 위해 이웃 부족에 가서 부르테라는 여자 아이를 며느리로 삼기로 결정하고 돌아오던 중 타타르 부족의 잔치에 갔다가 평소에 원한이 있던 타타르 부족은 예스게이의 음식에 독약을 타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예스케이는 자기 몸 속에 독이 퍼짐을 알고 부하에게 이 사건의 전모를 아들에게 알리고 뒷일을 부탁하고 죽었습니다.
결국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동안 복종했던 모든 사람들이 테무친의 가족에게서 떠나가고 테무친은 고난과 궁핍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스게이의 옛 부하들도 모두 달아나고 남은 것은 어머니 오옐륜과 테무친 형제와 이복동생들 둘째 부인과 하녀 두세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번창했던 예스게이 집안은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옐륜은 현명하고 용감한 부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절망하지 않고 "오냐 다들 떠나거라. 그러나 여기 굳센 아버지의 피를 받은 테무친이 있는 이상 다시 옛날의 권세를 되찾고야 말 것이다." 고 말했습니다.
테무친의 가족은 고기를 잡거나 사냥으로 연명하며 나물을 캐먹으며 지냈습니다.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오옐륜은 귀족가문의 기품을 잃지 않고 아들들을 키우면서 틈만 있으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몰락해 이런 생활을 하고 있지만 너희는 언제는 그 근본을 잊어서는 안된다. 너희 집안은 훌륭한 집안이고 너희 아버지는 여러 부족의 어른이셨다. 그러니 너희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집안을 일으켜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의 이 곤경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 참고 애쓰거라. 너희에겐 그래야만 할 의무가 있는거다."
그리고 그녀는 조상들의 무용담과 설화나 전설을 들려주면서 아들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테무친은 어머니의 말을 들을 때마다 "어머니 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우리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야 말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어 모든 몽고 부족의 우두머리가 되고야 말겠습니다." 고 결의를 다졌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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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무친의 어머니는 형제들이 싸우면
"그림자 외에는 친구도 없는 말 꼬리 외에는 채찍도 없는 너희 형제끼리 싸우면 어떻하느냐? 너희들의 적은 다른 데 있다는 걸 명심하라." 고 타일렀습니다.
어머니의 가르침과 교욱으로 세력을 키워가던 중 테무친은 어느 예언자의 말을 믿고 동생 카살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 온 어머니는 옷 자락을 풀어 헤쳐 늙어서 쪼그라든 젖가슴을 내 놓은 채
"너는 이것이 보이느냐? 네가 먹던 젖이 바로 이것이다. 네가 먹고 난 뒤에 이 젖을 먹은 자가 누구냐? 같은 젖을 먹고 자란 아우에게 무슨 죄가 있어 너는 혈육을 해치고자 하느냐?"
어머니의 화난 모습에 테무친은 동생을 죽이지 못했습니다. 테무친에게 어머니는 그림자였습니다. 그녀는 자식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지만 잘못을 할 때는 언제나 훈계로서 바른 길을 가도록 했습니다.
테무친이 황제가 되었어도 그의 어머니는 항상 테무친이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지도해 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몽고제국의 영웅 칭기스 칸은 어머니의 훌륭하신 가르침과 훈계로서 천하를 호령한 역사의 영웅으로 남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씨 없는 수박으로 잘 알려진 인물로 우리는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를 잘 기억하지만 그의 성정과정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는 영원한 한국인의 표상입니다.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 우범근은 개화파의 한 사람으로 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실패한 후 일본으로 망명해서 사카이라는 일본 처녀와 결혼하여 낳은 첫 아들이 바로 우장춘 박사입니다. 그러나 그는 우장춘 박사가 4살 때 수구파가 보낸 고영근이란 자객에 의해 암살 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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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의 어머니는 자신의 남편이 조선인에게 암살당하고 자신은 일본인이면서도 항상 자식에게 한국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한국 이름을 쓴 것입니다.
"밟혀도 밟혀도 꽃을 피우는 길가에 민들레처럼 다시 일어나야 한다." 고 가르쳤습니다.
조센징이란 놀림을 받으면서도 그는 한국인의 자존심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려서 너무 가난하여 고아원에 맡겨지기도 했던 우장춘이지만 그의 어머니는 우장춘을 훌륭한 인물로 키우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너무 가난하여 남편을 묻었던 묘소를 팔아 아들의 학비를 대려 하자 모든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남편의 무덤을 팔아서 자식을 가르치느냐고 반대하면서 그녀의 행동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우장춘의 어머니는
"남편의 묘소를 지켜 자식을 망하게 하느니 자식을 가르치는 일은 죽은 남편도 바랄 것이다." 고 말하고 남편의 무덤을 팔아가면서 자식의 학비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과 노력 속에 우장춘은 일본 내에서도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우장춘은 해방이 되자 조국인 대한민국에 가려 하자 많은 사람들은 마땅한 실험실 하나 없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을텐데 왜 그런 볼모지로 가느냐고 한결같이 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상관없소. 나는 한국 사람이요." 하고 영광과 명예를 뒤로 하고 고국에 돌아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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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고국에 대한 애정에 대해 그의 어머니와 아내만은 이해했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길러 자기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일하게 하였으니 이제 지하에 가서 남편을 만나도 부끄럽지 않다." 고 우장춘을 한국으로 보낸 것을 다행으로 여긴 뒤 그로부터 3년 후 우장춘의 어머니는 남편의 곁으로 갔습니다.
우장춘 박사는 한국에 와서 그를 환영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여태껏 어머니의 나라인 일본을 위해서 일본인 못지 않게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나라인 조국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그리고 죽어서 내 뼈는 이곳 조국 땅에 묻고 싶습니다."
우장춘 박사는 우리나라 농촌의 현실을 잘 알고
"나는 우리 농촌 곳곳을 돌아보고 매우 놀랐소.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농촌은 점점 살기 어려워지고 농민의 식생활에 필요한 무, 배추 등의 작품을 생산하지 못할 정도요. 장다리(무, 배추 등의 꽃줄기)가 나와 꽃이 피었으니 고생하며 씨뿌려 가꿔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나는 지금부터 우선 무, 배추의 새로운 종자를 만들 것이오. 하루속히 우량종자를 생산하여 널리 퍼뜨려야 할 것이오." 고 말하고 새로운 종자 개발에 나선 것입니다.
우장춘 박사는 병충해에 강하고 사람 먹기에 좋은 우량종자를 개량해서 개량된 배추로 김치를 담그자 맛이 보통배추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우장춘 박사가 만든 개량종자를 보급하려 해도 농민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우장춘 박사는 다시 씨없는 수박을 만들었습니다.
그때서야 많은 사람들은 우장춘 박사의 말을 믿고 개량된 무, 배추를 심게 되었고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무, 배추는 바로 우장춘 박사가 만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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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 박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국민들이 모아 준 조의금도 쓰지 않고
"이 돈은 국민들이 나를 위해 주신 것이 아니고 내 가족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고 오로지 나의 어머니를 위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어머니 같으면 무엇을 하셨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는데 시험장 내에 우물을 파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고 그 돈으로 시험장 내 우물을 팠는데 지금도 부산에 가면 그가 만든 자유천이란 우물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수도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서 불편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조국을 위해 애썼던 그는 1959년 8월 10일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죽기전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고 "나의 조국이 나를 알아 주었다." 고 보람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는 죽을 때 자신의 공적이나 행적이 만인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생각에서 죽어도 천당이나 극락에 갈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너는 전생에 무엇을 하다가 왔느냐?"하고 물을 것이 아닌가? 그러면 나는 "너 저는 전생에서 배추잎 하나를 개량하고 왔습니다." 한단말야 그러면 염라대왕이 "그러냐? 별로 대단치 않지만 그만하면 착한 일을 하고 왔으니 저기에 있는 작은 연꽃 앞에 가서 앉게." 할 걸세 나도 뭐 그렇게 큰 연꽃에 가 앉겠는가?" 하면서 사후에 극락으로 갈 것으로 믿었던 분이며 착하게 살겠다고 항상 마음속으로 다짐하면서 지낸 분입니다.
우장춘 박사의 숭고한 고국애와 공적에 대해서는 이은상씨의 추도시에도 잘 나타나 있스니다.
흙에서 살던 인생
흙으로 돌아가매
그 정신 뿌리되어
싹트고 가지 뻗어
이 나라 과학의 동산에
백화만발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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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용기를 주고 곧은 길을 간 소박한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는 그의 어머니가 남편의 묘소까지 팔아가며 가르친 정성의 터전이라 생각지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상의 여러 기록을 찾아 보면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훌륭한 인물들은 어려서부터 가난과 어려운 역경 속을 헤쳐 나왔다는 사실과 남들처럼 좋은 학교나 정상적인 교육보다도 가정에서 어머님의 교육 속에 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서 역사를 이끌어가는 수많은 역사의 인물 중에 몇 편에 불과한 내용을 정리했을 뿐입니다. 읽으시는 분들이 자신의 마음으로 선의적으로 해석하고 바르게 이해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내 자신이 훌륭하신 어머님들의 행적을 논하거나 설명을 붙인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훌륭한 성인들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떤 생활의 지침이나 좌우명 혹은 생활 본보기란 것을 정해놓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바른 길을 가도록 노력했습니다. 참고로 동서양의 여러 인물 중 좌우명으로 많이 쓰이는 세분의 경우를 생각하면서 같이 교훈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 나라의 경우는 앞에서 율곡의 자경문을 소개했으므로 그 내용으로 대신하고 두 번째로는 미국의 독립운동가이며 독립선언서 기초위원이기도 한 벤자민 프랭클린의 경우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프랭클린도 너무 가난하여 학교에 낼 학비가 없어 1년만에 학교를 그만 두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양초와 비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많은 책을 읽으면서 꾸준히 노력한 결과 피뢰침, 안경 등 많은 발명품을 만들고 국가 발전에 필요한 많은 법률도 만들었습니다. 그는 일생을 살아가는 좌표로 삼은 13가지의 교훈을 만들고 그것을 수첩에 적어놓고 실천에 옮기며 살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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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13가지 교훈은 침묵, 규율, 절약, 근면, 성실, 정의, 중용, 청결, 보건, 평정, 순결, 결단, 겸손입니다.
프랭클린은 병원도 설립하고 법률도 만들고 소방대도 조직하고 인쇄기계도 개량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겨 정치가로 과학자로 출판없자로 미국 사회에 양키의 아버지로 영원히 기록되었던 것입니다.
참고로 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로 유명한 장사숙의 14가지 좌우명을 기록해 보겠습니다.
14가지 좌우명
1. 모든 말은 반드시 마음에서 우러나와 성실성과 신의가 있게 할 것.
2. 모든 행동은 반드시 조심하고 도탑고 공경스럽게 할 것.
3. 음식은 반드시 신중히 절제하여 알맞게 먹을 것.
4. 글자는 반드시 정자로 또박또박 알기 쉽게 쓸 것.
5. 얼굴의 표정은 언제나 단정하고 당당하게 가질 것.
6. 옷차림은 반드시 언제나 엄숙하고 단정하게 할 것.
7. 걸음걸이는 반드시 안정되고 정중하게 천천히 걸을 것.
8. 일 없이 앉아 있을 때는 반드시 자세를 단정히 하고 조용히 할 것.
9. 일을 할 때는 반드시 처음 시작할 때 계획을 잘 세울 것.
10. 말을 할 때는 반드시 실천할 것을 생각한 다음에 할 것.
11. 변함없는 덕을 꾸준히 굳게 지녀 나갈 것.
12. 승낙할 때는 반드시 신중을 기하여 응할 것.
13. 다른 사람의 선행을 보면 나의 선행처럼 생각할 것.
14. 다른 사람의 악행을 보면 내가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생각할 것.
끝으로 아버지가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보내는 편지 한 페이지를 소개해 보려 합니다.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제갈공명은 유비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크나큰 역할을 했을뿐 아니라 지략과 재능이 뛰어난 전무후무라는 말이 붙여질 정도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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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한시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쁜 사람이었으나 자식에 대한 애정 또한 대단했던 사랍입니다. 그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적어 봅니다.
"군자가 마음을 편안하고 고요하게 가짐으로써 자기 몸을 닦아야 하고 검소한 생활로서 자기의 덕을 길러야 한다. 검소하지 못하면 물욕이 생겨 맑은 마음을 잃어 군자로서 뜻을 밝게 지녀 나가지 못하고 마음의 편안함과 고요함을 잃으면 원대한 사업은 이루지 못한다.
대저 배움에는 반드시 안정되어야 하고 재주는 반드시 배워서 얻어야 하거니와 만일 배우지 아니하면 재주를 넓힐 수 없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서는 배움을 이루지 못한다.
만일 배움을 게을리하면 정묘한 도리를 깨닫지 못하게 되고 마음이 안정을 잃어 침착하지 못하면 올바른 성품을 이루지 못한다. 이리하여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게 되고 배움에 대한 의욕도 해마다 쇠퇴하여 마침내 마르고 떨어지는 늙은이가 되어 가난한 집에서 슬퍼하고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자식의 장래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간곡한 편지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두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편견된 고집과 독선적인 자기 주장만 고집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뜻을 무시하게 되면 가정과 사회와 나라를 망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보다 실천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불교에서는 보시라는 말이 있는데 다 주고도 더 주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으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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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도 주어도 또 주고 싶고 어떠한 보상도 요구하지 않는 어머니의 참사랑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에 필요한 참부모의 참사랑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조건없는 무한한 사랑을 주시는 어머니가 계시기에 앞에서 나오는 훌륭한 인물이 나올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동안 관심을 갖고 협력해 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드리면서 누구든지 이 편지는 세 번씩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