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36
8월1일[성 알폰소 마리아 데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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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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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8cALAG29FFs
[서울대교구 최정현 힐라리오(시흥5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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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의 하느님은 두려운 분이 절대 아닙니다!>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의 어린 시절은 요즘으로 치면 ‘엄친아’였습니다. 그는 요즘도 큰 도시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규모면에서 세계적인 대도시였던 나폴리의 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머리까지 비상해서 16세 나이에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젊고 유능한 불패(不敗)의 변호사로서 세간에 이름을 날리며 탄탄대로를 걷던 그였는데, 한번은 자신이 맡은 한 사건이 사소한 실수로 패소하는 쓰라림을 체험합니다.
승승장구하던 그가 세상의 쓴맛을 본 후 허망해하고 있던 차 그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이제부터 세상을 떠나 나를 따라오라.’ 그는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세속 변호사의 길을 접고 주님의 변호사로 탈바꿈합니다.
1726년 서른 살의 나이에 사제로 서품된 알폰소는 우연히 나폴리의 뒷골목,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의 참담한 현실을 목격하고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당시 통계에 따르면 나폴리 인구 100명당 1명이 사제 신분을 지니고 있어 사제 과잉 현상이 있었답니다.
수많은 사제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대도시의 뒷골목을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제들이 안락한 대도시에서 부자들과 어울리는 동안 그는 도시의 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법학이면 법학, 신학이면 신학, 학문에 있어서 큰 성취를 이룬 그였지만 그의 가르침은 항상 단순하고 명료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끝에 서 있던 사람들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강론은 단순했으나 기도생활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에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의 저술은 깊은 신앙의 핵심을 담고 있었지만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말로 썼습니다.
알폰소는 당시 교회 전반을 좌지우지하던 얀세니즘과 반성직주의에 맞서 자비하신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결코 두려운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찾아갈 때 마다 언제나 환대하시고 무조건 용서하사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두려워하기보다는 안심하십시오. 고해소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안에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대리자가 앉아계십니다.”
당시 많은 사제들이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들은 후 죄질이 안 좋다고 여겨지면 사죄경을 낭독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러나 알폰소는 고해소 안에서 항상 너그럽고 관대했습니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고해사제 알폰소를 통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는 극단적 경건주의로 인해 훼손된 고해성사의 원래 가치를 복원시켰습니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는 그를 고해사제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알폰소의 자취가 남아있는 성화들을 보면 성인의 고개가 똑바로 서있지 않고 약간 삐딱합니다. 대체 왜 그런가 알아봤더니 그분의 한 평생은 참으로 혹독했더군요.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71세 되던 해 당시로서는 불치병인 류머티즘에 걸려 목이 심하게 굽어버렸습니다. 후에 각도가 조금 완화가 되기는 했지만 그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굽은 목 때문에 턱이 가슴을 눌러 항상 상처가 남아있었습니다.
그렇게 그의 한 평생은 다양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끊이지 않았던 힘겨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수도회 설립자로서 이런 저런 고민꺼리가 많았던 그는 만성 두통에 시달렸는데, 그럼에도 집필을 계속했습니다.
얼마나 두통이 심했으면 왼손으로는 차가운 대리석 조각으로 두통부위를 마사지하며 오른 손으로 글을 쓸 정도였습니다.
대성인이자 교회박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알폰소도 우리가 겪는 이상의 고통과 시련을 겪으셨다는 것, 수시로 와 닿는 깊은 상처에 속수무책이었다는 것 그 자체로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고통이 너무 클 때는 만사 제쳐놓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때만을 기다렸습니다. 시련이 크면 클수록 더욱 성모님께 매달리면서 그분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탁월한 성모 신심의 소유자였던 그에게 성모님께서도 많은 중재와 도움을 베푸셨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로 그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장수했습니다. 그는 자주 성모님과 깊이 통교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성모님을 사랑한 성인들’, 생활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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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 구분법>
오늘 복음에서 심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비유 말씀으로 어부가 물고기를 거두어들여 어떤 종류는 거두어들이고 어떤 종류는 버린다고 하십니다. 내가 어떤 물고기일까를 알아보기 위해 일반적으로 어떤 물고기들이 거두어들여지고 어떤 물고기들이 버려지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우선 버려지는 물고기들의 특징을 봅시다. 그것들은 맹독성이 있거나 가시가 많거나 잡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사람이 손쉽게 먹기 어려운 이런 물고기들은 사실 다른 물고기들에게도 천적이 없습니다. 사람이 먹기 어려우면 다른 물고기들도 먹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복어를 볼 수 있습니다. 복어는 지금 양식을 해서 독성이 없이 잘 먹기는 하지만, 예전에 복어가 그물에 들어왔다면 어떨까요? 처음엔 분명 버려졌을 것입니다. 복어는 물이나 공기를 삼켜 몸을 부풀려 몸을 더 크게 만들고 삼키기 어렵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부풀어 오를 때 직립 되는 가시를 가지고 있어 추가적인 방어층을 형성합니다. 무엇보다 많은 복어의 조직에는 강력한 신경독인 테트로도톡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독소는 잠재적인 포식자에게 치명적일 수 있어 복어를 먹으려는 시도를 방해합니다.
라이온피쉬는 생긴 것은 멋있지만, 지느러미에 길고 독이 있는 가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가시는 잠재적인 포식자에게 독을 주입하여 극심한 통증, 마비, 심지어 사망까지 초래할 수 있습니다. 밝은 색상과 뚜렷한 패턴은 다른 동물에게 독이 있다는 경고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쓰는 라이온피쉬는 그것들을 걸러내고 식용을 하기에는 노력에 비해 얻는 것이 적어서 일반 어부들에겐 버려지기에 십상입니다.
스톤피쉬는 독과 위장술로 거의 공격을 받지 않으며 만약 밟거나 만질 경우 인간에게도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독이 있는 가시가 심각한 부상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어와 같이 특별한 조리법으로 요리하는 어렵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더라도 먹기를 원하지 않는 이상 인간에게는 쓸모없는 물고기입니다.
전기 뱀장어를 볼까요? 전기 뱀장어는 강력한 전기 충격을 일으킬 수 있는 특수한 전기 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기 뱀장어가 발생시키는 전기 충격은 잠재적인 포식자를 기절시키거나 죽일 수 있어 효과적인 억제 수단이 됩니다. 다른 물고기들에게 해를 끼치는 전기 뱀장어는 사람에게도 그럴 수 있어 식용으로 잡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상어는 어떻습니까? 가장 강한 물고기이기에 천적이 없습니다. 즉, 상어는 먹이 사슬의 최상위에 있습니다. 그들의 강력한 사냥 능력과 자연 포식자의 부족으로 인해 그들은 서식지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상어의 지느러미를 먹기 위해 상어를 포식하기는 하지만, 생존을 위해 상어를 잡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다른 물고기들에게 먹혀 영양분을 줄 수 없는 독성이 강하고 다른 것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위험한 가시들이 있는 물고기는 인간에게도 이롭지 못하기에 버려지게 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만약 물고기가 인간이라면 다른 이들에게 먹혀 자신을 희생할 수 없는 사람은 하느님도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밥이 될 줄 아는 존재가 됨을 배우는 과정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해나가야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탈리아 복치아니코에서 출생한 성 카밀루스는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성장해서는 군인으로서 터키인들을 대항한 베네치아를 위하여 전투에 참가하였고, 도박에 빠졌으며, 1574년경에는 무일푼의 신세가 되어 나폴리 거리를 방황하였습니다. 그는 몸이 건장하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라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몸에 독기를 품고 가시를 세우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가 1575년 우연히 신부님의 설교를 듣고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서, 일생 그를 괴롭힌 다릿병과 신세만 한탄할 게 아니라 자신도 이웃을 위해 아픔을 감수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좋은 물고기 탄생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이기는 방법의 하나로 다른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온 힘을 쏟았으며, 로마의 산 자코모 병원에 자원으로 봉사하다가 성 필립보 네리의 권고를 받아들여 1584년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병자들을 위한 봉사 수도회를 창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죽는 날까지 자신보다 더 아픈 이를 돌보다 하느님께 갔습니다.
이웃을 위해 아파질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좋은 물고기의 조건입니다. 물론 먹히는 것은 아픔입니다. 어차피 독과 가시를 품고 사는 것도 아픔입니다. 그것보다 이웃을 위해 아파질 줄 아는 것을 배운 이는 좋은 물고기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당신이 그러한 삶을 사셨듯이 밥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도 좋아하실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밥이 되어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길은 먼저 이웃에게 밥이 되어주어 이웃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삶은 현대 한국 가톨릭 신앙인들에게 그 모범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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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낯선 모임에 가면 사람들이 서로 교환하는 것이 있습니다. ‘명함’입니다. 명함에는 이름, 직장, 메일, 전화번호가 있습니다. 저는 이름을 소개할 때 주로 세례명인 ‘가브리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가브리엘은 성모님께 예수님의 잉태를 알려준 천사입니다. 저는 가브리엘 천사처럼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쉽게 저를 기억합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의 이름과 세례명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내 이름과 세례명의 뜻과 의미를 떠올리고, 그 의미에 맞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성당에도 이름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지역의 이름을 따라서 성당 이름을 정합니다. 제가 있는 성당의 이름은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입니다. 댈러스는 지역 명칭이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주보성인의 이름입니다. 미주 지역의 성당은 대부분 한국의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간직하려는 마음이 있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개신교회는 이름을 정하는 방식이 가톨릭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개척교회의 목사님과 공동체가 교회의 이름을 정하는데 지역의 명칭이나 주보성인으로 정하지 않습니다. 성인이라는 교리가 없고, 가톨릭처럼 속지주의 원칙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이름을 보면 ‘반석교회, 빛과 소금 교회, 광명교회, 온 누리 교회, 사랑의 교회, 방주교회’와 같이 성경에서 교회의 이름을 찾습니다. 한 목사님이 공동체와 함께 교회의 이름을 정했는데 ‘주님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너는 반석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 목사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교회의 이름을 주님의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목사님도 아니고, 교회의 주인은 장로님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바로 주님이기에 ‘주님의 교회’라고 정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그 원칙에 따라서 10년만 목회하고 떠났습니다. 장로들도 임기를 정하고 모두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그런 교회와 목회자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공동체를 이루는 신자들이기에 큰돈을 들여서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등학교에 큰 강당을 지어주고, 그 강당의 일부를 교회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셨고,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교회 재정의 50%는 교회를 위해서 사용하고, 50%는 이웃을 위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헌금 봉투에 이름도 적지 않았고, 주보에 헌금 낸 교우의 이름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두 알고 계시니 이름을 굳이 적을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했어도 교우들은 기쁘게 헌금했다고 합니다. 1년 예산을 정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지출했다고 합니다. 다만 모든 지출의 원장을 공개했다고 합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 지출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합니다. 예산을 정하면 그 예산에 부족한 금액을 확보하기 위해서 헌금 설교를 해야 하는데, 예산을 정하지 않으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모든 걸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니, 35년이 지났어도 공동체는 사랑과 기쁨이 넘쳐났다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옹기장이와 진흙’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옹기장이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입니다. 진흙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만물과 사람입니다. 세상 만물은 옹기장이이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데 오직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서 진흙인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다고 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실행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고, 할 수 없는 것은 포기할 수 있는 겸손함을 주십시오. 더불어 제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내가 이 옹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인간은 너희를 구원하지 못한다.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고, 그날로 모든 계획도 사라져 버린다. 행복하여라, 야곱의 하느님을 구원자로 모시고,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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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47-53: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47절)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라는 그물 안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다 들어 있으며, 온갖 고기가 들어 있다는 것은 모든 민족이 다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물은 세상이라는 바다의 파도 속으로 던져진다. 파도는 세상이라는 바닷속에 있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뒤흔들고 있다. 그물은 복음서와 사도들을 통해 전해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안에 사는 이들을 그물처럼 모아들이셨다. 그물은 물속에 사는 온갖 고기들을 모아 물 밖으로 끌어내듯이, 우리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어 참 빛이신 주님 안에 데려다 놓는다. 빛 속에서 좋은 것은 남기고 나쁜 것은 버림으로써 심판이 이루어진다.
교회는 그물에 비유된다. 교회가 어부에게 맡겨졌고, 모든 이가 세상이라는 거친 물속에서 그물에 담겨 영원한 나라로 끌어 올려진다. 그물에는 온갖 종류의 물고기를 모아들인다. 모든 사람을 죄의 용서로 부르기 때문이다. 그물은 마지막 때, 모든 인류를 모아들일 때, 가득 차고, 어부들은 그물을 끌어 올리고 물가에 앉는다. 현세를 바다라고 하면 물가는 현세의 종말이고 심판의 장이다. 이 그물은 종말까지 모든 물고기를 모아들일 것이다. 그때 하느님께서 지명하신 천사들이 모든 것을 끌어올려 놓고, 의인과 악인을 가려낼 것이다. 바다에 던져진 그물을 살피는 이들은 그물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와 천사들이다. 현세의 종말에 좋은 고기는 바구니에 담기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48절) 버려진다. 그물에 모아들여져 물가에서 버려지는 일이 없도록 항상 변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여기서 밖은 예수께서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49-50절) 하신 불구덩이를 말한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들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52절) 하신다. 그 사람은 하늘나라의 기쁨에 관한 새로운 것을 꺼내올 줄 알고, 구약성경의 가르침도 이야기할 수 있는 박식한 사람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자신의 삶으로써 그것들을 꺼내오는 것이다. 마음의 곳간이 아니라, 가르치는 자신의 직무에서 그것들을 꺼내온다. 그가 꺼내오는 옛것들은 새것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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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마태오 복음서 13장에는 하늘 나라에 관한 여러 비유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늘 나라의 모습과, 마지막 날 하느님 나라의 모습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시작된 하늘 나라는 씨앗이며 새싹입니다. 그 하늘 나라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있습니다. 누룩처럼 이 세상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늘 나라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때로 이 나라가 너무 미약하다고, 하늘 나라가 과연 우리 가운데 와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답답해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하늘 나라의 그 무력함은 하느님 자비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하늘 나라가 완성되는 날에 가라지는 불태워지고, 나쁜 물고기는 밖으로 던져집니다. “온갖 종류의 고기”(마태 13,47)가 모여 있는 그물은 아직 완성을 기다리고 있는 하늘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 아직 기회를 주시는 때이고, 하느님께 돌아가도록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예레미야서의 말씀도 같은 내용을 말합니다. 예레미야서 18장에서는 옹기장이가 그릇을 빚으면서 잘못된 그릇을 다시 고쳐 빚지만, 19장에서 이미 그릇을 구운 다음에는 잘못된 그릇을 깨뜨립니다. 구워진 그릇은 다시 고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도 18장은 아직 하느님께 돌아갈 여지가 있는 상태를 나타내고, 19장은 인간이 하느님을 거부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를 나타냅니다.
선과 악이 함께 있는 시간, 하늘 나라가 이미 와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입니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있도록 두시는 하느님께서는 가라지를 불태우시는 하느님이시고, 온갖 고기를 모아들이시는 하느님 또한 나쁜 물고기를 버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하느님께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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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종말’은 지금 진행 중입니다.>
“또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7-50)
1)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4,19) 사람을 낚는다는 말이 나쁜 뜻으로 사용될 때가 많은데,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구원’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물’은 죽음과 멸망을 상징하고, 사람을 물 밖으로 끌어내는 것은 ‘구원’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그물의 비유’에서, 그물을 바다에 던지는 것은 선교활동을 상징합니다. ‘온갖 종류의 고기’라는 말은, 좋은 뜻으로 생각하면 교회 공동체 구성원의 ‘다양성’을 나타내는 말이고, 다른 뜻으로 생각하면 교회 안에 의인들과 죄인들이 섞여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면, 그물을 아무렇게나 던져서 닥치는 대로 고기를 잡는 것으로, 즉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지 않고 아무나 다 교회에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복음을 선포9할 때에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선포하지만, 아무에게나 세례를 주는 것은 아니고, 복음 선포에 응답하는 사람, 즉 신앙생활에 대한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세례를 줍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예비신자 교리 교육을 충분히 한 다음에 신중하게 세례성사를 집전합니다.
그렇다면, 그물 속의 고기들은, 즉 신앙인들은 처음에는 다 좋은 신앙인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좋은 신앙인으로 심판대에 서고, 어떤 이는 중간에 변절하거나 타락해서 나쁜 신앙인으로 심판대에 섭니다.
2) 종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고, 아직도 진행 중인 일이고, 마지막 날이 되면 완성된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지금 우리는 종말의 시대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라고 표현했습니다(마태 3,10).>
그런데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니까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명백하게 죄가 드러난 사람들만 하는 일이 아니라, 구원받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일입니다.
<비유에서 말하는 ‘의인들’은 ‘회개한 사람들’이고,
‘악한 자들’은 ‘회개하기를 끝까지 거부한 자들’입니다.>
3)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 중이라면, 최후의 심판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데,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우리는 심판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이다.”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인생이 심판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일 뿐이라면, 너무 힘들지 않은가? 신앙생활의 기쁨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말하는 ‘심판’은 꼭 처벌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구원을 하기 위한 심판도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앞에서 말한 ‘심판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이라는 말은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이라고 바꿀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죄 속에서 살면서도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멸망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입니다.
<따라서 심판의 결과는 각자 자신이 선택하는 셈입니다. 심판관이신 하느님(예수님)께서 구원이나 멸망을 ‘선고’하시기 전에, 각 개인이 스스로 구원과 멸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울며 이를 가는” 상황도 지금 이루어지는가? 인간 세상에는 죄 속에서 살면서도 정말로 마음 편하게 잘 지내는 악인들이 많지 않은가?
양심이 마비되어서 죄의식도 죄책감도 없이 살고 있는 자들이 많다는 것은 분명한 현실인데, 그러나 그들도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되면 예외 없이 후회와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마지막 순간이 되기 전이라도 지옥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겉으로만 안 그런 척 할 뿐입니다.
4) 지금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신앙인들은, 세례자 요한의 다음 경고를 새겨들어야 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7ㄴ-8.10-12)
자기 자신이 ‘쭉정이’인 줄 모르고 ‘알곡’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회개를 ‘남의 일’로만 생각할 때가 많은데, 바로 그 착각과 자만심은 대단히 위험한 함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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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하늘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던져진 그물과 같습니다. 고기잡이를 생각해 보면, 그물은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습니다. 가능한 많은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이 그물의 역할입니다. 하늘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그물이 가득 차면 어부들이 그물을 끌어 올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골라내는 것처럼, 하늘나라는 충만해질 때까지 사람들을 모아들입니다.
하늘나라는 이렇게 모든 사람을 초대합니다.아직 심판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말이 오면, 그때에 비로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리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종말에 있게 될 심판을 언급하여 우리에게 의로운 삶을 살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먼저 하늘 나라가 모든 사람을 초대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지 지금 심판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주어진 셈입니다.
왜 죄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불행하게 살고,악을 저지르는 이들이 편하고 행복해 보이는지, 하느님의 심판은 어디에 있는지, 왜 하느님께서는 악한 사람들을 그냥 두시는지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그 답은 하느님이 아닌, 내 안에 있을 것입니다. 나도 죄를 짓고 실수를 하지만 지금 심판받지 않고 용서를 체험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비유의 장점은 그 뜻이 무엇인지 찾아가게 유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나의 삶 속에서 말씀의 뜻을 고민하고 그 의미를 찾게 합니다. 이렇게 하나씩 의미를 깨달아 가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하늘 나라를 경험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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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13,47)
베트남에서 생활할 때, 가끔 호치민에서 가까운 해변 마을 무이네로 가서 쉬었다 오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베트남 어부들이 어떻게 고기를 잡는지 알 수가 있었습니다. 베트남 어부들은 통버이라는 대나무로 엮어 만든 바구니 배로 가까운 연안에서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습니다. 그렇게 물고기를 잡은 통버이는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모래밭으로 끌어올리게 되고,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이 함께 앉아 잡은 물고기들을 선별하고 분류해서 이내 팝니다. 그중 어떤 물고기들은 너무 작아서 버려지는 것도 많더군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13,47)라고 말씀하신 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13, 51) 하고 물으십니다. 비유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야 할”(13,48) 제자들의 식별과 분류할 수 있는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의 제자는 모름지기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기” (13,52) 때문에 솔로몬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과 선과 악을 지혜롭게 분별할 수 있는 마음”(1열3,9), 곧 식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 하늘나라의 곳간지기는 언제나 현명한 솔로몬처럼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의 선악을 식별하고 분별할 수 있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성령의 이끄심에 민감해야 합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곧 교회는 가득 채워진 그물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 우리가 들어 알고 있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가 가르친 뜻과 유사함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바다이든 호수이든 그곳이 어디이든 그물을 던질 때, 좋은 고기든 나쁜 고기든, 큰 고기든 작은 고기든 원하는 고기만 잡을 수 없습니다. 일단은 그물을 던지고 난 뒤, 그물을 뭍에 끌어올린 다음에 자신이 원하는 고기를 선별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밀과 가라지가 함께 공존하듯이 그물 안에 잡힌 고기도 마찬가지로 큰 고기와 작은 고기,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함께 공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밀과 가라지가 반드시 다 익어야 가려내는 것처럼, 그물 역시도 여러 종류의 물고기로 가득 차야 그물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을 때(13,48참조), 비로소 선별할 수 있습니다. 물속의 그물에서는 선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물을 뭍에 끌어올린 연후에야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릴” 것입니다. 그릇은 생명이 넘치는 상태이고 그릇 밖은 죽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물고기에게 있어서 물은 생명이 넘치는 곳이지만 물 밖은 곧 죽음이 넘치는 곳이잖아요. 그렇게 마지막 순간에야 비로소 생명과 죽음으로, 천국과 지옥으로 가려 나뉘게 되고 “불구덩이에 떨어진 이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13, 50)라고 비유의 뜻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일은 그 끝이 있기 마련이고 무엇이든 다 그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물을 던질 때가 있고, 그물을 끌어 올려 그것을 선별하고 구별할 때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미 그물 속 곧 교회의 일원인 하늘나라의 제자가 되었으니 늘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이 되도록 늘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과 기도하는 영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를 깨닫고 우리에게,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몸으로 한 일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됩니다.”(2코린 5,10)하고 말씀하면서 빛의 자녀답게 깨어 살도록 초대하고 촉구합니다.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복음환호송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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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97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셀던 글래쇼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물리학자들이 하는 연구의 상당수는 사실 필요가 없지요. 지금까지 이루어진 놀라운 발견 중 대부분이 우리 삶에 아무런 직접적인 영향도 미치지 않을 거예요. 매일 세계를 조금 더 이해해 간다는 기쁨을 제외하면 말이죠.”
결국 물리학자들의 연구는 세계를 조금 더 이해한다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이 글을 읽으며 신학생 때의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생각났습니다. 철학, 신학을 배우며 이것이 과연 이 세상에 어떤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이었습니다. 단지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도 싶었습니다. 하지만 쓸모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조금 더 이해하는 기쁨이 이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이해되지 않는다고 또 잘 모르겠다며 공부하기를 소홀히 했던 저의 게으름을 늦게나마 반성하게 됩니다.
신자들도 하느님을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이 하느님을 조금씩 알게 됩니다. 이렇게 알게 되면서 우리 역시 선한 모습으로 악인과 구별되게 됩니다. 또 그 안에서 하느님을 이해해 간다는 기쁨도 얻게 됩니다. 알려고 하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쓸데없는 노력이라고 평가절하해서는 안 됩니다. 이럴수록 하느님을 더 모르게 되면서, 동시에 하느님으로부터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마치 그물에 걸린 온갖 종류의 고기 중에서 좋은 것만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밖으로 던져지는 것처럼, 세상 종말에도 의인들은 받아들여지고 악한 자들은 불구덩이에 던져 버려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그때 가서 울며 이를 갈면서 후회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의인의 길에 들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하느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또 그 소리도 들리지 않는 하느님을 알려고 한다는 것을 어리석게 여기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맘껏 누리면 그만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나만 잘되면 그만이고, 남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말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길이 결국 악인의 길이 되고, 심판 때에 큰 후회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는 하느님을 알기 위해, 특히 그분께서 말씀하셨고 강조하셨던 사랑의 길을 걷기 위한 것입니다. 분명히 하느님을 알게 되면서 그분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게 됩니다. 지금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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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빈 콩깍지>
저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성모 동산이 있는 아름다운 성당을 기억합니다. 지금은 아주 작게 느껴져도 그 멋스러움은 여전합니다. 지금은 주차장이 되어있지만, 텃밭에는 콩도 심어있었고 들깨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밭모퉁이에는 가로등이 밤새 켜있었습니다. 가로등 가까이에 있는 콩과 들깨는 다른 것보다 훨씬 더 키가 크고 잎도 넓었습니다. 그러나 추수 때에 보면 열매가 없었습니다. 겉은 화려했지만 정작 속은 빈 껍데기였습니다. 낮에는 햇빛을 견디고 밤에는 어둠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탓입니다. 결국 곳간에 채워진 것들은 겉보기에는 초라했던 콩이고 들깨입니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16,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겉모양으로 갚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인생 여정 안에서 겪을 것을 다 겪으면서 견디고 받아들인 삶의 모양을 헤아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삶 속에 감춰져 있는 악이 나타나지 않고 그 사람이 존경받는다 하더라도, 혹은 외적으로는 아무런 흠이 없고 유능한 사람으로 드러날지라도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은 ‘마지막 날’ 추수 때에 밝히 드러나므로 지금 누리는 것들이 헛된 기쁨이 아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지금 처한 어려움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시편 저자는 노래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6)
예수님께서는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을 끌어 올려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13,48).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로마2,6). 사실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여정이 이미 좋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과거에 매이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이 세상의 삶은 실패도 없고 성공도 없습니다. 실패가 없다는 것은 지금 정신을 차려 알곡의 삶을 살면 된다는 의미요, 성공이 없다는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안치 못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추수라는 심판의 두려움에 주눅 들지 말고, 새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이 과거를 발판 삼아 오늘을 새롭게 하고 그리하여 복된 내일을 희망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가까운 사이라 해도 그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얼굴을 맞대고 서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마음은 천 개의 산이 있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뱃속까지 환희 들여다보십니다(예레17,9). 사람이 하는 일이 제 눈에는 옳게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 마음을 헤아리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마음속을 보시는 하느님 앞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분 마음에 드는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맺는 모든 열매가 주님 그릇에 담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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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날은 오리니 오늘>
마태오 13,47-53 (그물의 비유, 비유를 끝맺는 말씀)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그날은 오리니 오늘>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마태 13,49)
그날은 오리니
오늘 맑으렵니다
그날은 오리니
오늘 밝으렵니다
그날은 오리니
오늘 깨끗하렵니다
그날은 오리니
오늘 부드러우렵니다
그날은 오리니
오늘 착하렵니다
그날은 오리니
오늘 곧으렵니다
그날은 오리니
오늘 아름다우렵니다
그날은 오리니
오늘 사랑하렵니다
그날은 오리니
오늘 살리렵니다
그날은 오리니
오늘 걸으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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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죽음>
-어떻게 죽을 것인가?-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내 한평생, 나는 주님을 찬양하리라.”(시편146,1ㄴ-2ㄱ)
7월21일 사후, 이렇게 크고 깊고 길게 울림을 준, 향기로 남아 있는 분은 처음일 것입니다. 향년(享年) 73세로 사망했다는 향년이란 말마디도 새롭게 와닿았습니다. 살아서 누린 나이 답게 그렇게 아름다운 삶을 누리었고 겪어낸 분입니다. 신자 아닌 경우 유가족이 청하지 않았는데 가톨릭교회 주교가 이렇게 각별히 장례미사에 추모강론을 한 경우도 사상 초유의 사건일 것입니다. 그 까닭은 믿는 누구보다 내용적으로 충실히 주님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참 아름다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사후 10일이 지났는데도 신문에서는 릴레이 식으로 계속 이어지는 미담성 기사입니다. 축생(畜生;사람답지 못한 짓을 하는 사람의 비유)의 시대, 비로소 인생이, 사람 얼굴을 한 아름다운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흡사 불교의 윤회설을 생각할 정도로 명칭만 사람이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짐승같은 모습들도 얼마나 많은지요? 길다 싶지만 어제 기사도 소개합니다.
“작가 서해성은 그의 넋이 너무 아름다워서 영전에 꽃을 올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는 하늘에서만 빛나지 않을 것이다. 가난한 마을에 불이켜지면 별들의 노랫소리를 담아 내려올 것이다. 모든 잘난 것들이 사라진 마을에는 또 다른 김민기가 살고 있을 것이다. 주막을 발견하면 어떤 속기(俗氣)도 묻어있지 않은 미소를 지을 것이다. 우리 삶도 떠내려 가고 있다. 노을 뒤편의 어둠이 보인다. 무엇을 받들고 무엇을 버려야 김민기 마을에 들 수 있을까.”
오늘은 8월 첫날이자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창립자인 참 아름다운 사람,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그와 수도회의 모토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하라.”(루카4,18) 였습니다. 그는 18세기 한생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살았던 프랑스 출신의 착한목자 주교학자였습니다. 그는 엄한 윤리를 강조한 얀세니즘의 흐름 안에서도 고해소에서는 자비와 부드러움으로 사람들의 양심을 매우 편안하게 해줘야 한다며 다음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나쁜 악습에 깊이 빠져들어 있을수록 그만큼 더 부드럽고 다정스레 그에게 다가가야 한다. 고해신부는 죄가 남긴 수많은 상처들을 돌봐야 한다. 그는 풍부한 사랑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꿀처럼 부드러워야 한다.”
제가 이용하는 일력의 8월 주제어는 노자에 나오는 ‘독립불개(獨立不改;흔들리지 않은 마음은 단단한 몸가짐에서 나온다)라는 말마디로 우리 삶의 지침이 됩니다. 이어 8월1일 옛 어른의 말씀 역시 좋은 삶의 지침이 됩니다.
“생각과 행동 사이만큼 먼 것은 없다. 공부는 그 먼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이다.”<다산>
이런 공부가 평생학인의 참된 공부요, 우리의 전삶을 망라한 삶자체가 공부이겠습니다.
“군자의 학문은 귀로 들어와 마음에 붙어 행동으로 나타난다.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와 입으로 나온다.”<순자>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언젠가 갑작스런 선종이 아니라 ‘군자의 학문’처럼 잘 살았을 때 잘 죽은 선종의 죽음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물음은 저절로 ‘어떻게 살 것인가?’ 물음에 지결됩니다.
오늘 복음 역시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오늘로써 마태복음 13장, 하늘 나라의 비유들도 끝납니다. 엊그제 복음 ‘가라지 비유의 풀이’처럼, 오늘 그물의 비유 역시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런 심판을, 구체적으로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 때 적당한 긴장에 아름다운 하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조언은 늘 들어도 반갑습니다. 해설이 없어질 정도로 단숨에 읽혀지는 오늘 복음 전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타고난 ‘이야기꾼(storyteller)’입니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회개하라 연장되는 날입니다. 회개도 때가 있습니다. 종말의 죽음에 임박해서는 너무 늦습니다.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는 손오공처럼, 모든 시간이, 모든 사람이 하느님 수중에, 하느님 그물망에 있습니다. 그물을 들어 올리는 날이 죽음의 날입니다. 의인의 삶이었는지 혹은 악인의 삶이었는지 확연히 구분될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이런 종말심판에 대한 믿음이 의인의 삶을 선택해 살게 합니다. 어제 지인의 언급을 잊지 못합니다.
“불공정과 불의가 만연된 위정자들 집단입니다.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불공정과 불의가 거짓이 일상화되어 갑니다. 국민들이 처음엔 놀라며 분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 그러려니 하고 마비 중독되어 가는 것이, 서서히 사회 전체가, 나라 전체가, 소리없이 썩어가는 것이, 망해가는 현실이 두렵습니다. 늑대 소년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늑대가 나타났다 거짓말에 동네 사람들이 나섰지만 거짓말에 속은 사람들은 세 번째 정말 나타났을 때는 아무리 외쳐도 거짓말인줄 알고 나타나지 않아 늑대에 먹혔다는 일화입니다. 무신불립, 한번 잃어버린 신뢰의 회복은 요원합니다.”
오늘 복음의 그물의 비유를 대할 때 마다 노자도덕경에 나오는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疎而不失), 천지 자연의 법칙은 광대하여 엉성한 듯 보이지만, 악인에게 벌을 주는 일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느님의 그물망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며 그물망을 들어 올릴 때가 죽음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그물의 비유’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옹기장이의 비유’가 흡사합니다. 옹기장이 하느님의 손안에 있는 옹기그릇과 같은 우리의 존재임을 깨달아 겸손히 그분 뜻에 따라 살때 아름다운 삶에 죽음일 것입니다. 성가 49장 옹기장이를 조용히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옹기장이 손에든 진흙과 같이
내게 있는 모든 것 주님 손에서,
님뜻 따라 나의 삶이 빚어지리니,
가르치심 마음새겨 들으렵니다.”
진흙하니 어제 읽은 감동적인 글도 생각납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세3,19) 구절에 대한 풀이에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살아라, 죽어서 흙될 생각말고 살아서 너는 흙으로 살아라. 온갖 썩는 것, 더러운 것, 말없이 품열고 받아들여 오래 견디는 참사랑, 모든 것 삭이는 세월에 묻었다가 온갖 좋은 것 토해내어 마침내 열매 맺도록 다시 말없이 버텨주는 흙으로, 흙으로 살아라. 너는 흙이니 오오, 거룩한 흙으로 살아라.”
흙의 영성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흙에서 나온 흙처럼 겸손한 참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흙(humus)에 어원을 둔 겸손(humilitas)이요 사람(homo)이요, 이에 가장 가까웠던 분이 예수님이자, 앞서 소개한 아름다운 사람, 김민기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은 우리 모두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주님은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모두에게 당부하십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너희들은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지금까지 하늘 나라 비유들을 다 깨달았는지 물으시며 각오를 새로이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지혜로운 집주인처럼 성경의 곳간에서 지혜로이 새것도 옛것도 꺼내면서 기존관념이나 편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을 구원자로 모시고,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이!”(시편146,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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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지옥에 가지 맙시다!>
오늘 하늘나라에 관한 마지막 비유는 마지막 비유답게 중대한 비유입니다. 우리 교회가 주장하는 상선벌악(償善罰惡)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상 받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벌 받는다는 내용의.
그런데 이것은 지옥의 실재 문제와도 관련이 있고, 사랑이신 하느님이 인간을 영원히 벌하시는가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지요.
이것은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뜨거운 논쟁 주제이기도 했지요. 당시 성공회 신부가 ‘지옥은 없다.’라고 주장하며 그 근거가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주장은 역시 충실한 가톨릭 사제답게 ‘지옥은 있다.’입니다. 그렇다고 그 지옥은 ‘불붙는 지옥’과 같은 그런 지옥이 아닙니다.
천국이 하느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것이라면 지옥은 정반대로 하느님과의 영원한 단절이지요. 그런데 이 영원한 단절이 하느님의 벌 때문인가?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마지막 날 천사들을 시켜 악인들 가운데서 악인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질 것이라고 하고 있지요.
그러나 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굳이 지옥이라는 곳을 만들어 놓고 저승사자를 보내 악인을 지옥에 처넣지 않으실 겁니다.
인간이 천당 가고 지옥 가는 것은 하느님의 선택이 아닙니다. 천당과 지옥은 인간의 선택입니다.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시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유로 하느님께 다가갈 수도 있고, 같은 자유로 하느님과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이 사랑으로 선택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이 교만으로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히 거부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런 존재가 악령들이고 더러운 영들일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예레미야서와 연결해 보겠습니다. 오늘 예레미야서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옹기장이와 옹기들로 비유합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그런데 옹기장이는 옹기그릇에 흠집이 생기면 버려버립니다. “옹기장이는 옹기그릇을 만드는데 옹기그릇에 흠집이 생기면 자기 눈에 드는 다른 그릇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되풀이하였다.”
옹기장이 하느님은 옹기인 우리를 흠 없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 하느님은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고 좋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흠 없게 만든 옹기에 흠집이 생기는데 그 흠집은 어떻게 생긴 것입니까? 하느님이 흠집을 내신 겁니까?
아닙니다. 자해(自害)입니다. 하느님이 원치 않으시는 짓을 자기에게 한 것입니다.
나를 사랑으로 만드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이 사랑으로 만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그렇게 자신을 자해하며 하느님 사랑을 영원히 거부하면 그것이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며, 스스로 영원한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은 우리를 지옥에 보내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옥에 가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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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 13,48ㄴ)
<세상 종말과 심판!>
오늘 복음(마태 13,47-53)은 '그물의 비유'와 '비유로 끝맺는 말씀'입니다.
'마태오 복음 13장(1-53절)은 비유 사화'입니다.
'6개의 비유', 곧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보물의 비유, 진주 상인의 비유, 그물의 비유가 전해지고 있는데, 모두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오늘 복음인 '그물의 비유'는 가라지의 비유처럼, '세상 종말의 때 행해지는 심판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9-50)
오늘 독서가 전하는 말씀입니다.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예레 18,6ㄷ)
7월이 지나가고, 8월의 첫 날을 맞이했습니다.
참으로 덥습니다. 거의 모든 지역에 폭염 경보가 내려졌습니다. 지난 5.8(수) 기공식으로 시작된 성당 엘리베이터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땀흘리며 고생하시는 형제님들이 참으로 안쓰럽습니다. 그래서 저는 열심히 포카리 음료와 팥빙수를 챙겨드리고 있답니다. 그리고 감독(?)하면서 함께하고 있는데, 조금만 움직여도 땀에 범벅이 됩니다. 지난 월요일과 어제 오전까지 좀 바쁜 공사 일정이 있어서 저도 꽤나 땀을 흘렸답니다.
지구가 펄펄 끓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세상 종말의 한 모습이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위대한 인간의 약함(탐욕과 교만)이 나은 결과라고 생각하니, 기후위기의 구체적 행동인 '생태적 회개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해 봅니다.
"성 알폰소여, 우리의 마음을 회개로 이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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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마태 13, 47)
꽃물이
물드는
팔월의
첫날입니다.
그물은 이미
우리를 향해
던져졌습니다.
모아들이는
그물은
예수님의 삶과
예수님
생의
양식이며
예수님의
빛나는
복음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복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모아들임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줍니다.
모아들임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삶입니다.
모아들임으로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게 됩니다.
모아들임은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모아들임의
덕분으로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우리들이
하느님을
뜨겁게
만납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산 우리들이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물 속에서
그물을
끌어올리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끌어올리지
않고서는
구원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구속주회
설립자인
알폰소 성인은
길을 만나면서
거두어들이는
수확의 기쁨을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서로 같은
세상에 살며
다른 방식의
삶인
끌어올리고
모아들이는
복음의 방식을
사셨습니다.
그 누구도
모아들임의
방식을 막지
못합니다.
모아들이기 위해서
먼저 찾아 나서는
힘차고 좋은
발걸음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역사가 됩니다.
그 역사에서
삶의 좌표를
만나는
우리들입니다.
새 것과 옛것에서
복음을 만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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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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