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실에 놓인 침대에는 이미 미라가 된 여인이 누워 있다. 꽃다웠던 청춘. 백설공주라 불렸던 소녀는 백설공주처럼 누워 부활을 기다린다. 소설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리고 전도유망하던 청년이 여자친구 둘을 살해한 죄로 10년을 복역하고 나오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야기가 소설이 되기 위해서는 사연이 있어야 하고, 반전이 있어야 하겠기에 그 청년, 토비아스는 그 살인 사건의 범인이 아니어야 한다. 누구라도 예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구인가? 10년 전 사건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소설은 그 비밀을 찾아 숨막히는 여정을 시작한다.
소설, 특히 이와 같은 추리 소설 내지는 미스터리 소설을 을 읽게 되면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이 소설을 영상으로 옮기는 상상을 한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대개의 소설의 경우 영화인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은 8부작, 16부작 시리즈를 떠올리게 한다. 걸려 있는 사건이 많은 것도 아닌데도 그렇게 떠올리는 것은 장면마다 의외의 내용들이 튀어나오고, 반전이 거듭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범인인가 싶다가, 다른 사람이 의심되고, 또 다른 전개로 반전이 이뤄진다. 그 반전의 장면이 바로 드라마의 엔딩 장면이다. (물론 소설에서는 이 반전의 장면마다 독자의 궁금증을 최대화시키기 위해 적지 않은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친절하지 않으면서도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드라마의 수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드라마가 연상되는지도 모른다.)
파고들수록 사건은 집단적 침묵이 일조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자신이 억울한 것인지, 아니면 진짜 범인인지도 확신이 없는 토비아스는 이미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데 의지가 없다. 따라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외자가 필요하다. 도시에서 쫓겨나듯 그 마을로 들어온 아멜리, 그리고 개인적인 문제를 갖고 있는 형사 콤비 미아와 보덴슈타인이 그들이다.
어느 사건도 대개 그렇듯이 10년 전의 사건, 그 10년 동안에 벌어진 일들, 그리고 10년 후 토비아스가 출소한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 모두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일들이었다. 욕망의 크기가 클수록, 강력할수록 그 인간은 높은 자리로 올라간다. 그 높은 자리에서 다시 욕망을 발산한다. 그렇게 악(惡)은 유지되고 번식한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기생하는 이들의 작은 이기심은 큰 악의 배양토가 된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면서 누군가를 구렁텅이로 몰아내고는 겉으로는 평온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가장한다.
그러나 그런 가장(假裝)의 평화는 상당히 견고한 것이었지만 어느 순간 작은 균열로도 무너질 수도 있는 허약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의 경우 10년을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돌아온 토비아스라는 존재, 그리고 10년 전의 백설공주를 닮은 한 소녀의 존재가 그 작은 균열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추악한 진실이 드러난다. 누구라도 그 진실의 추악함에서 발을 뺄 수 없을 만큼 지저분한......
소설은 이 이야기들을 촘촘하게 엮어내고 있다. 어찌 보면 이 소설에서는 필요 없을 듯한 피아와 보덴슈타인이라는 형사 콤비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덧대는데, 그게 숨막히게 전개되는 사건 속에서 숨 쉬게도 하고, 더욱 숨막히게도 하는 요소다. 그런 것까지 적절하게 배치해가면서 다양한 인물들의 이기적이고 추악한 면모를 개성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이 두 형사가 다음 소설에도 등장한다는 것을 보면, 그들의 개인사가 여기서 반드시 필요하기도 했다.)
“눈처럼 희고, 피처럼 붉고, 흑단처럼 검어라.”
‘백설공주’라는 존재, 또는 그런 관념을 생각해본다. 사람들은 이상적인 인물을 잘 만들어낸다. 한 존재를 마음 속에 두고, 그 존재를 이상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 존재를 사랑한다 여긴다. 그런데 그게 정말 사랑일까? 현실의 존재가 절대 백설공주와 같은 이상적일 수 없는데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백설공주라는 것, 백설공주라야 한다고 생각해버리면, 그 사랑은 다름아닌 집착이며, 허공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마주하는 현실은 백설공주에 대한 사랑이 아닌, 현실의 사랑, 인간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말로 백설공주에게는 죽음이 필요한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