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우의 미세한 풍경]
내게는 현금 쓸 권리가 있다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카드만 받는 일부 커피점, 한국은행법의 ‘현금 무제한 통용’ 규정 위반
서울 버스 25%는 현금 안 받아… 효율성이란 이름으로 소비자 강제
현금 고집할 생각 없지만, 편리란 이유로 현금 쓸 자유 빼앗기는 것
서울 신설동에 허름한 순댓국집이 있다. 간판도 없고 점심 장사만 한다. 여든 넘은 주인 할머니의 푸짐한 인심과 손맛 덕에 손님이 많다. 이 집은 카드 결제가 안 되고 현금만 받는데 계좌 이체도 안 된다. 현금 없이 온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손님에게 돈을 꾸고 계좌 이체를 해주기도 한다. 왜 카드 안 받느냐고 따지는 사람은 없다. 할머니 권력에 얌전히 복종한다.
그 흔한 카드 스티커 한 장 없는 것으로 보아 순댓국집은 카드 가맹점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카드 결제 거절은 불법이 아니다. 그렇다 해도 연 매출 2400만원이 넘으면 현금 영수증을 끊어줄 의무가 있지만, 혼자 부엌일에 정신없이 바쁜 할머니에게 현금 영수증 달라고 할 용기는 내게 없었다. 만약 현금 영수증 가맹이 안 돼 있다면 매출이 얼마냐고 물어야 하는데, 그다음 대답은 너 뭐 하는 놈이냐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할머니 장사 방식이 못마땅하다면 안 가면 그만이다.
반대로 스타벅스를 비롯한 몇몇 커피 체인은 현금을 받지 않고 오로지 카드만 받는다. 이것 역시 배짱 장사다. 신용카드 한 장 없는 무능력자는 손님으로 받지 않겠다는 뜻인지, 카운터 앞에서 동전 세면서 가게 분위기 깨지 말라는 뜻인지 모른다. 이에 대한 스타벅스의 입장은 “카드 전용 점포임을 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싫으면 딴 데 가라는 소리다. 나는 커피집에서 현금을 쓰고야 말겠다는 사람은 아니지만 순댓국집의 카드 결제 불가와는 다른 불편한 감정이 생긴다. 전등 켤 수 있으니 촛불 켜지 말라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것은 명백한 불법이다. 한국은행법 48조는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한국은행권은 언제 어디에서든 통하도록 보장받는 화폐로서 모든 거래에 무제한 통용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은행법에는 처벌 규정이 없다. 게다가 현금 사용률이 크게 낮아지다 보니 별 민원도 발생하지 않는다. 한국은행은 그래서 몇 년 전부터 ‘현금 사용 선택권을 보장해 달라’는 캠페인을 벌이는 데 그치고 있다.
‘현금 결제 불가’가 커피집 아니라 버스라면 문제는 다르다. 현금 안 받는 버스가 크게 늘면서 신용카드 없는 노인이나 어린이, 외국인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고 한다. 서울은 버스 4대 중 1대가 현금을 받지 않고 대전은 전체 버스가 그렇다고 한다. 이 사안을 일부 이용자의 불편 문제로 보는 것은 본질을 흐리는 것이다. 엄연히 조폐공사가 돈을 찍어내고 있으며 화폐는 경제의 기본 도구다. 신용카드나 무슨 페이 같은 디지털 결제 수단은 사기업이 만들어 내 수수료를 챙기는 일종의 부가가치 산업이다.
현금 쓰는 사람이 적다고 해서 버스 같은 공공 서비스 분야의 현금 결제를 완전히 차단하는 것은 효율성이란 이름으로 소비자를 통제하고 조종하는 것이다.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결제를 할 수 있으니 내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기본권을 침해하는 기업과 방조하는 국가에 순응하는 것이다. 버스가 “싫으면 타지 말라”고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당신이 무슨 이유에서든 신용카드를 쓰지 않고 스마트폰도 쓰지 않는다고 치자. 이미 엄청난 불편을 겪고 있을 것이다. 모든 온라인 상거래와 민원 서비스에서 배제되고 돈을 보낼 때마다 은행 창구나 ATM 앞에 가야 한다. 그래도 생활을 영위할 수는 있다. 그런데 이제 버스도 타지 못하게 됐다. 신용카드 소지가 국민의 의무라도 된단 말인가.
기술 발전은 막을 수 없는 것이지만 인간이 기술에 종속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텔레스크린은 벽마다 붙어있는 감시 장치였지만 스마트폰은 24시간 우리를 따라다니는 감시 장치다. 우리는 무슨 앱을 설치할 때마다 연락처와 사진과 카메라에 접근을 허용하면서 감시를 자청한다. 버스 타고 내릴 때마다 기계는 ‘삑’ 소리를 내며 내가 누구인지 언제 어디로 이동했는지 기록한다. 기계는 점점 인간 같아지고 인간은 갈수록 기계를 닮아간다. 이것은 20세기 수많은 작가가 공통적으로 예견한 디스토피아의 모습이다.
에리히 프롬은 ‘1984′ 해설에서 “’수백만 명이 어떻게 틀릴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구호와 ‘어떻게 소수가 옳을 수 있단 말인가’라는 구호 아래 진리가 성립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편리하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자유를 포기한다. 나는 버스 탈 때 현금을 고집할 생각은 없지만, 현금 쓸 권리를 빼앗기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