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
민은 자신을 안은 민아 쪽으로 돌아섰다. 민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승아의 눈매를 닮았다. 그녀의 눈에 승아 납골당 앞에서 슬픈 미소를 짓는 잔상이 보인다. 곁엔 윤도 보인다. 윤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납골당 승아 옆에 자리한 남자의 사진이 보인다. 흐릿하게 보이는 사진 속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민이 민아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는 동안, 민아도 민을 바라보고 있다. 민은 바람에 날리는 민아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오빠라…? 갑자기 왜 오빠야?"
"아주 어렸을 때 오빠의 뒷모습을 본 적... 있어요. 절 돌담에 앉아있던 오빠의 뒷모습... 아주 어렸을 때라 아주 흐릿한 기억인데 참... 슬퍼 보이는 등이었어요. 오빠라는 걸 알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요."
사람에게 존재를 들키면 안 됐기에 밤에만 절을 돌아다닐 수밖에 없던 민아와 사람을 만날 수 없었던 민이 바다를 바라보며 한없이 마음을 삭히던 그 돌담. 민아는 돌담에 앉아있던 자신을 봤던 모양이다. 이제서야 민아가 진짜 승아의 동생 같다. 이제서야 가장 힘들었던 그 시기를 함께한 사람 같다. 민은 사람을 만날 때 항상 벽을 만들었다. 그 벽 너머로 누구도 넘어올 수 없게 했다. 유일하게 벽을 만들지 않은 사람이 윤이다. 벽을 만들지 않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참으로 오랜만이다.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은 의외로 한 단어, 한마디의 말이다.
"절에 대한 기억은? 혹시 생각나는 거 없어?"
민아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래, 넌 너무 어렸으니까."
민아는 다시 한 번 골똘히 기억을 더듬어본다. 어렸다. 4살이라는 너무 어린 나이었다. 기억하고 있었던 것조차 희미해질 먼 기억이다. 민아는 민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사람의 눈은 언제나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처음 면접장에서 만났을 때도, 자신을 좇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자신을 바라보던 눈동자에서도. 언제나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이 눈동자. 처음 봤을 때부터 어딘가에서 본 것 같아 계속 되뇌던 눈동자.
"아…기억나는 거… 그 아주머니! 절에서 한바탕 시끄러웠던… 조용한 절 법당에서 한 아주머니가 몇날 며칠 밤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는데… 그때 정확하지는 않지만 오빠가 그 아주머니한테 당신은 강당에 서야 살아.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어렴풋한 기억이라 정확하게는 안 나네요."
민도 그 날을 기억하고 있다. 그 날 주지스님께 종아리가 퉁퉁 붓도록 매를 맞았다.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던 민이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 여자 눈의 잔상을 읽었다. 그리고 말했다. 민아가 듣고 봤던 대로 말했었다.
"그래, 그랬지. 기억난다."
"그때 오빠 모습도 기억나요."
"잊는 게 좋을 모습인데."
"오빠… 저는 조각난 기억을 갖고 있었어요, 너무 어렸을 때라. 조각난 기억에 드문드문 누군가가 있었는데 오빠였어요. 오빠… 전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 기억에 오빠가 남아있어서…"
민은 민아를 안아준다. 그리고 민아의 머리를 천천히 쓸어준다. 버리고 싶은 기억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 있다. 아프고 슬픈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만들어 주는 사람. 그것은 단순히 기억을 바꿔주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포근하고 따뜻하게 해 기억을 추억으로 남긴다.
* * *
선미는 울음을 삼켜내는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치명적인 아픔을, 치명적인 슬픔을 공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 창피함을 나누면 그것은 하나의 공통된 기억으로 남을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 밑 보였다는 생각에 마음이 안 좋을 수 있다. 마음이 안 좋았다면 그것은 상대에 대한 마음의 크기가 안 좋은 만큼의 크기 밖에 안 됐기 때문이다. 선미는 치명적인 아픔, 치명적인 슬픔이 그리 많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에서 그런 일은 그리 많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민은 달랐다. 한없이 부족함 없이 자랐을 것만 같은 민은 늘 무언가에 그늘이 져 있었다. 웃음 뒤에 슬픔이 있었고, 슬픔 뒤에 아련함이 있었다. 선미는 그런 민을 좋아했다. 한참 울고 나서야 선미는 울음을 그쳤다. 선미는 양껏 마음껏 울고도 곁에 있는 사람이 윤이라 민망 하지 않았다.
"이제 좀 괜찮아?"
선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윤은 으이그. 으이그. 하면서 선미의 볼에 흐른 눈물을 닦아준다. 윤이 선미에 대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선미가 남자로 봐주길 바랐던 적이 있다. 과거형이다.
"미안해. 또 못난 모습 보여서. 그러지 않기로 해놓고…"
"사람 마음이 어디 쉽냐."
사건을 해결하면서 가장 힘들 때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하고 힘들게 하고 감싸주고 보호하는 순간이다. 그것은 조사하는 사람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는 마음이다. 사건 조사하면서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이기 때문에, 그 마음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 부분을 분명히 건드리고 넘어가야 함에도 그냥 넘어간 적이 있다. 동료 검사들은 그 부분을 더 강하게 건드려서 파야 사건 해결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했지만 그건 아마추어들의 얘기다.
"어떻게 할래. 출근 하겠냐, 그 상태로?"
"그럼~! 프로끼리 왜이래. 출근해야지. 간다"
눈이 시뻘건 상태로 병원을 향해 달려가는 선미를 보며 윤은 또 생각한다. 사랑엔 프로도 아마추어도 없다고. 사랑을 하는 동안엔 미숙한 한 인간만 있을 뿐이라고. 누군가를 만날 때 이런 실수는 하지 말아야지. 이런 마음은 갖지 말아야지 하지만 결국 사랑하는 사람과 맞닥뜨리게 되면 바보처럼 멍해지고 마는 게 사랑하는 매 순간이다. 출근해 서류를 뒤적거리며 선미 생각을 놓을 수 없는 것을 보면 오늘 선미의 하루는 분명 자신보다 길 것이다.
"강 검사님!"
"네? 네!"
서계장이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윤은 그 서류를 받아들고 가만히 쳐다보았다. 서류에는 남소현이라는 여자에 대한 프로필 정리가 되어있다. 한국대학교 교수, 가족관계는 없고. 가족관계가 없다? 여기서부터 뭔가 미심쩍다.
"남소현?"
"혹시 모르세요?"
"글쎄요. 이름만 봐서는 모르겠는데…"
"검색해보세요."
윤은 노트북에 '남소현'이라는 이름을 쳤다. 남소현 텔런트, 예쁘다. 남소현 모델, 잘 빠졌다.
"말구요."
서계장은 윤이 들여다보는 사진을 뒤에서 보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한마디 하고 남소현 교수를 지목한다.
"모르세요?"
윤은 노트북 화면에 잡힌 남소현 교수를 가만히 살펴본다. 한국대 병원과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기사를 본다. 남소현 교수… 남소현 교수… 낯이 익다. 어디서 봤을까?
"검사님, 진짜 기억 안 나세요? 사건 기록에는 강 검사님이 절에 머물렀던 그 시기에 남 교수도 그곳에 있었어요."
윤은 남소현 교수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주 어렴풋한 기억이다. 8살 때 민이 처음으로 이상하다고 느꼈던 그 날이다. 민이 저 미치광이 여자한테 당신은 곧 강단 위에 설 거라고. 그래야 당신은 산다고. 말했었다. 그 날의 기억은 또렷하다. 그렇다면 그 여자가 바로 이 남 교수…?
"강 검사님이 제외했던 1988년 정동진 근처 사찰과 교회에 있던 사람들을 다시 조사했습니다. 이승아가 죽었던 4월 12일 전후에 등명락가사에 단 한 시간이라도 머문 20~30대 여성만 걸러내고 걸러냈는데 이 교수가 리스트에 남았습니다."
그렇다. 그 시기에 분명 자신은 그 절 안에 있었고 그래서 누구보다 절 내부에 있던 사람들에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래서 그냥 넘어갔던 거다. 남 소현 교수가 절에 머물렀던 기간은 기껏해야 3개월 남짓. 남편과 아들을 잃고 반 미치광이가 되어 절을 찾았던 여자. 그런데…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 남 교수를 데리고 온 사람이 박정심이라는 보살입니다. 그 당시 박 보살과 남 교수는 교통사고 가해자와 피해자 사인데… 까놓고 말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이럴 수 있는 사입니까."
냄새가 난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남소현 교수와 박보살님이 가해자와 피해자라…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 공간에 있었다? 한 공간에서 서로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왜 그들은 한 공간에 있어야 했을까?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잡니까?"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 였냐에 따라 이 사건의 판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이야기가 점점... 이상하게 돌아간다.
첫댓글 누군가에게 밑보였다는 생각에 마음이 안좋았다면 그것은 상대에 대한 마음의 크기가 안좋은 만큼의 크기 밖에 안 됐기 때문이다
이 말 참 좋으네요
헐...... 그렇게 된거로군요