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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白巖) 박은식(1859~1925) 선생의 「한국통사」는 가장 공정한 사관에 입각하여 기술된 우리의
근‧현대사다. 해방 후 이병도와 그 동조자들, 그리고 그들로부터 역사를 배운 제자들은 철저하게 친
일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역사책과 교과서를 쓰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특히 이병도는 서울대 교수 시
절 왜국에 출장을 가면 가장 먼저 왜복으로 갈아입고 신사참배부터 했다. 친일을 넘어 숭일(崇日)분
자였던 것이다. 오늘날 이 나라 사학계를 장악하고 있는 좌파 사학자들은 한 술 더 떠 대한민국의 정
통성을 부정하는 역사책과 교과서를 써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문재인은 1919년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한민국의 뿌리로 간주하겠다며, 올해
3‧1절에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거행하겠다고 공언했다가 보수진영의 격렬
한 반대에 부딪혀 이를 생략했다. 일부 인사들에 의해 구성된 임정은 국가의 기본요소인 국민‧주권‧
영토를 갖추지 못한 그야말로 임시로 만든 정부 형태였으니, 그러한 형태의 임정을 대한민국의 정통
으로 간주하겠다는 이면에는 비슷한 과정을 거쳐 구성된 김일성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하겠다는 저의
가 깔려 있는 것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나는 문재인의 脫원전정책도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여 북한에 맞설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저의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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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들이 쓰는 역사서적은 시대의 산물이다. 헤로도토스나 사마천이 현대에 살고 있다면 전혀 다
른 사관에 입각한 역사서를 쓸 것이다. 불과 130여 년 전에 죽은 공산주의의 교조 마르크스도 마찬가
지다. 조선은 1905년에 왜국과 체결한 을사보호조약 이후 실질적으로 40년 동안 그들로부터 식민 지
배를 받았다. 왜정 40년을 산 우리 역사가들도 시대적 지배 아래 역사서를 썼다. 왜인들의 감시 아래
서도 그들은 조선인들의 각성과 단결을 촉구하고 항일투쟁을 북돋우려는 목적으로 역사서를 쓴 것이
다. 이를 민족주의적 역사학이라고 한다.
19세기에는 로마제국이나 페르시아제국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가 세계를 지배했다. 로마제
국 이후 1000년 동안 제국을 형성하지 못했던 유럽 여러 나라는 발전한 기술과 압도적인 군사력을 사
용하여 다른 대륙에 강력한 제국을 수립했다. 스페인을 필두로 포르투갈‧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이
식민지 형태의 제국을 수립하여 힘이 약한 식민지 원주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수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복할 땅이 얼마 남지 않은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미국‧러시아‧이탈리아‧독일‧왜국 등도 식
민지 확보에 나서 다른 나라에 제국을 수립했다. 그러고 나서도 욕심을 멈추지 않고 땅 따먹기를 계
속하다가 충돌한 것이 양차 세계대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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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국 식민지 시절 ,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민족 해방투쟁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일제의 불
법적‧폭력적인 조선 강점 과정과 조선인들이 벌인 해방투쟁을 자세하게 그렸다. 신채호는 「조선상
고사」에서 조선인들이 민족적 자부심과 자주성을 북돋우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역사를 재구성
하고 재해석했다. 백남운은 공산주의자들의 ‘역사 발전 5단계론’에 입각하여 「조선 봉건사회 경제
사」를 집필했다. 서울대와 독일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얼치기 좌파 유시민이 하고많은 우리나라 근‧
현대 역사서 가운데 콕 찝어서 백남운의 「조선 봉건사회 경제사」를 포함시켰다. 그러나 그공산주
의 사관을 알리려는 불순한 의도가 너무나 뻔하여 내용 소개는 생략한다. 백남운은 골수 공산주의자
로 1947년에 월북하여 김일성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초대 교육상, 과학원 원장, 최고인민회의 의
장 등 요직을 역임한 뒤 숙청도 당하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 백남운의 「조선 봉건사회 경제사」는
유시민을 비롯한 좌파 운동권 학생들의 오랜 필독서였다.
황해도 태생인 박은식은 청년기에 향시에 합격하여 6년 동안 숭인전(평양에 있는 기자조선의 시조
기자의 혼백을 모시는 사당) 능참봉을 지냈다. 1898년부터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동했
으며,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차례로 맡아 애국계몽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일합병
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이 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5년에
는 중국 상해에서 조선의 망국과정을 그린 「한국통사」를 출간했으며, 「이순신傳」과 「안중근
傳」을 펴내기도 했다. 1920년에는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썼다. 1923년에
는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사장을 역임했으며, 1925년 3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
통령에 추대되었다. 그는 조선이 독립하면 「대한민국 광복사」를 집필하려고 결심했지만, 각중에
건강이 악화되어 대통령직을 사임한 뒤 1925년 11월에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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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은 한글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역사책은 순한문으로 썼다. 국호도 다른 역사가들이 조
선, 대한제국 등 다양하게 사용한 것과 달리 일관되게 ‘한국’으로만 표기했다. 「한국통사」는 우리
민족이 겪은 아픈 역사를 가장 객관적으로 쓴 책이다. 1895년 8월 20일 새벽, 왜인들이 민비를 시해한
이른바 을미사변의 기록도 다음과 같이 짧고 담담하게 사실만 기록했다.
<왜인들은 왕후를 칼질하여 죽였다. 그들은 평복 차림으로 환도를 소지했으며, 호신용 총을 휴대하
고 입궐한 자객‧고문관‧순사 등은 모두 60명이었다.>
그런 다음 같은 장면을 자세하게 서술한 법무협판 권재형이 1896년 4월에 작성한 보고서를 첨부해두
었다. 박은식은 민비의 정치행위를 매우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었는데, 유시민은 을미사변을 간
략하게 쓴 것은 박은식이 자신의 손으로 민비의 시해 내용을 자세하게 쓰고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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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통사」 제1편은 한반도의 역사‧지리‧주요 도시 등을 간략하게 소개한 데 이어, 상고시대부터
삼국시대‧고려‧조선에 이르는 역사를 요약해놓았다. 제2편은 고종이 즉위한 1863년부터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까지 정치적 혼란과 국정 부패 상황, 쇄국정책의 이행, 천주교를 빌미로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철폐한 무도한 범법자들 처벌, 개항과 왜국의 침탈과정,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
전쟁, 을미사변, 항일의병전쟁 등을 담았다. 제3편은 대한제국 선포, 노일전쟁, 을사늑약, 한일합방,
‘105인 사건’ 등을 기술했다. 1911년에 일어난 ‘105인 사건’은 안명근 의사가 조선총독 데라우치를 살
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조선총독부가 애국지사 105인을 공범으로 몰아 불법적
으로 감금하고 처벌한 사건이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어린이 구호 캠페인, 어린 소녀가 엄마.아빠로 부터 의 확대를 심히 걱정하는 TV광고를 EBS에서 자주 봅니다.
부모님 의 회초리가 내 인생을 바로 잡았다는 사람도 적지 않듯, 무엇이 잘못된 행동인지 그리고 남에게 페를 끼치는 행위인지 아직 구별할수 없는 어린이에게 육체적 자극으로 분명한 기억을 심어주는 것이 그 아이를 위해 옳으냐 그르냐는 앞으로도 계속될 논쟁 입니다. 법으로 제어를 한다는게 선듯 용납되지 않아서 입니다. 좋은 하루 맞이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