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시골에 농한기가 되면 노름이 성행했는데 돈도 돈이지만 논문서가 오고가고 해서 봄이 되면 논 주인이
바뀌어 있기도 했다, 어스름한 저녁이 되면 노름꾼들이 선친 눈치를 보며 찾아들었는데 보통 2~3십리 떨아진
이웃마을에 노름을 오고 갈래니 불도 없는 컴컴한시골길에서 누구에게 습격 당해 털릴지도 모르는 판에 소문난
주먹인 선친이 보디가드로 나서면 걱정 없고 그만큼 든든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억나는 것은 자전거 체인줄을 감아 지니고, 고추가루 한봉지는 꼭 챙기셨던 것 같다.
"아부지 그거는 와 챙기는데요?"
"아, 패싸움에는 체인줄 만한게 없고, 여의치 않으면 고추가루 뿌리고 튈라고 그란다."
그러니 해방후와 전쟁 무렵 무질서하던 시대의 얘기이고, 중국 무술 18기를 수련하셔서 6순 후반 때의 선진
사진을 보고 있으면 농군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어떤 포스가 절로 느껴진다.
그래도 선친께서는 결코 노름에는 전혀 손대지 않으셨고 항상 강조하시기를, 탁한 물을 가까이 하면 흐려 지기
쉬우니 친구 사귐을 주의하고 항상 덕 있고 지혜로운 이를 가까이 하는데 게으르지 말아라 그래야 사람이 깨끗하고
맑아 진다 하셨다.
선친은 또한 돌을 던지는 돌팔매의 명수로 알려 지기도 하셨다. 농한기에 가끔 하천에서 석정 이라는 돌팔매 경기가
열리기도 했는데, 표적이 되는 쇠기둥을 메달아 놓고 짐작컨데 대략 한 30미터 사선에서 돌을 던져 맞히는 것인데,
임시 설치된 본부석 간이 무대에는 기생들이 불려 모여 흥을 돋구고 있었다.
다섯발 씩 던져 쇠기둥을 맞히기를 하는데, 5발3중이상 즉 3개 이상을 맞히면 기생이 따라주는 막걸리를 들이
키고 기생들의 장구 춤에 맞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었는데 우리 또래 애들도 덩달아 흥에 겨워 같이 노래하고
떠들었었는데, 5발3중, 5발4중에 따라 노래가 달라서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데 5발5중은 거의 없었던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사실 5개 던져 하나도 못 맞히는 사람이 허다 했다.
5발3중
"지화자~지화자~ 지화 지화~ 지화자~ ~~~"
5발4중
"꽃바람~꽃바람~ 꽃바 꽃바~ 꽃바람~ ~~~"
"정본아~정본아~ 너거 아부지 꽃바람이다 꽃바람~" 동네 애들이 더 설쳐대며 노래를 부르며 흥겨워 했다.
거제 고현이 625 포로 수용소로 지정되고 소개령(주민 대피영) 내리기 전 1년을 미군이 먼저 진주하여 같이 주둔
하고 있였는데 그해에 몹시 가물었더란다, 농민은 논이 가물고 농작물이 메마르면 가슴이 탄다고 했는데 식솔의
생계와 명운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논은 하천을 사이에 두고 산이 있었는데 선친께서 긴 버드나무 몇개에 홈을 파서 이어 도수관을 만들어 이어
논에 산물을 받아 대고 있었는데, 어느날 물을 보러 나갔는데 미군 댓명이 도수관을 잘라 그 밑에서 샤워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선친이 냇가에 흔한 돌멩이를 집어 던지기 시작했더란다.
발가벗고 샤워하던 미군들이 난데 없이 날아오는 돌멩이 세례를 받고 말도 안통하니 옷을 챙길 겨를도 없이 이마에
피를 흘리며 벗은 채로 도망을 치다 냇가에는 돌이 많으니 논밭을 지나 마을로 냅다 달리는데 선친은 계속 돌을
날리며 따라오니 미군 다섯명이 발가벗고 달리는 스트리킹 쇼를 벌리고 말았다.
유대인 다윗의 돌팔매에 팔레스타인 장수 골리앗이 나가 떨어졌다 하던가, 미군 다섯이 선친의 돌팔매 세례에
어쩌지도 못하고 발가벗은채 도망을 친걸 보면. 명수 답게 아마도 타격도 심했던 모양이다
훗날, 모내기 할 때 못줄을 잡고 있으면 동네 할머니들이 종종 그 얘기를 하며 키득대기도 했다,
"정본아, 너거 아부지 덕에 우리는 난데 없이 좋은 구경을 했었니라, ㅎ ㅎ ㅎ "
*못줄 : 모내기 할 때 모심는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일정한 간격과 줄에 맞추어 모를 심도록 긴 줄에 표시를 해서
양쪽 논두렁에서 잡아 넘기는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