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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속에 나타난 인간의 희망과 다성성
- 차 례 -
Ⅰ. 머리말
Ⅱ.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사상
1.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2.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세계
Ⅲ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희망의 발견
1. 드미트리 표도르비치 카라마조프
2. 이반 표도르비치 카라마조프
3. 알렉세이 표도르비치 카라마조프
Ⅳ. 다성성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 다성성의 의미
2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인물들의 다성성
3. 다성성과 작품의 주제
Ⅴ. 맺음말
Ⅰ. 머리말
도스토예프스키는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거장이자 세계적인 대문호로 칭송받고 있는 작가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 읽는 순간, 누구라도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작가 앞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타난 인물들에 대한 치밀한 내면의 묘사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는 그가 탁월한 작가이자 치열하게 자신을 성찰한 인간임을 말해준다. 또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는 현대의 많은 사상가와 문예비평가, 작가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도 평가받는다. 이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라는 작품 속에 내재된 문학적, 철학적 탐구 영역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보여준다 하겠다.
무엇보다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대단한 이유는 이 작품이 묻고 있는 바와 그 질문의 답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의 세 아들인 드미트리 표도르비치(미챠), 이반 표도르비치(이반), 알렉세이 표도르비치(알료샤)가 주요한 인물로 등장하면서 ‘친부살해’라는 소재를 가지고 인간의 근원에 숨은 양심과 그로인한 갈등, 그리고 구원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세 아들은 육욕과 방탕, 이성과 지식, 금욕과 선행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자체가 인류의 보편적 심성과 인간적 특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들의 심리와 내면을 상세히 보여주면서 인간이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그리고 이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희망이 있을 수 있는가를 묻고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끊임없이 육욕을 추구하는 드미트리의 방탕한 모습 속에서도 양심의 가책과 선을 추구하는 내면의 갈등을 그리고 있으며, 신을 부정하는 이반의 모습 속에서도 인간의 선행에의 기쁨, 양심의 울림에 귀기울이는 모습을 통해 진정한 인간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준다. 알료샤는 자신들의 형들과는 달리 신에게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선(善) 자체인 것은 아니다. 그 속에도 내면의 갈등과 희생의 요구가 필요한 인간적 모습을 담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들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바는 비록 신에게 멀리 떨어진 인간일지라도 그 속에 내재된 선함의 추구, 양심의 울림, 서로에 대한 배려에서 오는 보편적 사랑과 희생을 통해 인류의 미래에 희망이 있으며 자기 내면의 양심에, 그 사랑과 희생에 귀 기울인다면 비록 부족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희망이 있으며 구원받을 수 있다는 자기 신념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본 조는 작품의 주제를 이것으로 보고 이 주제의식과 관련하여 작중 인물을 분석하고자 하였다.
또한 본 조에서는 이 작품에 대한 탁월한 비평으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새롭게 해석했다고 평가받는 바흐찐의 비평을 중심으로 분석을 시도하였다. 바흐찐은 근대 이성의 획일성을 상징하는 독백주의을 비판하면서 타자를 상호 영향을 주는 존재로 인정할 것과 주체로 인해 억압받은 타자의 회복을 주장했던 러시아비평가이다. 바흐찐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본질을 외재성을 상실한 작가, 그 결과 완결될 수 없는 주인공으로 정식화한다. 바흐찐은 이를 통해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 나타나는 다성적 성격을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특징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본 조에서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나타난 인간의 구원과 그 희망의 가능성에 대한 분석과 다양한 면모를 보이는 인물들의 다성성 분석을 통해 이 작품의 주제가 어떻게 뚜렷이 나타나는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에 따라 먼저 이 놀라운 작품을 쓴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작가에 대한 이해와 그의 문학관을 개괄한 뒤, 작품 속에 나타난 인물의 성격 분석과 다성성을 파악하면서 결론을 맺고자 한다.
Ⅱ.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문학세계
1.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인간은 신비입니다. 그 신비를 풀기 위해 인생 전부를 바친다 해도, 시간을 낭비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내가 이 신비에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나는 인간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1839년(18세) 도스토예프스키가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미 어릴 때부터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인간이 되고 싶다’는 자아 실현을 그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해 이루었는지도 모른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생의 연보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미주참조)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1879~80)을 집필하기 시작했을 무렵, 작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성은 러시아 전역에 알려져 있었다. 저명인사들이 그를 방문했고 그는 저명한 편집자이자 작가인 네크라소프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과학 아카데미는 그를 문학부 준회원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1880년에 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 추모제에서 행한 연설은 러시아의 세계적 소명을 힘차고 분명하게 예언함으로써 청중들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얼마간 떨어진 작은 휴양지 스타라야루사에서 아내와 두 아이 표도르와 류보프와 함께 조용히 사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이곳에서 그는 규칙적으로 산책하고 글을 쓰는 엄격한 요양법을 지켰으며, 헌신적인 아내는 그가 구술하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속기로 받아썼다. 그가 창작생활을 시작한 이후 줄곧 준비하다시피 한 이 작품은 한마디로 말하면 아버지 살해에 대한 이야기로 심오한 심리적·정신적 암시로 애증의 갈등을 도입하면서 아버지 살해과정을 냉혹하게 전개해간다. 위 연보와 비교해 보면 특기할 만한 것이 있는데, 이는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아버지가 지주로서 인근 농노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이다. 모츨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주요 내용인 친부살해의 모티부를 여기서 빌려온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그가 쓴 최후의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59세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완성하고 60세 1월에 죽음을 맞이한다. 생의 마지막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마무리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할 만하다.
Ⅲ.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머리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의 보편적 심성을 표상하고 있다. 이 소설의 대략적인 사건의 전개 자체는 단순한 편이다. 아버지인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첫째 아들인 드미트리와 그루센카라는 여인을 두고 연적 사이이고, 드미트리는 이전에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와 약혼한 사이였다. 둘째 아들인 이반은 카테리나를 사랑하게되어 드미트리가 그루센카를 차지하길 바란다. 드미트리는 카테리나에게 진 빚과 그루센카와 살기 위해 필요한 돈을 표도르에게 요구하지만 표도르는 이를 주지 않는다. 결국 드미트리가 그 돈을 훔치기 위해 아버지 집에 침입하지만 싸우다 도망나오고 그 사이 아버지는 누군가에게(스메르자코프임이 밝혀지지만) 타살되어 버린다. 결국 드미트리가 용의자가 되어 심문을 받고 살인이라는 판결을 받게된다. 드미트리는 이반의 계획하에 탈출할려고 하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기본적인 뼈대는 이와 같지만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자신의 내면과 갈등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구원과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세 아들의 모습 속에서 인간의 희망을 발견해 보고자 한다.
1. 드미트리 표도르비치 카라마조프
드미트리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기에 독자들이 많은 매력과 동정을 함께 느끼게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미움, 증오, 질투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랑과 두려움, 공포 그리고 사회적 입장에서 가질 수 있는 체면과 마음속에서 들려주는 양심의 소리, 정직, 참회까지 드미트리는 모든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서 보여주는 악한 모습의 아버지에 관한 것은 맨 마지막으로 미루고 먼저 카테리나에 대한 복수심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내가 이 아가씨에게 접근한 건, 얼마 후 어느 야회석상에서였는데,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더니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고 멸시하는 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꼭 다물고 있는 거야. 음, 두고 보자, 꼭 복수하고 말테니! 하고 나는 생각했지.」
드미트리는 이렇게 말한다.
알료샤가 카테리나의 집에 가는 도중 드미트리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드미트리는 알료샤가 왜 이렇게 속삭이느냐는 물음에 ‘인간의 본성이란 이따금 영문도 모를 일을 할 때가 있는거야.’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은 이 행위뿐만이 아니라 카테리나에게 한 행위와도 연결된다. 아버지에게 6천 루블을 받고난 후에 그녀의 아버지 소식을 듣고 나서 카테리나 언니에게 돈이 필요하면 카테리나 혼자만 자기의 집으로 보내라는 말을 전한다. 그녀의 언니는 그에게 비열하다고 이야기 했으나 상황이 급박하여 그녀 홀로 그에게 보냈지만 드미트리는 돈만을 빌려주고 정중히 그녀를 보낸다. 드미트리가 처음에 돈을 빌려주려고 하였을 때는 복수심에서 시작한 일이었으나, 후에 한 행동은 카테리나에게도 드미트리를 사랑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자살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인간의 본성은 영문도 모를 일을 할 때가 있다고 드미트리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복수심과, 질투, 죄악들은 숨겨진 또 하나의 마음 어느 한 편에서 선한 마음으로 그것들을 억누르게 하며 이것이 진정한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자, 그 속에 희망, 구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역시 수치심이라는 것은 있으니까. 그루센카를 찾아다니기 시작한 그 때부터 나는 이미 약혼자도 아니고 수치를 아는 인간도 아니야.」
그루센카를 찾아갔던 이유도 그녀를 때려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의연치 않게 그는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그의 약혼녀인 카테리나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생겨버렸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더욱 악화됨과 동시에 그가 진심으로 가지게 되는 희망도 모두 그루센카에게 있다.
그가 가진 가장 큰 악은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드미트리와 표도르의 부자관계는 평범하지 않다. 평범한 부자관계를 기대하는 것은 드미트리와 오히려 길러준 그리고리의 관계일지도 모른다. 같은 여자를 사랑하면서 느끼는 서로에 대한 질투와 미움은 애증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고 본다. 그는 자기의 형제들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회가 되는대로 아버지를 죽일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수사와 가족과의 회합에서도 표도르와 드미트리는 다투게 되는데 이 때 조시마 수사의 행동을 본문에서 보면,
「수사는 무릎을 꿇더니 드미트리의 발을 향해, 방바닥에 이마가 닿도록 정중하고 뚜렷하게 의식적인 절을 하는 것이었다.~수사의 입가에는 가냘픈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용서하시오! 여러분, 용서하시오!”그는 사방을 둘러보고 일동에게 인사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가 드미트리에게 절을 한 이유는 죽음 전에도 독자들은 알 수 없으며, 사람들의 입에서 카라마조프가에 살인이 일어날 것을 예감하게 되고 범인이 드미트리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 드미트리는 아버지를 폭행하는 장면도 있었고, 그루센카를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드미트리는 무서울 정도로 사나운 증오의 불길이 갑자기 타오르기 시작해 별안간 호주머니에서 놋절굿공이를 끄집어내어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병석에 누워있던 그리고리 노인이 잠을 깨어 아버지를 죽일 수 없었다. 책에서 드미트리는 이 때 ‘하느님께서 나를 지켜 주신 거야.’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내면의 악함은 그리고리처럼 때로는 누군가에 의해 그리고 그 스스로의 참회에 의해, 알 수 없는 어떤 힘, 아마도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그 힘에 의해 그렇게 악함은 눈이 녹듯이 사라져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악한 면을 가지고 있는 그이지만, 책 전체에서 그가 하고 있는 대화를 살펴보면 끊임없이 반성하고 참회하며 자기 자신을 비열한 인간이라고 일컫는다.
드미트리가 선술집에서 퇴역 대위의 턱수염을 움켜잡고 길거리로 끌어다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두들겨 패주었던 사건을 자기 스스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버지! 나는 나의 행위를 변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아니,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고백하겠습니다. 나는 그 대위에게 행패를 부렸습니다. 지금도 내가 짐승처럼 분노를 터뜨린 것을 후회하고 있으며 나 자신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러한 행동을 한 이유도 그 대위가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며, 드미트리와 아버지와의 사이를 독자는 이미 알고 있으므로 오히려 그가 한 행위는 그의 악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 술에 취한 이가 그러한 상황에서 충분히 저지를 수 있을 것이라는 동감을 얻게 한다.
마지막 탈출 부분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사코 탈출하겠다.~그 대신 나는 끝까지 자신을 책망할 거다. 저 쪽에 가서도 죽을 때까지 내 죄과를 씻도록 전념할 거야!」
알료샤와의 대화에서 그가 행동한 것을 고백할 때에는 수없이 자신은 비열한 인간이라며 참회하는 드미트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에서 그는 진정으로 악하지 않은 인간임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지나치게 난로를 때서 방안에 탄산가스가 가득 찼을 때, 술 취한 농군이 코를 골며 자고 있자, 미탸는 그 사람이 죽을까봐 창문을 열고 굴뚝 마개도 뽑고 랴가비를 간호해준 것에서도 드러난다. 표도르의 집에서 드미트리가 빠져 나올 때 자고 있던 그리고리가 뒤쫓아 오다가 쓰러졌을 때도 드미트리는 담에서 내려와 그를 확인하고는 정신없이 흰 손수건으로 머리를 틀어막는다. 그 후 그는 계속 괴로워한다.
「‘오오, 하느님, 울타리 밑에 쓰러진 사람을 제발 살아나게 해 주십시오!~만약에 그 노인이 살아 있다면…. 그때엔 나도 그 밖의 모든 모욕을 씻어 버리겠습니다. 훔친 돈도 돌려주겠습니다.~」
드미트리는 공판에서도 그리고리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기뻐한다.
드미트리는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방탕을 사랑했고, 그 방탕의 치욕까지도 사랑했어. 잔인한 짓도 좋아하고. 그런데도 나는 빈대가 아닐 수 있겠니? 카라마조프라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러나 나는 더러운 욕망에 사로잡혀 추잡한 행위를 좋아하지만, 결코 비겁한 짓은 하지 않아.」
「난 비굴한 욕망을 가진 사나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만은 정직하니까.」
「초 값은 갚겠네. 물론 숙박비도 내고. 드미트리 카라마조프의 체면은 지킬 테니까.」
그는 자신의 목숨 이상으로 체면, 자존감이 강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 소설 속의 사건이 일어난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3천 루블’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카테리나의 집으로 가는 알료샤를 만난 드미트리는 이렇게 말했다.
「봐라, 바로 여기에서 무서운 파렴치가 일어나고 있는 거야(‘바로 여기에’라고 말했을 때, 드미트리는 아주 야릇한 표정을 짓고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쳐 보였다. 그것은 마치 그 파렴치라는 것을 가슴 속 어디에, 주머니 속이나 아니면 목에 건 주머니 속에 깊이 감춰 두고 있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이것만은 말하지 않았어. 나도 그렇게까지 철면피는 아니니까!~그리고 그 비열한 계획을 끝까지 실행하고 말 거야.」
드미트리는 카테리나에게서 3천 루블을 그녀의 언니에게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지만 그는 언니에게 전해주지 않고, 절반은 흥청망청 써버리고 나머지 반은 그루센카와 도망갈 때 사용하려고 가슴속에 두는데 그것을 미리 암시해놓은 장면이다. 드미트리는 여자에게서 신세지기 싫은 체면 때문에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되었다. 드미트리는 이 3천 루블을 돌려주지 않아서 느끼는 양심의 가책으로 후에 엄청난 일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호흘라코바의 집에서 뛰쳐나오면서 드미트리는 미친 사람처럼 가슴을 치면서 걸어갔다라고 표현했다.
「가슴의 바로 그 부분을 두들긴다는 것이 어떤 뜻을 지니고 있으며, 또 그 동작으로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이건 지금 현재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에 속한다.~이 비밀 속에는 그에게 있어 모욕 이상의 것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3천루블을 마련하여 카테리나에게 갚아 줌으로써,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며 몸에 지니고 다니는 이 모욕을 자기 가슴으로부터, ‘가슴의 그 부분으로부터’제거해 버리지 못한다면 꼭 거기에는 파멸과 자살만이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조그만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내 어 울기 시작했다.」
그는 이 돈에 대한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으나 예판 때 결국 그는 고백을 하게 된다.
「목에서요. 목에서 떼어 낸 겁니다. 바로 이 목에서 말입니다. 돈은 여기, 내 목에 걸려 있었던 겁니다. 헝겊에 꿰매서 목에다 걸고 다녔지요. 이미 오래 전, 한 달 전부터 수치와 오욕을 무릅쓰며 그 돈을 목에 걸고 다녔던 겁니다.」
그는 결국 솔직하게 고백을 했지만 그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미리 말했던 많은 이야기들 때문에 아무도 그의 말을 온전히 믿지 않는다. 3천 루블 중에 나머지 절반이라도 갚으면 나중에 언젠가 이 사람이 돈을 갚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라며 돌려주려고 했던 이유는 그의 신념이 도둑놈은 비열한 인간보다 더 비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루센카와 도망가서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으므로 그의 신념마저도 흔들리게 되고 더욱더 그는 괴로워하게 된다.
돈 3천 루블은 드미트리에게 있어서 그의 마지막 남은 재산이며, 사랑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도구이며 동시에 양심이었다. 그루센카와 도망가기 위해 마지막 양심이라도 찾기 위해 카테리나에게 돈을 돌려주기 위해서 그는 돈을 빌리려고 아버지에게서부터 호흘라코바 부인에게까지 돌아다니며 빌리려고 하였으나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가고, 이에 따라 그의 감정도 격해져만 가고 이성을 잃어가는 모습을 독자들은 함께 느끼게 된다.
그리고리의 머리에서 나는 피를 닦아준 후에 피가 묻은 채로 드미트리는 페냐에게로, 표트르 일리치에게로 갔을 때 이렇게 말한다.
「나한테는 그런 높은 뜻의 질서라는 게 없어요……. 그러나……, 모든 건 끝났습니다. 슬퍼할 거라곤 아무것도 없어요. 때는 이미 늦었으니, 될 대로 되랄 수밖에! 내 일생은 무질서의 연속이었소. 그러니까 질서를 세울 필요가 있는 거죠.」
드미트리는 정직하고 체면을 중시하고 솔직하다. 그의 감정을 거짓 없으나 두서없이 예판이나 공판에서 또는 사람들에게 말하게 됨으로써 사람들은 드미트리가 돈 때문에 표도르를 살인했을 것이라고 믿게 된다. 하지만 계산되지 않은 그의 행동과 말들은 치밀하게 살인계획을 세운 《죄와 벌》에서의 라스콜리니코프와는 다르게 훨씬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저지른 행위와 악에서 구원되는 희망을 보여주는 것은 그가 깨달은 사랑이며, 그보다 더 큰 것은 바로 참회일 것이다. 한 순간도 그는 참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기에 드미트리에게서 희망이라는 것을 우리는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2. 이반 표도르비치 카라마조프
이반의 성격의 모티프는 ‘고뇌’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여러 등장인물, 주로 알료샤와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토로해 나간다. 하지만, 그는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고정된 성격의 인물은 아니다. 자신과는 상이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알료샤는 그의 생각을 이끌어 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이반은 그에게 자신의 사상을 최대한 고민하여 표현함으로써, 토로하는 것이다. 그는 사회에 관심이 많은 지식인 청년으로써, 신과 영원에 관한 문제에 모든 인간과 사회에 관한 문제가 귀착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의 해결에 관해 끊임없는 고민을 해 나간다. 그의 대답들을 살펴보면, 그는 신을 부정하고, 신이 있음으로 해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선한 양심을 부정하는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온전한 신념을 택하기보다는 사상의 자유를 택하는 이성적인 인물의 전형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고정된 인물이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세상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신이 만든 불합리한 세상에 대해 신과 싸우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고 괴로워하며, 실제로는 신을 인정하고 순수한 신앙을 열망하는 존재로서, 선을 희망하고 있는 모습이 곳곳에서 그려진다. 방금도 말한 것처럼 이반은 작중 인물들을 대변한 작가와의 대화에 능동적으로 대답하며 변모하여 나가는 존재다.
먼저, 가족들이 모인 회합에서 조시마 장로와의 대화를 살펴보자. 국가가 교회에 동화되어야 하며 교회가 사회재판을 담당해야 한다는 그의 논문의 요지를 밝힌다. 그러나 교회의 문제에 대한 주장을 정작 자신이 믿고 있지 않다는 조시마 장로의 말에 그는 얼굴을 붉힌다. 자신의 문제에 관해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그 앞에서 놀라고 그는 그것이 해결될 수 있는지 솔직하게 묻고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작중인물의 성격이 하나의 입장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사상은 아직 당신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해결을 못 보고 있어서 당신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엄청난 재난을 당한 사람은 너무나도 절망한 나머지 그 절망에 스스로 위안을 느낄 때도 가끔 있는 법이지요. 당신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되어집니다만, 당신은 절망한 나머지 잡지에다 논문을 쓰기도 하고 사교계에 나가 토론을 하기도 하면서 그것은 스스로의 위안으로 삼고 있지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의 주장을 믿지 못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그 주장을 냉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당신의 마음속에서 아직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지요. 바로 여기에 당신의 커다란 비애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끊임없이 해결을 강요하고 당신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 문제가 과연 제 마음속에서 해결될 때가 있을까요? 긍정적인 방향으로 말입니다.」
「긍정적으로 해결을 보지 못한다면 더구나 부정적인 방향으로는 해결을 볼 수 없으리다! 그것이 당신 마음의 특성이라는 것은 당신 자신도 잘 알고 있겠지요. 바로 여기에 당신의 고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고뇌를 고뇌로 삼을 수 있는 고결한 마음씨를 주신 조물주에게 감사를 드리시오. ‘높은 것에 뜻을 두고 높은 것을 구하라. 이는 우리의 안식처가 하늘에 있음이니라.’ 부디 하느님께서 당신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마음 속 고뇌가 해결을 보게 해주시고 또한 당신의 앞길에 축복을 내리시기를!」
사랑하는 여인이지만, 그녀에게 또한 집착하고 싶지 않은 젊은이다운 이반의 모습은 또 다른 모습으로 생동감 있는 인물로 보여 진다. 분명 자신은 카테리나의 자신의 관한 사랑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반을 사랑하고 고통을 주고 있다는 알료샤의 말에 그것은 오해라며 거부한다. 이 부분도 역시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카테리나와 알료샤 와의 대화 속에서 능동적으로 주도적으로 대처하는 이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결코 나를 사랑한 적이 없어! 물론 나는 한번 사랑을 입 밖에 내서 고백한 적은 없지만,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이분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그걸 알고 있기는 했으나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이분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아니, 도대체 나는 이분의 친구였던 적도 없었으니까. 정말 단 하루도 없었어. 자존심이 강한 여성에게 나 같은 놈의 우정이 필요할 리가 없지.」 <후략>
이반은 자신의 동생이자, 수도회의 수습기사로 열렬한 신앙심을 가진 알료샤 와의 대화에서 그의 입장을 피력하면서도 변화가 가능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알료샤라는 인물은 그에게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대상이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알료샤 와의 대화를 통해서 이반은 자신의 영혼을 치료받고 위안 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성의 논리에 앞서는 자신의 문제의 해결을 역시나 바라고 그와의 대화를 시도하며 고민을 토로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창조해낸 인물은 반드시 그가 생각한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대화를 통해서 이반은 작가를 놀라게 하고 작가가 일찍이 추측하지도 못한 것을 말하고 행하는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철저하게 논리적으로만 보이는 그의 내면은 고뇌로 인한 비애로 고통 받고 있기 때문에 선에 대한 희망과 신에 대한 인정을 곳곳에서 드러내는 것이다. 이반에게서 알료샤는 그의 대답을 이끌어내는 인물이다. 그의 질문에 대해서 그는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대답한다.
「내가 비록 인생에 대한 자신을 잃고 사랑하는 여성에게 실망하고 우주 만물의 질서조차 의심한 끝에 그래서 모든 것은 무질서하고 저주스럽고 어쩌면 악마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혼돈된 세계라고 확신하게 되어 인간적인 환멸과 공포를 남김없이 맛본다 하더라고, 그래도 나는 끝내 살기를 원할 거야.」
<중략>
「모든 사람은 이 지상에서 무엇보다 먼저 삶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삶의 의의 이상으로 삶 그 자체를 사랑한단 말이지?」
「물론이죠. 형님 말씀대로 논리고 뭐고 할 것 없이 우선 사랑부터 하는 거예요. 그것은 반드시 논리보다 앞서야 해요. 그때 비로소 삶의 의의를 깨닫게 되지요. 이건 벌써 오래 전부터 내 머릿속에 떠올라 있던 거예요. 형님께선 이미 반을 성취한 셈입니다. 그 나머지 반을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형님은 구원을 받게 될 겁니다.」
「넌 벌써 나를 구제하려고 하지만, 나는 아직 파멸의 길에 들어서지 않았는지도 모르잖아?」
<중략>
「좋을 대로 하세요. 형님 말대로 ‘다른 출발점’에서부터 시도해도 좋구요. 하지만 형님은 어제 아버지 집에서 신은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셨죠?」
알료샤는 힐끗 형의 눈치를 살폈다.
어제 아버지 집에서 식사 중에 내가 그렇게 말한 건 널 놀려주고 싶어서였어. 그러니까 아니나 다를까, 네 눈동자에서 금방 불똥이 튀는 것 같더군. 하지만 지금은 너하고 토론하는 걸 회피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 정말 이건 내 진심이야. 난 너하고 친하고 싶다. 알료샤, 내겐 친구가 없어. 그래서 한번 너하고 사귀고 싶은 거야. 그리고 어쩌면 나도 신을 인정하고 있는지도 모르잖니.”
<중략>
“알료샤, 나는 너를 타락시키거나 너와 그 견고한 입장에서 너를 끌어내리려는 건 절대로 아니야. 아니, 어쩌면 내가 너한테서 치료를 받고 싶어 하는 지도 모르지.”
이반은 아주 얌전한 소년이 된 것처럼 싱긋 웃어 보였다. 알료샤는 여태까지 형이 그런 미소를 짓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
그에게서 구원과 희망의 길은 신이 주신 ‘선에 대한 양심’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아버지의 죽음에 동의한 도덕적인 살인에 대한 법정진술을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다 죽어가는 농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를 도와주는데 1시간 이상을 소비하고도 몹시 만족해하며 희열을 느낀다. 여기서 그는 신이 없다면 인간의 선행과 양심은 소용없다고 말하던 자신의 논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모습이며, 한 인간으로서의 양심이 그에게 내재된 빛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눈이 농부의 얼굴을 거의 다 덮고 있었다. 이반은 갑자기 농부를 잡아 일으켜 등에 들쳐 업었다. 오른쪽에 보이는 오두막 불빛을 목표로 나아가서 탕탕 덧문을 두들겼다. 이윽고 대답을 하고 나온 집주인인 상인에게 3루블을 사례하겠다고 약속하고 농부를 파출소까지 데리고 가는 것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상인이 옷을 챙겨 입고 나왔다. 그리하여 이반은 무사히 농부를 파출소에 데리고 가서 곧 의사의 진찰을 받게 했을 뿐 아니라 인심 좋게 여러 가지 비용을 지불했다.」
결정적으로 환영을 만남과 대화는 이반이 변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환영은 자기 자신의 일부였던 것이다. 환영의 실재성으로 인해 알료샤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대답을 하던 존재였던 그가 환영 앞에서는 신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그 답을 구하고 있다. 자신을 조소하고 깔보는 환영과의 마치 싸움과도 같은 그들의 대화는 이반에게서 그의 양심이 살아있음을 깨닫게 해주고 비열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또한, 환영이 대심문관과 ‘인간은 무슨 짓을 해도 상관이 없다’는 그의 논리를 언급하자,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컵을 집어 던진다. 그의 사상을 그가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망상증을 통한 이 환영은 그에게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인정하고 구원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비추어지고 있는 것이다. 환영은 그에게서 선의 빛을 발견하고 이끌어주는 존재다.
「나는 자네 마음속에 매우 조그마한 신앙의 씨를 던져 넣지. 그러면 그 씨에서 한 그루의 참나무가 자라는데, 그 자라나는 것이 엄청나서 자네기 그 위에 올라가면 ‘황야에서 수도하는 신부나 깨끗한 수녀들’ 속에 한몫 끼고 싶어질 만큼 큰 나무란 말일세. 그것이 자네가 남몰래 열망하던 일이니까. 자네는 황야에 은둔해서 메뚜기를 먹으며 영혼의 구제를 위해 노력하겠지.” <중략>
“내 천성 속에 있는 일체의 어리석은 생각들, 벌써 생명을 잃은 지 오래 되는 나의 지혜로써 다 음미해 보고 썩은 고기처럼 내동댕이친 것들을 자네는 무슨 신기한 것처럼 새삼스레 권하고 있단 말야!」
이반은 끝내 자신의 형을 배신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3만 루블을 형을 위해 희생한다. 그것이 자신이 살인자이기 때문이건, 어쨌건 간에 시베리아로 호송될 기차의 역장을 만나고 드미트리를 구출하기 위해 그를 희생하는 것이다.
「그이는 말예요, 그 봉투 안에 상세한 탈주 계획서가 들어 있으니까. 만일 자기가 죽거나 중병에 걸리거든 나 혼자서라도 미챠를 도와주라는 거예요. <중략> 이반은 아직도 내가 미챠를 사랑하는 줄 알고, 늘 안절부절못하는 주제에, 형님을 구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나한테 드미트리의 구출을 부탁하지 않겠어요. 그 순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아아, 그야말로 참된 희생이라는 거예요!」
이 세상에 신으로부터 삶이 주어져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알료샤처럼 그의 존재를 믿고 숭고하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도 있고, 드미트리처럼 그의 생활을 방탕할지라도 끝내는 신에게 돌아오는 자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반처럼 신을 부정하며 살아가는 존재도 있다. 이반에게는 신에 대한 기쁨의 환호성이 아니라 고뇌와 비판 속에서 살아가지만, 누구보다 삶을 사랑하고 살고 싶어 하는 존재이자 신을 순수하게 믿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그의 삶의 동요와 불안, 믿음과 불신의 싸움으로의 고통은 어쩌면 목을 매는 고통보다도 더하다. 그러나 이반은 스메르쟈코프의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비열함을 바닥까지 드러내는 상황에서도 살고 싶은 열망이 강한 인물이다.
신을 사랑하는 방법에도 여러 가지 있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던가. 사랑하는 사람과는 소중하기 때문에 싸울 수도 있다. 적어도 이반은 신에게 무관심하지 않다. 오히려 그와 반항하며 싸운다. 그의 부조리한 세상이 바뀌어 지기를 희망하고 추상적으로나마 인류와 신을 사랑하는 존재가 바로 그이다. 그가 신에 대해서 갖는 부정은 그는 누구보다 신을 믿고 싶어 하기 때문에서 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지독한 고뇌의 인간에게도 희망은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 아무리 부정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에게 내재된 신의 빛으로서의 양심은 이반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리고 형의 무고한 유죄선고 앞에서도 그의 양심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구원과 희망의 길은 이렇게 열려지고 있다. 자신의 사상의 결과로써 아버지의 죽음을 초래한 것에 대해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신으로부터의 용서를 마음속 깊이 구하는 것이 누구보다 삶과 신을 사랑하는 이반에게 남아있다.
3. 알렉세이 표도르비치 카라마조프(알료샤)
도스토옙스키에게 있어서 알료사는 또 하나의 구원을 찾아 보기에 가장 적절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알료사야말로 가장 그리스도적인 선을 가지고 확실한 구원의 형태를 띄고 있었으니 말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있을 수 없을 법한 인물을 설정해 놓고서는 책임 없이 그를 카라마조프의 한 형제로 만들어 버렸다. 이로 인해 들어나게 될 모습을 도스토옙스키는 어두운 서재에 앉아 두 손을 마주잡고는 차가운 미소와 함께 바라만 보고 있었을런지는 않은지. 그렇지 않으면 최후의 대책으로 마련된 방편이라는 임무를 알료사에게 부여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알료사는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선하다. 아니 다른 어떤 인간들과 비교해도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근원적인 선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선은 ‘기독교’적 신앙관과도 잘 결합되어 있다. 이런 그는 다른 이들의 호감을 사기에도 매우 뛰어나서 대다수의 사랑을 받는가 하면은 심지어 표도르의 사랑마져도 가능 해 보인다. 결국 소설 내내 알료사는 가장 ‘완벽한’ 인간상을 가진 것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미래의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여겨지게 된다. 그래서 혹자들은 ‘카라마조프의 해결은 알료사이다’ 라고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알료사는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 역시도 하나의 인간, 즉 신은 아니었고 그랬기에 더욱 더 구원의 행방은 절실하다. 완전하리라 싶었던 알료사지만 그에게도 여러 번의 혼란은 찾아왔다.
(조시마 장로가 죽은 후..) ..그의 곁으로 다가간 파이시 신부는 그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온 몸을 들썩거리며 소리 없이 비통하게 흐느껴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알료샤는 마치 어린애처럼 울어서 퉁퉁 부어오른 얼굴에서 손을 떼고 그를 쳐다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곧 얼굴을 돌려 다시 양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3부 제 7편 알료샤 中>
이렇게 괴로워 한 알료사는 자신이 중요시 여겼던 것들 또한 대수롭지 않게 여겨 버리게 되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자신이 동정과 선을 베풀었던 그런 인간들과 똑같은 모습을 말이다.
..그러나 자넨 소시지 같은 건 먹으려 들지 않겠지..
그것 좀 주게.(생략)
보드카도 좀 주게.
야아, 이건 놀라운데!..
- <제 7편 알료샤 중..>
그렇다면 우리는 드미트리, 이반과는 달리 알료사에게서 무엇을 찾아 낼 수 있어야 하며 도스토옙스키 역시 알료사에게 알아내고자 하였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도스토옙스키는 알고 싶었던 것이다. 과연 알료사처럼 철저히 선하고 교도적이며 존경받을 만한 인품이란 이 세계에서는 구원의 길을 제시 할 수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표도르를 떠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중 객관적으로 봤을 때에 가장 선한 알료사는 자기 스스로를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지를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알료사는 절대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이다. 오히려 그로 인해 우리는 인간의 구원을 다시 바랄 수 있게 되었다. 오직 궁극의 선만이 우리를 구원과 희생에 이를 수 있게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소돔의 미를 추구하는 우리 인간이야 말로 어두운 암실속에서 발버둥 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알료사는 드미트리로 인해 일료사와 연관을 맺게 되고 또한 여러 아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러한 것은 순전히 드미트리의 뒤처리로써 이루어 진 일이지만 알료사는 그 와중에도 선과 교도를 행한다. 그러면서도 자신 역시도 같이 영향을 받는다.
자넨 어떤 의미로 나를 신비주의자라고 하지? 또 내게서 무얼 고친다는 말인가?
그 신인지 뭔지에 열중하는 것 말입니다.
아니, 그러면 자넨 하느님을 믿지 않나?
아니야, 자네는 비록 좀 비뚤어지긴 했지만 아름답고 훌륭한 천성을 지니고 있어..
<콜랴와 알료샤의 대화 중에서>
이렇게 보면 마치 알료사는 인간 구원의 부재에 대한 대비책으로 제시되었다기 보단 인간 본성에는 선 마져도 원초의 성품이며 구원으로 가는 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결국 알료사의 번민과 슬픔, 고통 그리고 나타나는 변화는 결코 인간이 인간을 포기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는 대지에 몸을 던졌을 때는 연약한 젊은이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대지에서 일어났을 때는 한 평생 흔들리지 않을 견고한 힘을 가진 투사가 되어 있었다..
Ⅳ. 다성성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 다성성의 의미
머리말에서도 밝혔듯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성격은 바흐찐이 말한 바와 같이 다성성에 있다. 여기서는 다성성이 무엇이고 그것이 현대에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지에 대해서 잠시 설명하고자 한다.
‘다성성(polyphony) 은 ‘다성악’이라고도 번역되는데, 원래는 독립된 선율을 가진 둘 이상의 성부로 이루어진 음악을 말하는 음악 용어이다. 미하일 바흐찐은 이를 도스토예프스키의 비평에 도입하여 사용하였는데, 원 의미와 마찬가지로 소설 내의 인물들이 독자적인 성격과 사고를 가지고 소설을 구성해나가는 것을 말한다. 소설이란 작가가 인물을 완결된 형식으로 창조해 내는 것이 기본이 되고 작중 인물은 작가의 형상이라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바흐찐은 이 같은 작가의 형상이 작중 인물이라는 말은 형용 모순(contradictio in adjecto(노어)- contradiction in terms or in definition(영어))이며 작가와 작중 인물은 서로 다른 상황과 사고, 다른 인격을 가진 상이한 존재라는 것이다. 즉 작가가 주체라고 할 때, 작중 인물은 타자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반적인 작가들은 작중 인물을 자신의 형상을 닮은 자로 여기고 자신이 통제하고 결정하며 조정하게 된다. 이것은 타자에 대한 인정과 배려가 사라진 작가 개인의 독백에 불과한 것이다. 독백주의의 원인은 작가와 작중 인물간의 거리, 즉 작품 외적 존재로서의 작가와 작품 내적 존재인 작중 인물간의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기 때문이다.
바흐찐은 이 같은 독백주의를 비판하고 타자와의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잘 보여주는 작품의 예가 바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과 작중 인물과의 거리를 파괴하고 작중 인물을 자신의 창조물로 보지 않고 하나의 독자적 인물로 보고 직접적인 대화를 시도하였다. 즉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소설이지만 자신만의 이야기를 설파하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작중 인물들에게 묻고 작중 인물이 답하는 대화의 형식을 통해 소설을 구성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 속의 인물은 그 스스로 인격을 부여받고 소설 속에 완결된 창조물이 아니라 생동하고 고민하고 답하는 존재가 된다. 일반적으로 작가가 소설을 창조한다 할 때, 작가는 능동적인 주체가 되고 작중 인물은 피조물로서 수동적 객체 혹은 타자가 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타자인 작중 인물에게 묻고 대화함으로써 주체와 객체가 상호 교류하고 관계하는 동반자로서의 지위를 주게 되는 것이다. 바흐찐의 다성성이란 이처럼 작중 인물이 독립된 존재로 작품 속에 등장하고 그 인물이 독립적이기 때문에 작가에 의해 그 삶의 시작과 끝이 단절되지 않는 존재가 됨을 말하고 이를 통해 타자의 회복을 추구하는 것을 바흐찐의 대화주의라고 할 수 있다.
2.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인물들의 다성성
소설에서 인물은 행동의 주체이며, 주제의 구현자로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인물의 설정이 소설의 구성요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까닭은 소설의 궁극적 대상이 인물을 통한 인간의 문제를 다룸에 있기 때문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등장인물 역시 주제를 구현해 내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작가는 인물들의 행동과 치밀한 내면적인 묘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을 말하고자 한다.
이 소설의 주요등장인물은 러시아의 어느 도시의 카라마조프의 집안의 늙은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와 그의 아들들, 즉 장남인 드미트리, 둘째 이반, 셋째 알료샤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 세 아들의 상이한 성격의 상징성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본성과 본질에 다가가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사실상 독립적이고 병합되지 않은 다양한 목소리들과 의식, 진실로 다성적인 목소리들로 특징 지워진다. 그의 주요 작중인물들은 작가의 언술의 객체에 해당될 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들 자체로서 의미 있는 언술의 주체에 해당한다. 우선 무엇보다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한 다성성은 작중 인물이 자기 자신과 그를 에워싸고 있는 주변의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나 견해에 해당된다.
예를 들자면, 작가는 카라마조프라는 한 집안의 세 형제들을 각각 다른 성격과 사상의 인물들로 등장시킴으로써 신과 인간에 대한 다양한 자신의 관점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각 인물들이 신과 세상에 대해 바라보는 관점을 극단적일 정도로 상이한 면을 많이 지니고 있다. 신에 대한 신념, 러시아의 국민성, 세속의 쾌락, 유산상속문제를 둘러싼 갈등, 여인을 사이에 둔 내면적 욕망, 아버지의 죽음 등의 자기의 자아와 주변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고 반응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것이 그의 생애에서 자신이 소유했거나 혹은 추구했었던 모습들을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고 다양한 인물의 창조를 통해서 인간의 탐욕과 열정, 순수, 신념, 사상, 희망, 비열함 등 진실로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각각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은 독자적인 언술, 즉 순수한 목소리를 낸다. 작중 인물에 대한 작가의 언술은 곧 언술에 대한 언술인 것이다. 그들의 언행은 작가에 의해서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아니라 작가가 작중인물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작중인물은 놀라게 하고 작가가 일찍이 추측하지도 못한 것을 말하고 행하는 능력을 획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생애의 그의 사상들로 창조해낸 인물들과 작품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는 소설의 대화에서 단순히 또 다른 참여자에 지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3. 다성성과 작품의 주제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주인공은 다양한 인간유형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가장 신성 모독적이고 파괴적인 친부살해라는 소재를 사용함으로서 인간이 가진 죄악성과 신성성을 행동뿐만이 아니라 마음과 무의식의 영역에서도 발견하고자 한다. 다성적인 기법을 통하여 선악을 동시에 내재한 본연의 인간 본성을 파헤치고 싶었던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고뇌와 여러 상념과 당시의 사상들을 주인공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로 하여금 모든 생각을 토로하게끔 한다. 그것들은 작가 자신의 삶을 통해 스스로 고뇌했던 문제이고, 끊임없이 직면하고 해결해야 했던 문제이기 때문이다.
소설 전체를 통해 끈질기게 이어지는 것은 신에 대한 믿음과 불신 사이의 갈등이며, 이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중심사상이다. 형제들 가운데 막내인 알료샤는 그리스도교적 이상을 구현한 존재로서, 삶의 의미보다는 오히려 삶 자체를 사랑한다. 드미트리 역시 끝없이 삶을 사랑하다가, 운명적인 사건을 겪고 나서야 그 의미를 신의 품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삶 자체보다 삶의 의미에 더 관심이 많은 이반은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신이 만든 세상을 허무적으로 바라보며 신에게 대항하지만, 결국 신속에서의 양심과 선행이라는 면에 직면하여, 비열한 자신의 환영을 발견하게 되며 이반의 형이상학적 반란은 끝을 맺는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반의 고뇌와 아픔을 공유하지만, 이반의 사상과 함께하지는 않는다. 그는 궁극적으로는 이성의 논리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법과 사랑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로 이끌어지기를 희망하였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은 각자 자신이 가진 세계에 대한 이해의 방식과 고뇌들을 가지고 갈등하며 반목하지만, 결국에 작가는 신이 없는 그들의 길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그리하여 결국, 이들이 택한 길은 선과 신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 길을 택한 것처럼 말이다. 선이라는 관념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인 관계에서 나온 인위적인 것일지라도, 그 선을 지향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이끌어 간 것은 작가가 그만큼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일 것이다. 각기 다른 성향을 가진 인물이 카라마조프가라는 하나의 틀 안에서-그 틀이 탐욕적이고, 정열적이라 결코 긍정할 수 없는 것으로 상징되지만- 알료샤라는 인물의 상징성, 드미트리의 갱생과 부활, 이반의 형이상학적 고뇌로 보여주고자 하며 나아가려 한 것은 인간과 신, 또다시 우리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Ⅴ. 맺음말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작가가 가진 인간 본연에 대한 탐구정신은 그의 작품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특별히 가장 마지막으로 쓰여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들은 선과 악, 신과 인간 사이에서 고뇌하는 극단적인 주인공들을 통해 작가 자신의 고민을 나타내고 있다. 작품 속의 모든 주인공들은 질곡의 과정을 통해 결국은 선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의 표면에는 신을 가장 따르는 알료샤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 언제나 고민하는 이반과 끊임없는 욕망을 추구하면서도 그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체 자신을 채찍질 하는 드리트리가 결국 인간의 근원적 선을 발견하고 구원의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선을 추구해나가는지 알려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같은 인간의 본질적 문제에 접근하면서 자신과 작중 인물과의 거리를 두지 않는다. 위에서 살펴본 봐와 같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작가 자신이 직접 서술하다가도 알료샤의 시선으로 전환되고, 이반의 사상을 설파하다가 드미트리의 욕망 속에 빠져들기도 한다. 또한 작품 속의 시간은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각 주인공의 움직임과 대화, 생각에 따라 자유롭게 압축, 연장되며 소설을 구성한다. 이는 소설의 특성인 내적 화자와 외적 화자의 경계를 무너트리는 결과를 낳게 되고 주인공은 자신 스스로의 생명력을 받아 작품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규정되지 않은 실존적 존재로 태어나게 된다. 바흐찐이 파악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다성성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같은 독특한 서술적 특징은 도스토예프스키가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고자 했던 의도, 즉 선과 악, 욕망과 사랑, 순수한 희생이라는 인류 전체의 보편적 심성을 드러내고 이를 변호하며 연민하고 포옹하려 했던 위대한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본 조에서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발표를 준비하면서 무엇보다도 흥미진진하게 논의한 것은 자신이 누구와 닮았냐는 것이었다. 조원 중 신을 믿는 자는 자신 속에 이반이 보여준 신에 대한 부정이 있었음을 인정했고 누군가는 드리트리를 보면서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알료샤는 선함을 추구하지만 자신 스스로도 유혹에 흔들리는 모습을 인정함으로서 읽는 이로 하여금 위로도 되어주었다. 알료샤를 통해 위선이 나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위선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나쁜 것이란 생각도 같이 공유했었다. 이처럼 다양한 의견과 감상을 나누며 발표를 준비한 것은 본 조 모두에게 발표 성적과는 별도로 중요한 유익한 시간이었음을 전하며 발표를 마치고자 한다.
참고문헌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해원출판, 1993.
콘스탄틴 모츨스키, 《도스토예프스키-영혼의 심연을 파헤친 잔인한 천재》, 책세상, 2000
마하일 바흐찐, 《대화적 상상력》, 김욱동 역, 문학과 지성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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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화 지음, 도스또예프스키 : 읽기의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