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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묵상글 ( 대림 제1주일. - 기다림. 등 )
* 김찬선 신부님: 아직 / 05 : 33 추가
* 키엣 대주교님: 아직 / 08 : 1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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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다림>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오시는 분을
맞이하는
설레는 기다림
오시는 분을
믿는
오롯한 기다림
오시는 분을
바라는
애틋한 기다림
오시는 분을
사랑하는
따뜻한 기다림
오시는 분을
닮아가는
살가운 기다림
오시는 분께
나아가는
벅찬 기다림
오시는 분께서
기다리시는
우리의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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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2.01 05:22
- 대림절의 마음 관리
오늘 첫째 독서 예레미야서는 “보라, 그날이 온다.”라고 예언합니다.
그런데 그날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날이고,
오늘은 주님께서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의 첫날입니다.
그리고 이 첫날에 복음은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우리가 해야 할 것 두 가지를 얘기해줍니다.
하나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입니다.
다른 하나는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해야 할 것인데
먼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겠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며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마음 관리입니다.
한자어로는 조심(操心)입니다.
그런데 조심이란 말을 그대로 풀이하면
조(操) 자가 ‘잡다, 쥐다, 조종하다’라는 뜻이니
마음을 잡는다는 뜻이고, 내 마음을 내가 조종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함부로 날뛰지 않도록 꽉 잡는 것이요,
핸들을 꽉 잡듯이 내 마음을 꽉 잡고 내가 조종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하는데 우리는 자주 조심하지 않고 방심합니다.
방심(放心)은 조심의 반대말인데
잡았던 마음을 다시 놓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은 마음을 놓게 하고
마음이 물러지게 하는 것 세 가지를 꼭 짚어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방탕인데 방심하면 방탕하게 되고,
방탕하게 되면 마음이 물러지게 되겠지요.
마음을 꽉 잡지 않고 놓으면 마음이 제멋대로 날뛰어 방탕하게 되고,
이 방탕이 뭘 하려고 마음을 먹어도 마음이 물러지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만취인데 이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사실 술처럼 마음을 무장해제 하게 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술 먹을 때 더 조심해야 하는데
우리는 역으로 마음의 긴장을 풀기 위해 술을 먹기도 하지요.
셋째는 근심 걱정입니다.
방탕과 만취가 마음을 물러지게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데
근심과 걱정이 마음을 물러지게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어지는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과 연결해 이해해야 합니다.
일상의 근심과 걱정이 많을수록 그 근심과 걱정에 매몰되지 않고,
다시 말해서 근심과 걱정에서 빠져나와 주님 앞에 서고,
주님께 기도드려야 하는데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 근심 걱정이나 하곤 합니다.
근심 걱정은 마음이 세상에 있는 것이요,
그러므로 주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근심 걱정을 주께 맡기라는 노래가 있듯이
그러므로 우리는 근심 걱정거리가 있을 때
롯의 아내처럼 뒤돌아보지 말아야 하고,
근심 걱정에서 빨리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빠져나와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올해는 조심하여
방탕하지 않고,
만취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깨어 기도하며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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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986년 데이비드 스노든은 75세 이상의 가톨릭 수녀 678명을 대상으로 ‘노화와 알츠하이머에 관한 수녀 연구’라는 제목의 연구를 했습니다. 사후 수녀들의 뇌를 검사한 결과, 살아 있을 때 치매를 유발할 수 있었을 정도의 뇌 손상이 심한 수녀들이 있었습니다. 연구진은 이 수녀들이 삶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가에 따라 치매에 걸리는지 안 걸리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그리고 무엇보다 영적으로 삶의 더 많은 면에서 활동적으로 참여했고, 노년기까지 그런 삶의 방식을 유지했던 수녀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경 생성과 신경 가소성을 자극했습니다. 이런 수녀들의 뇌는 일부 손상이 되었어도 건강한 삶의 발판이 되어 줄 수 있었습니다.
치매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열정을 가지고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연구였습니다. 그만큼 열정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열정을 멈추고 시들시들한 삶을 사는 사람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나름 이유를 가지고 있지만, 과연 자기를 망가트릴 정도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요?
활기차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삶이 자기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미 충실한 삶을 당신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 모범을 따라 적극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기를 망가트리는 삶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기를 완성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 날이 갑자기 들이닥치고, 죽음이 생각지도 않은 사이에 닥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때 심판관이신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하시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산 사람이 주님 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삶을 산 사람이 과연 주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오늘부터 우리는 대림시기를 지내게 됩니다. 대림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는 주님 성탄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다시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며 회개와 속죄로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이 시기를 잘 보낸 사람만이 당당하게 기쁜 성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활기차게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쁜 성탄이 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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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풍요가 아니라 삶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다(호세 무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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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입니다.
오늘부터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기다림’이 활짝 피어오르는 시기입니다.
“기다림”이란 양광모 님의 시가 떠오릅니다.
누군가/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눈부신 일인가.//
아침이 기다리는 태양처럼/ 밤이 기다리는 별처럼/ 그에게 한 줄기 밝은 빛이 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가슴 따뜻한 일인가.//
그리하여/ 그날을 손꼽으며 내가 그를 기다리는 건/ 또 얼마나 가슴 뜨거운 일인가//
태양을 기다리는 아침처럼/ 별을 기다리는 밤처럼/ 그를 위해 아름다운 배경이 될 수 있다는 건/
또 얼마나 맑은 눈물 같은 일인가.//
우리는/ 태어나고 기다리고 죽나니/ 살아서 가장 햇살 같은 날은/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촛불처럼/ 기다리는 날이라네.
사실, 모든 역사는 ‘대림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모든 시간이 대림이었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시간도 역시 모두 ‘대림의 시간’입니다.
반대로도 생각해봅니다. 하느님께 있어서도 역시, 어제도 오늘도 늘 ‘대림의 시간’이 아닐까요? 우리가 그리스도 오심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열절한 마음으로 망부석이 되어 오늘도 문 앞에 서서 우리가 문을 열어주기만을 내내 기다리고 계시지 않을까요?
오늘 <말씀전례>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재림)에 대한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아는 말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 그가 세상에 공종과 정의를 이룰 것이다.”(예레 33,14-15)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 재림하실 때,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1테살 3,13)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날에 나타날 표징들을 알려주시며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루카 21,27)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루카 21,27) 해야 할 일을 세 가지로 말씀하시며 그 이유도 다음과 같이 밝히십니다.
첫째는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루카 21,28)
둘째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루카 21,34-35)
셋째는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이는 다시 말하면, 첫째는 속량이 가까이 왔기에,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오시는 분을 향해 희망을 가지라는 말씀이요, 둘째는 그날은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니, 스스로 조심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라는 말씀이요, 셋째는 그날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일”(로마 13,14) 입니다. 방황하고 있던 아우구스티누스를 회개의 삶으로 이끌었던 이 구절은 이렇습니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 13,13-14)
그렇습니다. “주 그리스도를 입고” 살아야, 스스로 조심할 수 있고, 어둠에 속거나 빠지지 일을 막아 주고,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입는 일’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는 일’은 그리스도의 현존 앞에 머무는 일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 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곧 ‘기도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 앞에 깨어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기도하라” 하심은 자신의 약함과 무능력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주님의 능력과 선물을 믿으며, 주님께 소망하고 의탁하라는 말씀이요, “깨어 기도하라” 하심은 그분을 맞아들이기 위해 준비하여 마음을 경계하고, 그분을 향하여 있으라는 말씀이요, “늘 깨어 기도하라” 하심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분의 동행에 함께 머물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기도하는 것’이 ‘깨어있음의 표시’가 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현존에 깨어 있으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현전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깨어있음”이란 ‘이미 오신’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일이요, 동시에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단지 ‘깨어 있어라’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기도 안에서 ‘깨어있을 수 있고’, 기도 안에서 ‘깨어 있을 수 있는 힘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실, 기도는 이미 주님 앞에 서 있는 일이고, 그렇게 주님 앞에서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힘이 길러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보다 먼저 우리 안에서 깨어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도’는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기다리시며 깨어 기도하고 계시는 바로 그분을 만나는 일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요, 경이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깨어있는 이 안에서는 그분 현존의 기쁨이 차오를 것입니다. 그러니 ‘기쁨’이 곧 깨어있음의 표지가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주님!
제 마음이 물러지지 않게 하소서.
흔들리더라도 당신을 벗어나지 않고,
넘어지더라도 당신을 붙들고 있게 하소서.
안일과 편리로 무뎌지지 않고 근심에서 벗어나 당신 사랑에 열렬하며,
늘 깨어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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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 어디 있느냐?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혼자 두지 않으시려고 이 땅에 오신 임금이십니다.” 대림 시기는 하느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시간이며 그분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대림(Avvento)이라는 말은 라틴어 아드벤투스(Adventus)에서 유래했으며 ‘현존’, ‘도착’, ‘오심’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오심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으로 기다려야 할까요?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마음의 힘을 북돋아 주시어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테살3,13).하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놓쳐 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히브12,14-15). 하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으로, 하느님의 숨을 받은 사람이요,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해서 거룩한 사람으로 축성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거룩함을 잘 지키고 보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21,36). 우리는 깨어 기도 함으로써 늘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의 현존을 감사하고 기뻐해야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보라, 그날이 온다…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에게 한 약속을 이루어 주겠다”(예레33,14).고 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약속을 꼭 지키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잊어버리거나 저버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시고 꼭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는지”(1테살4,1)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일상 안에서 철저히 준비하면 종말이 오더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준비된 사람에게는 종말이 영원한 상급이 주어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이 나타나고…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고 …사람들은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루카21,26).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루카21,27)라고 했듯이 두려움과 공포 중에도 준비된 사람은 영광의 모습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는 사람은 어떻게 주님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기도하면, 불필요한 많은 일들로 산만해 지거나 불평 불만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맞이하는 마음, 주님의 사랑과 용서, 그분의 말씀, 그분의 식탁에 다가가고 기도할 공간을 찾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환대하고 그들의 요청에 앞서 찾아갈 수 있는 마음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대림시기 동안 우리의 나태함을 떨쳐버리고 잠에서 깨어나도록 합시다!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가? 나는 깨어 있는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가? 나는 일상적인 상황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사에 정신이 팔려있는가? 오늘 그분의 오심을 깨닫지 못한다면, 마지막 때에 그분께서 다시 오시더라도 우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깨어 있으십시오! 주님께서 오시길 기다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길 기다리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거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깨어 기다리도록 합시다. 대림은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 곁을 지나시는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여정입니다”(2022,11).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왜 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모든 것이 주님의 마음에 쏙 들도록 노력하는 대림절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마음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내가 바뀌면 세상이 아름답고, 모든 사람이 아름답게 보이지만 내가 바뀌지 않은 채 남이 바뀌기를 바라면 설사 남이 바뀌어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변할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가 바뀌기를 바란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음의 문은 꼭꼭 닫아 둔 채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 하기 전에 “내 마음을 변화시켜 주십시오” 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으로 많은 사연을 안고 있으며 어렵고 힘든 일이 많지만, 내색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고달프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기도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때야말로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힘든 게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일반 사람들과 다른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에 주님께서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부끄러워 숨었을 때 “너 어디 있느냐?”(창세3,9) 찾아 나서시며 당신의 현존을 보여주신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시며 자신의 마음을 보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하고자 모세를 선택하시고(탈출3장) 낮에는 구름 기둥 속에서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 속에서 비추어 주셨습니다 (탈출13,22). 그분은 “여인이 자기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이사 49,15)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요한8,10). 물으시며 용서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처지와 여건 안에서도 주님은 함께 하시면서 물으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 지금은 실망과 좌절에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기에 앞서 우리보다 먼저 애타게 기다리며 “너 어디 있느냐?” 물으십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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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비행기를 타면서 가끔 웃지 못할 일이 생기곤 합니다. 포트워스 신부님과 하와이엘 갈 때입니다. 전날 확인했을 때는 터미널 A였습니다. 저는 당연히 그럴 줄 알고 터미널 A로 갔습니다. 게이트는 39번이었습니다. 저는 신부님께 전화했습니다. 게이트 39번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도 39번에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신부님이 없었습니다. 다시 전화해서 어디에 있냐고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터미널 D에 있었습니다. 게이트는 같은 39번이지만 터미널이 달랐습니다. 알아보니 아침에 터미널이 변경되었습니다. 저는 터미널 D를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다행히 터미널 D로 가는 기차가 있었습니다. 저는 신부님과 전화 통화를 해서 다행히 비행기를 탈 수 있었지만, 제가 아는 주교님은 게이트가 바뀐 걸 모르고 있다가 비행기를 놓치고, 다음날 비행기를 탔습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우리를 내셨기에 주님 안에 쉬기까지는 내 영혼이 평안하지 않나이다.” 깨어 있어야 하는 데는 주교님도, 사제도, 수도자도, 평신도도 예외가 없습니다.
같은 지구지만 우리는 ‘시차’가 있습니다. 서울은 이곳 달라스보다 15시간 먼저 하루가 시작됩니다. 뉴욕은 이곳 달라스보다 1시간 먼저 하루가 시작됩니다. 교회의 시간은 세상의 시간보다 1달 정도 먼저 시작됩니다. 교회의 시간은 태양을 중심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준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12월 25일이고,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기 위해서 4주간의 대림 시기를 정하였습니다. 오늘은 12월 1일이고, 대림 제1주일입니다. 교회는 대림 제1주일을 새로운 한 해의 시작으로 정했습니다. 세상 사람보다 1달 먼저 새해를 시작했으니 더 감사하며, 더 기뻐하며, 더 나누며 살면 좋겠습니다. 저는 2025년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사목 지침을 정하였습니다. 오늘은 그 사목 지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2025년 본당 사목 지침
1. 사랑과 배려를 바탕으로 한 신앙생활, 사랑과 배려가 공존하는 공동체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모든 구성원은 서로를 존중하고 도우며, 상호 간의 관심과 배려를 나눕니다. 소그룹 모임, 친목 모임, 그룹 공동 활동 등을 통해 교회 구성원들의 상호작용과 유대감을 증진하며, 공동체 의식을 강화합니다.
2. 다양한 교육 및 활동, 교회는 다양한 연령층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교육 및 활동 프로그램을 제공합니다. 이를 통해 각 개인의 영적 성장과 친교를 나누며, 공동체 내에서의 상호 지원과 협력을 도모합니다. 구역모임, 성경 공부, 기도 모임, 성가대 활동, 봉사활동 등을 통해 교회 구성원들은 서로를 도우며 신앙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세대 모임을 활성화 하도록 합니다. 소그룹과 단체에 가입해서 봉사할 수 있도록 합니다.
3. 순교 정신과 사회봉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의 본보기로서 지역사회에 봉사합니다. 교회 구성원들은 이웃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고, 지역사회와 함께 손을 잡아 봉사하는 문화를 정착시킵니다. 지역사회나 어려운 이웃을 위한 지원 활동, 재난 구호 봉사, 장애인 센터 방문 등을 통해 교회는 순교 정신과 사랑의 행동을 실천합니다.
4. 미사와 기도의 중요성 강조, 미사와 기도는 교회 생활의 핵심입니다. 교회 구성원들은 꾸준한 미사 참례와 개인적인 기도 생활을 통해 하느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며, 영적인 성장을 이룹니다. 온라인 미사, 주일 미사, 평일 미사에 참례하면서 교회 구성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미사를 통해 영적으로 충전됩니다.
5. 본당 설립 50주년 준비 위원회 발족, 2027년은 본당 설립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난 50년을 돌아보며 다가오는 50년을 준비할 수 있도록 준비 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이런 사목 지침을 통해 달라스 성 김대건 성당은 소공동체의 활성화를 도모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나누며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교회로 거듭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시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와 함께 재림하실 때,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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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제 마음에 머무르는 말씀은 두 가지 말씀이었습니다. 첫째는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덮치지 않게 하여라.”이고 두 번째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입니다.
위의 두 가지 말씀은 제게 이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세상의 삶을 헛되이 지내지 말고 사랑하여라. 오늘 하루가 사랑의 완성을 위한 선물이며 동시에 하느님께서 주신 기회라는 것을 기억하여라. 그리고 그렇게 매일 마지막처럼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사랑에 관한 결과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 달력으로 즉 전례력으로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새해 첫날 우리에게 다가온 복음은 바로 ‘속량의 때가 가까이 왔다’ 입니다.
속량의 때란 바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죽음이 우리에게 가까이 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들에게 주어진 하루를 사랑으로 채워가야 한다는 것과 회개로써 하느님을 향해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새해 첫날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과거의 죄스러운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벗어버리고 새로운 마음을 새로운 하루에 담아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속량의 때가 가까웠습니다.’ 우리 각자가 하느님 나라 대문 앞에 언제 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미래의 일이 아닌 오늘에 있음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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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다.
인생은 쾌락이 아닌 감동이다.
인생은 소유가 아닌 나눔이다.
인생은 성취가 아닌 보람이다.
인생에서 속도는 중요치 않습니다. 가야 하는 방향으로 정확히 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늘을 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생에서 쾌락이 목표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촉촉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그 가슴을 울릴 감동이 필요합니다.
인생은 소유가 아닙니다. 그 소유는 진짜 내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나눔이 우리 소유가 될 것입니다.
인생은 성취만을 위한 삶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성취 후의 갈증을 우리는 풀어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 갈증은 ‘보람’이라는 약수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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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키엣 대주교님.
희망의 해
한 해의 전례는 대림시기 첫 주일부터 시작됩니다. '대림'(待臨)이라는 말은 '도착'을 뜻하는 라틴어 '아드벤투스'(Adventus)에서 온 것으로 사람들은 주님 성탄을 준비하면서 구세주 하느님의 아드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립니다.
“하느님은 이미 오셨는데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요?”
대림시기는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시기이며, 또 다른 의미로는 우리의 인생 끝에 맞이할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기쁜 성탄절을 맞이할 수 있도록 신앙인의 영혼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재림 영성에서 그리스도는 이미 그 곳에 계시는 분이며 동시에 계속해서 기다림 속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영성으로 구세주를 기다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대림은 우리의 삶이 아직 여행 중에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의 진정한 고향은 하늘나라입니다. 지금 우리는 천국을 향한 여정 중에 있기에 지금 잠시 쉬고 있다면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는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삶의 방향과 고귀한 의미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다림 또한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2025년 전례력을 잘 지내기 위해서는, 우선 모든 세상의 가치들은 우리 삶의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각자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세상의 가치들은 더욱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 자신과 주변, 가족과 사회 안에서 옳지 않은 것들과 단호히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깨어 있는 삶이며, 기도하고, 주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구부러진 곳은 곧게 되고 거친 곳은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은 평탄하게 되느니라.…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2025년은 "희망”입니다. 12월 24일 성 베드로 대성전 성년(聖年) 문 개방으로 시작해 2026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까지 희년의 주제는 ‘희망의 순례자들’입니다. 교황께서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성년 문 앞에서 「희망은 실망하지 않는다」를 발표했습니다. 칙서에서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희망을 일깨우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강렬한 체험으로 초대하고자 다시 한 번 거룩한 문이 열릴 새로운 희년의 때가 왔다”고 밝혔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혼란 속에서 많은 국가들은 여전히, 마치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8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 전쟁과 증오, 가난과 재해, 불의가 만연하는 고통의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의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인간을 이끌어 세상의 여정을 완수하게 하시고,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실 날을 향해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항상 깨어 있고,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합니다.
충실한 종처럼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해 주인의 뜻에 따라 일을 완수하며, 주인이 언제 돌아오실 지 몰라도 문을 열어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자애로운 성모님, 모든 순간과 모든 곳에서 저희가 주님을 따라 희망 속에서 걸어가게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봅시다
1. 이미 오신 주님을 매년 다시 오시기를 바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 주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걸 느끼고 경험해보았습니까?
3. 깨어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깨어서 기도한다”는 의미를 묵상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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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대림의 기쁨
“오늘, 그날의 구원을 앞당겨 삽시다”
“주님, 저희에게 당신 자애를 보여 주시고,
당신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시편85,8)
어제의 끝은 오늘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오늘은 대림1주일 12월 첫날!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희망과 기쁨의 대림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엊저녁 성가연습을 하면서도 웬지 모를 기쁨이 샘솟는 느낌이었습니다. 오늘 옛 현인들의 지혜도 좋은 깨달음을 줍니다.
천명미상(天命靡常), “천명은 일정한 것이 아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멈추지 말고 성장하라.”는 사자성어와 더불어, “중단하지 않는 한 실패가 아니다.”라는 어느 현자의 말마디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용기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혜다. 지혜가 없으면 그 반대로 한다.”<다산>
“용기를 좋아하되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질서를 어지럽힌다.”<논어>
참으로 배움을 좋아한 호학好學의 현인 공자였습니다. 수도자들뿐 아니라 믿는 모든 구도자들의 특징은 “하느님께 대한 갈망, 그리고 배움에 대한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갈망이, 대림의 희망과 기쁨이 더욱 좋으시고 아름다우신 하느님을 찾게 하고 배움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합니다.
“주님, 당신께 제 영혼 들어 올리나이다.”(시편25,1)
오늘 화답송 말씀대로 제 영혼 들어 올리는 마음으로 아주 예전에 써놨던 ‘사랑’이란 고백글을 나눕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랜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1997.3.>
무려 27년전 여기 이 자리에서 쓴 글입니다. 은총의 대림시기 우리가 사랑하며 기다리는 주님은 이런 분입니다. 이런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어떻게 준비하며 살아야 할까요? 그 방법을 나누고 싶습니다.
어제 수도원 피정자들에게도 늘 해오던 대로 ‘희망의 여정’을 강의한 후 일일일생(一日一生), 일년사계(一年四季)로 내 삶의 여정을 압축한후 어느 時點에 와있는지 살펴보라 했습니다. 이런 확인이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환상이나 거품이 걷힌 종말론적 본질적 깊이의 선물인생을 살게 합니다.
첫째, 꿈을, 희망을 지니십시오.
생생한 하느님의 꿈, 하느님 나라의 꿈입니다. 꿈꾸는 희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궁극의 꿈을, 희망을 지니고 살아야 험하고 거친 광야인생 살아낼 수 있습니다. 이런 꿈과 희망이 있어야 끝없이 기쁘게 인내하며 버텨내고 견뎌낼 수 있습니다. 성서의 사람들은 모두가 꿈과 희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에게 한 약속을 이루어 주겠다. 그날과 그때에 내가 다윗을 위하여 정의의 싹을 돋아나게 하리니 그가 공정과 정의를 이룰 것이다. 그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예루살렘이 안전하게 살 것이다.”
흡사 주님 탄생의 예고처럼 들립니다. 우리가 대림시기 기다리는 분은 그 옛날 예레미야가 예언한 바로 이런 주님입니다. 오늘이 그날입니다. 그날의 구원의 꿈이, 희망의 기쁨이 과거의 상처나 어둠을 압도하며 우리를 변화시켜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 천상의 기쁨을 살게합니다. 대림시기, 늘 짧은 기도 노래로 끊임없이 바치는 다음 대림1주일 아침성무일도시 첫 후렴입니다.
“그날에 모든 산에서 단 것이 방울져 흐르고,
언덕들에서 젖과 꿀이 흐르리라.”
정작 살 줄 아는 꿈과 희망의 사람은 오늘 바로 지금 여기서 그날의 젖과 꿀이 흐르는 천상의 행복을 미리 앞당겨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이 그날입니다. 오늘 그날의 희망을 앞당겨 살 때 샘솟는 활력에 기쁨이요 사막은 낙원으로 변모하니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루가복음 역시 꿈과 희망의 사람들을 격려하고 고무합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주님을, 사람의 아들을 내다보며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 오늘 그날의 그때를 앞당겨 살아가는 은총의 대림시기입니다.
둘째, 하루하루 맡은 바 본분의 책임을 다하며 사십시오.
구원의 행복은 밖에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꽃자리에 있습니다. 결코 지난 날에 아파하지도 말고 앞날을 앞당겨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다른 어디서도 못만납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하늘길, 하늘문입니다. 주님 앞에서 책임을 다하는 믿음이요 책임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바로 여기서 비로서 검증되는 참믿음, 참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의 충고가 대림시기, 참 적절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날이 너희에게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땅위에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유비무환입니다. 늘 준비하며 책임을 다하며 사는 이런 이들에게는 일일시호일 추호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햇빛 밝은 날이든 구름낀 어둔날이든, 비오는 날이든 눈오는 날이든, 추운 날이든 더운 날이든 모든 날이 다 좋습니다. “언제나 주님이 함께 계시기에!”
셋째, 늘 깨어 기도하십시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입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기도가 삶의 꼴을 형성합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나중 남는 얼굴은 기도한 사랑의 얼굴인지 아닌지 둘중 하나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서 벗어나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주는 것도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하며 불암산을 바라볼 때 저절로 흘러나오는 고백입니다. 10월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아니 앞으로도 저를 행복하게 할 고백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
참으로 기도할 때 생생히 살아나는 하느님의 꿈, 희망, 비전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 희망, 사랑도 날로 깊어져 내 주어진 책임도 온전히 수행해 낼 수 있습니다. 더욱더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책임을 다하며, 늘 깨어 기도하며 살아가십시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를 주님의 통한 당부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사랑을 더욱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시며, 여러분의 마음에 힘을 붇돋아 주시어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이 은총의 대림시기,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1테살4,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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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전례력으로 영적인 한해를 시작하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깨어 기도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깨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신앙의 근간이 되는 ‘믿음과 사랑의 깨어있음’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것은 많은 경우 고통의 문제입니다.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주님께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않고 그 믿음에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있을 때에는 고통이 매우 적습니다. 우리 자신이 이기심에 의해 야기된 고통으로부터 그리고 분노와 원망, 자기연민, 신랄함, 절망에 의해 야기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일상생활 안에서 우리의 감정들을 들여다 보면 고통을 참아내야 할 여러 상황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사소한 경우일지라도 우리의 감정들을 자극하는 모든 것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하기 위해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이야 말로 하느님의 뜻이 일상 생활속에 내재함을 이해할 수 있는 빛을 우리에게 줄 수 있습니다. 이 빛이 없으면 우리는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이해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확실성 없이는 우리는 초자연적 확신과 평화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항상 살아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을 끊임없이 쇄신해야 합니다. 영적 삶은 무엇보다도 이처럼 깨어 기도하는 믿음의 삶입니다. .
우리 각자 안에는 어떤 갈망이 있는데, 그 갈망은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우리 자신의 깊은 중심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갈망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만족스럽게 채워지지 않을 뿐더러 결코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가끔 이 갈망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갈망은 언제나 깨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에 대한 인간의 갈망입니다. 이 지상의 모든 사람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기를 또 사랑을 알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자아와 우리 존재는 바로 이 사랑의 갈망 안에서 발견됩니다.
우리는 사랑의 빛을 품고 사는 법을 배우려고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품는다는 것은 세가지 의미가 있는데, 곧 사랑을 견디어 내고, 사랑을 지니고, 사랑을 낳는 것입니다. 첫째로 사랑을 견디어 낸다는 것은 사랑의 아름다움으로 고통을 견디어 내는 능력 안에서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사랑을 지닌다는 것은 사랑을 전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로는 우리가 사랑을 낳는 사람이 되고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사랑의 세가지 본성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갈망은 이 우리를 깨어 기도하게 만들고 우리가 깨어 있음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위한 것인데 그것은 참된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우리가 의식하고 있음은 우리의 심장이 뛰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믿음과 사랑을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사랑에 대한 갈망으로 인한 깨어 있음의 시작단계가 지나면 믿음과 사랑의 의식이 자라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일상안에서 믿음과 사랑의 은총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사건들 안에서 늘 믿음과 사랑으로 깨어 있으면 이 믿음과 사랑은 늘 우리의의식안에 자리잡아 우리의 삶을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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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니클라우스 형제와 그의 동료 은수자들의 삶에 대한 서언(序言)
아인지델른 교구 수석사제인 이 알브레히트 폰 슈테텐은 고귀한 인품으로 지도층에서 존경받고 계시는 여러 신부님들과 시장님, 그리고 훌륭하신 뉘른베르크(Nürnberg) 시 의원 여러분들께 안부의 인사를 드립니다. 경애하는 여러분틀께서 마음 써주신 덕택에 ‘낭떠러지 아래에 있다(Unter der Flüe) ’고 불리우던 니클라우스 형제에 대해 최선의 호의를 베풀어 줄 수 있게 되었다고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곳 운터발덴국(國)에서 이미 오랜 동안을 세속적인 음식이나 음료를 먹지 않고 엄격한 은수자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저희도 그렇게 훌륭한 사람으로 그에 대해 널리 믿고 있습니다만 그에 관해서는 내가 여기에 써서 얘기할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많고 충분한 내용의 말들이 대중들간에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그를 칭찬하고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또 모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종이 되도록 북돋우기위해서 제가 모든 것을 보고 듣고난 후 나는 얼마 전 앞서 말한 그 은수자의 지위와 인품, 그리고 본성에 대해서 라틴어로 묘사하고 서술했지만 여러분들께서 별로 만족해 하시지 않는 것 같기에 이번에는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여 라틴어를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 작품을 성실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사자((使者)편에 보냅니다. 나는 이 작품을 훈쾌히 받아 주시기를 소망하고 있으며, 또한 나를 관대하게 받아들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보고 인지한 사실들이 더욱 더 높이 평가되도록 하기 위해 위에서 말씀드린 교황청 영지 및 황제 궁정의 선제후이며 수석 사제인 내가 선제후 직위의 인장으로 이 책을 봉인 했습니다.
이 책이 보니파시오(Bonifatius)를 기념하는 월요일에 아인지델른에 보내질 경우 그 시기는 서기 1485년이 될 것입니다.(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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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21,28)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다림으로 깨어 준비해야 하는 대림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대림 시기의 핵심 주제는 기다림입니다. 사실 우리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을 마침 하는 순간까지 기다림의 나날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세상의 어둠 가운데서도 희망으로 기다리는 존재들입니다. 희망으로 기다린다는 것은 그 기다림의 목적이 분명하고 명확하기에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다림은 이미 오셨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기다림이고, 사랑으로 기다리는 존재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기다림도 있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 역시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이 돌아서기를 하염없이 기다리시고 또 기다려주시는 분이십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간절히 기다리는 법입니다. 제 어머니 살아 계실 때 그분은 제가 사랑하는 것보다 저를 더 사랑했기에 늘 저를 기다렸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느님을 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 기다리십니다. 구약 성경의 모든 예언서의 주제와 예언자들이 외쳤던 외침은 한결같이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느님께로 돌아오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의 마음을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18,2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 곧 세상의 심판관이신 당신이 다시 오실 날을 예고하시면서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21,28)하고 선언하십니다. 바로 이 말씀에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설렘과 기쁨과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속량이란 몸값을 지불하고, 노예나 포로에게 자유를 주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누군가 신분상 구속받는 경우가 생길 때 가족 또는 친척 가운데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를 속박에서 해방시킬 의무가 있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그러한 처지에 있을 때 하느님께 그 의무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신앙의 관점에서 속량은 온갖 형태로 당신 백성을 구속하거나 억압하는 모든 상황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하느님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속량이라는 말은 구원 또는 해방이라는 말로 대치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바로 그러한 속량이 가까웠다고 선포하십니다. 당신이 다시 오시는 날, 완전하고 최종적인 속량이 실현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약속된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희망과 용기와 힘을 줍니다. 구원에 대한 말씀보다 더 반갑고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복음이란 바로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거저 인간을 사랑하시어 구원해 주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하지만 현세적인 행복과 물질적인 재화에 몰두하고 만족하려는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는 고리타분하고 비생산적인 소리로만 들릴 것입니다. 때로는 신앙인들도 영원한 생명이나 천상 복락 등에 대한 말씀보다는 세속적인 관심사를 충족시켜 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구원 불감증’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이들에게 당신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속량의 날인 동시에 준엄한 심판의 날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은 심판의 냉혹함에 대하여 오늘 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예고하십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21,26) 하지만 구원을 희망하며 충실하게 신앙을 지켜온 사람들은 그날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게”(21,28) 될 겁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늘 깨어 기도하여라.”(21,36)라고 가르치십니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깨닫는 점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남이 해주어야만 하는 일도 있습니다. 신앙의 측면에서 후자를 구원이라고 한다면, 전자는 구원을 위한 우리의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라는 표현이 이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선택 결정권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구원을 향해 나아갈 것인지 나아가지 않을 건지,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할 것인지 준비하지 않을 건지 우리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갈수록 세상은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게 우리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심지어는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갈팡질팡 혹은 우왕좌왕하면서 살아가기에 오늘 제2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데살로니카인들에게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마음에 들 수 있는지 우리에게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4,1)라고 당부하고 권고합니다. 물론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은 늘 자기 나름대로 핑계나 논리로 자신의 잘못된 판단과 선택을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여하튼 이러한 사고방식의 신앙생활에 젖어 있는 이들을 신앙인이 아닌 종교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종교인이 아닌 참 신앙인이 되라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시되는 참 신앙인의 첫 번째 생활방식은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우리의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는 것”(21,34참조)입니다. 일상의 근심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살다 보면 늘 해야 하는 일과 크고 작은 근심과 걱정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런 근심과 걱정이 깊어지면 때로는 체념으로, 때로는 자포자기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상의 걱정이 내세 영원의 행복을 위협해서는 아니 될 겁니다. 두 번째 생활방식은 “늘 깨어 기도하는 것”(21,36참조)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기도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도 없이 일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신앙인의 일이 아니라 종교인의 일일 뿐입니다. 주님과 함께하기 위한 기도, 그분과 하나 되기 위한 기도가 삶의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일상의 근심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아빠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의 아들 앞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께서 제시해 주시는 참 신앙인의 생활방식을 삶에서 실천하는 일입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25,8-9)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다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왕좌왕할 인생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이제는 한눈팔 것이 아니라, 정해주고 알려준 그 길을 따라 충실히 걸으면 됩니다. 또다시 감금 상태에 놓인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여사의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첫째, 사람들은 욕망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둘째, 사람들은 싫어함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셋째, 사람들은 망상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넷째,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대림 시기는 주님께서 오실 때,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우리의 방탕이 오신 주님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만취가 주님이 오신 것조차 모르게 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근심 걱정이 오신 주님께 눈길조차 주지 않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눈길을 주님 오시는 쪽으로 돌리고, 깨어 기도하면서 올바른 길을 걷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예수님을 바라보며 대림 시기를 시작합시다. 우리의 속량이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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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대림 첫 주일 그분 기다림으로 /
박윤식 [big-llight] 2024-11-30 ㅣNo.178070
오늘은 가톨릭 전례력으로 가나다중 다해의 새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이다. 거룩하신 아버지께서는 대대로 약속을 잊지 않으시어, 온갖 죄악에 짓눌린 인류가 얼굴을 들게 하신다. 우리 모두 희망으로 가득 차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우리 주님, 심판자이시며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기다리자. 삶은 경주가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을 음미하는 여행이다.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밤에도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준비는 하고 있어야 한다. 어떤 일에 열정 둘 것인지, 또 내려 둘 건지를 정하자.
상황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지만, 이처럼 할 일 덜할 일의 정리에서 일정한 조화는 유지되며 그것으로서 삶은 지탱된다. 좁고 짧은 시각에서는 무질서로 뒤범벅된 것 같지만, 넓고 긴 세월에서는 언제나 조화와 질서로 연속이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온 마음과 정성 쏟으려면, 눈 더 뜨고 깨어 있어야만 한다. ‘하느님 뜻’이라 여겨 기도하면, 모든 사물 또 새롭게 보니까.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이르셨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 종말이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이들에게 들이닥치리라. 너희는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깨어서, 기다려라. 도독이 언제 올지 모른다.
어쩌면 따져 보노라면 우리네 인생의 삶은 일, 가족, 건강, 친구라는 4개의 공을 늘 돌리는 것이라나. 일은 고무, 다른 3개는 유리로 된 공들이다. 일의 고무공은 떨어뜨리더라도 바로 튀어 오른다. 일은 있다가도 없기도, 없다가도 또 다시 생기니까. 그렇지만 가족, 건강, 친구의 유리공은 하나라도 잘못해 떨어뜨리면 긁히고, 깨지고, 흩어져 버려 다시는 전과 같이 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돌리기를 잘 이해하여, 하루하루를 이 4개의 공들이 진정으로 균형 갖고 잘 돌게 노력을 해야만 할 게다. 또한 이 공들을 돌릴 때에, 다른 이들에게 괜스런 눈치를 두지 말고 자신에게 가장 최선을 다하자. 그리고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에 더 애착을 갖자. 그것들이 없는 자신의 삶은 너무나 무의미하다. 과거나 미래에 너무 집착해, 현재가 당신 삶에서 결코 벗어나게 하지도 말자. 당신의 삶이 하루에 한번인 것처럼, 모든 날들이 그렇게 가는 것 아닌가! 그리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또 어디로 가는지 모를 정도로는, 모질게는 살지 말자.
사실 이러한 삶의 공 돌리기에서도, 가장 유일하게 평등한 게 있다면 모두에게 딱 한번밖에 주어진 죽음이다. 그 죽음은 어느 때 어떤 모습으로 올지 아무도 모른다. 그 날은 불현 듯 꼭 온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에게 불안과 공포를 안긴다. 하느님은 여기에서 해방되도록 늘 깨어 기도하도록 이르셨다. 그분 말씀처럼 우리가 깨어 있는 삶 산다면야 우리는 얼마나 행복할까?
오늘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우리네 전례력의 또 한 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이다. 이 대림 시기는 예수님 성탄을 기다리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려고 준비하는 때다. 희망을 품고 주님을 기다리며,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알아 뵐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해야만 하겠다. 만사를 진지하게 준비하는 삶, 한 순간순간을 값어치 있게 만들려는 삶, 지금은 이런 삶이 필요하리라. 한 해의 전례주년이 시작되고 ‘기다림’의 대림 첫 주일이 시작되는 지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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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일상에서 기도가 사라져 버린 이유는 분명합니다. 신앙생활이 갈수록 버겁게 느껴지고 짐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전혀 바라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실 때,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1테살 3,13).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만일 내 삶에서 기도가 사라져 버렸고, 고해성사도 하느님과 함께하는 미사 시간도, 신앙생활의 모든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삶을 살았다면, 예수님을 다시 만나는 순간이 어떻게 느껴질까요?
우리 구원을 위한 속량이 이루어지는 희망 속에서 그분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하느님과 맺은 관계가 무너졌다면 기도하는 삶을 시작하십시오.
기도는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여전히 나를 떠나시지도 포기하시지도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깨닫게 해 줍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깨닫고 우리 삶이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는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가 시작됩니다.
기도하는 삶과 함께 그분을 우리 구원자로 맞이할 수 있는 영적 힘을 키워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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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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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세상 마지막 날에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는 날 나타날 표징들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불러 일으킬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그런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 두려움을 잊기 위해서 사람들은 도망갑니다.
그렇다고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기에
술을 마신다던지
마음을 쏟을 다른 무엇인가를 찾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방식을 선택하지 말고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빠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날이 우리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노력한다면
충분히 그날이 우리를 갑자기 덮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마지막 날이 두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소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노력이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깨어 있음'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는 행동들은
우리가 우리로 살아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소위 말하는 정신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신 없이 살다보면
두려움을 느낄 정신도 없습니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 편안할 것 같지만
실제 두려움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숨겨진 것이고
그것이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또 생깁니다.
여기에서의 어려움은
내가 스스로
두려움에서 벗어나려 노력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시면서
두려움을 직면하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두려움을 직면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
하느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즉 두려움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극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뒷부분에는
예수님의 걱정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세상 마지막 날의 사건들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잘 되기를 원하시지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하느님께서 우리를
무서운 심판으로 기다리고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걱정과 사랑에 의지하여
두려움에 무너지지 않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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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도하는 사람이란 깨어있는 상태로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저희 공동체 전례 담당자이신 어르신 신부님께서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대림 시기 시작하는데, 대림환 어쩔거요?” 하고 물으셨습니다.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저는 부랴부랴 창고에서 아이 키 만한 큰 초들을 쇠톱으로 자르고 칼로 다듬었습니다.
시골스럽게 대성당과 소성당에 대림환을 설치해놓으니, 그제야 어르신 신부님 얼굴에 화색이 환하게 돌았습니다.
대림환 장식은 초기 양성기 형제들이나 젊은 형제들, 아니면 봉사 오시는 자매님들의 몫이라 생각했는데, 깊은 시골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웬만한 것은 직접 다 해야 합니다.
열심히 초를 자르고 깎던 제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번 대림 시기 초를 깎는 마음으로, 나를 깎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
하늘을 찌르는 교만을 깎고, 나태함과 게으름의 나를 깎고, 하느님께 대한 불신과 불충실한 나를 깎으며 그렇게 한 달을 살아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오늘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 돌아보니, 지난 한 해도 어김없이 결핍과 상처투성이의 삶, 실패와 부끄러움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제 깊은 상처 그 틈 사이로 크신 주님의 자비가 흘러들어왔음을 실감합니다.
대림 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예수님께서는 각별한 당부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고 계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 날이 너희를 덫처럼 덮치지 않게 하여라.”(루카 복음 21장 34절)
돌아보니 참으로 많은 시간을 헛되고 의미 없이 보냈습니다.
내 인생 여정에서 앞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금쪽같은 시간을 흥청망청 놀고, 먹고, 마시는데 소모했습니다.
모든 것 하느님 자비하신 손길에 맡겨드리지 못하고 부끄럽게도 오랜 시간 근심하고 걱정했습니다.
놀고,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듭니다.
한 치 앞만 내다보게 되니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게 만듭니다.
남아있는 시간, 남아있는 인생을 주님 권고에 따라 살아가야겠습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복음 21장 36절)
깨어있음은 언제나 기도와 연결돼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란 깨어있는 상태로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일정 시간은 잠을 자야 하는 인간이기에 항상 깨어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하루의 많은 시간을 생업에 몰두해야 하는 게 우리네 삶입니다.
그러나 잠드는 순간, 잠자는 순간조차도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깨어있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할 때 역시 주님께서 내 옆에서 내를 지켜보시고 나를 도와주신다고 생각하고 일을 하면 그 역시 깨어있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국 깨어 기도함을 통해 우리는 주님 재림의 날에도 굳건하고 기쁘게 서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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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
오늘부터 대림시기가 시작된다. 대림이란 인류가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하여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그리스도께서 정의와 평화를 주시는 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준비하고 바라고 희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기다림은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셨던”(요한 1,14) 그 역사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하여 그분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통하여 그분이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 그분은 이제 매 순간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이 대림을 살아야 하고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예레미야서는 인류가 기다리는 메시아가 “다윗의 정통 왕손(싹)”(예레 33,15)으로 메마른 땅에서 생존의 희망인 생명의 싹이시다. 오직 하느님만이 이 메시아를 일으켜 주실 수 있고,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바로 그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적으로 오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사명, 정의와 평화를 이룰 사명, 정신적 육체적 모든 악을 치유해야 할 사명은 우리가 느끼듯이 성취되어야 한다. 그래서 대림이란 신앙인의 본질적 차원인 동시에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도 기다림의 자세를 알려주고자 한다. 이 기다림은 성탄을 넘어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께 대한 것이다. 오늘의 말씀은 공관복음에 나타나는 종말론적 담화의 내용이다. 복음에서는 여러 가지 징조들을 들어 신앙인들의 준비된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있다(25-26절).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27절) 이때 세상은 새로워져, 낡은 세상은 가고, 악과 죽음의 세력은 더는 그 영광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28절). 이러한 새로운 세상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시지만, 인간의 거룩한 삶과 깨어 기다림으로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34-36절) 말씀하신다. 세상 걱정에 휩싸인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나의 인간적인 것에 매여 하느님께로 가기보다 죽음의 길로 가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날은 어느 때 올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때는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는 아름다운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났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영광스러운 만남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깨어있는 삶을 언제나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하신다(36절). 그러므로 항상 깨어있는 삶이나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계속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대림의 삶인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을 통하여 계속 우리에게 오고 계시는 분이시며, 이제 우리의 매일의 삶을 통하여 잘 준비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 준비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쓸데없는 마지막 날에 관한 생각과 두려움 때문에 이 순간을 잃는다면 우리가 원하는 가장 중요한 것까지 잃을 수도 있다. 주님께서 오심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사는 현재 이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 안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체험할 수 있는 삶이 계속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우리가 노력한다면 우리가 시간 안에 살면서도 시간을 초월하며 사는 것이다. 나의 이 순간의 삶은 바로 하느님 앞에 영원한 가치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이 세상을 새로운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드시는 분이시다. 참된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이러한 선물도 인간의 협력이 없으면 주어지지 않는다. 그분을 기다리는 우리의 삶 역시 하느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생활이어야 한다. 현재의 이 삶은 구원을 체험하는 장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의 삶에서 사랑의 삶을 노력해야 한다. 이 사랑의 삶이 곧 깨어있는 삶이며, 깨어있을 때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줄 수 있는 삶이 될 것이며, 이러한 삶이 사랑의 완성인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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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수님 인격적으로 만나는 법: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에 빛이 떠오른다
오늘 복음은 실상 세상의 마지막 때를 예언하고 계십니다.
세상 마지막 때는 고통의 때 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사람의 아들이 권능을 떨치며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법입니다. 마지막은 항상 새로운 시작입니다.
목동들은 그 마지막 때에 아기 예수님을 만나 위로를 받았습니다.
당시 목동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직업이었습니다. 고통받는 이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보이시는
주님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마태오 복음엔 이런 이사야서의 인용이 있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별은 밝은 도시가 아니라 깜깜한 시골에서 더 잘 보입니다.
우리가 죽음 직전까지 가지 않으면 생명이신 분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가서 매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행복을 찾아 들어갔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행복하게 해주지 않으면 죽여달라는 마음으로
일주일 단식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한번의 만남의 힘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시간』이란 책에는 봉하령 요셉 신부의 기도 체험인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결정적인 사건, 죽을 고비」라는 꼭지가 있습니다.
봉하령 신부는 부모의 낙태 시도를 이기고 3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돌도 되기 전,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던 1월 동네 할머니가 아기를 업고 우물물을 길으려다
20미터 우물 속으로 떨어져 돌아가셨습니다. 아기도 죽었지만, 그를 구한 분이 침을 놓아 살렸습니다.
열 살 때는 친구들과 놀다가 경운기에 끼여 왼 팔은 잘렸고 오른 팔은 처참할 정도로 뭉게져버렸습니다.
오른 팔은 하루 꼬박 걸린 수술로 회복할 수 있었으나 왼 팔은 잃었습니다.
그 무렵 성당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는 팔을 감추고 본심도 감추었습니다.
그러다 ‘선택’이란 청년 피정에 가서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게 되었고 그때 자신이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청년이 되어서도 장애로 인해 취업을 할 수 없었던 그는 수도회에 입회하기로 합니다.
장애인을 받아주는 수도회가 없었지만, 갓 만들어지기 시작한 중증장애인을 돌보는
‘작은예수 수도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98년 서른셋의 나이에 한국 신학교에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2008년에 부제품을 받았으나 15년 동안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제품을 받지 못했습니다.
2023년 사제품을 받을 때까지 부제로 15년 정도 살아야 했습니다.
이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뛰쳐나가고 싶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풍선처럼 목구멍까지 차올랐고 숨을 쉴 수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봉 신부는 이때 ‘기도’를 선택했습니다.
늘 입에 이 노래를 달고 살았습니다.
“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 저를 버리셨나이까. 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 저를 버리셨나이까.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생명의 하느님을 그리워하나이다.”
결국 숨이 막혀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 것도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신 것도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도 다 “너를 위해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봉 신부는 “고통이 없었다면, 아픔이 없었다면, 좌절이 없었다면 나는 그토록 애절하게 주님을
찾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그분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죽을만큼 원해야 생명이신 분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확실합니다.
‘엄마 찾아 3만리’를 보십시오.
엄마는 아들 마르코를 살리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먼 아르헨티나까지 돈을 벌러 갔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은 그만큼 멀리 있습니다.
그분을 만나려면 나도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너무 좋은 것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단식하시며 광야에서 기도하신 만큼 절실히 주님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한 5년은 가슴이 저미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성체조배를 하면 잠깐 사라졌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바라고 싶습니다.
그래서 다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생명의 빛을 보고 싶다면 최대한 어둠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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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대림 시기는 ‘믿음’을 점검하고 바로 세우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25-28.34-36).”
1) 여기서 ‘방탕과 만취’ 라는 말은, ‘세속 생활의
즐거움과 재미’ 같은 것에 취해서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잠자는 이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하는 이들은 밤에 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1테살 5,5-9).”
무슨 죄를 짓는 것은 아니더라도, 사는 것이 편안하고 즐겁고 행복하고, 생활에 부족하거나 불편한 일도 없고, 하느님께 특별히 뭔가를 청할 일도 없을 때, 그런 때도 ‘취해 있는 때’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에서는 그런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날마다 생활이 편안하고 즐겁고 행복할 때에는
그 상황에 대해서 ‘감사기도’를 드리게 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게 그렇게 안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을 잊어버리거나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우리는 하는 일마다 잘 될 때 더 조심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도 마귀가 파 놓은 함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일상의 근심’은 앞에서 말한 것과는 반대 상황입니다.
사는 것이 힘들고, 불안, 근심, 걱정 등이 계속 생길 때, 그런 일들 때문에 신앙생활을 더 간절하게 잘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그런 일들만 생각하느라고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상의 근심’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루카 8,14).”
<‘인생의 걱정’과 ‘일상의 근심’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먹고사는 일에 대한 걱정을 비롯해서,
누구든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크고 작은 걱정거리들, 근심거리들, 고민거리들입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숨이 막힐 정도라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가시덤불을 제거하든지, 아니면 그것에서 빠져나가든지 해야 하는데, 첫 번째 해결 방법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1-2ㄱ).”
주님 말씀을 믿으려고 노력하면 지금 숨 막힐 정도로 나를 억누르고 있는 가시덤불을 제거할 수 있고, 아니면 최소한 그것에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한 번에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꾸준히,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3) 대림 시기는 각자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고,
더욱더 단단하게 믿으려고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방탕과 만취’에 빠지면 ‘믿음’이 희미해집니다.
<‘믿음’이 희미해지면 더욱 쉽게 방탕과 만취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 ‘믿음’을 다시 세우는 것이 곧 방탕과 만취에 빠지는 것을 예방하는 것이고, 또 그런 것에 빠졌더라도 그런 것에서 벗어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일상의 근심’에 억눌리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근심 때문에 믿음이 약해지기도 하고,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에 근심에 억눌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믿으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1베드 1,23-25).”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에게 의지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만이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을 믿고, 그 말씀에만 의지해야 합니다.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기도’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은데, 기도를 강조하기 전에 먼저 믿음을 강조해야 합니다.
믿음 없이 바치는 기도는 빈말이고,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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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
오늘부터 대림시기가 시작된다. 대림이란 인류가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하여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그리스도께서 정의와 평화를 주시는 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준비하고 바라고 희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기다림은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셨던”(요한 1,14) 그 역사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하여 그분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통하여 그분이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 그분은 이제 매 순간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이 대림을 살아야 하고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예레미야서는 인류가 기다리는 메시아가 “다윗의 정통 왕손(싹)”(예레 33,15)으로 메마른 땅에서 생존의 희망인 생명의 싹이시다. 오직 하느님만이 이 메시아를 일으켜 주실 수 있고,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바로 그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적으로 오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사명, 정의와 평화를 이룰 사명, 정신적 육체적 모든 악을 치유해야 할 사명은 우리가 느끼듯이 성취되어야 한다. 그래서 대림이란 신앙인의 본질적 차원인 동시에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도 기다림의 자세를 알려주고자 한다. 이 기다림은 성탄을 넘어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께 대한 것이다. 오늘의 말씀은 공관복음에 나타나는 종말론적 담화의 내용이다. 복음에서는 여러 가지 징조들을 들어 신앙인들의 준비된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있다(25-26절).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27절) 이때 세상은 새로워져, 낡은 세상은 가고, 악과 죽음의 세력은 더는 그 영광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28절). 이러한 새로운 세상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시지만, 인간의 거룩한 삶과 깨어 기다림으로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34-36절) 말씀하신다. 세상 걱정에 휩싸인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나의 인간적인 것에 매여 하느님께로 가기보다 죽음의 길로 가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날은 어느 때 올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때는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는 아름다운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났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영광스러운 만남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깨어있는 삶을 언제나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하신다(36절). 그러므로 항상 깨어있는 삶이나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계속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대림의 삶인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을 통하여 계속 우리에게 오고 계시는 분이시며, 이제 우리의 매일의 삶을 통하여 잘 준비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 준비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쓸데없는 마지막 날에 관한 생각과 두려움 때문에 이 순간을 잃는다면 우리가 원하는 가장 중요한 것까지 잃을 수도 있다. 주님께서 오심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사는 현재 이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 안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체험할 수 있는 삶이 계속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우리가 노력한다면 우리가 시간 안에 살면서도 시간을 초월하며 사는 것이다. 나의 이 순간의 삶은 바로 하느님 앞에 영원한 가치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이 세상을 새로운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드시는 분이시다. 참된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이러한 선물도 인간의 협력이 없으면 주어지지 않는다. 그분을 기다리는 우리의 삶 역시 하느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생활이어야 한다. 현재의 이 삶은 구원을 체험하는 장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의 삶에서 사랑의 삶을 노력해야 한다. 이 사랑의 삶이 곧 깨어있는 삶이며, 깨어있을 때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줄 수 있는 삶이 될 것이며, 이러한 삶이 사랑의 완성인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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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 36)
기도라는
좋은 소식을
깨어있음이라는
가장 좋은
아침을
기도로
나눕니다.
보다 새로워진
삶이란
이와 같이
늘 깨어
기도하는
삶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께 주신
새해를
맞이합니다.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인 기도로
새해를
시작합니다.
기도하는 마음이
새해의
밝은 마음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는 삶은
해야할 일을
뒤로
미루지 않습니다.
미루지 않는
오늘이
하느님께 드리는
살아있는
기쁨입니다.
살아있는
기쁨이
늘 깨어있는
맑은 삶이
됩니다.
깨어있는
기도만이
가까워진
속량을
체험합니다.
생명으로
넘치는
희망과 용기
지혜입니다.
기도라는
작은 아름다움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아름다움이
진정한
실천이라는 것을
가까워진
속량에서
깨닫습니다.
말씀도 실천이며
사랑도 실천입니다.
실천으로 가득한
은총의 새해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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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21,25-28.34-36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교회는 두가지 시간을 사용합니다. 하나는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물리적 시간’입니다. 교회도 세상 한가운데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에 모두가 정한 기준을 따라가는 겁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12월 31일에 끝나고, 그 다음 날인 1월 1일에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지요. 이제 곧 많이들 잡으시게 될 연말 모임 약속들도 이 물리적인 시간을 기준으로 정하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의 기준으로 바라보는 ‘의미의 시간’입니다. 교회는 이를 가리켜 ‘전례력’이라고 부릅니다. 교회가 전례력을 따로 사용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 한가운데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존재가 되어서는 안됨을, 우리 삶은 하느님의 뜻과 섭리에 따라가야 함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이 전례력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이라는, 우리 구원 역사에서 가장 의미있는 두 사건을 중심으로 돌아가지요. 그 중 하나인 성탄 전 4주간을 ‘대림시기’라고 부르는데, ‘대림’(待臨)이란 ‘주님께서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오늘이 바로 대림시기를 여는 날이자,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앞서 언급한 대림은 두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는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 예수님이 이 천년 전에 세상에 오셨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악에 물들어 멸망을 향해 나아가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음을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과 표징으로 드러내셨던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들을 기억합니다. 그분께서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음을 기억합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의 소명을 다 마치시고 하늘에 오르시어 아버지 오른편에 앉으셨음을 기억합니다. 다른 하나는 ‘심판주’이신 예수님께서 종말의 날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등잔에 넣을 기름을 따로 준비해서 혼인잔치에 오는 신랑을 맞이하였듯이, 우리들 또한 신앙의 등잔에 넣을 믿음, 희망, 사랑의 기름을 잘 준비한 채로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여 그분과 함께 구원의 잔치에 들어가야겠다는 다짐을 되새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다짐을 성실히 실천에 옮김으로써 아기처럼 작고 약한 이의 모습으로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살아있는 ‘구유’가 되는 겁니다. 이와 같은 대림의 두 가지의 의미를 삶 속에서 충실히 실천하는 이들은 죽음이나 멸망을 막연히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죽더라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그처럼 최선을 다하는 삶이, 그리고 죽음 이후에 이어질 영원한 생명에 대한 참된 믿음이 우리로하여금 죽음이나 세상의 멸망을 담대하게 맞을 수 있는 내적인 힘과 용기를 키워줍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그러지 못합니다. 세상 만물은, 작고 약한 미물에서부터 해나 달처럼 큰 천체에 이르기까지 ‘태어난 것은 죽고 생겨난 것은 사라진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세상이 영원히 이어질거라 착각하며 이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 모든 걸 다 쏟아붓기 때문입니다. 그러느라 참된 세상에서 살아갈 영원의 시간을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채로 종말의 순간을 맞게 되는 겁니다. 평소 예습 복습을 성실히 하지 않는 학생에게 갑자기 보는 쪽지시험이 청천벽력처럼 느껴지듯이, 영적으로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이에게는 종말이 내가 세상과 함께 멸망하는 재앙으로 여겨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서 나라는 존재 자체가 소멸되는게 아닙니다. 나는 죽음이라는 관문을 넘어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는 새로운 세상으로 넘어가게 되지요. 다시 말해 내가 살게 될 세상이 바뀔 뿐입니다. 유한하고 불완전한 세상에서 영원하고 완전한 세상으로, 인간이 만든 상대적 기준에 얽매인 세상에서 하느님께서 만드신 절대적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단단히 차리면 살 길이 열리듯, 세상이 멸망해도 내가 종말과 심판을 제대로 준비하면 새로운 세상에서 하느님과 함께 참된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종말과 심판을 제대로 준비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크게 두 가지를 강조하십니다. 하나는 우리 마음이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방탕과 만취는 육신의 욕망을 절제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채우려드는 방종한 태도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또한 걱정은 자기 마음 속 욕망을 채우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염려하는 마음이지요. 욕망에서 비롯되는 그런 부정적인 것들이 우리로하여금 세상 것들에 얽매이고 집착하게 만듭니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게 방해하지요.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로는 작고 약한 이웃의 모습으로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기에, 사랑이라는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은 채로는 신랑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으러 나갈 수 없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적당주의와 안일함으로 마음이 물러지게 하지 말고 단호한 의지와 결단으로 욕심과 집착을 끊어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순수한 어린 아이처럼 하느님께만 시선을 고정한 채 그분 뜻에 맞는 올바른 길을 따라가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참된 회개이며, 그렇게 회개한 이들에게는 종말의 그 날이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는 않을’거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종말과 심판에 대한 준비로 강조하신 다른 하나는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은 하느님으로부터 원하는 걸 얻어내는 게 아니라,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설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죄의식과 두려움으로 주눅들지 않고 떳떳하게 서 있으려면 그분께서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는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또한 나도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서 하느님의 뜻을 따를 것이고, 그런 삶이 나를 구원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욕망에 휩쓸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했던,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뱀의 말을 따랐던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어둠 속에 몸을 숨겼지요. 우리도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언제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깨어 있는 것’은 세상의 유혹에 휘둘리지 않고 항상 주님과 그분 뜻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은 이 세상에 속해 살고 있지만 정신과 영혼만큼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영원한 세상을 희망하며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이 내가 세상과 함께 멸망하는 두렵고 공포스러운 날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설레고 기쁜 날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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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준비하며 기다리는”
이제 연중시기가 끝났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종말에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심판하실
심판관으로 그리고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냈습니다.
이제는 우리는 어둠에서 새로운 태양으로 ,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맞습니다.
교회력으로는 오늘이 새로운 해이고 새로운 시작인 것입니다.
대림은 기다림입니다.
우선 종말에 오실 주님을, 다시 말해서 재림하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입니다. 또 다르게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레미야는 외칩니다. 나탄을 통해서 다윗과 유다 가문에 하셨던
하느님의 영원한 약속을 상기시킵니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에게 한 약속을 이루어 주겠다.
그날과 그때에 내가 다윗을 위하여 정의의 싹을 돋아나게 하리니,
그가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룰 것이다.”(예레 33,14-15)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시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실 때,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1테살 3,13)
-주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으스스한 종말의 모습을
예고하십니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5-28.34-36)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공포스러운 분위기에 휩싸일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종말에 대한 징조를 말씀하시며 사람의 아들의 오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비록 천지의 이상한 징조와 두려움이 크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그랫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우리 자신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며 해야 할 과제는 주님께서도 당부하셨지만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는 우리의 잘못에서
깨어나 주님께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지배해온 죄, 악습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나의
이기적인 삶의 태도, 악습등을 고치는 이번 대림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세 동방의 값진 황금, 유황, 몰약을 바치지는 못하더라도 주님께 우리 자신도
우리의 회개하고 변화된 삶을 봉헌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이 거룩하고 뜻 깊은
대림절을 잘 맞아 우리도 열심히 기도하며 주님 오시는 것을 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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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알아차림과 기다림
오늘의 세계는 걷잡을 수 없는 인구증가와 그에 따른 자원의 고갈, 생태계 파괴와 생명경시, 정보화에 따른 비인격화 경향, 빈곤의 문제, 전쟁과 난민 문제 등 복잡하고도 심각한 문제로 얽혀 있습니다. 벌써부터 지구의 종말이 멀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인간은 희망과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기다림의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다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인격에 대한 기다림이며 따라서 그것은 희망의 기다림입니다.
오늘의 말씀들은 어떻게 주님을 맞이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제1독서는 주님을 맞는 가장 근원적인 자세가 바로 '회상'과 '현재화'임을 말해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 유배를 맞아 절망하며 울부짖습니다. 그러자 예레미야 예언자는 메시아가 오시어 세상에 공정과 정의가 이루어주시고, 유다는 구원을 받고 예루살렘을 안전하게 될 것이며, 이스라엘과 맺은 하느님의 계약은 영원하리라는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33,15-16).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공정과 정의를 이루어주시고,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에 대한 기억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정의의 싹’을 키우시는 하느님의 손길에 의해 반드시 실현되고야 말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을 맞으려면 창조와 해방으로 이끄신 구원의 손길을 기억하고 그것을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을 기다리는 가장 근본적인 자세는 사랑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느님 앞에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도록 주님께서 테살로니카 교우들의 사랑을 더욱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시며 힘을 북돋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1테살 3,12-13). 사랑이신 주님을 맞이하는 합당한 자세는 사랑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대림절은 간절한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초대하는 시기입니다. 오시는 주님께서 미약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아차리고 느낄수록 나는 사랑의 사람으로 바뀔 것입니다. 사랑이 커가고 사랑으로 충만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 앞에 나설 수 있으며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이 사랑의 존재가 되고 그 사랑으로 타자(他者)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좋은 준비는 없습니다.
주님을 맞으려면 사랑의 존재가 되는 것과 더불어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의 징후가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속량이 가까웠기에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하십니다(21,28). 예수님의 죽음을 통한 구원이 임박하였기 때문입니다. 온갖 변화는 창조와 파멸의 징후를 품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늘 깨어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뜻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죽음을 자초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을 맞으려면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고”(21,34),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21,36) 해야 합니다. 따라서 현세일과 탐욕으로 영적인 감각을 잃는 일이 없어야 하고,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었던 하느님의 생명과 그분이 실천하신 연민을 보고 깨달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향한 주님의 창조와 해방의 손길을 기억하여 현재화하고, 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알아차려 사랑의 사람이 되며, 늘 깨어 기도함으로써 영적 감각을 잃지 않고 하느님의 생명과 연민을 실천하는 행복한 기다림의 순간을 이어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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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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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1. 대림 제1주일.
거짓과 허영을 멈추는 삶
<2024.12.1> 아침을 여는 묵상 (호 11장 12~12장 14절)
❝거짓과 허영을 멈추는 삶❞
❚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공의를 회복하고, 그분을 소망하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
✔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 신실하신 하나님 안에 거하며 거룩해야 합니다(12~12:2절).
거짓말과 탐욕과 불신으로 가득한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어찌하오리까? ‘에브라임은 거짓말로, 이스라엘 가문은 온갖 음모로, 유다 족속도 신실하고 거룩한 하나님을 거역’(11:12)하였습니다. 지금의 처한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앗수르에 조공을 바쳐서 평화 조약을 맺었고, 애굽과는 군사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거짓과 폭력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1절). 이러한 인위적인 계책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안위를 보장받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북 이스라엘의 심판을 ‘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겠다...’고 표현하십니다(2절).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더더욱 신뢰하고, 신실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작금의 이 나라의 현실을 보면서 울분과 개탄스러운 마음과 말할 수 없는 자괴감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어떤 것도 우리 마음의 궁극적인 치유와 회복을 안겨다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고, 영적 파멸과 죽음의 길로 이끌어 갈 뿐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바르고 정직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화려하지 않고, 많은 것을 드리지 못해도 진실한 마음, 거짓 없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재물이나 행위로 우리 자신을 치장하려는 마음이 아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상한 마음으로 신실하신 하나님 안에 거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중심으로 하나님만을 바라고 기뻐해야 합니다(3~6절).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성공에 집착하며 야망을 품고 고통스럽게 살았던 인생 전체를 언급하십니다. 즉 야곱은 결국 형 에서를 속이고 아버지의 축복까지 받아 낸 후, 아람 땅에 있는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가는 중에 하나님은 벧엘에서 야곱을 만나 주셨고(3~4절), 그 후손들을 향하여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5절)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니 너희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사랑과 정의를 지키며, 너희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6절)고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나라와 민족이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길 밖에 없습니다. 거짓과 불의는 덮는다고 덮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저 깊은 곳에 숨겨져 왔던 거짓이 지금 수도 없이 파헤쳐지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거짓되고, 불의한 모든 것들이 세상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 하나님의 인애와 정의가 온전히 회복 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또 다시 힘 있는 자들의 농락에 빠져 수면 아래에 감춰져 있는 거짓이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 없기를 그저 기도하고 바랄 뿐입니다. 나아가 무작정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할 자격이 나에게는 없기에 그저 인애와 정의와 진실을 원하시는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갈 뿐입니다. 중심으로 하나님만을 바라고, 그분 안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긍휼하신 하나님께만 구하고 나아가야 합니다(7~14절).
하나님은 신실한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는 이스라엘이 ‘속이는 저울’을 가진 상인으로 묘사하셨습니다(7절). 에브라임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이유는 자신들의 부요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이 숨겨지리라 생각했다는 것(8절)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감출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에도 그들의 하나님이셨습니다(9절). 그래서 지속적으로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셔서 ‘이상’과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10절). 그러나 그들은 길르앗과 길갈에서 수송아지에게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거짓된 자들이었습니다(11절). 하나님은 도망하는 야곱과 동행하시고, 그를 보호하셨습니다(12절). 그리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도록 모세도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13절). 이처럼 거짓으로 하나님께 나아간 결과는 그들이 징계를 받아 수치를 당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14절).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적인 성공에 이르렀다고 그 과정에서 행한 불의함이 모두 용납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이 행한 모든 과정을 낱낱이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거룩한 모습을 보이지만 세상에서는 불의하게 살아간다면 하나님께 인정 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에브라임처럼 속이는 거짓 저울을 가지고 속이는 악한 자로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나 세상에서 일을 할 때나 늘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며,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고 교회 문을 나서는 그 순간이 진짜 예배의 시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삶이 예배가 되는 삶을 위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만 내 인생의 전부를 맡기고, 구하며, 진실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물질적인 풍요와 욕심과 탐욕을 버리고 성실과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구하는 삶으로 나아갈 뿐 아니라 진실한 마음과 찢기고 상한 마음을 기뻐하시는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호 11:12~12:14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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