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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윤씨가는 과연 국부(國富)였나?
[녹색의장원 녹우당 32] 재산상속 '남녀균분' 덕에 큰 부자로
오마이뉴스 기사 등록 : 2007.04.23. 10:01l최종 업데이트 07.04.23 14:10
글 : 정윤섭(cul70)
국부(國富)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많은 재산을 소유했던 녹우당 해남윤씨가는 과연 얼마간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을까?
부자가 3대를 못 넘긴다는 말이 있지만 500여년의 세월 동안 해남윤씨가에서 그 많은 재산을 잘 유지보존해온 것을 보면 거기에는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집안 나름의 재산경영 시스템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양반사대부가의 재산경영은 분재기(分財記)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는데 분재기에는 자손들에게 노비나 토지를 어떻게 분배하고 나누어 주는가에 대해 낱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소유형태와 상속 방법 등을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해남윤씨가에는 고산 윤선도의 분재기를 비롯하여 공재 윤두서의 분재기 등 많은 분재기들이 전해오고 있는데,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준 내역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재산 정도를 짐작하게 한다.
일종의 재산 상속문서라고도 할 수 있는 분재기에는 죽기 전 자식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는 허여(許與)문기, 죽고 나서 재산을 나누는 화회(和會)문기 등이 있다. 재산을 둘러싼 다툼을 막기 위해 대부분은 죽기 전에 이러한 문서를 남겼으며 분재기는 재산분배로 위한 다툼을 막기 위한 장치라고도 할 수 있다.
남녀가 똑같은 재산상속
해남윤씨가의 재산경영 스타일은 어떤 것이었을까? 당시 성리학을 신봉하는 집안에서 오늘날처럼 이윤을 중요시 여기는 경제 논리를 적용하기 어려웠겠지만 집안에 내려오는 가훈과 문서들을 통해 보면 근검절약과 적선을 강조하는 지극히 유교적 이념을 실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해남윤씨가의 재산이 이처럼 막대하게 늘어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고려 말 조선중기까지도 실시되었던 '남녀균분제'의 재산상속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 무렵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남녀가 똑같이 재산을 나누어 가지는 '남녀균등분배'의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였다. 그러나 장자에 의한 제사승계와 함께 대대로 내려온 재산을 온전히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장손에게 더 많은 재산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현실론이 대두되면서 장자상속 중심으로 흘러감에 따라 남녀균분의 원칙은 깨지고 만다.
이때까지만 해도 보통 결혼은 남자가 여자의 집에 장가드는 '남귀여가혼(南歸女家婚)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동안까지도 처가에서 한동안 살았는데, 이 때문인지 몰라도 아직도 외가에 대한 추억과 그 친밀감이 더 깊은 것은 이 같은 오랜 전통의 습성인지도 모른다. 남녀균분의 원칙도 이러한 가족개념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해남윤씨가의 성립과 재산형성 과정을 살펴보면 남녀균분의 원칙이 매우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을 알 수 있는데 그 첫 번째 사례가 해남윤씨가의 중시조인 광전이 고려공민왕 3년(1354년) 아들 단학에게 남긴 <노비허여문기>에서 엿볼 수 있다.
광전은 아들 단학에게 '봉제사(奉祭祀)'의 목적으로 이 노비문건을 남기는데 노비문건에 나오는 노비는 광전의 처인 함양박씨가 데려온 신노비로 당시 남녀균분의 원칙에 의해 시집간 딸에게 분배된 종이었다.
또한 녹우당의 입향조인 어초은 윤효정은 남녀균분의 덕을 가장 많이 본 사람으로 당시 해남지역의 가장 큰 세력가이자 부호인 정호장의 딸에 장가를 들게 되어 분가를 하자 막대한 재산을 분배 받아 녹우당에 튼튼한 기틀을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도 처가 덕을 잘 보면 경제적으로 쉽게 자리를 잡지만 당시는 제도적으로 만들어졌던 셈이다.
남녀균분에서 장자상속으로
이러한 처가로부터의 재산이 분배되어 오는 것과 함께 또 하나 부를 축적 시키게 만든 것은 양자의 입양이었다. 양자로 들어오게 되면 재산을 친부와 양부로부터 물려받게 되는데 고산 윤선도는 대표적인 경우다.
윤선도의 양부인 윤유기의 처 구씨(具氏)로부터 받은 화회문기를 보면 노비 144구(口 )중 윤선도는 노비 50구를 받는다. 윤선도는 양부와 외가에서도 재산을 분배 받아 재산규모가 크게 불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경우는 여러 대에서 양자로 대를 잇는 해남윤씨가의 모습이기도 하다.
해남윤씨가는 어떻게 보면 '일거양득'으로 많은 재산을 얻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윤씨가부명어일세(尹氏家富名於一世)'라 할 정도로 가장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던 때는 대종손의 경우 시기마다 얼마간의 차이는 있지만 노비는 500~600여구, 전답 1000~2300두락의 재산을 소유할 때였다.
노비 500여구는 당시 가장 많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매우 큰 규모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토지는 1두락을 보통 1마지기로 보는데 한 말의 씨를 뿌릴 수 있는 면적으로 평지와 산지 또는 토지의 비옥도 등에 따라 면적이 약간씩 다르지만 보통 논의 경우에는 200평, 밭은 300평을 한 두락으로 보았다. 2000여 두락이라고 했을 때 밭을 기준으로 한다면 약 60만평 가량의 규모에 해당한다. 지금의 규모로 보아도 상당히 넓은 면적을 경영했음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이처럼 많은 재산을 경영하고 있었지만 17세기를 넘어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남녀균분의 원칙이 무너지자 재산상속의 개념이 장자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양반사대부가들이 장자상속의 방법을 택하게 되는데, 해남윤씨가 역시 균분에 의한 재산의 흩어짐을 막기 위해서는 한사람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어야 했는데 그것은 봉제사의 목적으로 장자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었다.
소위 제사를 지내는 대가로 주는 '봉사조(奉祀條)'의 목적으로 전 재산의 많은 양을 봉제사로 남겨두고 나머지를 서로 분재를 하는 방식이다. 봉사조는 장손의 소유권과 권리가 매우 커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처럼 물려받은 봉사조를 장손이 모두 임의대로 처리할 수 없는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분재기속에는 이를 지키게 하는 일종의 약조를 남기고 있는데 공재의 아들인 윤덕희가 남긴 '윤덕희 12남매 화회문기'에서 이러한 강력한 규정을 엿볼 수 있다.
이 화회문기는 14개조로 된 서문이 있다. 서문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종가의 경제력을 유지시키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서문에서는 종가의 소유 땅을 환속하게 하거나 종손도 절대 매매할 수 없도록 하고 각 처에 산재하여 있는 종가의 땅은 종손도 마음대로 이매할 수 없도록 규정하여 제도적으로 종가의 경제력을 안정되게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해남윤씨 종가의 경제력이 지속적으로 보존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은 이때의 문기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 여행의 기록입니다.
길 위의 호남 선비, 시조문학의 최고봉 고산 윤선도(3)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시민의 소리 기사 승인 : 2018.03.05. 16:49
윤선도(1587∼1671)는 8세 때인 1594년에 인생에 중대한 전환점을 맞는다. 강원도 관찰사를 한 작은아버지 윤유기의 양자로 입양되어 해남윤씨 가문의 대종(大宗)을 잇게 된 것이다.
서울 명동성당 건너편에는 ‘한국YWCA회관’이 있는데, 근처에 ‘윤선도 집터’라는 표시석이 있다. 1988년 12월 한국관광공사에서 세운 것인데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표시석의 글을 읽어보자.
윤선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작가이다. 그의 시조는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대 시가의 쌍벽이라고 평가된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어부의 생활을 노래한 <어부사시사>와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달을 다섯 벗으로 비유하여 지은 <오우가>가 유명하다.
그렇다. 고산 윤선도는 송강 정철(1536∼1593)과 더불어 조선시대 시가의 쌍벽이었다. 송강에게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이 있다면 고산에겐 오우가와 어부사시사가 있었다. 그런데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전라도 창평(지금의 담양군 창평면)에서, 오우가와 어부사시가는 해남 금쇄동과 완도 보길도에서 만들어졌다. 우리말의 조형성을 가장 아름답게 꾸민 두 대가의 작품이 모두 남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 긍지를 느낀다. 전라도가 시가문학의 보고(寶庫)라는 점이 자랑스럽다.
아쉽게도 표시석 안내문에는 이곳이 명례방(明禮坊)으로서 해남윤씨의 종가인 윤유기의 집인데 윤선도가 양자로 입양되어 대종을 이었다는 글은 없다.
그러면 여기에서 해남윤씨 가문을 살펴보자. 홍우원이 쓴 윤선도 시장(諡狀) 첫 머리에는 ‘윤선도는 시조 윤존부의 16세손’이라고 적혀 있다. 윤존부는 고려시대 중엽의 인물로 보이고, 윤선도의 고조부 어초은 윤효정(尹孝貞 1476∼1543) 때에 이르러서 해남윤씨는 해남에서 사족(士族)의 길을 가게 된다. 강진 덕정동에 살고 있던 윤효정은 금남 최부(崔溥 1544∼1504)에게 글을 배우기 위해 해남에 왔다. 『표해록』으로 유명한 최부는 강직하고 청렴한 선비였는데 해남이 처향이었다.
그의 호 금남(錦南)도 최부가 태어난 금성(나주의 옛 지명)의 ‘금(錦)’과 처가인 해남의 ‘남(南)에서’ 한 자씩 따온 것이다. 안타깝게도 최부는 김종직(1431∼1492)의 제자로 붕당했다는 이유로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戊午士禍)때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를 가서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때 참형을 당했다.
한편 윤효정은 해남의 대부호인 호장(戶長) 정귀영의 사위가 되었고, 당시 자녀 균분 상속의 관례에 따라 그의 부인은 시집오면서 막대한 재산을 가져왔다. 윤효정은 이 재산을 바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국부(國富)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백련동(지금의 연동)에 터를 잡고 살면서 가업을 일으켰다. 윤효정은 6남(윤구 · 항 · 행 · 복 · 후 · 종)을 두었는데, 윤구· 윤행 · 윤복 세 아들이 문과에 급제하는 등 가문이 크게 번창했다.
귤정 (橘亭) 윤구(尹衢 1495∼1549)는 윤효정의 장남이자 윤선도의 증조부이다. 그는 151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에 이르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으나 1519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영암으로 귀양 왔다. 윤구는 3남(홍중, 의중, 공중) 1녀를 두었고, 윤의중(1524∼1590)은 윤선도의 조부로서 대사헌 · 형조판서 등을 하였다.
윤복(1512∼1577)은 1565년에 안동도호부사를 하였고 이후 충청도관찰사를 했다. 그는 퇴계 이황과도 교류했으며 강흥 · 흠중 · 단중 세 아들과 외조카 문위세를 이황에게 보내어 수학케 했다. 이를 계기로 문위세의 매부 죽천 박광전이 1566년 겨울에 안동 도산서당에 가서 이황에게 공부를 배웠다.
한편 윤항(윤효정의 차남)의 아들 윤관중은 『미암일기』를 남긴 미암 유희춘의 사위가 되었는데 유희춘은 최부의 외손자이다.
그러면 윤선도는 어떻게 해남 윤씨 대종이 되었을까? 해남 윤씨 집안은 윤효정 – 윤구 - 윤홍중으로 종가가 이어졌는데 윤홍중은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동생인 윤의중의 둘째 아들 유기를 입양하여 후사로 삼았다. 기묘하게도, 윤유기 역시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윤의중의 아들이자 윤유기의 친형인 윤유심의 셋째 아들 윤선도가 큰아버지인 윤유기의 양자가 되었다.
遺産
동아일보 기사 입력 : 2005.02.11. 오후 7:05
황호택 논설위원
조선시대 양반 집안에서는 재산의 상속과 분배에 관한 분재기(分財記)를 작성했다. 가옥, 토지, 노비, 가재도구를 아들과 딸에게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를 상세하게 기록한 문서다. 현존하는 분재기 중에서 ‘서애선생모부인곤문기(西厓先生母夫人昆文記)’와 ‘율곡(栗谷)선생남매분재기’는 모두 보물로 지정됐다. 아버지가 죽기 전 직접 재산을 분배해 준 분급문기(分給文記)와 아버지가 죽은 후 형제들이 합의해 재산을 분배하는 화회(和會)문기도 있다.
▷전남 해남군 삼산벌의 대지주 해남 정씨 집안에는 자손 균분(均分)의 전통이 있어 시집간 딸에게도 재산을 떼어주었다. 고산(孤山) 윤선도의 4대조인 어초은(漁樵隱) 윤효정은 그 집에 장가들어 엄청난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어초은은 재산의 장자(長者) 상속 전통을 세웠다. 처가 유산(遺産)으로 불린 재산을 장손(長孫)에게 집중시킴으로써 해남 윤씨 집안에서는 윤선도와 윤두서라는 걸출한 문인과 예술가가 배출된다. 자손 균분의 해남 정씨가 장자 상속의 해남 윤씨 집안을 중흥(重興)시킨 셈이다.
▷부잣집 자식으로 태어난 것을 영어식 표현으로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고 한다. 부잣집에서 은식기(silverware)를 쓴 데서 생긴 말이다. 미국에서는 부유층 자녀가 사립대를 거듭 중퇴하거나 졸업 후에 일자리를 구하지 않고 술, 마약, 섹스에 탐닉하는 현상을 ‘은수저 증후군(Silver spoon syndrome)’이라고 한다.
▷부모가 생전에 분재를 제대로 해 놓지 않으면 자손이 조상의 기일이나 명절에 만나 우애를 나누는 대신 분란을 키우기 쉽다. 설 연휴에 아버지가 물려준 토지의 분배를 둘러싸고 이복(異腹)형제 간에 엽총 참극이 벌어졌다. 유산은 해남 윤씨 집안에서처럼 인물을 키우는 자양분이 될 수도 있고, ‘은수저 증후군’처럼 자손을 망치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자손에게 갈등과 증오의 씨앗이 되는 유산이라면 차라리 사후(死後) 사회 환원의 유언 공증(公證)을 해 두는 편이 나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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