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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늘빛향기 원문보기 글쓴이: 등대지기
새벽이슬강좌/ 레위기 19 장
상생의 등불 (레 19:1-37)
온 종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길을 나서는 친구에게 “어두운 밤길이니 이걸 들고 가라”며 주인이 등불을 내밀었습니다. “아니 자네는 나를 놀리는 건가? 앞 못 보는 나에게 등불을 주다니!” 소경인 친구는 화를 벌컥 냈습니다. “아닐세, 오해하지 말게나. 이 등불은 자네가 필요해 마련한 것이 아니라, 자네의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을 위하여 준비한 것이야. 누구보다 자네를 잘 아는 친구로서 자네를 놀리겠는가?” 어두운 밤 길,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에게 장님의 등불은 참으로 필요합니다. 남을 위한 배려는 결국 앞 못 보는 소경 자신을 돌보는 일인 것입니다. 남을 위한 밝음은 나 자신을 위한 환한 비춤입니다. 그것은 너와 나를 위한 상생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 등불이 꺼진 줄도 모르고 활보하면 상대방만 탓하는 어처구니없는 오해와 파멸이 기다릴 뿐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지는 “너희는 거룩하라”(2절)입니다. 이 말은 레위기의 요지입니다. 레위기 전반에 걸쳐 줄곧 강조하는 명령입니다. ‘거룩’이 무엇입니까? 구별이라는 의미를 가진 ‘거룩’은 마치 소경의 밝은 등불과 같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어디를 가도 어두움인 세상에서 빛만이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소경 친구에게 등불을 들려주듯이 빛이신 하나님께서 어두운 세상에서 살아가야하는 선민에게 들려주신 밝은 등불이 곧 거룩입니다. 그래서 이 명령을 주신 이가 ‘하나님 여호와’라고 계속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는 말씀이 본 장에서 일곱 번 (3~4, 10, 25, 31, 34, 36절) 그리고 “나는 여호와니라”는 말이 여덟 번(12, 14, 16, 18, 28, 30, 32, 37절) 나옵니다. 구약에서 “나는 여호와니라”는 말씀 속에는 나는 영원하다 나는 거룩하다 나는 자비롭다 그리고 나는 공의롭다라는 식의 자존적 속성이 자연스럽게 함축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여호와이신 신약의 예수님이 그래서 그렇게나 자주 나는 빛이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선한목자다 나는 길이다는 식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곧 구약의 여호와라고 주장하시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왜 “나는 여호와니라”는 선언 앞에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넣어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여기서 하나님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엘로힘’입니다. 창세기 일장에 처음 등장하는 ‘엘로힘’이라는 이름은 그래서 전능하신 창조자의 속성을 강조합니다. 엘로힘이란 어형이 히브리어에서만 나올 뿐, 다른 셈어에서는 나오지 않으며, 심지어 성경 아람어에서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엘로힘만이 창조와 구원, 그리고 우주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능력의 유일무이한 소유자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구체적인 규례와 법도의 말미에 반복적으로 언급된 이 두 스타일의 교차 선언을 연구해보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먼저 본문에서 선민의 세 가지 삶의 원리로서 밝히고 있는 거룩 공의 자비로운 속성을 강조하실 때는 “나는 여호와니라”가 붙고, 반면에 구원과 풍성한 공급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실 때는 전능하신 하나님 '엘로힘'을 강조하여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폐일언하고, 어둠 속에서 파멸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등불을 주실 분은 오직 빛 되시는 “하나님 여호와”뿐이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자체발광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이 말씀은 빛처럼 살라는 말씀이요 자체발광이 안 되는 너희는 내가 책임지니 나를 바라보고 살라는 말입니다. 마치 모세가 시내 산에서 사십일 동안 하나님과 대면하고 난 후 그 얼굴에서 광채가 발산되었던 것처럼(출 34:29~30),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하늘의 영광을 옷 입고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 대면하실 때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마 17:2)던 것처럼, 빛 되시는 하늘의 아버지를 내 마음에 품어야 이 어두운 삶의 터전에서 해같이 빛나는 거룩한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야 하늘의 빛이 쏟아져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놀라운 빛을 받기 위하여 사람들은 마음의 빗장을 풀지 않는 것입니까? 사도 요한이 잘 지적하였듯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요 3:19)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치명적인 사랑이요 오판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어두움은 잘못된 내 판단과 생각, 그리고 내 소원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의미로 내 눈이 멀어버린 것입니다. 탐욕에 눈멀고, 자랑으로 눈 먼 것입니다. 종교인이나 유명한 자나 똑똑한 자 모두가 꺼진 등불을 들고 서로 파멸의 구렁텅이로 인도하고 있는 꼴입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꺼진 등불에 기름을 채우는 일입니다. 기억하세요. 전능하신 엘로힘 하나님만이 상생을 위한 등불에 그 기름을 공급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서두에 그래서 하늘을 향해 어둠의 자식들이 마음의 빗장을 어떻게 꺾어버릴 수 있는지 네 단계를 소개합니다.(1~8절) 첫 번째는 먼저 부모님께 마음을 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하나님의 뜻을 나에게 실현시킨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안식일을 준수하라고 합니다. 내 일을 쉬어야 안식일을 준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과 내 소원을 멈추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세 번째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내 생각과 판단에 매여 헛된 것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화목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라는 초청입니다. 그리고 이웃과 나누라는 권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단계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내 마음의 빗장을 꺾기 위해 십자가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한 여름 밤에 호수에서 낚시를 해 보셨나요? 몸통을 꺾으면 발광하는 케미라이트를 꽂은 찌를 던져 놓으면 칠흙같은 호수 위로 한 점 불빛이 영롱하게 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몸통이, 즉 내 마음의 빗장이 꺾이고 그 문이 활짝 열려야 하늘의 빛을 받아 발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청취자 여러분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소경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하늘에 대하여 눈 먼 자요, 다른 한 부류는 세상에 대하여 눈 먼 자들입니다. 그러나 착각하면 안 됩니다. 둘 다 소경입니다. 그러므로 모두에게 밝은 등불이 필요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지혜롭고 놀라운 분이십니다. 누구에게나 등불을 들려주면 ‘서로가 공존하면서 살 수 있다’(相生)는 것을 아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 등불이 꺼진 등불이냐 아니면 밝은 등불이냐는 것입니다. ‘꺼진 등불’은 서로를 파멸로 인도하지만, ‘상생(相生)의 밝은 등불’은 상생(常生) 즉 영생(永生)으로 인도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오늘 이 아침 아버지를 향해 마음의 빗장을 꺾기 위해 십자가로 나옵니다. 등불이 꺼진 줄도 모르고 남을 탓하고, 오해하면서 살았습니다. 심지어 남을 인도한다며 교만하였습니다. 세상에 눈 감고, 하늘 빛 마음에 품은 채 오늘도 세상으로 나가오니 순간마다 기름을 채워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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