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전철에 오른 것은 밤 10시 가까운 시각. 이 시각이면 열차는 시발역에서 자갈치역까지 거의 텅 비어 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장애인이나 임산부 그리고 유아를 동반한 사람과 노인들이 앉도록 정한 교통약자석도 여유가 있는 편이다. 그곳에 우리 부부가 자릴 잡고 보니 맞은편엔 서너 살짜리 꼬마아들을 동반한 젊은 엄마가 앉았고 그 옆엔 중년부인이 타고 있었다. 다음 역인 남포역에서 빵모자를 쓴 작달막한 노인이 열차에 오르더니 옆에 와서 붙어 앉았다.
부산역을 지날 무렵 갑자기 꼬마아이가 “꽤~액!” 하고 비명에 가까운 날카로운 괴성을 질러댔다. 그러고 잠시 후 두 번을 더 연속으로 질러서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제야 아이엄마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니 필리핀 여성처럼 생겼다는 걸 알았다. 아이엄마가 우리말을 알아듣는가를 확인하느라 “우리나라 사람 맞나요?”하고 물었다. 그녀의 옆에 앉은 중년부인이 세 번째 아이의 비명소리에 얼굴을 찡그리는 걸 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러지 못하도록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엄마는 아이가 귀여워서 그러는지 얼굴을 맞대어 부비는 장난을 걸어서 그 괴성을 즐기고 있었다. 내가 아이엄마에게 묻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옆 좌석 노인이 용수철처럼 튀면서 나를 속사포로 공격했다. “아니, 얼마나 좋아요? 꾀꼬리소리 같잖아요?” 그가 술 냄새를 풍긴다는 걸 그때 알았다. 너무나 뜻밖이어서 목소리를 낮추어 한 마디 했다. “당신에게 한 말이 아닌데 왜 나서느냐? 술이 취해서 그러느냐?” 그는 나의 반말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내가 일흔다섯이고 대학교수를 지낸 사람”이라는 말을 크게 떠벌이면서 아이엄마에게 아첨하는 언행으로 ‘글로벌’ 어쩌고 하는 영어나부랭이를 지껄여댔다. 그렇게 해서는 성에 차지 않는지 아예 일어서서 아이에게 바짝 다가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아내가 보니 그는 뒷발질로 날 차는 시늉을 두세 차례 아이에게 해보이더라고 했다. 극구 사양하는 아내를 동반하여 외식을 했던 날인데 결국 열차 안 소동 때문에 기분을 잡치고 말았다.
아내는 어쩌면 내년 자신의 생일엔 외출을 거부할 수 있는 명분을 하나 더 벌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진 “이제 다 늙어가지고 생일은 무슨 생일?” 정도였는데 꼴불견 노인네들까지 득실거리는 세상이라 이제 동반외출 자체를 거부할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엔 사무실 잔무정리가 늦어져 밤 11시를 약간 넘겨 전철 승강장에 내려섰다. 검정색 바지에 같은 색 티셔츠를 조폭처럼 걸친 건장한 노인이 고래고래 소릴 지르며 휴대폰 통화를 하고 있었다.
스포츠형으로 짧게 깎은 머리에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었다. 어디서 한 잔 걸친 것이 분명했다. 그는 좁은 승강장 구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열차를 기다리는 10여 분 동안 쩌렁쩌렁 울리도록 악을 써댔다. 내가 그 자리를 피해서 다른 칸에 탔으면 될 것을 통화를 끝내지 않고 열차에 오르는 그를 떠밀다시피 하면서 통화를 끝내고 다음 열차를 타라고 주문했다. 그렇게 달리는 열차 안에서 그와 둘이서 옥신각신 볼썽사납게 시비가 붙었고 순찰하는 지하철 보안관이 퇴근한 뒤라 직원 두 명이 달려왔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던 그는 파출소로 가자는 그들의 말에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서울 남부터미널역 앞처럼 부산에서 가장 혼잡한 환승역의 한복판에 설치된 서면역 승강기는 항상 초만원이다. 이 승강기 이용객은 대부분 노인들이라 그런지 승강기 안에서는 분쟁이 자주 일어난다. 명판에 표시된 15명 정원은 10명도 제대로 못 태우고 경고음이 울리기 때문에 교통공사가 승객들 간에 싸움을 붙이는 꼴이다. 중량초과로 문이 닫히지 않아도 나중에 탄 사람은 내릴 생각을 않는다.
오히려 딴청을 부리다가 내리라고 말하는 사람을 향해 공격하기도 한다. 또 새치기한 노인은 나무라는 노인에게 시비를 거는 진풍경도 종종 벌어진다. 노인들의 실수하는 매너를 꼬집은 동영상이 SNS로 도착했다. 놀랍게도 영상을 만든 그룹은 실버들이다. 신세대와 구세대 간의 갈등을 해소하여 서로 소통하길 바란다며 만들었다. 자신이 노인이면서 “나도 노인이 싫어!”라고 한다니 이런 세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영상제작 팀이 분석한 ‘노인들이 싫어하는 노인들의 유형’은 세 가지였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양보를 강요하거나 처음 보는데 다짜고짜로 반말하는 사람들 그리고 줄서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새치기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젊은이들이 꺼리는 노인의 유형이기도하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젊은이들에게 어른 대접을 받으려는 노인들이 더 싫다는 게 영상 제작진들의 말이다. 그들도 모두 65세 이상으로 구성되었고 직접 스마트폰으로 현장을 촬영하여 편집을 통해 미디어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전하고자하는 메시지는 아주 간단하다.
노인들과 젊은이들 간의 세대갈등을 줄여보자는 것이다. 어른들은 젊은이들에게 버릇없다고 혀를 차고 젊은이들은 그러한 노인들이 불편하다며 피하고 있는 세태를 치유코자 한다. 이들은 서로 네 탓만 하면 갈등을 풀 실마리가 없는 만큼 어른이 먼저 솔선수범하자는 주장을 펼친다. 다시 말해 젊은이들이 싫어하는 노인유형을 스스로 고치면서 반성하자는 것이다. 최근에 제작한 동영상은 '노인 에티켓 3부작'이다.
아무리 배가 고프더라도 급식소에서 새치기하지 말자는 것이 식사예절 편이고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로 통화하지 말자는 것이 휴대전화 예절 편이며 처음 보는 젊은이들에게 반말하지 말고 반드시 호칭을 부르면서 존대하자는 것이 대화예절 편이다. 노인들은 나이가 들수록 남에 대한 배려나 체면 수치심이 줄어든다. 노인들이 먼저 깨닫고 매너를 지켜야 젊은이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동영상 제작진들이 내건 캐치프레이즈도 ‘세대갈등을 세대공감으로’다.
노인세대의 질서의식과 예절을 어떻게 하면 다시 세울 수 있을까. 어렵겠지만 위의 영상 제작팀처럼 지속적으로 계도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다. 6.25동란과 보릿고개를 모두 겪었기에 작금의 노인세대들은 그만큼 눈치만 남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눈치란 것도 알고 보면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이기심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노인들이 선진외국을 찾든 그쪽에서 우리나라를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든 그들은 어떻게 질서와 예절을 지키는가를 유심히 살피고 그대로 따르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